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강) 시편 37:1-9 길이 다르다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미국의 오스틴이라는 목사가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나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은 신자가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하나님의 목적에 따르는 삶을 살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런 얘기를 귀담아 듣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에 부합된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인가 아닌가? 진리에 부합되는 말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내 마음에 드는 말이라는 것 때문에 복음의 말로 간주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부패되어 있고 자신을 위한 욕망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자기 욕망에 부합되는 말에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간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여러분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보상을 받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면서 거부감을 드러냅니다. 대신 믿음으로 살고 ‘하면 된다’는 믿음이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식의 말을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면서 솔깃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겪고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겪고 있는 현실은 신앙이 좋은 신자라고 해도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평생을 예수를 믿으면서 십일조를 했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새벽예배를 나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현실입니다. 또한 반대로 생각해 보면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 또한 현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눈에 목격되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복 받고 잘산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거짓말을 좋아하고 기대를 걸면서 하나님께 나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의 보상이 현재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보다는 듣기에 기분 나쁜 말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복음인가 아닌가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복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듣기에 좋은 말이라고 해도 그 길에서는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가 어떤 현실에 처하든 그것으로 자기 신앙을 판단하는 어리석음에서는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즉 일이 잘된다고 해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십일조를 철저하게 했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반대로 일이 잘 안된다고 해서 혹시 자기 신앙에 문제가 있어서 벌을 주시는 것은 아닌가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도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합니다. 행악자, 불의한 자들이 현실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로 인해서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불평을 했던 것처럼, 현실을 바라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납니다. 신에 대한 세상의 상식은 ‘상선벌악’의 신입니다. 선에 대해서는 상을 베풀고 악에 대해서는 벌을 주는 것이 신다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존재한다면 세상은 착한 사람들은 모두 아무 탈 없이 잘 살아야 하고, 죄를 범하는 악한 사람들은 모두가 있던 것도 다 잃어버린 채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되고 또한 그것이 정의로운 사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세상은 생각하는 것처럼 흘러가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당시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핍박하는데도 하늘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그때의 현실이었고, 지금의 현실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로 인해서 세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도 잘만 사는데 착한 사람들이 변을 당하고 고통을 겪는 현실을 보면서 도무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박국과 같은 불평이 우리에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불평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음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에 대한 보상이 현재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행악자에 대한 보상 역시 현재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2절에 보면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고 말합니다. 행악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상관없이 그들의 운명은 풀과 같이 베어지고 푸른 채소같이 쇠잔하는 것입니다. 즉 푸르름이 영원토록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베어지고 쇠잔하는 운명으로 끝나는 것이 행악자들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그냥 내어버려두십니다. 내어버려두시는 이것이야 말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이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고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자정능력이 있어서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자신을 고치며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어버려두셨다는 것은 베임을 당하고 쇠잔하는 운명으로 끝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악자들에게 희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행악자는 이러한 희망을 보지도 생각지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세상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모든 희망을 두고 살다가 결국 베임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행악자들이 누리는 것이 부럽다면 신자로서 신자다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귀하다고 하면서도,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배설물에 불과한 것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있는 행악자가 부럽다는 것은 입으로는 은혜를 귀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비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인도하시는 길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은 하나님만 믿으면 자동적으로 가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때문에 항상 관심은 세상에서의 복으로 향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하나님만 믿으면 자동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세상에 마음이 기울어져 살아가는 우리들을 다스리시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수고로 인해 들어가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3-6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성실을 식물로 삼아라는 것은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이 우리를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약속을 이루시는 여호와의 성실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방해하는 대적과 싸워 승리하심으로써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죄에 붙들려 있던 우리를 기어코 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신 여호와의 성실하심을 생각한다면 신자는 여호와의 성실을 식물로 삼아 배부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기뻐하며 여호와께 모든 소원을 두고 살아갈 것이고, 여호와는 신자의 소원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실하심이 저와 여러분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갈까요? 부자입니까? 권력자입니까? 그 어떤 것도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나의 갈 길로 믿고 그 길로 가게 해달라고 소원하는 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일이고, 이러한 여호와의 일로 기뻐한다면 그 소원이 세상의 것을 얻고 취하는 것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가는 것에 두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소원을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우리의 힘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길을 마음에 두기를 원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 소원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십니까? 7-9절을 읽어보십시오. 행악자의 길과 신자의 길은 분명 다릅니다. 행악자는 끊어지는 길을 가지만 신자는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인도받는 그 길이 아예 다릅니다. 행악자는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심 가운데 자기 욕망을 따라 자기를 위한 길을 가다가 결국 베어지는 운명에 처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간섭하고 다스리시면서 영원히 사는 길로 인도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의 차이를 잊지 않고, 길의 다름을 안다면 행악자들이 현재에 누리는 것들로 인해 불평하고 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길이 다르다는 것, 이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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