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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등감의 증상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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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등감의 증상


  첫째, 두려움과 불안, 타인을 향한 불신, 자기학대로 나타납니다.

  

  열등감은 자존감의 유무와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일단 열등감이 생기면 두려움과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합니다. 당장 일어날 일이 아닌데도 근심하고 염려합니다. 수년 후에 일어날지 모르는 일에 대해서도 염려를 하게 됩니다. 대인관계에서도 이런 불안한 마음은 찾아옵니다. 방금 만난 사람에게서 앞으로 헤어질 일을 걱정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어도 헤어질 것이 두려워 지금의 만남을 즐기지 못합니다. 만남이 주는 즐거움은 잠간이며 상대방이 나를 버리지는 않을까 안절부절 합니다. 대개 이런 경우, 실제로 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등감을 가진 개인은 결국 피해의식으로 물듭니다. 불신은 피해의식 속에서 싹트는 독버섯과도 같습니다. 남들이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지만 피해의식 때문에 사랑과 관심을 거부합니다. 감사하지 않습니다. 불평만 나열합니다. 원망스러운 생각만 듭니다.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방에게 짜증을 냅니다. 마침내 사람을 잃어버립니다.


  열등감이 심해지면 자기학대로 빠집니다. 자신은 열등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믿어 버립니다. 자신은 열등하기에 남들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믿습니다. 자기는 홀로 있어야 마땅하며 버려져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무력한 존재라고 자기를 인식합니다. 대인관계를 하면서 상대방이 자기를 버리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부각시켜 상대방이 환멸을 느끼도록 만듭니다. 자기 스스로 사랑을 받지 못할 존재로 만들어갑니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환경 탓을 할 때가 많습니다. 왜 나는 이런 환경가운데 살아야 하나?”, “하필이면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이 고생인가?”, “왜 나는 하는 일마다 안 되는가?”,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실패만 하는 내가 미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안된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안 될 일만 보이는 법입니다. 부정적인 것만 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연애할 때에는 몰랐는데 결혼 후 자신의 열등함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사랑을 자꾸만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사랑을 받으려면 자기도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심어야 하고 투자를 해야 합니다. 먼저 인정해 주어야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어야 할 것은 심지 않고 상대방에게 자꾸 요구만 나열합니다. 자꾸 확인하려만 듭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는 행동은 하지 않은 채 요구만 하는 자세, 잘못입니다.


  연애할 때에는 예쁜 행동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나쁜 면만 상대방에게 보여줍니다. 나는 이렇게 나쁜 행동을 해도 당신은 나를 사랑해 주어야만 한다는 자세로 말입니다. 짜증을 달고 삽니다. 신경질을 밥 먹듯 냅니다. 여자의 경우 몸을 가꾸지 않습니다. 거친 행동을 합니다. 옷이 많이 있는데도 버림받은(?) 옷만 골라 입습니다. 가장 멋있는 옷은 교회 갈 때만 입습니다. 머리도 다듬지 않습니다. 파출부 아줌마인지 마누라인지 구별이 안갑니다. 열등감 때문에 안 가꾸는 사람,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에게 가꾸라고 하기 전에 화장품을 한번이라도 사줬어야 말이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면은 중요합니다. 흔히 말하기를 영적인 것이 중요하지 머리, 옷이 뭐 중요하냐고? 그런 것은 다 세상적이야! 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영적인 깊이가 있는 사람일수록 보이는 삶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전 지금 육적인 면을 잘 가꾸어 옷 잘 입고 몸매를 가다듬고 성형 수술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영적인 깊이는 반드시 육적인 면으로 보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내면의 믿음이 외적으로 순종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이는 이웃과의 관계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5절부터 17절입니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5-17)


  보이는 아내에게, 보이는 남편에게 보이는 사랑을 주지 않으면서 어찌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말로는 누구나 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실제의 세계에서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보이는 인간관계가 정상적이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보이는 관계가 우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인 열매를 맺고 있는지 또는 영적으로 바로 서 있는 것인지 확인하는 방법으로서 ‘보이는 세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보이는 세계는 굉장히 중요한 세계입니다. 영적으로 깊어갈수록 보이는 세계에서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이유는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며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이는 세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유일한 해결책 삼는 훈련의 장으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남녀관계로 묘사하셨습니다. 주님을 신랑으로, 우리들을 신부로 묘사하셨습니다. 교회에서 집사님들도, 사모님들도, 목사님들도 치장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너무 가꾸어도 안 되지만 너무 헬렐레 풀고 다녀도 안 됩니다. 우리 사모님은 너무 풀고 다니셔!”, “아무개 집사님은 너무하시는 것 같아!”, “우리 목사님은 너무 영적이시라서 머리도 안 감으셔! 기도만 하시는가봐! 이런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어떤 부흥사가 한 말입니다. 남자들이여 아내에게 화장품을 사주시라, 야한 잠옷도 사주시라틀린 얘기임에는 맞습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 있는 가치관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볼 부분이 있습니다. 혹 사람들이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너무 나누지 않았나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회복하는 정도는 아내와 남편과의 회복하는 정도와 비례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 아내와 남편과도 가깝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십자가의 복음 위에 토대하여 세워질 때 가장 먼저 부부관계를 다루십니다. 결국 부부관계가 서지 않으면 신앙의 본질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먼 사람은 아내나 남편, 가족, 이웃과 먼 법입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면 되지 꼭 표현해야 사랑인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이 중요한 만큼 장미꽃다발도 중요합니다.

                           

  오래 전에, 전 사모에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하는 십분의 일만 내게 하라. 그러면 내가 살겠노라.” 맞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끄럽습니다. 실제로 많은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하는 십일조만 아내에게 한다면 목사님들 가정이 달라질 것입니다.

  

  둘째, 열등감은 욕심이나 개인적인 야망, 스스로 세우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열등감이 커지면 사랑이 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자기학대의 결과로 굶주림이 커집니다. 굶주림의 증상은 욕심으로 나타납니다. 욕심은 강한 소유욕과 강한 집착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열등감이 강한 사람은 소유욕이 강합니다.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할 때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서로가 받아주어야 할 때 받아주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부부싸움이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깁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크게 싸우는 법입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신혼부부가 처음 싸울 때 많은 경우 치약을 어디서부터 짜는가를 가지고 다투기도 합니다. 이러다가 이혼에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어차피 맞지 않는 배우자와 살다 헤어지느니 미리 헤어지자는 논리로 말입니다. 서로가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 결론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만들 수 있는데 꼭 이렇게만 되어야 한다고 우겨대며 핏대를 올리면 싸움은 일어납니다. 집착 때문에 싸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경우, 집착은 자존심의 옷을 입고 나타난 열등감이요 이기적인 욕심입니다. 서로가 인정받아야 할 때 인정받지 못한 결과입니다.


  3) 열등감은 완벽주의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허점이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열등감이 나타나는 것으로 흔히들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단점과 허점을 보이지 않기 위해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고 기를 씁니다. 허점을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욕구가 작용을 한 것입니다. 인간은 원래 허물이 있는 법인데 말입니다. 완벽으로 자기를 꾸미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이럴 경우, 대개 어릴 적 부모님들이 실수를 잘 감싸주지 않은 결과입니다.


  넷째, 열등감은 겸손과 희생하는 모습으로 잘 나타납니다.


  자기를 자책하고 자학하는 표현으로서의 겸손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항상 못난 놈이야”, “나는 자격이 없어”, “나는 항상 궂은 일만 해야 하고 희생만 해야 해.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많이 하는 분들 중에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봉사를 잘 하다가 끝에 가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봉사 중에 누가 성령으로 봉사하고, 누가 열등감으로 봉사하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성령과 열등감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헌신된 성도가 봉사할 때 일부는 은사로, 일부는 자기학대로 봉사를 합니다. 이렇게 봉사하다가 자기의 희생에 대해 인정을 못 받았다든지 자기에게 돌아와야 할 칭찬이나 몫을 타인이 취했을 때 분노가 폭발합니다. 내가 이렇게 봉사하니까 너 까지 나를 무시하느냐?”, “나를 이렇게 따돌릴 수 있는 거야?”, “내가 너희들처럼 고상할 수 없는 줄 알아? 이게 다 주님을 위한 거라구, 알아들어?


  그러기에 교회가 행위로서의 봉사를 장려해서는 안 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교회가 잘 돌아가는 것 같고 좋을지 모르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폭발이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열등감으로 인한 마음을 먼저 치유해 주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로 봉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섯째, 열등감은 더 나아가 불신과 불만 증세를 보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서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불신입니다.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과 더불어 그들의 죄악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성경은 악심이라고 표현 부분도 있습니다. 불신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까 하노라”, “하나님을 대적했다”,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하나님을 배반했다”, “하나님을 거역했다등으로 묘사한 부분도 있습니다. 모두 불신과 더불어 쓰고 있는 구절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우리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기 쉽습니다. 이런 성경구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에이, 믿음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 같으니라고. 에이, 얼마나 믿음이 없었으면 하나님을 분노케 하고 하나님을 대적했을까. 오죽 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졌을까. 답답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우리는 성경의 관점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엇을 두고 불신이라고 말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불신이 아닌 성서가 말하는 불신의 의미를 추적해야 합니다.


  성경은 출애굽기 16장의 사건을 가리켜 불신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 7절부터 16절입니다.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히 3:7-16)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드리면, 출애굽기 14장은 홍해를 건넜던 사건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장은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 군대를 멸하신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을 추며 찬송하는 장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장은 홍해를 건넌 후,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먹을 것이 떨어져 모세를 원망하는 백성들의 불평불만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장면을 가리켜 성서는 불신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알아야할 것은 성서가 불신을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기 16장 사건까지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이 동이 난 것입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광야입니다. 인구수는 장정만 60만 명,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닙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먹을 것이 없습니다. 나무도 풀도 없었습니다. 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상황 가운데 있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나 같더라도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을지 모릅니다. 솔직해집시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그 상황의 10분의 1만큼 어려움을 당해도 더 원망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은 「하나님을 불신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을 대적했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은 여러 군데에서「악심을 품었다」,「하나님을 배반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불신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은 환경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에 의존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불의의 사건 앞에서 성도들은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를 한 다음에 일어납니다. 기도 응답이 지연되거나 아예 응답이 없으면 그 때부터 성도들은 환경을 바라보며 환경을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이리저리 해결책을 찾아보기도 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기도부탁과 함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건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좌절하는 모습이 오늘날 성도들의 모습은 아닌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가져야 할 인식은 ‘하나님은 성경에 말씀하신 그대로의 하나님’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확인되었다는 진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은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사건이나 환경으로 인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옵소서.”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믿음입니다. 환경에 따라 좌우되는 삶은 믿음에 의한 삶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등감은 상대방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열등감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구실을 잡아 가지고 상대방에게 불만을 터뜨립니다. 사랑을 베풀려는 상대방에게 더 많은 요구를 하여 상대방이 한계를 가지도록 합니다. 그러면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내가 못할 거라고 했잖아? 사랑한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내 말이 맞지? 한 가지 잘못한 것을 가지고 계속 트집을 잡습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가 없는 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던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지하여 열등감을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구원자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더 나아가 모세를 원망하면서 온갖 불평을 다 쏟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은 하나님께 감사보다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많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항상 하나님께 요구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들어주시면 원망하였습니다. 출애굽의 감격과 표적과 기적의 경이로움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 생겼던 열등감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계속 성장하고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창조주를 의지해야만 합니다. 믿음의 근거를 살아계시며 인격체인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도 열등감이 나타납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열 명의 문둥이를 고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명만 예수님께 감사하러 돌아왔습니다. 왜 한 명만 감사하러 다시 돌아왔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 여기서는 열등감을 통해 이유를 찾    아 보겠습니다. 문둥이하면 모든 것을 포기한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결혼, 돈벌이, 학벌이란 의미가 없습니다. 죽을 목숨이며 버림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사람의 생활은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문둥이들 스스로 자기들은 신에게 심판받아 이    렇게 되었노라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던 문둥이들, 어느 날 예수를 만났고 주님께서는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들은 나음을 입자마자 보통사람이 되었고 보통사람들의 생활이 그들에게 의미가 있게 되었습니다. 아, 이제 내가 살았구나. 나도 이제 결혼을 할 수 있다! 돈도 벌어봐야지! 가족들도 만나야겠다! 그들의 마음은 치유에 감사하기보다는 미래의 자기 생활에 온통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아라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문둥이들은 고침을 받자 보따리에 눈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구원받고 나면 죽음에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문둥이들은 고침을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기 보다는 이전에 하지 못한 생활을 보상받고 싶어졌습니다. 보상심리가 극대화되었습니다. 더 멋지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이 같은 보상심리는 사람을 불만가운데 빠트립니다. 감사를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문둥이들은 치유의 감격으로 주님께 돌아가 감사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세상에서 채우지 못한 것을 이제는 채우고 쌓으려는 불만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유한 자의 부를 노래를 다 부르기도 전에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서 이전에 추구했고 부러워했었던 세상 것을 쌓기 위해 주님께 돌아갈 생각을 못했던 것입니다. 이방인의 버려진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시는 우리들의 가장 건강한 모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항상 출애굽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것은 늘 감사의 노래였고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바울에게 있어서 자랑거리는 오로지 십자가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이렇게 고백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아픔과 버림받음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께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혹시 내가 십자가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내 자신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무익한 종인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원래 버림받았던 존재였습니다. 피투성이로 살았습니다. 노예였고 포로였습니다. 문둥이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문둥이였을 때 무엇을 소망하였습니까? 대학? 결혼? 사업? 돈? 아파트? 우리가 문둥이였을 때 이런 것들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치유해주시는 것밖에 소원이 없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성경 속의 열 문둥이처럼 우리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우리도 감사를 잊었습니다.


  내가 오늘 아무 것도 안 되었지만 이렇게 호흡하며 살았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 아닙니까?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 내가 치유되었다는 이 기적, 이제 감사합시다. 예수 때문에 살았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합시다.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덤으로 주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다시 가져가신다고 해도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내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우리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기만 하셨나요? 하나님의 일군으로 부르시기까지 하십니다. 자, 뭐가 좀 안 되면 어떻습니까? 남들보다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남들이 나를 조금 무시한들 뭐 어떻습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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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봉서방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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