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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표류하는 한국교회, 좌표는 어디에?-이광호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6. 22:57
표류하는 한국교회, 좌표는 어디에?


                              이광호 박사 '한국교회 신학(교육)의 현실과 과제' 기고


현대의 지각있는 성도들 중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우려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심지어는 불신자들마저도 한국교회를 매섭게 질타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시사저널 2004년 12월 16일자(790호)에서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문제를 취급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심각한 비리들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어지러운 한국교회의 문제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영락교회, 광성교회의 분열과 중앙성결교회 이 모 목사의 불륜, 인천 장 모 목사의 불륜에서 비롯된 사망 등이 사례로 제시됐다.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1심 유죄 판결, 충현교회, 광림교회, 소망교회, CCC, 강남제일교회의 세습 문제 역시 한국교회가 맞닥뜨린 위기의 징후로 제시되기도 했다; 지난 2004년 10월 2일(토) 한국방송공사(KBS)는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에서 한국 개신교 120년을 조명하면서, 초심을 버린 한국교회의 물량화되고 세속화된 교회답지 못한 모습을 사례별로 지적한 바 있다. 이외에도 한국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타락양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한국교회는 좌표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으며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횡포에 신음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일부 목사들의 성윤리 파괴, 피라미드 영업에 개입한 사기, 공금횡령, 목회세습, 교단이나 신학대학 내부에서의 부정과 비리 등과 같은 엄청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놀랄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가!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내적 원인이든 외적 원인이든 명백한 그 원인으로 인해 현재 겪고 있는 어떤 상황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한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오늘의 타락한 현실적 한국교회를 있게 한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내적인 원인과 외적인 원인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내적인 원인은 실천적 의미에서의 신학의 질식에 있으며, 외적인 원인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세속적 공격에 견디지 못한데 기인한다. 그것이 결국 한국 교회의 불건전한 물질주의화를 가져왔으며 세속화를 부채질 했다. 그리고 그것이 한국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 세속정치의 집단 문화를 그대로 도입하게 했다.

물론 그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일반 목사를 비롯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세속화를 방치한 한국의 신학자들 및 신학교가 져야 한다. 이는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실천적 의미가 되어야 한다. 결국 세속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향해 마땅히 외쳐야만 할 신학적 음성을 발하지 않았거나 자유주의와 세속주의의 침투에 대한 견제부실로 인해 신학 자체가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즉 한국교회의 퇴락의 원인은 참된 신학의 부재와 신학교의 제 역할 포기 및 기능상실에 있으며 그것이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불러왔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학은 배의 키와 같다. 키는 전체 선박의 방향을 정한다. 만일 키가 말을 듣지 않거나 잘못된 방향제시를 하게 되면 그 선박은 표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신학과 신학교육의 목적>, <신학연구의 현대적 관행과 방법에 대한 비판적 이해>, <신학과 철학>, <교회와 신학교>, <직업적 신학연구의 위험성>, <세속주의의 위험과 현실 신학교에 대한 비판적 담론>, <신학의 사대주의>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를 통해, 늦은 감이 있으나 우리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소망할 때 한국교회가 거듭나게 되는 가능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신학과 신학교육의 목적

교회는,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 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신학은 지식확충을 위한 학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경으로 한 신앙의 골격을 의미한다. 즉 신학이 뼈대라면 신앙은 살인 셈이다. 뼈없는 살이란 상상할 수 없으며 뼈대가 약한 채 살만 찌게 된다면 건강상 위험천만한 사태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살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보이지 않는 뼈대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둘은 상호관계 속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편 생각하면 살은 찌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비만이던 사람이 운동이나 식이요법을 통해 정상체중을 회복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러나 뼈와 뼈대는 다르다. 뼈가 상하고 무너지면 그것으로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다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신학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신학이 신앙의 근간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 여기서 ‘신앙이 어리다’는 말은 나이가 어린 성도들이나 신앙생활의 연륜이 짧은 성도들 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목사나 장로들 가운데도 아직 신앙이 어린 교인들이 많이 있을 수 있으며, 현실적으로는 신학교수들 가운데도 신앙이 어린 자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이 신학이 없는 신앙을 보고 훌륭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만으로 살찐 것을 보고 건강하다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신학의 목적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신학의 목적은 말씀의 가르침에 대한 골격을 형성함으로써 이룩되는 교회의 상속, 교회의 세움, 교회의 보존, 그리고 그를 통한 하나님께 대한 송영에 있다. 신학의 목적은 인간의 지적 욕구의 충족에 있지 않다. 따라서 신학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학문화(學問化)되는 것은 견제해야 한다. 학문이란 그 속성상 지적(知的) 경쟁을 요구하게 되며 그를 통한 발전을 추구하게 된다. 만일 신학이 그렇게 되면 신학 본연의 목적을 벗어나 인본주의적 학문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게 된다. 그러나 신학은 미래적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처한 교회 가운데서 계시된 말씀에 기록된 바를 확인하는 교회의 작업이다.

그렇다면 신학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인가? 신학의 일반적인 목적이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적 뼈대를 강하게 세워주기 위함이라면 신학교(신학대학원)의 교육목적은 교회를 위한 교사의 양성이다. 올바른 신학교육은 상속되고 있는 교회의 교사들에게 참된 신학을 언약 가운데 전수하게 된다. 즉 신학교육이 단순한 학문의 활성화가 되어서는 곤란하며, 신학교육의 목적 역시 교회를 보존, 보호하기 위함임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신학연구의 현대적 관행과 방법론에 대한 비판적 이해

우리는 신학을 이야기할 때 현대 보편화된 신학분류법을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현대신학의 분류는 근대에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바 신학의 분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건전한 교회들 가운데는 신학분야의 다양한 분류가 있지 않았어도 교회를 위한 충분한 역할을 잘 감당한 경우가 많다. 현대신학의 지나친 분류나 세부전공의 경향은 도리어 교수나 학자들의 편향성을 가져오게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근대 이후 전통적인 신학의 분류라 할 수 있는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일반적으로 실천신학이라 일컬어지는 분야를 고려신학대학원에서는 봉사신학이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영역이 적용신학이라 일컬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조에성경신학연구원에서는 그렇게 칭하고 있다. 신학적 분류에 따른 특정 분야가 어떤 명칭으로 불려지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실천신학이라 하면 현상에 치중하는 인본주의적 경향에 치우칠 우려가 있으며, 봉사신학 역시 인간이 그 주체가 되는 용어로 보인다. 그러나 적용신학이라 칭하게 되면 성경말씀을 교회 가운데 어떻게 적용하며 받아들여야 할까 하는 원리적인 측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의 틀에서 지금은 <성경언어학, 해석학, 신론, 기독론, 인간론, 변증학, 윤리학, 신조학, 성경지리학, 목회학, 설교학, 교회행정학, 교육학, 선교학, 사모학, 통일신학, 영성신학 등등> 엄청난 세부적인 분류들이 시도되고 있다. 물론 앞으로는 현재보다 더욱 세분화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그것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특정 분야의 전공자가 잘못된 신학적 견해를 가진다 해도 전공자인 자신이 가장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해 버린다면 엄청난 혼란이 오기 마련이다. 더구나 극도로 윤리화된 한국교회 에서는 ‘잘못된 사상’ 마저 전공을 핑계삼아 덮고 수용하는 것이 마치 미덕인 양 호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근대 이전의 과거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런 식의 신학적 분류가 있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 속에 나타난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그리고 사도 및 초대교회에 살았던 많은 교회의 교사들을 성경신학자라든지 조직신학자라는 식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교회 역사 가운데 복음의 원리 가운데 살았던 많은 선배들, 이를테면 어거스틴이나 루터, 칼빈 등을 특정 학문분야를 전공한 사람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자기 전공영역을 지나치게 분명하게 구분짓는 것은 우리시대가 안고 있는 모순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구약신학자는 조직신학이나 역사신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게 보이고 실천신학자는 신약신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마치 미덕인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우리의 시대적 관행이다.

모든 신학자들은 다양한 신학적 영역들에 대해서 일관성 있는 신학적 가르침을 언급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는 이에 대한 한 해결책으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 본다: 기존의 거의 모든 신학자들은 자기의 특정 전공분야가 있다. 구약신학, 신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등의 전공분야를 가지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세부적인 자기 전공분야가 있다. 필자는, 각 학자들이 소위 자기 전공이외의 다른 전공분야를 일정부분 강의하고 연구하도록 제도적으로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들면 구약신학을 전공한 한 학자에게 요한계시록이나 설교학을 연구하고 강의하게 한다든지 선교학을 전공한 학자에게 신조학이나 창세기를 강의하고 연구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실천신학을 전공한 학자에게 중세교회사를, 그리고 역사신학을 전공한 학자들에게 선교학을 연구하여 강의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 전공분야를 충실히 연구하는 가운데 다른 전공분야를 깊이있게 연구하는 기반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내부에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질 때 통합성있는 진정한 신학교육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 것이다.

즉 자기만의 독립되고 고유한 연구영역이 제한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우리시대의 학문적 편의를 위해 그런 세부적 전공영역이 있는 것 자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마치 모자이크처럼 분류되어 제각기 자신의 모자이크 영역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듯한 그림이 제시되는 것은 결코 온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모든 신학자들은 각기 자신의 관심있는 분야(전공)에서, 혹은 다양한 각도에서 동일한 내용(성경)을 조망하며 조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신학자들은 각기 독립된 자기 학문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신학적 내용을 다양한 위치에서 조망하며 진리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 안에서 독립적 학문 영역들을 독립적인 모자이크 형식으로 분리하여 떼어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신학과 철학

지상의 모든 교회는 항상 세상에 노출되어 있다. 사도교회와 초대교회, 중세교회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항상 세상 가운데 노출된 상태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세속적 논리와 교회의 신학적 논리는 항상 대치관계 속에 놓여 있게 된다. 필자는 세상으로부터 발생하고 정리되는 학문을 철학의 범주에 넣는다. 세상은 시류에 따른 역사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끊임없이 제공함과 동시에 항상 새로운 철학적 논리를 제시함으로써 인류에게 정신적 지표를 제시하려 한다.

대신 인간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에서 발생하고 정리되는 학문적 내용을 신학적 범주에 넣는다. 신학은 세속에 대한 반응이자 해석을 위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참된 신학은 변천하는 역사활동에 대한 해석과 답변을 오직 성경말씀에서 찾는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세상의 철학과 교회의 신학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관계가 존재하며 상호 충돌을 준비하게 된다.

발전하는 역사 가운데 존재하는 세상은 지속되는 부대낌 속에서 전향적으로 변천해 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세상이 변화를 중단했던 시기는 단 한번도 없다. 세상의 변화는 역사의 수직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현실의 수평적 가치교환은 변화의 내용적인 면 뿐 아니라 그 속도를 더욱 활발하게 한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교회의 신학도 끊임없이 발전하게 된다. 이는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교회의 답변이 끊임없이 제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과학문명이 발달하고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을 보며 그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신학은 끊임없이 생생한 답변을 제시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신학의 발전은 단순히 전향적이지 않으며 이미 존재하는 가치를 확인하는 작업을 연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세상에 대한,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한 신학적 해석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만일 신학이 그 작업을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게 되면 그것은 죽은 신학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해석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즉 신학은 철학을 해석하는 주관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교회의 신학적 해석을 동반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값어치를 부여할 수 없다. 신학이 수행해야 할 기본적 역할은 교회로 하여금 죄악 가운데서 전진적으로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내리도록 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나아가 교회의 내부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도 신학은 신학적 해석을 지속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내에 새롭게 침투해 들어오는 세속적 사상 및 활동에 대해서도 신학은 끊임없는 해석을 해야만 한다. 천국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는 세상의 경향성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 가운데 살고 있는 교인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익숙한 논리나 가치를 교회 가운데 이식(移植)하려는 잠재적 노력을 지속하게 된다. 변화 가운데 있는 세상을 경험하며 신학적 해석없이 세상 친화적(親和的)이 된 잘못된 사람들이, 성도들에게 새로운 세상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교회를 미혹하려할 때 신학은 엄격한 해석을 함으로써 그에 대한 견제를 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공교회)와 신학교

교회의 교회를 위한 신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기구적 신학내부가 우선 선명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의 선명성을 드러내야할 학자들에게 그 선명성이 떨어진다면 신학적 위기를 맞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예를들어 보수주의와 개혁주의를 주장하는 한국의 일부 학자들의 신학사상에 대해서는 분명한 검증이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들어 지난 2004년 7월, 미국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는 고린도전서 14:34,35의 기록에 대한 사본학적 불안정과 두 구절이 고린도전서 14장의 전체적인 문맥을 끊고 있다는 점등을 근거로 들어 후대에 삽입된 것이 확실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 과연 그의 신학사상이 건전한가?

필자는 그의 신학사상이 매우 불건전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한국의 대다수 보수주의 신학생들은 그의 사상을 따르며 지지하고 있다. 한국의 건전한 신학교에서는 그의 신학사상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의 신학적 주장에 대해 신학적 동의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경계해야할 신학자인지 분명히 밝혀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신학생들이나 교단의 성도들이 신학적 균형을 잃지 않게 된다. 복음주의자임을 주장하면서 성경을 고등비평하는 그런 학자들을 보면서도 침묵을 계속한다면 누가 그들을 참된 신학자로 신뢰할 것인가!

그러나 대다수 교단들과 신학자들은 그런 신학적 문제가 제기 될 때마다 문제를 피해 가기에 급급했다. 그러한 자세는 신학과 고백을 신념을 지닌 교회의 학자들이 취할 수 있는 정직한 자세가 아니며 결국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 따름이다.

러한 무책임성은 미래의 신학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필자는 지금 특정 학자의 신학사상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단지 교회의 신학자들이 마땅히 제시해야할 신학적 문제 해결에 대한 기초적인 방법에 대한 중요성과 그에 대한 문제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특정 학자의 신학 사상에 문제가 있다면 기존 신학은 그에 대해 명확한 입장표명을 해야만 한다.

신학교는 공교회의 신학과 관련된 제반사항에 대해 교회의 교사로서 신실한 감독의 책무를 가진다. 그것은 일반 행정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결정에 대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아가 신학의 범주가 아닌 일반적 윤리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목사들이 공교회의 정책을 논하거나 재정의 씀씀이에 대해 결의를 할 때 신학교수들이 그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목사가 간음을 하거나 횡령을 했다고 가정할 때 달리 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있지 않아도 누구나 그런 행위들을 악한 범죄라는 것을 안다. 그런 사건들에 대해서는 달리 학자들의 해석이 따르지 않아도 치리회가 적절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러나 신학이 마땅히 문제를 지적해야만 할 내용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한꺼번에 5천명 가량의 군장병들에게 일시에 집단세례를 베푸는 문제라든지, 주일성수나 십일조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인해 부당한 교권을 휘두르는 문제, 신학사상을 초월한 강단교류 문제, 그리고 교단 인사 중 적법한 청빙절차없이 불법적 목사안수가 자행되는 문제 등에 대해서는 신학자들의 신학적 해석과 함께 마땅한 신학적 음성을 발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답변들을 회피하거나 침묵한다면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직업적 신학연구의 위험성

신학이 세상에 노출된 교회를 향하여 성경적 원리를 제공하는 일을 한다면, 교회는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실천적으로 적용하게 된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실천을 위한 최일선에 지(支)교회들이 있다면, 동일한 신학과 신앙고백을 소유한 여러 지교회들이 모여 하나의 공교회(교단)를 이루고 있다. 현실적 공교회는 회합의 특성상 실천적이지만 신학과 신앙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지속적인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신학과 신앙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상호 균형있는 위치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신학은 원리지향적이며, 교회는 실천지향적이라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원래적인 속성은 원리 지향적이지 않으며 실천 지향적이다. 인간은 경험적 존재이기 때문이며 현실적 삶을 중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천이 목표를 향해 전진적 작용을 한다면 원리는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을 천천히 가게 한다. 거기에서 실천과 원리사이의 마찰이 일어나게 된다. 신학과 공교회 사이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항상 그렇듯이 개인 뿐 아니라 집단에 있어서도 실천이 원리보다 강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약한 사람들이나 약화된 사회일수록 원리보다 실천이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원리가 약화된 상태에서 실천이 강화되면 그 사회는 예측불허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신학과 교권에 있어서도 이와 동일한 설명이 가능하다. 교권이 강하게 되고 신학이 약화되면 교권은 신학 위에 군림하게 되며 신학은 교권의 시녀가 될 수 밖에 없다.

신학이 교권의 시녀가 되면 신학자들이 직업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 연구가 아니라 신학자 자신의 학문성에 스스로 빠져 교권주의자들의 눈치를 보며 어용신학을 구가하게 된다. 그런 류의 신학은 더 이상 교회를 위한 신학이 될 수 없으며 학문 자체를 위한 신학이 되거나 교권적 집단을 위한 어용신학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신학은 결코 신학자들의 학문 중심의 신학이 되어서는 안되며 성경중심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탐구의 대상이 학자들의 선행된 연구나 학설 자체가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신학 연구방법론의 방향성이 학문적 연구동향에 맞추어지는 것을 피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연구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다른 훌륭한 학자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학이 직업적인 것으로 전환되게 되면 다른 학자들의 언어가 학문의 중심적 위치에 서게 됨으로써 그것이 도리어 말씀을 멀리하여 진리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주객전도(主客顚倒)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신학자(학문자체) 중심 연구와 성경중심 연구의 차이를 명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신학은 결코 교회를 위한 신학이라는 명제를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혁신을 위해서는 교권의 힘에 눌린 직업적 신학연구의 틀에서 벗어나 교회를 위한 참된 신학연구로 속히 돌아서야 한다.

세속주의의 위험과 신학교에 대한 현실비판

21세기 한국교회는 각 신학교들의 담이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에 놓여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좋은 현상이라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의 신학에 있어서 사상을 초월하여 교파간 담이 허물어지는 것은 신학교가 신학이 결여된 신학교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신학대학원들에 마저 이제는 세속주의, 자유주의, 신비주의 신학사상이 들어와 혼합적 양상을 띠고 있다. 이는 그동안 불건전한 신학의 진입에 대해 신학적 대처나 감시기능을 포기했거나 소홀히 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신학교(신학대학원)의 커리큘럼은 어떤가. 신학교의 커리큘럼은 성경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다양한 학자들의 주장에 관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명확하게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해진 기간 동안의 신학교육을 성실하게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말씀과 신학에 대한 체계적이며 명료한 이해를 하고 있지 못하다면 신학교육의 부실에 그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다.

또한 우리 시대 한국의 신학교들이 세속적 학위에 얽매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일선교회에서 목회를 담당하는 목사에게 세속정부가 부여하는 학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미없는 학위중심의 교육은 무의미할 뿐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해롭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위해 존재해야할 신학교가 세속의 학위를 조건으로 내걸어야만 더 나은 인정을 받는 것처럼 되어 있다면 그것은 참된 신학의 의연함을 상실한 지극히 나약한 모습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지금도 신학에 대한 학문성과 무관한 박사학위 과정을 두고 있거나 설치하려는 노력을 하는 몇 몇 신학대학원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한국의 몇몇 보수주의 신학대학원에서는 목회학 박사(D.Min)과정을 두고 있다. 만일 교육부의 인가를 취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운영하고 있다면, 관련자들은 한편으로 적법을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법을 동원하는 모순적 이중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교육부의 인가를 앞세워 소위 무인가 신학교에 대한 교회의 인가를 경시하며 비판하는 자들이 스스로 무인가 박사과정을 개설하여 교회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비싼 학비를 받으면서 여름과 겨울 불과 몇 주간씩 대중강의를 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박사학위를 수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말 신학교육이 목회자 재교육에 관심을 가진다면, 목회자간 차등화 방지를 힘쓰는 가운데 공부하고자 하는 목회자들이 재정적 압박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모든 목회자들에게 열려있는 순수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신학교의 인가, 무인가 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 시대에는 인가, 무인가 신학교라는 것이 세속정부의 인가 여부에 기준을 두고 있다. 1981년 이후 한국의 세속정부는 신학교에 목회학 석사(M.Div) 학위 과정을 허가함으로써 교회의 신학을 간섭하게 되었으며, 결국 교회의 신학교가 세속국가의 신학교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기독교적 국가가 아닌 세속주의 국가와 결탁한 것으로 그것 자체가 교회의 세속에 대한 타협이요 굴복일 수 있다.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신학교의 건전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건전한 교회(교단)의 온당한 인가여부를 따지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좋은 신학교는 교회의 요청에 충실한 학교일 것이며 세속정부가 부여하는 세속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학교이며, 세속의 지위와 권위에 대해 자유로운 학교일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일반교인들은 국가의 인가를 받은 신학교는 좋은 신학교이며 교회의 인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가장 미리 감지하고 있어야할 신학대학원 교수들이 도리어 앞장서 인가, 무인가의 기준을 교회가 아니라 세속정부에 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교회 스스로 세속정부에 굴복하여 자신을 부끄러운 자리에 까지 비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대학원 입학을 위한 특혜에 관한 면에서도 그와 동일한 안타까움이 있다. 신학교에 입학하는데 입학생의 세속적 경력이나 지위 따위는 전혀 관계없다. 그런 것들은 도리어 입학과 동시에 완전히 걷어내야만 할 내용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 지위나 요건에 따라 노회의 사전 결정이 없는 상태에서 특례입학을 허용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신교단의 고려신학대학원의 경우 박사학위 소지자, 판사나 검사, 의사 등 사회적 지위가 인정되는 자들에 대해 특례입학을 허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신학교의 세속화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세속적 경력이나 인정 정도를 교회가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현대 신학교의 심각한 폐단일 수 밖에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교회의 보증을 통해 특별한 경우 특례입학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주일학교 교사를 10년 이상 감당한 성도라든지, 신실한 장로로서 오랫동안 직분을 수행해온 성도들이라면 교회와 노회의 요청에 의해 그들을 특례입학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원리적으로 보아 그런 자들은 교회의 인정을 충분히 받고 있는 자들이므로, 마땅히 특례입학이 허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신학교들은 세속의 경력을 교회의 경력보다 더욱 중요시하는 잘못된 풍조에 빠져 있다.

신학의 사대주의에 대한 반성

한국의 신학은 전반적으로 서구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 다수의 학자들이 성경말씀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대한 관심 보다 서구의 신학 자체를 동경하고 있는 구차한 저자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나 제3세계의 교회와 신학이라 할지라도 말씀에 올바른 기초위에 선 신학이라면 마땅히 배우고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서구신학 자체가 곧 학문의 기준이 되고 있음은 한국교회가 겸허하게 반성해 보아야 할 분야이다.

신학을 위한 외국유학은 올바른 신학을 탐구함과 동시에 보편교회 가운데서 참된 교회를 배움에 있다. 참된 교회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올바른 신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동안 신학을 보존하고 지켜온 외국의 참된 교회들로부터 원리적, 실천적인 면을 배워 익혀 우리의 교회형편을 해석함으로써 참된 교회로 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스스로 많은 자랑을 해왔다. 역사상 유례없는 교회 성장을 진정으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 동안 우리의 신학 역시 정상궤도에 올랐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학자로서 교회를 위한 신학을 탐구할 만한 자질이 있는 후학들을 더 이상 외국의 현지신학을 맛보게 하지 않고도 건실한 학자로의 양성이 가능했어야 했다.

나아가 세속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구미(歐美)에 있는 건전한 교회에 속한 신학생들이 세속화를 피해 한국의 참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몰려들었어야 했다.

한국의 일반대학의 경우 외국학생들이 매우 많이 와서 학문을 연구하고 있다. 한국의 과학기술을 배우고 한국의 역사와 경제정책을 연구하기 위해 동서양의 많은 학생들이 한국에 와서 학문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한국교회의 신학을 배우고 전수받기 위해 학문을 연구하고 있는 학생은 거의 전무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의 교회 성장 비결을 배우기 위해 외국의 일부 목회자들이 관심을 보였고, 한국의 기도원을 살펴보기 위해 몰려오는 사람들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한반도에 세워진 참된 교회와 신학적 원리에 따른 측면이 아니라 외형에 치장된 형식에 대한 것들이었다. 한국에 얼마나 큰 대형교회들이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진 그 사람들이 정작 한국의 신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외국의 교회들 역시 건전한 신앙적 상식을 기반으로 한 성도들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 성공을 꿈꾸는 세속주의적 교인들이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서구의 신학이 허물어져 가고 있을 때 한국신학의 굳건함이 알려졌더라면 외국의 신실한 형제들이 한국교회와 한국의 건전한 신학을 배우려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한국어를 능통하게 하지 못한다 해도 다른 언어들을 통해 한국의 신학자들로부터 신학수업을 하고자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는 거의 전무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 신학교에 종종 외국 출신 신학생들이 있기는 하나 그들은 선교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지원 방편으로서 여기서 말하는 바와는 그 목적이나 이유가 다르다.

우리는 이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한다. 우리가 굳이 자랑하지 않아도 올바른 신학의 보존으로 인해 한국교회를 부러워하는 외국의 신실한 형제들이 많이 있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서구신학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무비판적 사대사상은 매우 위험하다. 사대사상 자체가, 강해 보이는 한편에 대해서는 비굴한 자세를 취하게 되고 연약해 보이는 다른 한 편에 대해서는 교만한 자세를 취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서구신학에 의존하는 사대주의 사상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란다. 이는 한국 신학의 토착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서구의 문헌을 버리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외국의 경험신학이 아니어도 성경말씀을 통한 올바른 신학이 충분히 가능해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서구에서 공부한 것 자체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올바르게 깨닫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할 따름이다.

교회의 위기는 항상 신학의 부재에 기인한다. 참된 신학은, 위기가 닥치기 전부터 끊임없이 교회를 엿보는 세상적 요소와 투쟁하게 된다. 그러나 신학이 그 고귀한 투쟁을 포기하거나 등한시하게 되면 교회는 급속히 타락하는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한국교회의 현재의 위기 역시 그 근저에는 신학(교)의 역할 및 기능 부재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교회의 현상적인 모든 잘못된 것들과 목회자들의 복음을 떠난 행위들은 신학적 해석이 없었거나 신학자들의 진지한 신학함의 삶과 행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한국교회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문제의 본질적인 측면부터 해결해 들어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한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음성을 높이고 있다. 외형적 병폐를 즉시 도려내야 한다는 이들도 있고, 점진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좀더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자들도 있다. 급진적 개혁에는 쪽박을 깨트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어떤 경우에는 한국교회의 회복을 위해서는 교회의 윤리성을 빨리 회복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으며, 또 다른 경우에는 교회다운 실천을 통해 부패한 한국교회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류의 이야기들은 원리적 치료책이 되지 못한다.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말씀의 신학이 살아나야 한다. 그렇지 않은 현실적 접근은 한국교회의 병폐를 더욱 고질화시키게 될 것이며 일시적인 외침 뒤에는 더 무서운 타락이 뒤따를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부정적인 세속화 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위 긍정적 세속화가 훨씬 무섭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잘못에 대해서는 상식적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신학적 명확한 해석이 있지 않은 한 시시비비가 가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은 이미 ‘혼합신학’이 되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상이한 신학을 따지거나 묻지 말고 우선 마음을 모아 연합부터 이루고 보자는 음성이 매우 설득력을 얻고 있는 시대이다. 참된 신학을 도외시한 인위적 연합은 교회의 교회됨을 상실하게 하는데 크게 일조할 것이다. 자유주의, 세속주의, 신비주의 신학 등의 위험성을 견제하지 않는 신학은 이미 참된 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견실한 신학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는 온갖 악한 신학사상들을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말로는 칼빈주의, 보수주의, 개혁주의를 일컫지만 실상은 칼빈주의자들이 이단으로 간주했던 알미니안주의자들보다 훨씬 더 칼빈주의로 부터 멀어진 우리의 모습을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개혁자 칼빈의 눈으로 본다면 현재의 한국교회는 ‘이단’이다. 두렵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칼빈주의를 주장하는 어처구니 없는 신학적 모순에 빠져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교회의 신학과 신학교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며, 이를 위한 성령의 긍휼하심과 도우심을 바랄 따름이다.

※ 위 글은 지난 17일 밤 대전에서 열린 <해서(海西)신학연구원 정기포럼>에서 발제한 강의안 전문입니다.

이광호 박사(조에성경신학연구원)

출처 : Chitho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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