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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7강) 시편 36:1-12 의인과 악인의 차이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9

 

 

 

 

 

 

 

 

 

 

(37강) 시편 36:1-12  의인과 악인의 차이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시편 36:1-12)


 

<설교>


사람들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 보이는 것으로 주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교회 또한 믿음에 대한 보상이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것으로도 주어진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기도 합니다. 즉 믿음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보장받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보상이 현세적인 것으로 주어진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보면 믿음의 여부에 따라서 잘살고 못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고 더군다나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보다 부요하게 사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현세적인 보상이 있는 믿음을 말하지만, 세상의 현실은 그러한 사실을 이미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보상이 현세적인 것으로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죄에 대한 심판 역시 현세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에 의해서 잘살고 못사는 것이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죄에 따라서 잘살고 못사는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믿음이 있는 자가 고통을 겪으면서 힘들게 살아갈 수 있고, 반면에 믿음이 없고 악한 자가 평안과 부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보상이나 죄에 대한 심판이 현세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일어나는 한가지 현상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해 욕을 해도 자신의 신상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도 물론 부정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성경은 악인이라고 일컫습니다. 1,2절을 보면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이라는 구절은 개역개정판에는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악인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는데 그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심판하신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를 심판해야 하는데 그러한 심판이 없이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사는 것에서 차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살아계심 자체를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릅니다. 신자는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자는 무엇으로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두려움이 있게 되는 것입니까? 신자라고 해서 죄를 지으면 불신자와는 달리 그에 따른 징계를 현세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현세적인 문제로 징계하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한 살아오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고통을 받는 일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을 모두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범할 때마다 그러한 방식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인간이 죄를 범할 때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심판하신다면 세상의 어떤 인간도 지금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참으시는 은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생각하지 못한 채 ‘하나님은 없다’면서 자긍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현세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성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만약 현세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존재성을 확인하고,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확인된 사실에 대한 우리의 선택과 의지만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평생을 어려움이 없이 평안과 부요를 누리며 살았다고 해도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죄에 대해 두려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임한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독생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의 심판을 예수님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아는 신자는 죄를 범해도 현세적으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죄에 대해 담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재앙을 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독생자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죄에 대해 철저하시는 하나님을 십자가에서 보기 때문에 죄에 머물러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아무리 편안한 삶을 누린다고 해도 그것을 복이라고 떠들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삶을 누릴 수 없는 악한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때로 어려움이 있다면 불평과 원망보다는 ‘나 같은 자에게는 이만한 일도 은혜일뿐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과 함께 반발이 있을 수도 있지만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 없음이 문제인 것이지 제가 잘못 말했거나 성경을 과장해서 말한 것은 아닙니다.

 

 

 


5-7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주의 인자, 주의 진실, 주의 의, 주의 심판을 말합니다.

 

 

 

 

사람이 과연 무엇에서 주의 인자, 주의 진실, 주의 의, 주의 심판을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현세적인 삶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펼쳐지는 현세의 상황이 ‘선과 악, 의인과 악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라는 기준에 의해서 펼쳐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어디를 봐도 주의 인자, 주의 진실, 주의 의, 주의 심판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보게 되면 그 모든 것을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죄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야 말로 죽어야 할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참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의로우심과 심판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악함을 선명하게 목도하면서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남과 동시에 그 모든 죄의 값을 예수님께 물으시고 대신 우리를 살리신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을 진정한 피난처로 삼게 하는 것입니다.

 

 

 


10-12절에서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주의 인자는 주를 아는 자에게만 베풀어지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주를 알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자를 베풀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반면에 악에 거하는 자는 넘어져 엎드려지고 일어나지 못하는 운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악인과 의인을 철저히 구별하여 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주의 인자를 계속 베푸시면서 악에서 건져내어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악인에 대해서는 내어 버려두심의 방식으로 이미 심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세적인 것으로 세상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를 풍족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8,9절에서도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신자에게 생명의 원천은 주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로 말미암아 풍족한 존재이고 생수이신 주로 말미암아 복락의 강수를 마시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누리는 참된 하늘의 복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믿음에 대한 복상은 주 안에서 이미 받고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런 복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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