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로마서강해

[스크랩] (33강) 시편 32:1-11 복을 아는 자의 기쁨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53

 

 

 

 

 

 

 

 

 

(33강) 시편 32:1-11  복을 아는 자의 기쁨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시편 32:1-11)
 

 


<설교>


구원에 있어서 신비로운 것은 죄인이 죄인으로 대접받은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대접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에 대해서는 사망으로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땅한 대접이었으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사망이 아니라 생명으로 대접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의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인 우리가 생명에 거하게 된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죄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어떤 노력과 열심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즉 선을 행하여 죄를 덮음으로써 죄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설사 선한 행위를 할 수가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모든 죄를 덮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을 행한다고 해도, 선을 행하는 동안 죄를 전혀 범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선이라고 여기는 것도, 죄 안에서 활동하는 도덕성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내어 놓는 그 어떤 선으로도 죄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죄의 해결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외부에서 이루어진 은총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1,2절에서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우셨습니다. 그로 인해 죄 없는 자로 간주되고 따라서 의인으로 여김 받으면서 정죄를 당치 않은 복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우리들의 선함과 열심, 그리고 행함과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이러한 구원에 대해 못마땅해 합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인간의 행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주장하는 것이 구원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도 천국에서의 상급은 행함에 따라 다르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기준과 천국에서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함에 따라 상을 각각 다르게 준비하셨다면 그것은 인간에게도 상 받을 만한 선한 행위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인간에게 선한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인간이 상을 받을 만큼의 선을 행할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하신다는 것은 말 그대로 인간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신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허물의 사함을 얻고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었으니 허물이 없는 자가 된 것이고, 모든 죄의 가리움을 받았으니 죄 역시 없는 자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없는 의인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이라는 것은 ‘무엇을 행했느냐?’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며 신분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내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으로 여김 받으며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었음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까지도 우리의 소관도 의지도 아닌 것입니다. 오직 무한한 은총이라고 외칠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돌출 될 수 없는 것은 행함에 대한 자랑입니다. 믿음에는 ‘내가 잘했다’ 는 것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한 것이 있으되 자랑하지 않고 숨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덕이고 미덕일 뿐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에는 아예 내가 잘한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믿음의 열매가 보인다고 해도 ‘나의 나됨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감사의 고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죄를 용서 받은 감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3-5절에서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고 말하는 것처럼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회개가 있게 됩니다.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려주신 은혜는 무엇보다도 죄에 대해 애통해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생각하지 않고 애통하지도 않으면서 십자가를 말하며 죄의 용서로 감사한다는 것은 단지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진심이 결여되어 있는 형식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는 것은 회개하니까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용서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다는 것이 어떤 복인가를 아십니까? 6,7절을 보면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찌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찌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는 신자는 주를 만날 수 있고 주께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교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홍수가 범람해도 그 화가 미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는 나의 은신처’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사하시고 모든 죄를 가리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가 신자에게는 은신처가 되고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고 말하는 것처럼 신자가 갈 길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높이고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이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의지하기 보다는 내게 힘이 될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것을 쫒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을 볼 때 그 무엇도 구원의 힘이 될 수 없음을 자각하면서 죄있는 자를 죄 없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11절의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는 구절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가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지금 형편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사는 일이 힘든데 여호와로 기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신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영혼에 주어진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알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잠시 잠깐 동안의 편안함보다는 영혼의 영원함에 주어진 복과 은혜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베푸신 일만으로 얼마든지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의인으로 불리게 되었는가를 생각한다면 나의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죄를 가리신 하나님의 은혜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면 인간은 자기의 것을 고집할 뿐입니다. 자기의 행함과 의를 포기하지 않는 고집으로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말하는 말이나 노새처럼 고집부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고집으로 살아가는 말과 노새 같은 우리를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시면서 하나님의 용서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신을 부인하게 하시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고 찬송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음으로 의인으로 불리는 것이 죄로 가득한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복인가를 생각하시고 그 복으로 감사하시고 기뻐하십시오. 그 감사와 기쁨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주를 바라보게 할 것이고 낙심하지 할 것이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

'신앙테크 > 로마서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로마서 강해 바로가기 모음  (0) 2010.11.06
로마서공부  (0) 2010.03.28
[스크랩] 로마서 강해 7  (0) 2009.05.29
[스크랩] 로마서 강해 6  (0) 2009.05.29
[스크랩] 로마서 강해 5  (0) 2009.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