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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 11월16일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0. 11:15


 


 

축일:11월16일
 

스코틀랜드의 성녀 마르가리타
 

Santa Margherita di Scozia Regina e vedova
 

Sta. Maragarita de Scotland
 

St. Margaret Queen of Scotland
 

Saint Margaret of Scotland
 

c.1045 in Hungary -
 

16 November 1093 at Edinburgh Castle, Scotland,
 

Canonized;1251 by Pope Innocent IV
 

Margherita = perla, dal greco e latino(=pearl, from the Greek and Latin)
 


 


 


 

에드워드 두트레메르 왕자와 독일 공주 아가타 사이에 태어난 그녀는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노의 조카이다.
 

그녀는 헝가리에서 태어났고, 스테파노 왕의 궁중에서 자랐으며, 하스팅 전투를 피하여 스코틀랜드로 갔다.
 

그녀는 여기서 말콜이란 사람과 결혼했는데, 이때부터 그녀의 성덕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기도와 고행과 단식에서 철저하였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놀라웠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되었던 성직 남용과 성직매매를 금지하려는 시노드를 적극 지원하였다.
 

또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예술과 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고,
 

던펨라인에 성삼위 성당을 세우는 등 교회 안팎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녀이다. (부산대교구홈에서)
 


 

*헝가리의 성왕 스테파노 축일:8월16일.게시판1318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스코틀랜드의 마르가리타는그녀가 자신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해방된 여인이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봉사하기 위한 자유를 의미했다.
 


 

마르가리타는 본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헝가리 출신이다.
 

그녀의 가족들은 정복자 윌리암으로부터 도망가다가 스코틀랜드 해안에서 파선당했다.
 

말콤 왕은 그들을 친절하게 대했으며 아름답고 우아한 마르가리타에게 사로잡혔다. 그들은 1070년 던펌린(Dunfe rmline)성에서 결혼했다.
 

말콤 왕은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마치 그의 나라처럼 거칠고 무례했다.
 

마르가리타에 대한 말콤의 사람이 극진하여 그녀는 그의 성격을 부드럽게 하고 그의 생활을 바르게 하며 그가 덕을 갖춘 왕이 되도록 도왔다.
 

그는 모든 집안 일을 그녀에게 맡기고 때로는 국사 문제에까지 그녀의 조언을 구했다.
 


 

마르가리타는 예술과 교육을 장려하여 그 나라를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종교 개혁을 위해서 교회 회의를 개최하도록 촉구하고 사제들과 신자들 가운데 있는 공통된 종교적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토론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것은 독성 또는 불순한 결혼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여러 개의 교회도 세웠다.
 


 

마르가리타는 왕비인 동시에 어머니였다. 그녀와 말콤 사이에는 여섯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이들의 종교 교육은 물론 다른 공부까지도 직접 지도 감독했다.
 


 

그녀는 집안 일과 나라 일로 대단히 바빴지만 세상사와는 멀리 떨어져 살았다. 그녀의 사생활은 엄격했다.
 

그녀는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신심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하여 검소한 식사와 짧은 수면을 취했다.
 

그녀와 말콤은 두 번의 재계를 했는데 한 번은 부활 전에 한 번은 성탄 전에 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들은 언제나 한밤중에 일어나서 미사에 참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가난한 사람 여섯 명의 발을 씻어 주고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녀는 공공 장소에서도 언제나 거지들에게 둘러싸였고 그들을 절대로 거부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홉 명의 고아와 24명의 어른을 먼저 먹이지 않고는 절대로 식탁에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1093년에 윌리암 푸퍼스 왕이 알위크 성을 불시에 공격하였을 때 말콤왕과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살해되었다.
 

이미 죽음의 병상에 누워 있던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살해된 지 4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애덕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깨꿋한 길’과 ’지저분한 길’이다.
 

’깨끗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단체에 돈이나 옷등을 희사하는 것이다.
 

’지저분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봉사함으로서 자기 자신의 손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두드러진 덕행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마르가리타는 물질적 선물을 줄 때도 매우 너그러웠지만 병자들을 방문하여 자기 손으로 그들을 직접 간호해 주기도 했다.
 

그녀와 그의 남편은 대림절과 사순절에 무릎을 꿇고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했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지저분한 애덕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마르가리타의 이야기에는 지헤의 소금으로 간이 배어 있다.
 

그녀가 침묵할 때에는 그녀의 침묵이 좋은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녀의 훌륭한 행동은 그녀의 착실한 성격과 너무나도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덕을 갖춘 생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터고트, 마르가리타의 고해 신부)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046년경 자기 아버지가 유배 생활을 하던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의 왕 맬콤 3세와 결혼하여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다.
 

사랑과 지혜로써 참된 어머니요 여왕으로서의 뛰어난 본보기가 되었다.
 

1093년 에든버러에서 세상을 떠났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현대 세계의 사목 현장)에서
 


 

혼인과 가정의 신성성
 


 

남편과 아내는 혼인 계약으로써 "이미 둘이 아니요 한 몸이 되었으니" 인격과 행위의 깊은 결합으로써
 

서로 도와주고 서로 봉사하며 동시에 이로써 자신들의 결합의 의의를 체험하며 날로 더욱 깊게 한다.
 

이 깊은 일치는 인격과 인격의 상호 교환이므로, 자녀의 행복이 요구하듯이, 부부의 완전한 신의와 그 일치의 불가해소성을 강요한다.
 


 

주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천상 원천에서 솟아나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를 모델 삼아 구성된 이 다각적 사랑에 풍부한 당신 축복을 내리셨다.
 

일찍이 하느님께서 사랑과 충실의 계약으로써 당신 백성을 도와주셨듯이, 지금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교회의 정배께서 혼인성사로써 신자 부부를 도우러 오신다.
 

그들과 함께 계시며 당신이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부부도 역시 서로의 애정과 변치 않는 충실로 서로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진정한 부부애는 하느님의 사랑에 흡수되어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과 교회의 구원 활동으로 지배되고 풍요해진다.
 

이리하여 부부는 효과적으로 하느님께로 인도되고 부모의 숭고한 임무 수행에 있어서 도움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 부부는 그 신분의 의무와 존엄성을 위하여 특수한 성사로 견고케 되는 것이니 말하자면 축성되는 것이다.
 

이 성사의 힘으로 신자 부부는 혼인과 가정의 임무를 수행하며 그들의 전 생애를 신망애 삼덕으로 채워주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충만하여
 

날로 더욱 자기 완성과 상호 성화에 전진함으로써 공공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
 


 

따라서 부모들 자신이 솔선 수범하고 가정적 기도 생활을 실천하다면
 

자녀들과 집안에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인간적 완성과 구원과 성화의 길을 더욱 쉽게 발견할 수 있으리라.
 

또한 부성과 모성의 직무와 품위를 갖춘 부부는 자녀 교육의 의무, 특히 자녀들의 종교 교육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할 것이다.
 

교육의 의무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부모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가정의 산 멤버로서 그들 나름으로 부모들 성화에 이바지한다.
 

감사하는 마음과 효심과 신뢰로써 부모에게 받은 은혜에 보답할 것이며 부모를 역경과 노후 고독 중에 자녀답게 봉양해 드릴 것이다.
 

홀몸의 신분을 결혼 성소의 연장으로 생각하여 강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가정들은 서로 영적 보화를 후히 나눔이 마땅하다.
 

그리스도교적 가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으로 맺어진 계약을 표상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혼인성사로 이루어졌으므로,
 

부부애와 풍부한 자녀 번성과 단합과 충실로써뿐 아니라 가족 전원의 사랑의 협력으로써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세상에 현존시켜 드리며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줄 것이다. (가톨릭홈에서)
 


 


 


 

마르가리타라 함은 진주(眞株)를 의미하는 라틴어로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마르가리타 왕후도 수많은 스코틀랜드의 여러 왕비 중에서 아름다운 진주와 같은 덕행을 가진 성녀였다.
 


 

그년 앵글로 색손 조(朝)의 최후의 국왕 성 에드워드의 왕녀로서, 덴마크 사람이 잉글랜드에 침입해
 

아버지가 헝가리에 피난하고 있을 때인 1046년 태어나 교육을 잘 받으며 경건히 자라나 침입자가 국외로 쫓겨나자 부모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 위 얼마 안되어 언니 크리스티나가 수도원에 들어갔고, 설상가상으로 1066년에 왕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전부터 호시탐탐(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복자로서 유명한 플라스노르만디의 왕 윌헬모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이 대군을 인솔하고 침입해 왔으므로 마르가리타는 오빠 에두가르도 등과 더불어 대륙으로 피난을 가는 도중에
 

타고 있던 배가 스코틀랜드의 해안에 표착(漂着)하여 그 나라의 왕 말콜 3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여러 차례 망명의 신세가 된 마르가리타는 점점 세상의 허무함을 깨닫고 하느님께 마음을 올리며
 

스코틀랜드 왕의 은혜를 잊지 않고 진실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사람들에게 성덕의 모범을 보여주어 그녀를 가슴 깊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특히 나이가 아직 젊었던 말콜 3세는 그녀의 훌륭한 인격에 감동되어 간곡히 왕비가 되어줄 것을 간청했으므로
 

마르가리타는 주위의 사정으로 보아 그에게 일생을 의탁하는 것이 하느님의 성의라 생각하고 쾌히 이를 승낙했다.
 


 


 


 

스코틀랜드의 왕비가 된 마르가리타는 자기 일신의 영화를 찾지 않고 다만 백성을 염려하고
 

본래 국사에 신경을 쓰지 않던 왕을 격려하여 선정(善政)을 하게 하고, 여섯 왕자와 두 왕녀의 어머니로서 손수 그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그 중에서 후에 왕위에 오른 다윗과 잉글랜드의 왕비가 된 마르릴라 두 사람은 특별히 성인이라는 소문이 높았다.
 


 

마르가리타는 모든 백성, 그 중에도 가난한 자와 병자에게 따뜻한 자비심을 발휘하여 종종 생활비를 떼어 그들을 도와 주었고,
 

고아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지 않고서는 식탁에 앉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민들간에 주위가 인산 인해를 이루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다행히 왕도 매우 인자한 사람으로서 마르가리타의 자선 사업을 금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이에 협력해 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르가리타가 이처럼 가련한 이들을 위해 진력한 것은 원체 그 열렬한 신앙에서 발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선 뿐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다른 의무에 있어서도 결코 게을리 한 적이 없고, 한 밤중에도 일어나
 

궁중의 성당에 가서 날이 샐 때까지 기도에 골몰한 적도 가끔 있어 그곳에서 거행되는 매일 아침 미사 성제에는 빠짐없이 참여했다.
 

더구나 그녀는 겸손의 마음이 깊어 종종 고해 신부에게 자기의 결점에 대해 주의를 주도록 간청했다고 한다.
 


 

마르가리타는 이외에 성당 건축과 유지를 위해 재산을 희사하기를 즐기며 왕의 즉위의 대전식이 거행된 즘펠무린에 화려한 세 성당을 세워 거룩하신 삼위께 봉헌하고,
 

그곳을 왕과 자기와 자녀들의 묘소로 정하고, 또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그 성당의 성직자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사제복을 손수 만들던가 혹은 타인에게 만들게 하여 가난한 사제에게 선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르가리타가 이 같은 성스러운 생활을 보내기를 23년, 외적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자 왕은 황태자와 더불어 이를 맞아 싸우기 위해 군대를 진격시켰으나 두 사람 모두 전사했다. 이리하여 비탄에 빠진 마르가리타는 마침내는 중병에 걸려 그들의 뒤를 따랐는데 때는 1093년 11월 16일이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성인 명부에 기입한 교황은 인노첸시오 4세이고,
 

그녀를 다시 스코틀랜드의 수호 성녀로 모신 교황은 클레멘스 10세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출처 : 일곱샘
글쓴이 : 일곱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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