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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벌구이식 독서로써 ‘파피용’을 읽은 후의 감상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5. 19:31
출판사
열린책들
출간일
2007.7.12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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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개미, 뇌, 천사들의 제국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소설. 태양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대한 우주 범선 '파피용'을 타고 1천 년간의 우주여행에 나선 14만 4천 명의 마지막 지구인들. 인간에 의해 황폐해진 지구를 ...
나의 평가
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꽤 괜찮아요
이 책은..
재치와 무한한 상상력, 거기에 과학적 이론으로까지 잔뜩 무장한 우리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참신하고도 기발한 소설로 또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비>란 뜻의 불어 ‘빠삐용’ 인 데 원제는 ‘별들의 나비’(Le Papillon Des Etoiles) 혹은 ‘별들로부터 온 나비’네요. 아마도 지구 를 떠난 새로운 별들의 세대 중 새 인류를 책임질 수 있는 환골탈퇴의 나비(애벌레에서 나비로 거듭 태어나는)를 기리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 개인적 소견으로는 말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뜩이나 요즘 번잡한 저의 마음이 더욱 번잡해졌음을 우선 고백하지 않을 수
가 없네요. 요즘 웬지 상당의 제 가치관이 혼란을 겪고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마치 온갖 잡스런
이론과 사상을 큰 솥에 퍼부어 놓고 휘휘 저어가면서 섞어 담금질인지 아님 그냥 대책없는 혼합
인지 모를 무언가로 만들어가는 중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서도 전
혀 아무런 감이 오지 않구요. 한 마디로 그냥 멍하면서도 편치 않게 지내고 있는 와중이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엎친 데 덮친 것같은 기분으로 책을 읽은 감상을 적다보니 다분히 부정확하고 어
떤 한 쪽으로 치우칠 확률이 농후하므로 제목을 <초벌구이식 독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문제 는 그나마 지금 감상을 안 남겨놓으면 시간이 갈수록 제 빈약한 기억력이 바닥을 드러낸다는 것
이죠. 그래서 할 수 없이 또 이렇게 주절될 수 밖에 없음이구요.ㅎ

그리고 제가 요즘 마음이 어수선한 것은 제 개인적인 일로부터가 우선적인 원인을 제공하지만 그 밖에도 저란 개인을 떠나 세상 돌아가는 어수선함도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제 조국, 그 밖에 멀리 있는 세계 저쪽, 그 안팎이 다 이 책에서 언급한 그대로 부조리와 카오스로 갈 데까지 간 느낌이거든요. 아마 제 마음이 편한 상태라면 이런 걸 느끼더라 도 아주 경미한 정도로 밖엔 느끼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작금의 제 안의 혼돈 역시 만만치 않은 카오스이므로 더 배가 되는 느낌 또한 사실이구요.

이렇게 우리 인생사라는 건 자신과 세상을 절대 분리시킬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가 맞는 것 같습 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 또한 아무 의미 없는 것이지만, 세상 또한 나란 존재와 반드 시 결부되어질 수 밖에 없는 무엇이 확실한 거죠.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찌기 “인간은 사회 적 동물이다.”라고 갈파한 게 아닐까 싶은 것이구요.

제 개인적 한탄과 소견은 이쯤에서 접기로 하구 이 책으로 돌아가자면요. 이 소설 역시 출발점은
바로 우리의 적나라하고 비참한 현실을 시작으로 하구 있습니다. 구태의연하고, 썩을대로 썩고,
곪아 터질대로 터져버린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몇몇의 뜻있는 사람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마
지막 희망>이라는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걸 보여주므로써 작금의 현실에서 그나마 숨통
을 찾아보려는 ‘희망적 메세지’를 던져주는 것으로요.

뛰어나고 기발한 상상력의 소유자답게 작가는 지구를 떠나 거대한 우주선을 타고 장구의 세월 동
안 우주를 여행하는 ‘희망의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세세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주선을 계획하는 사람부터 그 사람과의 잘못된 만남에서 결국 좋은 인연으로 맺어지는 또 다른
주인공, 거기에 그들의 계획을 가능케 해준 호탕한 사업가를 비롯 몇 명의 리더와 함께 독자들을
모험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이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행위 자체가 바로 그러한 프로젝트에 우리
또한 동참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지요. 그러면서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선과 악에 대한 개념, 이상주의, 이상국가, 이상이라는 낱말의 진정한 뜻에 대해 숙고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제 안에서도 이 책의 과정처럼 똑같은 신뢰와 불신, 그리고 희망과 좌절이 반
복되었던 게 사실입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건 뭘까에서부터 더 파고들어
가다 보면 내 자신에게서 내가 믿을 수 있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로까지 깊이깊이
침잠하였지요. 결국 인간에 대한 고찰을 좁히다 보면 바로 제 자신 안을 꼼꼼히 들여다 보는 걸 로 귀결되더라구요. 제 안에 온갖 것들이 다 들어있는 게 맞는 거더라는 거죠. 다시 말해 온갖 인간 군상의 조각조각으로 짜집기해 놓은 퀼트작품이 바로 나란 인간이라는 겁니다.그러니 또 한숨을 깊이 들이쉬며 자조(自嘲)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자신의 안을 들여다 보면 뭐 별 수가 있겠는지요? 너무도 뻔한 비참함 뿐이죠….

왜 희망을 말해주려는 이 책을 읽으며 이런 결론을 얻을 수 밖에 없었을까요? 이것 또한 지금의 제 마음이 평정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에 다름 아닐 뿐일까요? 아님 진정 이 책에 서 말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우리들의 불가피한 일상적 반복과 허무적 유한성인 걸까요? 또 이렇게 생각하다 그래도 이 책은 희망을, 꿈을 말하고 있는 게 맞는 것 같단 쪽으로 다시 기웁니 다. 아니, 솔직히 그 쪽으로 기울고 싶습니다.

너무 심각하지 않게 그냥 보여주는 대로만 보면서 마지막 3부인 ‘낯선 행성에의 도착’에 나오는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 아드리앵(재미있는 것이 그의 갈비뼈에서 나온 엔야가 계속 그의 이름을 잘못 부르다가 결국 아담이라고 부르게 됩니다.)에게 다시 희망을 걸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즉 인류의 시초라고 성경에 적혀있는 아담 말입니다. 어쩜 우리들은 우리들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실질적인 과거를 모두 잊고 다시 거듭 태어난 한 마리 나비인지도 모를 일인데 그렇게 보자면 바 로 아담인 아드리엥 역시 운명적인 순환 속에서 다시 인류의 기원으로 거듭난 것이구요.

아마 그와 같은 근거로 이 책의 제목이 <나비>가 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또 들었습니다. 마치 애벌레 시절을 잊어버린 나비처럼 과거를 다 잊어버린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란 거죠.
그러니까 우리들의 삶은 거시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 계속 순환되는 인류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것으로 까마득하게 과거를 잃어버린 우리들은 새로운 탄생이라 여기는 나비같은 생을 돌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단순한 반복이 아닌 <생명+지식>이 되어 똑같은 실수를 반복
하지 않아야 할 의무 내지 당위성이 요구되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영 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란 한 마디로 귀결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이러한 희망을 말하므로 우리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구요.

거기에 하나 더 희망적인 베르나르 베르베르식의 유머를 보자면 바로 이런 프로젝트를 탄생시킨 (다시 말해 나은 미래를 꿈꾸고 계획하는 주인공) 이브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하지 않은, 흔히 보 여지는 우리들 중의 하나로 설정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는 꼼꼼하지 못한 듯, 그러면서도 미래를 웬만큼 정확히 예측한 그런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비범함과 평범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우리 선남선녀의 모습 그대로인 셈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확대해석해 보자면 작가는 결국 세상에 뽐나 보이는 사람들에게서보다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는 결론까지 끌어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이런 제 추측을 증명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예가 바로 마지막 남은 아드레앙과 엘리자베스의 어이 없는 싸움으로 시작된 인류파멸의 위기 전 단계까지로의 점입가경일테구 말이지요. 정말 황당
하면서도 진한 묘미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작가의 톡 쏘는 유머의 엑키
스였죠. 후후…

그래서 전 이 책이 주는 무거운 화두에도 불구하고 이 작가를 계속 좋아하기로 맘 먹었습니다.
그의 유머가 너무도 맘에 확 들어오거든요. 그리고 원래 한 번 누굴 좋아하면 웬만해선 실망않
는 제 성격으로 봐서도 중간 중간의 이해 곤란한 부분부분에 대해서도 눈을 감아버렸습니다.
뭐 작가가 완벽함의 모델일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구요. 일단 우리들에게 어떤 주제
를 던져준 것만으로도 그들은 존경 받고 감사를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신념에는 변함이 없는 거
구요.

2007년 8월 어느 날에 읽었던 ‘빠삐용’은 내게 이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출처 : bambi
글쓴이 : 꿈을 가진 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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