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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지 중의 성지 이스라엘 순례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0. 11:15

 성지 중의 성지 이스라엘 순례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는 남북으로 좁고 긴, 작은 나라로서, 북쪽으로 레바논, 동북쪽에는 시리아, 동쪽에 요르단, 남서쪽에 이집트, 그리고 서쪽에는 지중해에 접해 있다. 이스라엘의 국토면적은 골란고원을 포함해서 약 21,946㎢로 우리 나라 남한 면적의 약 4.5분의 1에 해당된다.

1948년 영국의 신탁통치에서 독립한 이래 주변 아랍국가들과 수 차례의 분쟁을 겪어 왔으나, 1979년 이집트와 평화조약 조인, 1991년 중동평화회의 개최, 1993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와의 자치 협정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화합과 평화를 정착해가고 있다. 그러나 최근 팔레스타인의 독립과 예루살렘 관할문제로 새로운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공식언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1918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의 신탁통치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영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모든 도로와 공공장소의 표지를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로 함께 표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성서에서는 여러 가지로 불려진다. 예컨대, 가나안 땅(창세기 16.3-17.8 : 민수기 34.1-12), 언약의 땅(창세기 17장 : 출애굽기 6.4), 이스라엘 땅(사무엘상(13.19), 유다(역대기하(24.9), 팔레스티나(창세기 21장 : 출애굽기 15.14), 시온(즈가리아 2.12) 등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일컬어지고 있다.

 1. 예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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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성의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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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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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본예루살렘

 '평화의 도시' 또는 '평화의 근원지'라는 뜻을 지닌 도시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는 '예루살라임', 희랍어로는 '예로솔뤼마', 시리아어로는 '우루살람'이라 불리며, 이집트에서 발견된 텍스트에서는 '우루살리뭄' 또는 '우루슬림우'로 표기되어 있다. 회교도들은 예루살렘도시를 메카나 메디나와 같은 성지로 여겨 '엘쿠드스'(성지란 뜻)라고 칭한다.
  예루살렘은 B.C.1000년경 구약의 다윗 성왕(聖王)에 의해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해졌다. B.C. 587년에는 바빌론에 의해 점령, 파괴되고, B.C. 63년에는 로마제국에 병합된다.   성서에 나타나는 헤로대가 유대 왕이 된 것은 B.C.37년이다.
  A.D. 70년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 예언(루가 19, 41-44 : 21, 20-24)데로, 로마의 티토(Titus) 황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어 유대인이 이곳에 사는 것이 금지되었고, 313년 콘스탄틴(Constantine)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성도(聖都)로써 발전하였다.

637년에는 아랍의 회교도에 점령당하여 5백년간을 시달렸는데, 이때에 십자군의 원정이 있었고,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지배자가 바뀌었다. 1517-1917년의 4백년 동안은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영국의 위임통치 아래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건설되었고 그 수도로 되었다.

1958년 아랍인들과의 무력충돌로 예루살렘 구 시가지는 아랍 측 요르단에 속하고, 신시가지는 이스라엘에 속했다가, 1967년 소위 6일 전쟁(1967. 6. 5-10)으로 이스라엘은 전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면 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겠다고 하자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전체를 절대로 내놓을 수 없다고 하여 지금 또다시 분쟁이 진행 중이다.(2000년 10월부터)

오묘한 역사의 현장,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신앙의 원천이며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도시답게 순례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2. 성벽과 성문

오늘날 볼 수 있는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벽은 16세기 때 보수 및 재건된 것이다. 그때 당시의 성문 중 자파 성문, 다마스커스 성문, 시온 성문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성문들은 ㈁자형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인데 적의 침범 시 방어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① 자파성문 (The Gate of Jaffa  or Ebron)

  ② 시온성문 (The Gate of Zion or Da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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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자파, 또는 요빠라는 도시와 통하는 문이라고 해서 히브리어로는 '시아르 요빠'라고 불린다. 아랍어로는 '바브 엘 카릴'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친구 문'이란 뜻이다. 일카릴(하느님의 친구)은 곧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문이라고도 한다. 이 성문은 또한 아브라함의 묘가 위치한 헤브론과 통한다고 하여 '헤브론 성문'이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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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 산과 통하는 문이라고 해서 히브리어로는 '시아르 시온'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바브 엔 네 비다우드'라고 부르는데, 이 문을 통해 시온 산에 위치한 다윗 왕의 무덤으로 간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③ 뉴 게이트 (The New Gate)

   ④ 오물 성문 (The Gate of the Mograb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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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의 통로를 위해 새로 만든 성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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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시내의 모든 오물이 이 성문을 통해서 키드론 계곡과 티로포에온 계곡에 버려졌다고 해서 영어로는 '덩 게이트', 히브리어로는 '사아르 하아슈포트'라고 부른다. 이유인즉, 16세기경 북아프리카 무어족(회교도)이 이주하여 이곳 성문 근처에서 살았다고 해서이다. 현재의 성문은 요르단 사람들에 의해 개조된 것이다. 1948년 자파 성문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봉쇄되자 성벽 안으로 자동차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확장해 만들어진 성문이다.

 ⑤ 사자 성문 (The Gate of Gethsemane or Tribes or Lady Mary or the L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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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의하면 두 마리의 사자가 슐레이만 2세의 꿈에 나타나 부서진 성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고 해서 1540년경 성문을 보수했고 그 꿈을 기념하는 뜻에서 그 명칭이 주어졌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사아르 하아라요트'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의 명칭은 '바브 엘 고르(요르단 성문)'였는데, 오늘날 이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성문 근처에서 스데파노 부제가 치명했다고 해서(사도 7, 54-8, 1) 그를 기억코자 하여 성 스테파노 성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리아의 어머니 안나의 집이 이 성문 근처에 있었다고 해서 안나 성문이라고 부른다.
  아랍인들은 '바브 싯티 마리암(마리아 성문)'이라고 부른다. 마리아의 무덤이 이 성문 근처, 즉 키드론 계곡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였다. 대다수의 유다인들은 여호사밧 계곡으로 통하는 문이라고 해서, '사아르 여호사밧(여호사밧 성문)'이라고 부른다. 1920년에 영국군은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원래의 성문을 개조하였다. 1967년 6일전쟁시 이스라엘군들은 이 성문을 점령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⑥ 헤로데 성문 (The Gate of Herod or of the Watch)

⑦ 다마스커스 ( The Gate of Damascus or of the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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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데 안티파스의 궁전이 이 성문 근처에 있었다고 하여 이렇게 불린다. 유다인들은 '사아르 헤페라힘(꽃들로 장식된 성문)', 회교도들은 '바브 에즈 사히라(초소의 문)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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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성문 성문들 중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성문이다. 히브리어로는 세겜으로 통하는 성문이라고 해서 '사아르 세겜', 아랍어로는 '바브 엘 아무드(원주형 기둥의 성문)'라고 부른다. 로마시대에는 예루살렘의 중심 성문이었고 이 성문에서 시온 성문까지 중심도로(카르도 막시무스)가 놓여 있었는데, 웅장하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⑧ 황금 성문 (The Golden G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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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문'은 '자비의 문'이라고도 불리고, 동문이라고도 불린다. 이 문은 A.D.7세기에 지어졌으며 예루살렘성의 동쪽 벽에 위치하고 있다. 그 동쪽 벽에서는 유일한 문이며 성전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 문이었다. 후기 전승에 의하면 현재의 문은 예수가 입성했던 옛 문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던 옛 문에 관한, 그리고 그 문에서부터 키드론 골짜기를 가로질러 가는 길이 있었다는 사실에 관한 고고학적 근거가 있다. 초기 유다 전승은 메시아가 이 문을 통해서 온다고 전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준비하기 위해 이 문 가까운 곳에 묻히고자 했다. A.D.1530년, 예루살렘을 통치하던 터어키 총독은, 메시아가 다시 이 문을 통해 들어와 자기를 쫓아낼까 두려워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봉쇄령을 내렸다.

 3 . 베짜타 못(The Pool of Bethesda) 과 성 안나 교회(The Church of St. An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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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짜타는 '물이 쏟아져 나오는 집'이란 의미이며 약간의 다른 의미로는 '자비의 집'이란 뜻이다. 1871년 성 안나 교회 옆에서 행해진 발굴로 두 개의 커다란 직사각형 연못이 발견되었다. 바로 요한복음서(5, 2)에 나오는 베짜타 연못이었다. 여기서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셨다. 이 연못은 주랑에 의하여 몇 부분으로 나뉘어졌었다. 성전 희생양을 여기서 씻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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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그 근처에는 스테파노 성문과 성 안나 교회가 있다.  성 안나 교회는 현존하는 십자군 시대 교회 중 가장 잘 보존된 교회중 하나이다. 성모 마리아의 출생지와 성모님 부모의 집을 기념하는 동굴이 있다.

 4. 성전산 (예루살렘 성전)

성전산 지역은 현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다. 서쪽 길이 490m, 동쪽 길이 474m, 북쪽 길이 321m, 남쪽 길이 283m나 되는 방대한 구역이다.

유대인들과 회교도들의 전통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제사지냈던 모리야산(창세기 22장)이 바로 이 성벽 안에 위치했다고 한다. 모리야 산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위대한 신전이 세워져 있는 땅 이며, 크리스찬에게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많은 관련이 있는 곳이고, 모슬렘교도들에게는 메카(Mecca)와 메디나(Medina) 다음 세 번째로 거룩한 땅이기도 하다.

다윗 왕은 그의 왕정시절에 하느님께 성전을 짓기로 약속했으나, 이 영광은 그의 아들 솔로몬 왕에 의하여 이룩되었다. 솔로몬의 이 찬란하고 웅장한 성전은 B.C 587년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말았다. 50년 후에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그들은 즈루빠벨(Zerubabel)의 감독 하에 규모가 작은 성전을 복구시켰다. 헤로데는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시 성전 복구작업을 하였고 그 옛날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재현시키려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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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A.D 70년 로마의 티토가 이끈 군대에 의해, 예수님의 성전파괴 예언(마태오 24, 2 : 마르꼬 13, 1-2 : 루가 21, 5-6)의 말씀과 같이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A.D 135년 유대인들의 두 번째 폭동을 진압한 하드리아노(Hadrian)는 쥬피터(Jupieter) 신에게 봉헌하는 신전을 건립함으로써, 성스러운 이 터전을 모독하였다.

A.D 636년 모슬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모리야 산을 깨끗이 정화하고 그들의 예언자 모하메드(Mohammed)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장소라고 주장하면서 회교사원을 지었다. 현존하는 8각형의 아름다운 건물은 A.D 691년에 개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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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성전이 있던 모리야 산에 세워진 이 사원은 길이 457m, 폭 247m로 일부가 성벽에 둘러 싸여 있다.  바위의 돔은 메카(Mecca)에 있는 깝바(Kabba)와 메디나(Medina)에 있는 무덤 다음으로 신성시 되는 거룩한 곳인데, 이슬람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이 오마르 사원은 예루살렘 어디에서나 금빛 찬란하게 잘 보이며, 예루살렘에서 가장 절묘한 대표적 기념물이다.   이 장엄한 회교사원의 돔 아래에는 모리야 산의 바위(The Rock of Mount Moriah)가 있다. 높이 약 1.8m, 폭 11m정도의 큰 바위다.  

  성전에 의하면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 위하여 준비한 제단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모슬렘 교도들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사악이 아니라 이스마엘(Ishmael)을 희생제물로 바친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은 또 예언자 모하메드가 이 바위에서 하늘로 승천한 곳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인지 출입구 밖에서부터 누구를 막론하고 신발을 벗어야 하며, 카메라는 물론 가방 등 일체의 소지품을 밖에 놓고 들어가도록 통제한다.

 5. 통곡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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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벽' 또는 '통곡의 벽'이라 하는 이곳, 몇 세기 동안 유대인에게 가장 신성한 장소로 여겨져 온 곳이다. 이 통곡의 벽은 B.C 20년에 헤로데가 제2성전 주변에 세운 벽으로서, A.D 70년 로마의 티토 황제가 미래의 후손들에게 로마 군인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하여, 다른 모든 건물은 파괴하면서도, 돌로 쌓은 이 벽의 일 부분만은 일부러 남겨 놓은 것이다.
  로마제국의 통치기간 동안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비잔틴(Byzantine)시대에는 1년에 한 번 성전파괴 기념일에 들어오도록 허용되어 성스러운 그들의 성전이 폐허가 된 터 위에서 이산민족의 비탄과 슬픔을 통곡하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모여서는 슬피 울었기 때문에 이 벽이 통곡의 벽으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48-1967년까지 20년 동안, 이 지역이 요르단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방문할 수 없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곳은 이스라엘의 소속으로 되어 통행이 자유로워지자, 이 통곡의 벽은 국가적 즐거움의 장소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숭배의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성벽의 아래 약간 경사진 커다란 광장은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좋은 장소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이 벽에 얽혀서 전해 내려오는 관습으로는, 자기의 소원하는 바를 종이 쪽지에 적어서 돌 벽 틈에 숨겨두면 잘 들어주신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돌 틈 사이사이엔 많은 종이 쪽지가 구겨진 채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6. 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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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해가 있다. 사해 수면은 해저 392미터이고, 깊은 곳의 수심은 수면에서 약 400미터까지 내려간다. 사해의 길이는 약 200리(78킬로)이고, 넓이는 45리(18킬로)이다. 사해는 갈릴리 바다에서 흘러 내려오는 요르단강과 사해 주위에 있는 와디로부터 물을 받아들이지만 흘러 내려가는 곳은 없다. 사해는 보통 바다물보다 7배나 짜서 쓴맛까지 날 뿐 아니라 농도가 높아서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지 않고 뜬다. 또한 피부병 치료에 좋다고 하여 사해의 소금을 피부치료제로 팔기도 한다.

   7. 꿈란  QUM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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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의 서북연안에서 1.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이 꿈란은 1947년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 꿈란 주위의 동굴들에서 기원전 2세기경의 성경사본과 성경의 주석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성경들을 사해사본 또는 꿈란사본이라고 한다. 지금은 이 사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국립박물관 내의 사해사본 보관소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이사야 사본이 지금의 이사야 모든 부분으로 발견되어 감격스럽다. 또한 이곳은 에세네파가 기원전 200년-기원후 70년까지 공동생활을 하던 수도원 터로 사용된 흔적도 있다.

 8. 마사다   MASS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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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해의 서해안으로부터 약 4km 되는 유대 광야에 마사다 암반 요새가 우뚝 솟아 있다. 길이 800m, 넓이 198m, 높이가 사해 해면에서 600m이고 깊은 협곡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줄기와 분리되어 있다. B.C.2세기 중엽에 알렉산더 안네우스 대사제가 처음으로 마사다 정상에 요새를 세웠다. 그후 B.C. 40년에 헤로데 대왕이 자신의 말대로 유대인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사다 정상에 거대하고 웅대한 요새를 만들었다. 그는 또한 안토니우스에 의해 자신이 폐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거처로 사용하려고 그 곳을 화려하게 꾸몄다. 18피트 높이의 성벽에 높이가 75피트가 되는 38개 의 탑들이 세워진 철통같은 이 요새의 내부에는 창고들과 병영, 병기고, 빗믈을 저장하는 저수지와 왕궁의 각종 편의시설들이 있었다. 이 성은 뛰어난 건축술의 걸작품이었다.
  마사다는 유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는 성지가 되었다. 이 곳은 포로가 되기 보다는 죽음을 택한 장소로서 용기와 영웅심의 상징이 되었다. A.D.70년에 로마군이 팔레스티나 전 지역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켰을 때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거느린 유대 열혈단원들이 마사다로 진격해 가서 로마수비대를 무찌르고 그 곳을 점령했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나온 소수의 유대 열혈단원들이 합류하였고 그들은 대 로마 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하고 이 곳 마사다를 기지로 삼아 게릴라 전투를 벌였다. 72년에 로마의 실바 장군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요새를 함락시킬 결심을 했다. 그는 그의 최강의 장병들로 편성된 제 10여단을 포함한 예비 군대와 식수, 식량을 운반할 수천명의 포로들을 거느리고 이 곳으로 진격해 왔다. 실바는 장기전을 각오하고 요새 주위에 3마일에 달하는 성벽을 쌓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8개 지점에 군대를 배치시켰는데 그 흔적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포위는 물샐틈 없었으며 요새 안의 사람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수 개월 동안 로마군은 요새를 공격해 들어갔으나 방어가 완강하여 번번이 실패했다.
  마침내 로마군은 이동식 사다리를 만들고 파성추로 성벽을 공격하여 성벽이 뚤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요새 종말의 시작이었다. 요새 안에는 나무틀 속에 흙을 넣어 쌓아 올린 내벽을 구축하였으나 로마군은 횟불을 던져 불태워 버렸다. 요새의 지도자였던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다음날 아침이면 요새가 함락될 것을 알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연설을 했다.
"인간의 고통은 삶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한번 죽습니다. 이는 겁쟁이 이든 용감한 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노예가 되는 치욕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아내가 능욕을 당하고 우리 자식들이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손 안에 자유가 있고 우리 손 안에 칼이 있을 때 우리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죽음을 결행합시다. 영광스럽게 아내와 자식들에게 둘러싸여 자유인으로 죽읍시다. 서둘러야 합니다. 적에게 승리의 기쁨을 넘겨주지 말고 결연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리의 시체를 넘겨줌으로써 영원한 명예는 우리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적에게 항복하기 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960명의 영웅적이고도 극적인 종말을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들을 찔러 죽였다. 적어도 그들이 적에게 이러한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다고 자위하면서... 용기가 없어 결행하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제비를 뽑아 나머지 사람들을 죽일 10명의 집행자를 뽑았다. 그들은 이미 죽은 가족의 시체를 껴안은 후 집행자로 뽑힌 사람들 앞으로 다가갔다. 집행자 10명은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소임을 완수한 후에 제비를 뽑아 나머지 9명을 죽일 한 사람을 뽑았다. 이 9명도 앞서 간 그들의 형제들처럼 죽어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시체를 둘러보고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한 후 불을 지른 다음 그의 가족 곁에 가서 자결했다."
  그 다음날 새벽 요새를 공격하던 로마군은 적의 대항이 없자 당황했다. 그들이 성 안에 들어섰을 때 눈 앞에는 시체뿐이었고 5명의 아이들을 대리고 숨어 있었던 두 여인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자초지종을 알 게 되었다. 요세푸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적으로부터 얻어내려 했던 승리의 기쁨은 사라지고 모든 로마군인들은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깃든 기품과 국건한 미덕을 기렸으며, 거룩한 명분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의 행동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로마군에게 이 승리는 빈 껍데기 뿐이었다.
  1955년과 1956년에 이겔 야딘 교수와 여러 나라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마사다 정상 전 지역에 대한 발굴 작업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이 때 많은 중요하고도 흥미를 끄는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많은 학자들 간에 전설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던 요세푸스의 기록 중 일부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9. 가이사리아  (Caesarea)

    문헌에 의하면 빌라도는 그 시대의 다른 유다 총독처럼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그곳을 통치지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지중해 연안에는 '스트라토의 탑'으로 불렸던 페니키아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 곳에 B.C.20년에 헤로데왕이 가이사리아 도시를 세웠다. 당대의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이 동원되어 12년간에 걸쳐 완공된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이자, 당시 가장 주목 받는 항구의 하나가 되었다. 이 도시는 화려한 궁전들과 공공건물, 시장, 웅장한 대리석 신전, 원형경기장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헤로데왕은 이 곳에 큰 배가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인공부두까지 설치하였다. 헤로데는 이 도시를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티누스 케사르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리아라 불렀다. 헤로데왕이 죽은 후 로마의 통치를 받게된 가이사리아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로마 총독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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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에 살았던 본시오 빌라도는 과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가이사리아는 약 500년 동안 팔레스티나 지역 로마정부의 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복음 전파자인 필립보는 이 곳에서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고(사도 8/40), 이방인으로 첫 번째로 개종한 고르넬리오에게 복음을 전하고(사도 10/41), 사도 바오로가 2년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아그리빠를 비롯하여 여러 높은 사람들에게 부활한 예수를 증거했던 곳도 이 곳이다(사도 26). 그리고 A.D.66년에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2만명의 유대인이 무참히 살육당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거센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예루살렘과 제 2성전의 파괴로 끝났다. 69년 페스파시아누스가 이 곳에서 황제로 즉위했고, 3세기에 유명한 그리스도교 학자 오리게네스에 의해 그리스도교 학문의 중심지로 변하였다. 가이사리아는 638년부터 회교도의 지배하에 들어 갔다가 1102년에 십자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1291년 이집트의 바이바르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이것이 가이사리아의 종말이었다.

이 도시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해변의 모래 언덕에 파묻혀 갔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고학자들은 이 곳 가이사리아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화려했던 이 도시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 중요한 유물로는 로마 시대 때 만든 반원형 극장으로 지금은 많은 부분이 보수되어 음악회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19m 떨어진 산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수로들이 발견되었으며, 2만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길이 300m의 경마장과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  1961년 이탈리아 조사단에 의해 가이사리아의 헤로데 극장 터에서 부서진 비문이 하나 발굴되었다. 이 비문에는 본시오 빌라도가 티베리오 황제를 기념하고자 " 이 사원을 가이사리아 백성에게 바친다."라고 씌여져 있었다. 이것은 예수의 사형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로 남아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언급된 고고학상 유일한 유적이다. 이 글이 새겨진 돌은 원래는 티베리오 황제에게 헌납된 성전 벽의 주요 위치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티베리움'이라고 불리운 그 성전의 위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루이 9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벽은 폭이 9m되는 해자와 이 해자로부터 9-14m 높이까지 올라오는 경사진 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십자군 시대 때 이 도시의 면적은 43,000평이었으나 로마 시대 때는 그 여섯배나 되었다.

■ 야외원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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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년 전 헤로데왕이 건설한 로마식 야외 원형극장으로 현재 이곳은 예술가들의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매년 여름에 이곳에서 이스라엘 국제 음악제가 열린다.

■ 로마식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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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사리아에는 먹을 물을 공급하는 샘이 전혀 없다. 그래서 이 도시를 건설할 때, 12킬로 미터 떨어진 갈멜산 줄기의 샘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를 만들었다. 이 수로는 수직 갱도를 40m나 파내려간 다음 그 곳에서부터 65m 정도 떨어진 성벽 바깥쪽 샘까 지 터널을 만들어 물을 끌어 들였다. 그리고 침입자들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흙으로 덮어 위장해 놓았다.

  10. 갈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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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멜산은 이스라엘 세 번째 도시인 하이파항구의 뒷산을 가르킨다. 갈멜이란 하느님의 포도원이란 뜻이다. 고대에 이곳은 포도밭으로 덮여 있었으며 땅이 비옥해서 1년 내내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덮여 있어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매력적인 산이기도 하다.
  갈멜산은 유일신과 이교도의 잡신 사이에 대적했던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즉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신을 섬기는 450명의 예언자가 대결(열왕기상 18장)한 내용인데, 각각 제단을 쌓고 황소를 잡아 장작 위에 올려놓은 다음 어느쪽이든지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이 참 하느님으로 알자는 것이다. 바알신은 아무런 답이 없었으나, 엘리야의 차례에 야훼의 불길이 내려와 제물을 태웠다. 그래서 온 백성이 이 광경을 보고 "야훼께서 하느님이십니다."고 부르짖었다.

  갈멜산의 하단부 하이파항구의 지하 해안 근처에 성스러운 엘리야의 묘지가 있다. 이곳은 아합과의 분노에서 탈출하기 위해 피신했던 장소로 믿어진다. 유대인들의 묘지로 성화된 이곳은 크리스챤과 회교도들이 엘리야를 유일신의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존경하는 곳이다.

  이곳에 엘리야 예언자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갈멜 수도원이 13세기에 세워졌다.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탁발 수도회로 인준 받은 것이 1247년인데 1432년에 당시의 시대적인 영향을 받아 일부의 수사들이 규칙의 일부를 완화 수정해서 에우제니오 4세 교황께 허가를 받은 관계로 규율이 해이해졌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이단이 번지며 교회의 안팎으로 시련에 처해있을 때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와 갈멜의 수사 신부인 십자가의 성 요한이 손을 잡고 수도회의 개혁을 단행 1562년부터 초대 수도자들의 엄격한 규칙을 다시 지키는 수도원을 창설, 교회일치와 성화, 성체흠숭, 성직자들의 성화를 위해 수녀들은 완전한 봉쇄 안에서 침묵, 고행, 기도를 통하여 간접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돕고 남자 수도자들은 사도직에 협력 교회의 사명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현재의 갈멜 수도회는 완화된 규칙을 지키는 수도회와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개혁 수도회로 나뉘는데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는 모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갈멜 수도회이다.

 11. 텔아비브-요빠

  텔아비브와 요빠는 하나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이 2개의 도시는 나뉜 부분이 없이 이어져 있다.

■ 텔아비브(Tel-Aviv) 1js24.gif

  텔아비브는 봄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586-538)의 유태인 촌락의 이름이며 또한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헤르�의 주요저서 '오래된 새로운 나라'의 헤브라이어 번역에서 연유된다.
  이곳은 1909년 당초의 황량한 모래 둔덕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이스라엘 공화국 최대의 도시로 산업의 중심지이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기 때문에 국방성을 제외한 모든 관청이 예루살렘에 있지만, 비즈니스 라이프는 대부분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관청, 호텔, 박물관, 극장, 미술관, 외국 대사관 등이 집결되어 있다.

■ 요빠(Joffa, Jop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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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아비브 남쪽에 있는 이곳은 3천 6백년의 긴 역사를 가진 조그마한 항구도시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예로부터 이스라엘의 중요한 항구가 되어왔다.
 구약에 나오는 요나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리고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이곳에서 배를 탔다가 혼이 난 곳이며(요나 1,3),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기 위해 레바논의 송백나무 목재를 이곳 요빠에서 하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열왕기하 5, 6장) 요빠는 또 베드로 사도가 죽은 다비타(Tabitha)를 살린 기적을 행한 장소이다.(사도행전 9, 36-43)

  12. 갈릴리 호수 The  Sea of Galilee 와 티베리아 Tiber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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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레아 호수는 길이 21km, 폭 11.2km, 깊이 39-47m, 둘레 51.2km 정도되는 호수로 지중해면보다 206m 아래에 위치해 있다. 이 갈릴레아 호수는 일명 티베리아 호수라고도 불리어 지며 또한 하프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히브리어로 하프라는 뜻인 키네리트 호수로도 불린다. 이 호수에는 잉어, 정어리, 메기, 숭어가 풍부하며 지금도 물고기를 어망으로 잡는다. 수면은 깨끗하고 고요하다. 예서 시대 때는 모든 교통의 중심지로 교통이 편리하고 땅이 기름졌으며 아름다운 경치와 온천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었고 또한 많은 사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이 호수 주변에는 아홉 개의 도시가 있다.

  1894년네 조지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시원한 물에는 물고기가 풍부하고 파란 수면은 햇빛에 반짝인다. 갈릴레아 호수는 식량과 식수와 맑은 공기를 제공하며, 눈을 편안케 해 주고 가슴을 시원하게 터주고 세속으로부터의 피신처를 제공해 준다. 과거에는 지금 나무가 없는 곳에도 울창한 숲이 있었고, 늪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었으며 이따금 배가 보이는 곳에 선단이 있었다."
  호아드 신부의 묘사는 또 이러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매혹적인 주변 경관을 가진 아름다운 호수들은 있겠지만 더 황홀한 호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깊은 잠에 빠져 잔물결하나 없는 저 담청색 호수물, 마치 화폭에 담긴 듯 수면에 떠 있는 조각배들, 바람 한 점 없어 고요한 수면은 주위의 산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깊은 명상에 잠기는 기쁨을 안겨 준다."
  '자연의 야망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아름다운 호숫가의 언덕과 생동하는 골짜기에서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기 시작한 곳이다. 예수가 성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활동과 가르침, 그리고 기적들을 이 곳에서 행하였다. 베드로, 안드레아, 요한과 그 밖의 제자들을 부른 곳도 이 곳 호수가 에서였고(마태 8/!-4), 베드로의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쳤고(마르꼬 3/7-12 ; 루가 5/1-3), 풍랑을 잠재우고(마태  8/23-27), 호수 위를 걸으시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친 곳(마태 15/29-30)도 이 곳이었다. 예수가 12사도를 뽑은 곳은 호수 가까이 있는 산에서였다(마르꼬 3/13-19).

  갈릴레아 호수 서쪽에 자리한 티베리아는 지중해 수면보다 205m 낮으며 A.D. 26년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세워진 도시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아로 명명되었다. 헤로데왕은 이 곳에 아름다운 궁전과 극장, 금과 대리석으로 빛나는 성전을 지었으며 병을 치료하는 탁월한 효험으로 전 로마제국에 이름나 있던 이 곳 온천 위에 공중 목욕탕을 세웠다. 티베리아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의 하나로 정평이 나 있는 곳에 위치해 있으며 요세푸스에 의해 '대자연의 야망이라고 묘사된 곳이기도 하다.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이 곳은 성스럽게 여겨져 왔다. 바르 코흐바의 반란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이 곳으로 이주하여 제 2의 예루살렘을 건설하였고, 이 후 위대한 율법 학자들이 활동하게 되었다. A.D. 200년경 미슈나가 편찬되었고 4세기 말경에 예루살렘 탈무드가 완성되었으며 히브리 언어에 모음과 구두법이 소개된 곳도 바로 이 곳이다. 많은 율법학자들이 이 곳에 묻혔다. 위대한 사상가이자 카이로의 살라딘 궁전 의사였던 율법학자 마이모니데스(1135-1204)는 그의 대부분의 생을 카이로에서 보냈지만 1204년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시신은 이 곳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또한 기적을 행했던 사람으로 정교회와 유대교인들에게 크게 존경받고 있는 2세기 경의 율법학자 메이르도 이 곳에 묻혀 있으며 이 외에도 율법학자 호로비치를 포함한 많은 랍비들이 여기에 묻혔다.

출처 : 일곱샘
글쓴이 : 일곱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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