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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강해 5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5

 

 

 

 

 

 

 

 

 

 

로마서 강해 5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로마서 41강(롬6:11절)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2)
로마서 42강(롬6:12-14절) 다시 산 몸
로마서 43강(롬6:12-14절) 죄로 죽을 몸
로마서 44강(롬6:12-14절) 의의 무기인 몸
로마서 45강(롬6:15-16절) 순종의 종
로마서 46강(롬6장17-18절) 의의 종
로마서 47강(롬6:19절) 거룩한 몸
로마서 48강(롬6:20-21절) 돌아갈 수 없는 삶
로마서 49강(롬6:22) 신자의 거룩함

 

 

 

 

 

 

 

 

 

 

로마서 41강(롬6:11절) 하나님에 대하여 산자(2)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이제 우리는 죄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아직도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우리는 죄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영광과 거룩의 자리로 나갈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로서 신자가 기억해야 할 두 국면을 소개하여 신자된 기쁨과 신앙생활에서의 도움이 돈독해지기를 권합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 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였습니다. 물론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하여 살기 위해서 또 구원의 차원에서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죄 아래 있을 때 죄가 우리를 요구하고 우리에게 죄를 공급했던 것같이 이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공급하시며 영광의 자리에 이르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5-7).

 

 

 

여기 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될 현실입니다. 포도나무에 어떻게  포도가 열리는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가지 끝에 포도가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러나 가지가 열매를 달고 있을지언정 와서 결실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붙어 있는가를 아셔야 됩니다. 그러나 지금 포도나무 된 우리는 주님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을 결실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부터 발생하지 않는 거룩한 것과 영광 된 것을 결실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성도들 마음속에 있던 불경한 것들, 더러운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처음 평안을 맛보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를 믿는 동안 내내 어쩌면 이러한 고달픔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 경건해지고 더욱 영광스럽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만하면 됐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주님과 우리의 연합은 좀더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2-23). 성경에서 쓰는 교회라는 표현의 의미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전체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곧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23절을 잘 봅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누구입니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은 무엇입니까?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충만이니까 이 충만은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23절의 주어가 무엇입니까? 교회입니다. 바로 교회가 그 충만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없으면 충만하지 못하시다는 것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 한 충만하시지 않기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십니까? 상당히 빈약한 비유로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천국 보좌 우편에 계시지만 머리만 가 계시다는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가 천국 자리에 함께 앉기까지 그는 충만치 않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엡 1:17-20).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복 주심의 능력과 의지 가운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할지라”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복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라”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심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열심과 모든 능력을 가지심을 나타내는 말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된 우리를 향한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의 인생을 살면서 혼자 책임지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죄를 애써 거부하고 애써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옳은 것이므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여기서 실패라는 것이 삶의 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길은 자신의 손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의미로 인해 성도가 방자히 살라는 의도는 아닙니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슬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 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같이 살라지리니”  (사 (:1-5).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언하고 약속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스라엘에 구원이 약속됩니까? 이렇게 되는 이유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 9:6-7上)를 근거로 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로 하십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下).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분이 이렇게 하시기로 결심하셨고 그렇게 하시기로 작정하셔서 우리편을 들며 우리를 위하시며 우리를 복되게 하시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를 영광의 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정성을 기울이기로 하신 존재, 이것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된 우리의 위치입니다.

 

 

 

우리의 얻은바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 두 국면에서 분명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를 우리 죄를 위하여 죽이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시키고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고 그가 부활했을 때 하나님을 대하여 살았고 그의 승천과 함께 우리는 하늘 보좌 우편에 함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직 안 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가 실제로 천국에 가지 않은 것만 빼놓고 나머지는 다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를 천국보좌에 앉히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와 연합시키셨습니다.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은 이미 우리에게 다 일어났고 우리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확인해야 될 것은 언제나 다시 예수 그리스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서 있는 현실을 확인하는 명백하고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장차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분명하게 확인하는 증거입니다. 여태껏 일어난 것이 성취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결국 우리에게 약속한 천국에 앉히고야 말일을, 그분의 열심과 성의와 능력을 다 동원하여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결국 구원의 확증은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고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편인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32). 아들을 아끼지 아니했는데 무엇을 아끼시고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된 신자의 현주소입니다.

 

 

 

이 두 국면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된 우리의 신분과 위치와 삶과 우리의 자랑들을 확인합시다. 그러나 실제로 신자들은 이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대하여 살고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삶의 영역이 바뀌어진 것과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하여 산 영역에서 죽은 저 세상의 것들을 탐합니다. 그것은 마치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종 되었던 에굽땅은 벗어났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을 거부하고 광야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광야에서 살 때 그 생활이 애굽의 종살이와 비교해서 결코 낫지 않습니다. 실제로 광야생활을 성경에서 읽어보면 내내 이런 불평이 있습니다. “애굽에 살 때는... 참외도 먹고, 부추도 먹고, 무엇도 먹고, 무엇도 먹었는데 여기는 아침에도 만나, 저녁에도 만나 이것밖에 없다” 는 불평입니다. 무엇과 무엇을 비교하면서 불평을 합니까? 종 되었던 애굽과 자유인이 된 광야생활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종 되었던 땅을 벗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것입니다. 거기는 애굽땅보다 무엇이나 더 풍성하고 자유로운 내 땅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있으면 종은 아니지만 부유한 게 없습니다. 예수를 믿은 가치가 무엇인지를 지금은 뚜렷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말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라는 의미 속에서 보다 폭 넓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태를 우리의 가시적 현실과만 비교하는 신앙태도를 각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0-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이것도 할 수 있다, 저것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지금 사도 바울은 옥중에 갇혀 있고 빌립보 교회에서 위문단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고통 속에 갇혀 있는 상태였습니다. 고달픈 것입니다. 바울이 물질로 좌우되지 않을 수 있음은 능력 주시는 자가 따로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내게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의 배부름, 세상의 풍부가 내힘이 아닙니다. 즉 궁핍하게 만드는 것과 배고프게 만드는 것이 나를 방해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기 때문에 만약 자신이 쇠약해 진다면 그것은 주님이 문을 닫을 때일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신자들의 약점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의 영역에 살고 있으나 실상 모든 소원은 아직도 저쪽 세상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원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주님, 다른 것은 다 좋습니다. 이 딸자식 하나 시집 좋은데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막내 학교에 붙여 주십시오.” 모든 소원이 옛날 우리가 손을 끊었던 세속 영역에 가 있습니다. 물론 시집 잘 가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학교 붙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소원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이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필요한 힘이 주님께 있지 않고 세상에 있다면 소원과 자랑도 주님 안에 있지 않고 세상 안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될 때 신자들은 영적이지 않은 일에 아우성치며 기도할 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주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신자들을 만나보면 보통 목마른 것이 아니고 보통 굶주려 있지 않습니다. 아사 직전입니다. 그런데도 반드시 먹으라는 것은 다 싫다고 거절합니다. 뭘 달라는 것입니까 먹어서는 안되는 것을 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제목들이 뭔가 써보십시오. 모두 저쪽 나라 세상의 것들입니다. 신령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하여 그토록 속을 앓고 있지만, 그것은 공부 못한다고 속상한 것일 뿐 결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는 부모는 없다는 사실이 심각합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목마름이 없으며 우리는 영원히 주리지 않습니다. 주께 오는 자는 다 그렇습니다. 주께 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쫒지 아니하리라”(요 6:36-37).

 

 

 

우리는 주를 인하여 사는 자입니다. 빌립보서 4:13과 같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입니다. 주님만이 내게 힘이시므로 거룩한 것과 영원한 것과 하나님께 속한 것 이외에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도둑질하는 힘을 주시지 않고, 포카 할 때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쓸모없는 일들을 소원할 뿐, 주로 인하여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요구하는 것은 저 나라에 있는 것, 끊어버린 것, 다시는 돌아가서는 안되는 그 영역의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리고 목마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이 약속은 결코 주리지 않고 결코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적용되고 있습니까? 바울을 예로 듭시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고 감옥밖에 자유인들이 도우러 왔을 때 누가 더 부유하게 가진 자 입니까? 그것은 그가 칭찬하는 내용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를 찾아와서 고맙다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와서 잘했다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너희가 주의 사랑에 동참했으므로 내가 칭찬하노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이 고통까지 감수하고 있으니 바울은 강한 자였습니다. 여러분은 바울처럼 되기를 원하십니까? 바울을 찾아온 빌리보 교인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면회할 때 입회한 로마병이 되시겠습니까?

 

 

 

요한복음 4장의 수가 동네에 이르러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있은 이후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27-34). 이것이 주님의 양식이라고 합니다.

 

 

 

결코 주리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가장 큰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우리인생 속에는 한 순간도 헛된 시간, 빈 시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시간만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순종하고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순간마다 이런 일이 연속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주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우리 영혼의 만족한 포만감을 누리는, 승리와 감사와 찬송을 영원토록 빼앗기지 않으며 어느 한순간도 쉬지 않는 일생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요즘 젊은 부모들이 아이들 키우는 모습에 불만이 있습니다. 예전 우리 부모님들은 그렇게 안 키웠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의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요즘 젊은 부모님들은 옛날 부모님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희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부모님들은 즐겨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먹을 것 지 않고, 입을 것 입지 않고 너 공부시켰다”라고 회상하십니다. 요즘 부모들은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입고 싶은 것 다 입고도 돈이 남아서 얼마든지 자녀 교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 부모님들 보다 지금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은 부모님이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부모님들도 자녀들을 위하여 똑같은 사랑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본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이 잘 되는 일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맛있는 것은 자녀에게 주었지 부모님이 먹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맛있는 것은 자녀를 먹이나 더 맛있는 것을 먹을 돈이 부모에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불행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금자녀들은 부모님들이 그들을 위하여 돈 쓰는 것은 보지만, 무엇을 절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반성하십시오.

 

 

 

우리가 자라면서 본 부모님들의 모습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권위였습니다. 실제로 희생을 했고 실제로 우리편이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굶으셔도 자녀들은 배부르게 하고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은 다 참아도 자녀들이 갖고 싶다는 것은 다 해주었습니다. 희생을 하시면서 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부모님들에게 희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부모님들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던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유일하게 사는 낙이며 삶의 보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자의 삶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신자가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죄아래 있었을 때 자신만을 위하여 살고, 자기를 자랑코자 이웃과 늘 전쟁상태에 있었던 참담한 기억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증명하기 위하여 살거나 왕이 되기 위하여 살 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평안을 찾고 거기서 복된 것을 얻었습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주님이 영광 받으셔야 되고 주님이 전면에 나타나셔야 됩니다. 그것은 억지로 요구되는 책임이 아니라 그것이 자랑이요, 기쁨이요, 복입니다. 신자로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실제로 필요한 것은 모르고 쓸데없는 데에 가서 시간을 허비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답게 영광과 특권과 승리와 자랑을 놓치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누리십시오. 성경인 약속한 것 같이 결코 목마르지 않고 결코 주리지 않는 이 영원한 삶의 승리와 자랑들을 누리십시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열매맺는 일에 방해할 것이 이 세상에 없음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그 많은 아름다운 찬송과 그 놀라운 기록들이 여러분의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싫든지 좋든지 신자들이 살아갈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을 거부하면 손해를 볼뿐입니다. 그 길의 참 가치를 빨리 알 수 있도록 여러분은 기도하셔야 되고 더 깊은 신앙의 길로 가셔야 되고 영안이 열리도록 지혜로워져야 됩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되 행복을 위하여 이 길을 따르셔야 됩니다. 지혜로운 신자로서 앞에 놓인 이 복된 길을 아무도 실패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신자되었으며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복된 길을 누리며 그 자랑을 경험하기 위해서라도 순종하는 신자들이 되게 하시고 지혜로운 자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힘을 입게 하시고 허락된 것을 누리게 하시되 우리가 나오고 있고 끊어버린 저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말게 하시옵소서. 우리 힘이 주안에만 있음을 알게 하시고 우리의 갈 길이 하나님의 존전임을 알게 하사 우리로 주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성경에 약속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열매 맺혀져 우리 입술에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고백들과 감사와 찬송이 동일하게 열매 맺혀지는 복된 신자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심령들을 지키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42강(롬6:12-14절) 다시 산 몸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12-14)

 

 

 

예수를 믿는 신자들 중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과 구원 얻은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는 이 성화의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삼으시는 이 구원에 있어서 칭의란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고 받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일은 전적으로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 문제를 물어보면 칭의가 되는 이 구원의 첫단계는 자기가 결심을 하고 자기가 노력한 결과로 생각하여 성화를 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져야 하는 부분은 자신이 기도한 후 선물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본문의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본문을 보시면 성화가 하나의 권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우리가 할 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의 핵심을 세 가지로 분류해서 설명코자 합니다. 첫째, 성화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선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성화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어떤 체험이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쌓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께 맡겨서 주께서 성화되도록 해주시기를 빌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성화에 관한 내용으로서 바르게 기억해야 할 원리입니다. 그렇지 않고 성화를 우리의 책임으로 고정시킨다면, 이런 의문점이 생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예전에 죄 아래 있었지만 지금은 은혜 아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실패할 수 없고 자녀 됨은 취소되지 않고 포기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이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져 준다는 보장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다스리시사 우리의 잘잘못에 관계없이 예정하시고 이루시겠다는 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가만히 있으면서 구경꾼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성공해야 하나님이 성공하고 우리가 실패한다고 해서 하나님도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해답을 성경의 한 구절에서 찾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명령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에서 신자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이 성화의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성화에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하도록 우리를 권면하시며 우리를 분발시키시며 필요하다면 매를 드신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성화에 성공하기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놓아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왕 노릇하는 방법입니다.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만있어도 된다는 것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것을 어떻게 오해하느냐 하면, 기도해서 주님께 맡긴다는 식으로 성화를 생각한다는 것으로가 아니라 주님께 나를 맡겨버리는 것으로 오해하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 이런 오해가 생겼는가 하는 추적이 필요합니다. 왜 신자의 성화를 주님께 맡기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까? 이 부분에 대하여 가장 크게 오해를 야기시킨 사람이 워치만 니(Watchman Nee)입니다. 그에 의하면 깊은 신앙으로 가는 길을 내가 없어지고 자꾸 주님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그 주님을 강조하는 부분이야말로 워치만 니식으로 의도한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제가 그의 책을 보아서는 그는 우리가 우리의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듯합니다만 어쨌든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그런 오해의 소지, 즉 우리를 주님께 맡기고 내가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신앙의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은사에 대해서 신자들은 대단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은사에 대하여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느냐면 성령의 어떤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고급 신자라고 인식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은사는 연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이 고급 신앙이 되었다고 오해하는 맥락 속에서 고급 신앙으로 가는 것, 성화가 더 깊어지는 것을 하나님께 요구하여 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한다든가 그 사람을 더 높게 취급한다든가 그 사람의 신앙이 더 좋다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고린도전서 12:4-7에서 제일 중요시해야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역사는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 은사에 성령님이 한 분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는 것, 성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을 왜 강조해야 됩니까? 그 이유는 이런 내용들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한다고 할 때 그 방언을 주신 그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에게 방언을 주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대접하는 것이나 동일한 그 하나님은 그의 은혜와 능력과 열심으로 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방언을 준 것이 더 신앙이 강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은사를 주십니까? 은사로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주심은 신자를 유익하게 하려고 하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 어떻게 실제적인가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은사를 받아야만 확인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확인해야 된다는 면에서는 은사가 나타난 사람의 신앙이 조금 나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닙니다. 도마가 뭐라 그랬습니까? 그 손에 상처에, 그 옆구리의 상처에 자시의 손을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타나셔서 “만져 봐라, 만져 보고 확인하고 믿는 자가 되라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나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잊지 않아야 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은사 문제에서 그 은사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선물 받는 것이라는 원리 때문에 그리고 은사를 가진 것이 마침 더 성화되어 있고 더 고급 신자가 되어 있다는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화를 기도하면 빌어서 받는 것으로 자꾸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오해의 근거로 보입니다.

 

 

 

두 번째 오해의 근거는 우리의 기도의 요소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와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다 내려오신 사건과 그 동안에 산 밑에서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주기를 부탁했다가 실패하고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 준 사건이 기록됩니다.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8-29). 이것이 또 기도를 오해시키면서 성화도 오해시킨 것입니다.

 

 

 

기되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려면 기도를 해야 된다는 등식을 만들어 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여기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정확히 기도라는 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기도는 일종의 원리이고 자세입니다. 어떤 원리요, 자세냐 하면 신령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 신령한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나가면 안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행위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려면 영어책을 봅니다. 수학공부를 하려면 수학책을 봐야 됩니다. 책을 사려면 약방에 가지 않고 책방에 가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냥 책방에만 가면 영어나 수학이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가 근거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신령한 것과 영원한 것과 진리와 생명의 근거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이지 그 일을 일으켜내는 방법과 수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기도 이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한 것은 이런 일은 하나님으로부터만 가능하며, 하나님께서만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서 우리가 확인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성화되고 거룩해지면 하나님께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화를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거룩해지고 하나님을 닮아가려면 하나님을 뵈어야 되고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수학공부를 할 때 책을 펴가지고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실력이 늘 수 없습니다. 그나마 수학책을 바라보고 있으면 소설책을 읽는 것보다는 희망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를 하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거기서 듣고 알게 된 것을 실천해야 됩니다. 주문과 부적은 누구로부터 시작되는지 어떻게 되는지 알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는 수단과 방법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적을 보면 이게 도대체 지렁이가 기어간 그림인데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전하다고 사람들은 믿습니다. 기도를 그것들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를 그렇게 생각한 것같이 우리는 성화를 무언가 가서 매어달라고 나 아닌 어떤 힘에게, 성령님에게, 혹은 주님께, 아니면 신앙적인 어떤 것에 나를 내던져버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성화에 관하여, 신앙생활에 관하여 신자들이 노력하고 훈련하고 연습해야 됩니다.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하나씩 깨우쳐 나가며 습관으로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어떻게 쉬게 합니까? 짐을 대신 지어 준다든가 짐을 없게 해 준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짐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이 대신 해 주는 예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성경이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훈련하고 익숙하기까지 연습해야 됩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게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19-22).

 

 

 

바울은 루스다라에 갔다가 거기서 앉은뱅이를 고쳐 준 죄로 돌에 맞아 죽습니다. 나중에 그가 살아나서 더베로 가서 전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돌 맞았던 루스드라에 다시 갑니다. 거기 있었던 성도들은 대단히 많은 혼돈 속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천지를 마드시고 모든 능력의 근거이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그의 종을 돌 맞게 하셨을까? 이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은 필수과목이라고 합니다. 당연히 환난을 당해야 한다고 밝힙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5장에서 이 환난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주님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정체를 밝혀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속 깊이 숨어 있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허영심과 욕심을 밝혀 주고 그것을 끄집어내도록 도와줍니다. 신자가 환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은 이 성화를 우리 자신이 해야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그냥 선물로 주지 않는 그 증거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그런 연유로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근거로 인하여 다음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성화를 추구하는 이유와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냐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디로 가야 될 생명인가를  묻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신자다워야 하며 주 앞에 가야 한다. 그래서 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 된다’ 이렇게 성화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을 근거로 제시한 바와 같이 성화의 기준은 여러분의 행복과 기쁨을 위한 신앙으로 갖고 있지 않으며, 성화를 여러분의 혈통과 자랑을 위하여 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우리가 실제로 어떤 계획 속에 들어가 있는가를 깨우치는 것이 여러분이 성화되어야 할 이유이며 근거이고 책임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가 누구인가를 제시해 놓고 그 근거 위에 ‘이렇게 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지 않고 ‘이렇게 살라’고 되어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1-24). 하나님의 새사람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으로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엡 4:25-29).

 

 

 

따라서 무엇과 무엇을 관련짓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새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런 것들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물로 받지 않습니다. 기도해서 얻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가를 압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실제 생활에 적용해야 됩니다. 그리고 연습해야 됩니다.

 

 

 

신자들의 가장 큰 오해는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가? 기도원에 얼마나 많이 갔는가? 성경을 얼마나 많이 봤는가가 자랑의 초점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한 것, 여러분이 성경 본 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거짓을 버리게 하고 분을 내지 않게 하고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하고 더러운 말을 입밖에 내지 않게 하며 악덕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버리도록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는 연습하셔야 됩니다. 교회 안에 서로 좋은 사람끼리 모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 안에는 여러분을 가장 많이 시험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왜 예수를 믿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는 법입니다. 그래도 그 사람을 보고 참아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성화되지는 않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을 처음에 그 사람을 보면 도망가는 게 최고입니다. 부딪쳐서 화가 치밀 것 같을 때 도망을 가시고 도망갈 수 없도록 맞대면하면 그의 발끝만 쳐다보십시오. 얼굴을 보고 인내할 수 없다면 가능한 한 같은 자리를 피하는 것이 연습입니다.

 

 

 

처음부터 마음속에 사이다가 튀듯이 사랑과 희열과 기쁨이 쏟아져 나와서 아무나 보고 껴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화를 기도해서 얻어내는 결론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이 울어야 되고 많이 절망해야 됩니다. 성화를 실제로 경험하여 보십시오.

 

 

 

예전에 안현필 씨라는 영어를 잘 가르쳤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쓴 영어 자습서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오력일체] 어떻게 보면 신학적 용어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배운 것은 이것입니다. 어학에 지름길이 없으므로 매일 연습하는 수밖에 없고 눈으로만 보지 말고 입으로 읊어야 되고 자기가 읊은 것을 귀로 들어야 되고 써야 된다고 해서 오력일체입니다. 머리를 동원하고 눈을 동원하고 입을 동원하고 귀를 동원하고 손을 동원해서 자꾸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화 문제에 대하여 실제적인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봉사기관에 가입하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성화에 관한 연습을 스스로 하려고 기다리면 일년 동안 한 번 할까 말까입니다. 그 한 번이 언제냐 하면 크리스마스 때 어쩌다 자선남비에 돈 넣는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훈련되기 위해서 자신을 봉사기관에 예속시키십시오.

 

 

 

학생들 중에는 엉뚱한 생각으로 학교를 자퇴하고 독학을 하겠다는 학생이 가끔 생깁니다. 필요한 공부만 집중적으로 하겠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열심을 낼 때는 학교 진도보다 더 열심을 내지만 보통, 사람들은 학교 진도보다 게으를 때가 더 많습니다. 학교에 나가야 공부하기 싫지만 숙제를 내 주어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스스로의 힘에 맡기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게으르고 교활한 자들입니다. 여러분을 교회 안에 봉사할 곳들에 묶고 위원회에 소속되십시오. 장학위원회 같은 데 참여하십시오. 그래서 교회에서 장학금으로 예산을 책정한 것 이외에 얼마나 많은 곳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가를 눈으로 확인하시고 여러분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법을 배우십시오. 국내 전도부, 회외 선교부, 구제부, 관리부, 봉사부 다 참여하십시오. 안내를 해 보십시오. 우리 안내위원 중에 한 분은 안내위원이 된 다음부터 헬스클럽에 나갑니다. 의자 접었다, 폈다 하려고 말입니다. 성가대에 나오십시오. 그래서 남보다 일찍 나오는 법을 배우십시오. 연습한 곡으로 하나님 앞에 찬양드릴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준비된 마음이 모두에게  상응(相應)되기를 바라는 안타까움에 한 번 서 보십시오. 이것이 성화의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산기도 들어가서 사흘쯤 굶고 내려오는 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이 가졌던 것 중 매우 큰 액수를 자선 기관에, 어느 교회에 내놓는 것이 성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물론 거룩한 몸부림이긴 합니다. 한동안 그것을 우려먹고 살고 또 그 약효가 끊어지면 갑자기 어디다 바치는 것은 신자를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희생을 한 후 한동안은 너무 떳떳하기 때문에 말도 조심하지 않게 되고 행동도 조심하지 않게 됩니다.

 

성화를 가장 많이 그르치는 것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만 될 존재입니다. 그 일은 실패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여러분에게 요구하고 있는 성경의 선언입니다.

 

 

 

아무도 이 일에 실패하는 자가 없고 이 일에 어리석은 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여 선물로 여러분의 성화를 가질 수 없음을 명심하시고 하루라도 빨리 여러분이 마땅히 걸어야 할 신자의 길을 결심하고, 시작하고, 꾸준히 꾸준히 연습하시기를 권합니다.

 

 

 

 

 

로마서 43강(롬6:12-14절) 죄로 죽을 몸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2-14)

 

 

 

로마서 6:12은 성화에 관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죄로 너희 죽은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 이 말씀들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얼핏 보기에 이 말씀들은 마치 우리의 신체가 죄의 근거와 뿌리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표현하는 ‘죽을 몸’, ‘너희 지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이 성화 문제에 있어서 아주 심각한 오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오해가 어떤 것이냐 하는 설명에 앞서서 우선 ‘죽을 몸’이라고 표현된 말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물질에 관한 것을 죄악시하는 적이 없습니다. 죄란 경향이지 형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의 육체, 혹은 세상의 어떤 물질, 자연계를 죄악시하는 것이 없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면 거기에도 자연계가 있을 것을 아셔야 됩니다. 우리 몸으로 갈 곳임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자꾸 정신적인 것, 형이상학적인 것만 거룩하고 형이하학적인 것, 신체적인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본성적으로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는데 아마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탓인 듯합니다.

 

 

 

왜 죽을 몸이라 하는가? 몸이 죄의 뿌리라든가 근거라는 의미가 아니라 ‘죽을 몸’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한시적인 가치와 불안정한 영역을 묘사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 속에서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린다’라는 말과 그 다음 같은 13절 하반절에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라는 그 두 비교를 보실 수 있습니다. 죄에게는 우리가 자신을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전체, 우리의 인격, 우리의 존재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구원을 얻은 이후로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역 속에 있고 하나님의 소유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지체를 죄에게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같이 우리 자신이 죄 아래 다시 가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잠시 현혹시키고 잠시 실패케 할 수 있다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어서 지체와 자신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는 이야기는 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치와 이 세상의 비진리와 죄악 된 것에 우리를 맡기지 말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눅 16:9-11). 여기서 말하는 불의 한 재물이라는 것은 도둑질을 했거나 강도질을 한 재물, 말하자면 범법한 재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치가 있지만 영원한 가치는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한시적이고 제한된 그리고 영원치 않는 헛된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불의한 재물입니다. 11절에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는 대조가 있습니다. 이 참된 재물, 참된 것은 영원한 가치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실함은 이 세상의 가치를 추적하거나 이 세상의 재물을 목표로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또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9절에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표현된 이 세상의 재물들은 그것 자체로 범법한 것이라든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영원한 진리라는 것과 대조될 때는 불의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를 영원한 것에 맡기지 않고 이 세상의 가치와 원리에 내어 맡기는 것을 ‘죄로 죽을 몸에게 순종치 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죄로 죽을 몸’이라는 것은 우리의 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밖에서는 가치가 인정되지 않는 것, 영원한 진리가 아닌 것에 나를 맡기는 그런 원리들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결단코 우리 육신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좀더 직접적인 표현을 살펴보십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3-8)

 

 

 

여기서 육신은 무슨 뜻입니까? 3절 하반절에 있는 것과 같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처음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연합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인간은 죽습니다. 죽음은 지금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정말 죽었습니다. 그 죽음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그들은 서로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마치 고기가 썩은 것같이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이 두려워 숨습니다. 죽은 다음의 인간은 살아 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어서 그때부터 우리가 육신에 있는다는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육신에 있다는 것은 영이 죽어 있다는 것이지 육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세기 6장은 홍수를 내리기 직전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 6:1-3上).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생명된 진리도 거룩함도 연결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신령해지면 육체가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란 인간이 존재 중에 분명한 하나의 요소입니다. 이 육체가 거룩한 공급을 받지 못하니까 이것은 자꾸 썩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공급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함과 진리와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고 죄에 의해서 썩어져 가는 인간을 묘사할 때 성경은 육체라, 육신이라 하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결코 우리의 육체가 악하거나 죄의 근거나 뿌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죄로 죽을 너희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치 이 세상을 사는 게 전부인 것 같은 생각 속에서 우리를 죄에게 내어 맡기는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강조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화라는 것은 많은 성도들이 이런 식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안 나는 것, 죄악된 것이 생각났다 할지라도 어떤 거룩한 생각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내 속에 악한 생각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그 신령하고 거룩한 것이 나를 장악하여 악한 생각이 일어나지도 못하게 하며 혹 일어났어도 그것을 시행하지 못하도록 나를 거룩한 힘으로 붙잡아 매는 것, 이것을 성화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화라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 안에 거룩한 것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승리할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지만 그 승리를 내가 노력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싸워서 얻어내야 할 것으로 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는 로마서 6:12 이하도 이것입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되고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야 됩니다. 이것은 싸움입니다. 기도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 관한 서적들을 읽는 중에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이런 식의 잘못된 성화를 가르치는 책을 앞으로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 책들을 일일이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많은 책들에 이런 사상이 내재된 것을 봅니다.

 

 

 

성화의 단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하는데 늘 실패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마음에 소원이 있고 노력은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패로 나타날 것입니다. 대부분의 책들에서 이 해답을 이렇게 제시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왜 사탄과 직접 싸우려고 하는가? 왜 네 자신이 싸우는가? 싸움을 포기하라. 그것은 네 싸움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실 싸움이다. 주님을 앞세워라. 주님으로 하여금 그 싸움을 하시게 하라’는 권면을 여러 책에서 보실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우리 대신 싸우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울 싸움입니다. 여기가 성화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거리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화를 기도해서 얻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훈련하셔야 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이 갑옷을 입어야 됩니다. 투구를 쓰고 흉배를 붙이고 허리띠를 띠고 방패를 들고 신발을 신고 칼을 들고 신자들은 싸워야 됩니다. 승리를 입으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전투할 무장을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 후에 싸움을 싸워 이겨야 됩니다. 우리가 이 싸움에 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포기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됩니다. 이 싸움을, 이길 수밖에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싸움을 포기하고 이 싸움을 외면하고 혹 이 싸움에서 질 수도 있습니다. 성화에서의 실패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스스로 싸우지 않고 주님께서 내 대신 싸우시고 승리를 주시는 것으로 기대하면서 기도원에서 도망가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무릎 꿇고 기도해서 이 싸움의 승리를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이 해야 되는 싸움이며 아무도 여러분을 대신해서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악한 생각과 이 세상의 유혹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간섭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안에 그런 생각이 들어도 거룩한 생각만 갖고 희열과 기쁨과 감사만으로 충만해져서 선택의 여지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화의 문제에 있어 제일 많이 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거룩한 뜻을 갖고 있고 거룩한 소원이 있습니다만 동시에 세상적인 유혹이 나를 붙잡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실제 생활이 늘 어떻습니까?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러면서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세상으로 갑니다. 세상으로 가면서 “빨리 잡아 주십시오. 빨리 잡아 주십시오. 안 잡은 것은 주님 책임입니다. 난 모릅니다. 난 이만큼 기도했습니다. 난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안 도와 주셨습니다. 제 책임이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이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성화를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싸워야 할 싸움을 주님께 자꾸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내가 한 번도 그 일에 대하여 실제적인 결정과 실제적인 책임을 지지 않고서 하나님께서 한 번도 나를 도와주신 적이 없다는 섭섭함과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빠져 있기 일쑤입니다. 이것만큼 신자들이 자주 오해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신자들은 성화 됨에 대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거나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어온 죄의 유혹을 쉽게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처음에는 달지만 좇아가면 어떻게 망하는 것인가를, 잠시 놀고 온다는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생 속에서 경험합니다. 그리고 지를 지으면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보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다음에 여러분이 그것을 물리쳐야 됩니다.

 

 

 

공부 안하는 아이들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이들보고 너 왜 그렇게 공부 안하니 물을 때, 그들 대부분이 공부하기 싫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하려는데 책상이 없더라, 그래서 일단 책상을 정리하고 쓸려고 하니까 손톱이 더럽더랍니다. 손톱을 깎고 나니까 배가 고픕니다. 라면 하는 끓여 먹고나니까 2시인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서 잤습니다. 이런 것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의 변명입니다. 성화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고 행해야 됩니다. 성화 기도했다는 것과 고치려고 했었다는 것으로는 핑계를 대지 못합니다. 해내야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런 두 가지 결론을 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결론은 이것입니다. 주님이 내 대신 성화를 해 주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지만 결국은 이 싸움을 내가 이겨내고 해내야 됩니다. 우리는 절제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냉정한 자기 판단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0-14)

 

 

 

성도들이 조심하실 것은 이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칭의(稱義)입니까? 성화(聖化)입니까?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미 칭의를 온전히 이룬 자입니다. 한 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신분과 운명이 바뀌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얻은 것이요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성화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우리는 우리가 이 싸움을 해야 됩니다. 내가 좇아가야 됩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좇아가야 됩니다. 이 싸움을 주님께 대신 해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의 지혜와 책임이고, 우리의 권리입니다.

 

 

 

이 성화의 길을 여러분이 포기하시거나 오해하시거나 게을리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성도는 성화 되기까지 여선 번 넘어진 후 일곱 번 일어나고,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이어나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내를 가지셔야 됩니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성도의 신분을 이해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완성될 때까지 하셔야 됩니다. 물론 성도들 자신이 하셔야 됩니다.

 

 

 

두 번째 결론은 이것입니다. 이 싸움은 오늘 본문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 자신을 빼앗기는 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고 그의 소유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삶과 신분은 불변합니다. 우리는 큰 싸움을 합니다. 우리 안에 죄악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생각만이 가득 차고 한 번의 실수도 없기를 소원합니다. 성화는 그렇게 시작하지 않고 작은 것부터입니다. 우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지 않도록 싸우십시오. 작은 일에서 지지 않도록, 전체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빼앗겨서 결국 전체를 빼앗긴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골로새서에서 두 가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 탐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만을 기뻐하는 것, 이외의 것을 욕심 내는 것은 다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결국 성화는 이것입니다.

 

신자들의 인생과 존재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자녀 된 것만으로 기뻐합니다. 그 기쁨을 제대로 아는 것이 싸움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신자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믿어 드렸으니 이제는 ‘내 소원 이루어 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 해 주었으니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하나 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가 이 세상에서의 어떤 헛된 것입니다. 신자들의 기쁨은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함과 영광의 신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보상은 없습니다. 그것을 알게 해달라고 오히려 기도하셔야 됩니다.

 

 

 

로마서 12장 1절로 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1-3).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치 말라는 것은 인간이 어리석게 실패한 가장 큰 원인으로, 죄가 우리를 유혹하는 아주 교묘한 방법 중에 하나인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엉뚱한 생각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즉 하나님이 전능하시며 모든 지혜에 뛰어나신 분이며 우리 모두를 향하여 가장 크신 사랑과 능력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믿음 가운데서 자신을 안정시키십시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가? 왜 하나님은 일을 이렇게 하는가?”라는 생각이야말로 여러분을 순종하는 사람, 믿음을 따라서 인내하는 길에서 이탈시키는 최고의 유혹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그 첫 번째 시험의 원리가 무엇이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사탄이 와서 ‘하나님이 정말 그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왜 먹지 말라고 그랬는지 아느냐?’ ‘그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같게 될까봐 못 먹게 한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공평하시구나,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성화로 들어가면서 하셔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만족성, 풍족성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얼마나 인정하느냐? 이러한 싸움입니다. 결국 그 싸움은 자신 안에서 해 놓아야 됩니다. 모든 죄의 유혹은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로 인하여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 하나님이 하라는 것 외에 이 세상의 것도 얼마나 즐거운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것, 순종하는 것, 여기에서 끌어내는 싸움을 ‘이기는 싸움’으로 아십시오. 삶의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세상이 거짓 되고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다시는 실패하지 않도록 분명히 믿음 가운데, 진리 가운데 굳건히 세워 가는 것이 성화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실수가 같은 것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성경을 진리를 통하여 확인하십시오. 그 모든 것을 경험으로 확인하려 하면 참으로 고달픈 것입니다. 하나를 경험해서 알았으면 열 개를 경험하지 않고 자기의 것으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도마는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손을 내밀어 그 옆구리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야 확인했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꾸짖으셨습니까? “만져보고 믿느냐 그러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니라.” 왜냐하면 우리의 것으로 가져야 될 것 중에 그것을 일일이 다 확인하기에는 우리에게 허락된 진리와 허락하신 축복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가지려면 몇 개 못 가집니다.

 

 

 

사람이 평생에 경험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열 개나 될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은 만 개도 넘습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하나님께 핑계대지 마십시오. 성도 안에 있는 죄의 유혹과 뿌리들을 스스로 물리치십시오. 그것을 물리치기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써 뿌리를 뽑아 내십시오. 그것을 물리치기까지 포기하지 마십시오. 힘써 뿌리를 뽑아 내십시오. 말씀 가운데 굳건히 서서 신자 된 영광과 함께 허락된 모든 사실들을 자신의 것으로 누리십시오.

 

 

 

 

 

로마서 44강(롬6:12-14절) 의의 무기인 몸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롬 6:12-14)

 

 

 

예수 그리스도롤 말미암아 구원 얻은 신자가 마땅히 걸어야 할 상황에 있어서 우리가 살펴할 할 것은 이 문제를 자신으로부터 출발치 않는 것입니다. 성화 문제를 실패하는 모든 신앙인들의 현실적인 고민은 언제나 그 중심과 출발선을 자기 안에 갖고 있는 것으로 알 때입니다. 내 의지가 얼마나 박약한가? 내가 얼마나 게으른가 하는 것에 붙잡혀서 실제로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성화의 시작도 못해 보고 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전도 차원에서는 기독교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십니까? 교회로 오십시오 병 드셨습니까? 교회 오십시오.” 그런 이것은 신자들에게 뜻밖에 너무 많이 확대 해석되어서 신자가된 이후 성화의 길을 걸을 때에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신앙생활 곧, 거듭난 이후의 성화된 길이란 마음이 우울하고 참담함을 가지고 누구인가 내 편을 들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상담자를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친구를 찾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성화는 성경대로 이야기하자면 군대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오늘 은 이 본문 속에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역을 순종치 말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강한 어조의 명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 모두 들어주는 정신과 의사를 만나러 교회에 와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지친 심령과 절망한 마음들을 누구의 손에 맡겨서 위로 받고 돌아가는 , 어떤 위안소로 이해하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 편을 들어주고 응석을 받아 주는 분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군대에서 만나는 선임하사관의 실제적인 명령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군대에 보낸 자식들에게서나 남편에게서나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으실 것입니다. “군대란 개인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능력이나 개인적인 어떠한 거도 고려되어지는 곳이 아니다.” 명령 하에 성취되고 명령이 진행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납되자 않는 곳이 바로 군대입니다.

 

 

 

제가 군에 갔을 때는 상당히 더운 여름철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완전무장을 하고 어떤 산까지 갔다오는 24Km 구보를 하는데 중간에 잠깐 동안 아스팔트 대로를 지나야 하는 몇 백 미터 구간이 있었습니다. 번화하게 사람들이 오가고 교통량이 많은 데서 구보를 인솔하거나 감시하는 교관들과 조교들이 남들 보는 앞에 가면 유난히 더 별나게 행동합니다. 34-35도를 오르내리는 더위 속에 땀이 비오듯해서 군복을 팔꿈치까지 반소매가 되도록 걷어붙였는데 아스팔트에만 오면 갑자기 뛰던 것을 멈추고 낮은 포복을 시키는 것입니다. 아스팔트가 여름에는 물렁물렁합니다. 그러나 그게 물렁물렁해도 맨살보다 물렁물렁하겠습니까? 물론 단숨에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나면서 뼈가 드러날 정도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아이구’했다가는 흉한 꼴을 당하기 때문에 아무도 소리를 못 지릅니다. 기어가고 있는 우리는 물론 뒤에 배낭을 메고 있습니다만 그 위로 교관들과 조교들이 뛰어 다닙니다. 70Kg쯤 되는 사람이 중력 가속도와 함께 등어리에 떨어지면 마치 안에 있는 오장육부가 아스팔트 속으로 쏟아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잘 달래고 잘 먹이고 잘 가르치면 뛸 것 같지만 사람이란 의외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군대에서 분명하게 배웁니다.

 

 

 

지금 신자들이 오해하면서 쉽게 놓치고 실패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너희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이 명령을 우리는 울며불며 싸들고 다닙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 제가 그렇게 하지 못한 딱한 사정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항상 이 하소연을 들어 줄 사람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아! 그러셨군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십니까?” 이런 사람들끼리 모여 짝짝꿍을 치고 우리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그런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성화가 아닙니다. 성화는 훨씬 무섭고 냉정한고 그리고 엄중한 명령 아래 우리를 바치는 싸움입니다.

 

 

 

팻튼 장군이 2차대전에서 가장 유명했던 유럽전투에서 전투시 부상당한 사람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들렸습니다. “자네는 왜 이렇게 되었는가?” “어는 전투에서 어떻게  싸우다가 다쳤습니다.” 모자를 벗고 모두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하고 돌아다니다가 멀쩡한 환자를 하나 만났습니다. “너는 왜 여기 있는가?” “저는 무서워서 전투를 할 수가 없습니다.” 팻튼이 느닷없이 따귀를 올려붙였습니다. “그러고도 군인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 일로 팻튼이 얼마나 치명적인 피해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미국의 장성들에는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전투를 잘하면 별을 따지 못하지만 차트 설명을 잘하면 별을 딴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런 일들이 만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가 군인다운가? 그가 목사다운가? 그가 선생다운가가 아니라 다른 것들로 사람들을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그가 헌금을 얼마나 잘 하는가? 그가 얼마나 성가대에 열심인가?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조금은 부수적이고 이차적인 싸움입니다.

 

 

 

신자로서 완강하게 충성되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합니다. 군대란 군기가 엄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 명령에 출동을 하고 쏟아지는 적탄 속을 달려가야 됩니다. 적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데서 양팔 벌리고 서 있으라고 그러면 서 있어야 하는 데가 군대입니다. 왜 필요합니까? 거기는 전투를 위하여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6:12-13의 구절을 커피를 마시면서, 눈 내리는 경치를 보면서 읽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엄정한 군기 속에서 이 명령을 받아야 됩니다. 우리 나라에서 용감하기로 이름이 나 있는 공수특전단이라는 부대가 있습니다. 그 유명한 구호는 ‘안되면 되게 하라’입니다. 군대란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똑같은 분위기로 12절과 13절을 늘 읽으셔야 됩니다.“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여러분은 명령으로 받으셔야 됩니다. 이것을 안 지킨다고 해서 물론 군대처럼 맞거나 욕을 먹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여러분이 감상적으로 갖고 계실 틈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성경이 디모데후서에서 신자들을 즐겨 묘사하는 두 가지 모습이 잇습니다. 하는 농부이고 또 하는 군인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함이라”(딤후 2:3-4). 군인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가를 위하여 존재합니다.

 

 

 

또 6절에 보시면,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수고하는 농부, 경기하는 운동가, 전투하는 군인, 이것이 성경이 즐겨 쓰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곳에도 유약한 모습은 없습니다. 거기는 다 완강히, 강력하게 충성심과 인내를 가지고 목숨을 걸고 자기 일을 해내야 되는 강건한 사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을 발겨할 것입니다. 군인, 운동선수, 농부 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왜 전투라는 차원으로, 그 명령을 지켜야 되는 차원으로 가지 못하고 있느냐하면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너무 예민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의식 과잉입니다. ‘내 안에서 이런 생각이 난다, 저런 생각이 난다, 나는 아직 그런 것을 할 기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어제도 실패하고 그저께도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 여러분이 할 일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된 큰 이유 중에 하나가 저는 실존주의의 영향과 함께 현대 모든 과학과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심리학에 의한 피해라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이 실존주의 내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느냐하면 모든 기준을 우리에게 집중시킨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것은 대단히 나쁜 확인법입니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저 사람과 살아야겠다. ’나이가 맞느냐? 둘이 지금 좋게 결혼할 수 있는 위치냐?’ 이런 것은 상관이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기분과 자기 입장에서 모든 것을 요구할 떳떳한 학문적인 근거를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리학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것이 상담학입니다.

 

 

 

그가 지금 슬퍼하는 한 그 슬픔을 치료해 주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슬퍼하는 것이 마땅한가, 안 마땅한가를 따져야 됩니다. 군대에 가 보십시오.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0.5초 내에 일어나서 옷 입고 신발 신고 연병장에 나와 도열해야 됩니다. 못 일어나는 것은 딱 한 번의 경우밖에 없습니다. 죽었을 때입니다. 그 외의 경우는 무슨 일이든 기어이 일어나야 됩니다. 여러분은 혹 프랑스 군가에도 잠깐 채택된 멜로디로 되어 있는 ‘두 척탄병’이라는 노래를 아실 것입니다. “죽음로서의 이 한 몸은 내 조국을 지키려 한다. 황제를 호위하고 죽은 몸이지만 이 장검 짚고서 이러한 내 황제를 지키고 내 조국을 지키리라.” 그런 마음으로 일어나셔야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관을 고치고 좇아 다니면서 마음을 알아달라고 애를 쓰고 있고, 주를 위하여 살과 싶지만 그렇지 못하는 그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주는 목사를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어디로 갔습니까? 여러분은 주를 섬겨야 되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7-10). 이것은 굉장히 냉정한 내용이입니다만 이것만큼 신자의 형편을 잘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주인이십니다. 하인을 내보내서 밭을 시켰습니다. 저녁이 되어서 하인이 돌아왔습니다. 하루종일 뙤약볕에서 수고하고 왔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하인에게 “얼마나 수고했겠냐? 밥부터 먹으라” 그럴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왜 이제 오느냐 배고파 죽겠다. 밥 빨리 차려와라.” 그래서 시중들게 하고 자기 밥을 다 먹은 후에야 그 다음에 하인에게 밥을 먹이는 법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 문제에서 무정하다는 생각을 가지셔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자기 위치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잘못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자녀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군사로 종으로 쓰임을 받고 있다는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기분이 어떤가? 지금 어떤 마음 상태인가? 내가 지금 어떤 고민에 싸여 있는가에 맴돌고 있지 한 번도 군복을 입거나 창검을 들거나 종으로서 나가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돌아다니면서 자기 하소연만 늘어놓고 있고 성화를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의 영광을 휘하여 부름받음에 대해 한 번의 사건도 행위도 시작되지 않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신자인 것을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겨야 되고 여러분이 살고 존재하고 행하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증명되기도 하고 가리워지기도 함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이것이 신자의 지금 형편입니다. 자신의 문제에 연연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기분과 일을 뒤로 밀어 놓고 주의 일에 먼저 앞장서야 됩니다. 그 일에 여러분이 맨 처음 꺼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로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유혹하고 침투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명령입니다. 안되십니까? 오른팔이 죄짓게 하거든 잘라 버리십시오. 왼팔이 그렇게 하거든 이것도 자르십시오. 눈이 그렇게 하거든 뽑아버리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도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이유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유약해져 있습니다. 하소연할 준비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습은 신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봉사하고, 헌금 또한 잘 냅니다. 그러나 정작 신자로서 사는 생활이야말로 총 하나 못 쏘는 군인입니다. 총을 어떻게 쏴야 하는지 어디다 총알을 넣는지를 모릅니다. 때문에 신자 같지 않습니다. 노상 하는 이야기는 하소연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사업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프십니까? 그것은 일단 뒤로 미루어 놓으십시오. 그 일이 해결된 다음에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할 수 없습니다. 그 일을 걸머지고 싸우십시오. 무좀 결렸다고 군화 벗고 발바닥 긁는 군인 보셨습니까? 그럴 틈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젊어진 현실적인 짐들을 짊어지고 싸우십시오. 밥을 먹을 게 없습니까? 굶으면서도 신자로서 우선 해야 할 일은 배 곪는 것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기 위한 일을 생각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밥 한 그릇 얻어 먹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내가 죄를 짓지 않을까? 어떻게 내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할까? 여기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영적 전투요, 여러분이 해야 할 실제적인 신자로서의 싸움이요, 현실이요, 길입니다.

 

 

 

예전에 방송되었던 ‘전투’라는 외화가 있었습니다. TV 방송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했는데 늘 손더스 중사가 나와 독일군과 싸우는 장면이 나왔습니다만 가금 태평양전쟁, 일본군과 싸우는 사건도 등장하곤 했는데 한 번은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 해병 소대에 소대장이 죽어서 새로 소대장이 부임해 옵니다. 그리고 상륙작전을 하러 갑니다. 배를 타고 가면서 소대장은 자꾸 소대원들과 허물없이 지내려고 애를 씁니다. 내가 비록 전투를 지휘하고 너희들을 사지로 몰아넣지만 내 개인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령이기 때문에 할 수 없고 전쟁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지 난 개인적으로 너희 편이다 하는 것을 자꾸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소대원에게 자기를 소대장이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고 합니다. 형같이 생각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소대의 선임하사 하나만은 꼭 소대장이라 부르고 친할 것을 거부합니다. 상륙작전이 감행되기 바로 전날 배에서 소대장이 드디어 분통을 터뜨립니다. “자네 어떻게 그렇게 무정한 사림인가, 자네는 개인적으로 친한 것이 싫은가?” 선임하사관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훨씬 전쟁 경험이 많은 사람입니다. 소대장님, 당신이나 나는 어차피 저 사람들을 죽으라고 명령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여기 필요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잘해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긴장감이 있는 것이 좋고 어떤 때는 적의를 갖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소대장님이 하는 방법은 저 병졸들로 하여금 전쟁이 무엇인지를 잊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대장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우칠 상황이 생기고 나중에 자기가 맡은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는 것으로 극은 끝납니다.

 

 

 

이야기를 장황하게 했습니다만 이것으로 변명을 하나 하려고 합니다. 저와 성도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목사인 저는 성도들이 부모도 형제도 아닙니다. 저는 무서운 선임하사관입니다. 결코 성도가 뛰다가 낙오했다고 업어 주지 않을 것입니다. 발길로 걷어 찰 것입니다. 성도들은 스스로 맡은 일을 남이 대신 해주지 못하는 유일한 사명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서로 친하기 위해 생년월일을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강해져야 하고 주님 안에 있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신자로서 승리하는 법에 대해 익숙해지고 그 속에 성도 됨의 자랑과 기쁨을 가지셔야 됩니다. 목사와 친한 것으로 기쁨을 가지셔서는 안됩니다. 저랑 친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를 만나서 강한 신자가 되어야 됩니다. 신자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피로 값주고 산 영광스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신자의 특권과 고귀한 신분을 울음 섞인 말로 팔지 마십시오. 신자의 신분과 고귀한 위치를 구걸하지 마십시오. 성도 됨에 따르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보잘것없는 죄와 유혹에 자신을 팔지 마십시오. 사람 앞에서 자신을 설명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설며하시고 그 앞에서 잘했다 칭찬 받는 자녀들이 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고 승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군사로 세우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제 우리는 우리를 거룩과 영광에 바칠 수 있으며 생명과 진리로 우리를 바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이 특권들, 이 영광들을 놓치지 말게 하시고 저 죄와 더러움과 실패와 외면과 연약에 다시는 우리를 팔아먹지 말게 하시옵소서. 주의 자녀가 가는 길이 영광의 길, 승리의 길이 되게 하시되 싸움의 길을 외면하지 말게 하시고 주와 함께 이 모든 길을 승리하여 마침내 주 앞에서는 칭찬과 영광과 자랑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상급을 다 얻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45강(롬6:15-16절) 순종의 종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5-16)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의 삶이 방종해도 좋다고 성경이 약속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3-14).

 

 

 

우리는 사랑이라는 율법 아래 있습니다. 지켜서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 하는 율법은 우리에게 없어졌습니다. 이제 의와 거룩과 사랑의 법아래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고 헛되 것을 구하던 무법하고 더럽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욕심 속에 있었던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제 우리는 허락된 거룩과 영혼과 영생을 준비하고 가꾸고 열매 맺는 사람으로 부름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법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바로 이 문제에 있어서 오해를 하기 일쑤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으니 아무래도 좋다는 문제로 신자들이 많이 실족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는 많이 실족합니다. 즉 어떤 실태와 어떤 부족감을 느끼는 것은 모두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핑계하는 것입니다. 은혜 지상주의 , 믿음 지상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왜 병이 드느냐? 믿음이 떨어졌을 때 사탄이 침입하는 것이라는 데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왜 사업에 실패를 하느냐? 믿음이 부족해서, 자기 힘만 의지해서 살았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다. 왜 자녀가 대학에 떨어지느냐? 믿음이 부족해서, 교과서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안했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따위 가르침에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신자들 대부분이 실족하곤 합니다. 성경이 분명히 신자 된 우리가 의와 거룩을 열심히 노력해서 가꾸고 열매 맺을 것을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처럼 신자 된 이후에 성화적 삶도 선물로 받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로마서 6:11 이하에서 이 문제를 확인했습니다. 특별히 13절에서 분명히 제시해줍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성화의 삶은 각자가 노력하고 자기가 애써서 이루어야 되는 일인 것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도함으로써 성화되지 않습니다. 구원은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나 성화는 선물로 받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15절에 보는 것은 바로 그 문제에 관한 한걸음 더 나아간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의의 병기로 바쳐야 되며 우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바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그 앞에는 어떤 질문이 있었습니다. 곧 롬 6:1에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고 출발한 것으로부터 11절에 이르러서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로 6:11)라는 것으로 끝났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문맥으로 보이는 질문이지만 또 다른 질문이 15절에 나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15절의 답으로 나온 16절은 앞의 6:1과 11절에서 14절까지의 이야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약간 진전된 내용입니다. 그 앞에서는 신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자가 자신을 마땅히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고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 의의 병기로 자신을 순종시켜야 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럼 15절, 16절에서 하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앞부분의 6:11에서 우리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는 이야기는 끝을 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15절, 16절에 등장하는 것은 이런 중요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을 살펴보면서 누구를 향한 것인지를 밝힙시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6).

 

 

 

물론 신자를 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16절에 예를 든 내용은 신자만이 아니라 신자와 불신자를 포함한 일반론입니다. 여기서 일반론이라고 하는 것은 신자는 자신을 죄의 종으로는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원리는 신자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을 죄의 종으로 줄 수 없습니다. 13절에서 신자는 그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일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즉 실족하는 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죄에게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는 자이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잘라 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만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라”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죄에게 드리지는 못합니다. 자신을 죄에게 드려 사망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받은 바 구원과 지위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일반론입니다. 이것이 일반론인 이유는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는 말속에서도 나옵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면 순종의 종으로 생명이여야만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의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내지 않습니다. 생명은 우리의 순종의 결과가 아닙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은혜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께 순종해서 받은 결과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망의 대조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면 의로 되어 있고 영생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주의해서 보시면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 죄에게 우리를 주는 곧 죄와 대조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11절에서 14절이 말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너희를 바치지 말고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치라였는데 죄와 대조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것은 일반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는 자신을 죄에게 드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바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순종일 뿐입니다. 신자는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가 있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가 또 죄에게 드렸다 할 수는 없습니다.

 

 

 

부하 직원이나 하인이나 종이 잘못하면 내어쫓고 잘하면 데리고 있을 수는 있지만 아들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자녀는 자녀입니다. 못난 자녀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잘했을 때는 기쁜 자녀이고 마음에 맞는 자녀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타인보다 못한 자녀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순종과 불순종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 속했다가 죄 속에 들어갔다가 나갔다가 하는 등 신분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왔다갔다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일반론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런 일반론을 설명해야 합니까?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제는 죄의 종이 아니다. 이제 하나님께 속했고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으므로 신자의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신자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11절에서 14절까지가 권면이었다면 16절은 일반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에게 너희를 바치든지 그 열매를 맺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신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신자들 역시 자기를 죄에게 종으로 바치면 거기서 사망이 열매 맺는 것을 모르느냐?” 당연한 법칙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순종의 종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쳐서 그로 인하여 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하기를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짓겠느냐고 말하기 때문에 답변하려는 뜻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기를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천국에 가는 것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받은 나는 내 맘대로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천국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사이에 너무나 많은 공백이 들어 있습니다. 즉 구원 얻은 다음에 하나님 앞에 갈 때까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대부분의 신자들은 주의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성경은 ‘너희가 옛날에 죄인이었을때를 생각해 보라. 너희는 죄의 종이었고 죄에게 너를 바쳤었다. 그때 너희가 무엇을 얻었느냐? 그것은 불의와 불법과 더러운 것과 흉칙한 것뿐이었고 결국은 사망뿐이지 않았느냐?’라는 17절 이하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롬 6:17-21).

 

 

 

불신자들이나 신자들도 옛날에 불신자이며 자신들이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 맺어진 열매는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결국 사망에 이른 것뿐이었습니다. 신자는 죄에서 벗어났고 의와 거룩으로 부름받았고 그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즉 성경이 설명하는 구원을 받아 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의와 거룩으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이해하기 좋게 이야기하자면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거기서 사과가 맺어져야 됩니다. 배나무를 심었으면 배가 열려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나는 사과를 심을 마음이 없었는데 하나님이 사과를 그냥 심어 주셨다.’ 그런데 사과를 심었는데 왜 사과를 안 열리냐 말입니까? 배를 심었는데 왜 배가 열리지 않냐구요? 우리는 끊임없이 불평합니다.

 

 

 

옛날에 우리는 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답게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자녀가 잘되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겨야 했고, 그들이 실패한 자리 위에 서서 지위를 확보했었습니다. 그것이 죄인이었던 우리입니다. 죄인이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죄인이냐 아니냐를 다른 것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는 태도, 곧 달려 있는 열매를 보면 분명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오해하고 있습니까? 구원이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룩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하신 일이 열매 맺도록 이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가꾸지 않음으로써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 자랑과 영광과 책임을 두렵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는 신자라고 말하면서도 어리석은 자 같고 미련한 자 같습니다. 타인에게 자주 간증하고 ‘나는 찾았다’, ‘나는 기쁘다’라고 말만 하면 울고, 입만 열면 정답을 줄줄 내는 것만이 신자다운 삶이 결코 아닙니다.

 

 

 

15절 이후가 앞내용과 다른 점은 신자는 신자 된 것을 열매로 증명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였습니다. 여기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신자가 가끔 실족하고 실패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 속에 상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도 죄를 짓습니다. 불순종하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죄는 죄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의적이고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인 의지력을 가진 고집스러운 반항입니다. 신자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한 것을 심으시고 열매 맺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이 은혜 아래 있지 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은혜가 할 일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새 생명이 무엇입니까? 거룩과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닙니까? 그 길을 가야 됩니다. 책임져야 됩니다.

 

 

 

마태복음 7장으로 가 봅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는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5-20).

 

 

 

이 19절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지만 이전에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말씀과 동일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처음 그의 사역에 서서 외친 이야기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나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였습니다. 많은 신자들의 큰 오해 중에 하나가 이 열매를 맺는 방법으로 전도와 붕사, 구제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보면 좋은 열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열매라는 실천과 결과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로 표현된 나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그러니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라는 것이지 좋은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나무가 되는 법은 생각하지 않고 좋은 열매를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어떤 때 보면 사과나무가 되어있지 않고 사과장수가 되어 있습니다. 기껏해야 사과 도매상하는 것입니다. 별볼일 없는 사과 소매상과 더 별볼일없는 리어카 사과장수, 아니면 기차간에서 만났던 사과장수일 뿐 사과나무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주 심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밀접한 내용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라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그들이 무엇을 했는데도 주님은 쓸모없다고 하십니까?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고 권능을 행했는데도 주님은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권능을 행하는 것, 은사를 가진 것, 이런 것들이 신자 된 표는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무슨 이야기 끝에 나오는 것입니까?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입니다. 말하자면 아름다운 열매, 좋은 열매란 좋은 나무냐, 아니냐의 표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노릇한 것, 귀신 쫓아낸 것, 권능 행한 것은 그 나무가 좋은 나무냐, 아니냐의 표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많이 등장합니까? 신자 된 표를 말할 때 왜 우리는 확신, 감격, 체험, 능력으로 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어쩌면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마태복음 28:18 이하의 말씀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동일 내용인 사도행전 1:8,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전도와 봉사, 구제 이런 것들은 신자 된 가장 중요한 표는 아닙니다. 오히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되라는 것은 전도를 요구하는 것이기보다 ‘구원이 전 인류에게 허락되었다’ 는 것이 훨씬 큰 초점일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이스라엘 백성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을 뛰어넘어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는 것이 마태복음 28장 끝절과 1:8 이하의 말씀에 훨씬 중요한 핵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누구든지 예수를 믿은 후 바쁘게 전도하고 봉사하는 등 어떤 종교적인 행위는 부지런히 합니다만 순종의 종으로 자신을 드리는 일들은 안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16에서 가르치는 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는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심어 주신 씨앗에 물주고 키워서 튼튼하게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만 냉장고에 잘 보관해 놓고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형국입니다. 어디 가서 사과 팔아서 이익 남겨서 더 큰 사과, 더 큰 사과, 그래서 천국 사과주식회사를 이루는 것, 이것을 신앙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신앙적 행위들은 성공하지만 개인 인격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모든 것이 은혜였노라고 간증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은 엉망인 채로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도 됩니까?

 

 

 

그것은 결코 은혜가 아닙니다. 그 은혜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그 은혜가 요구한 거룩과 영광으로 가는 길이 내 정욕과 욕심과 세상을 따라 가는 길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면서 저 길을 동시에 구경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도 못합니다. 사과장수니까, 사과만 많이 팔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과를 파는 동안 여러 가지 딴 짓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뭐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뭐든지 할 수 있는 틈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됩니까? 사과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허락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키우고 그것을 아름답게 만들어 성숙시키며, 열매 맺는 일에 전력을 쏟아야 할 뿐 딴 짓을 할 틈이 없습니다. 은혜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은혜가 우리에게 시간을 주고 여가를 주고 무엇을 해도 좋은 방종을 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의로 거룩으로 나가야 되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죄를 벗어날 힘이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죄인 된 것에서부터 해방되었고 하나님께 나를 바칠 수 없었던 존재가 바칠 수 있게 된 것이 은혜이지 그 다음에 해야 되는 일도 은혜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사과나무입니까? 사과장수입니까? 신자다운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고쳐가는 데는 세상을 좇아가거나 욕심을 챙길 여지가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은혜가 여러분을 무섭게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가는 것을 깨우치시고 순종하면서 인생을 의롭게 살아가시기를 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와 거룩으로, 영광과 영생으로 이제 부르셨으니 우리로 순종하게 하시고 지혜롭게 하시고 그리고 깨어 기도하게 하시며 근신케 하시옵소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우리가 주를 닮게 하시며 주께서 부르신 영원한 상급을 향하여 날로 날로 매진하는 우리들이 되게 하사 마침내 주 앞에서는 날 기쁨과 감사와 영광 속에 서게 하시고 우리 중에 아무도 낙오자가 없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46강(롬6장17-18절) 의의 종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로마서 6:15 이하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는 한걸음 전진된 구원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구원이라는 것은 죄와 사망아래 있던 우리가 생명과 하나님의 세력 안으로 이전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 된 이것이 은혜로 되어 있고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많은 혼돈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6:1에서 본 바와 같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이 가능해지고 15절에 있었던 것과 같이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하는 질문도 나올 법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실력으로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크신 은혜로 이 구원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이나 우리의 실력으로 결과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대체 신자가 된 이후에 무엇 때문에 열심을 내는가에 대해 질문이 나올 법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영원 불변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이 바뀌지 않습니다. 거기에 대해 일차적인 질문, 즉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11절에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이기 때문에 죄와 관계 없습니다. 하나님과만 관계 있는 자 되었으니 하나님의 자녀다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하여 산 자 되었으니 그에게 순종해야 된다는 것으로 첫 번째 답을 했습니다. 이제 15절 이하에 나오는 두 번째 답에서는 그 시각을 더 깊게 가지고자 합니다. 은혜 아래 있으며 하나님이 자녀 된 신분과 처지로 어떻게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또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우리는 우리를 죄의 종으로 바칠 수 없고 순종의 종으로 살수밖에 없다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여기서 확인했던 것은 신자에게 그들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잠시 드리는 실패와 실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 안을 떠나서 죄 아래로 다시 집어넣을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근본 이유 중 하나를 17절에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이 17절과 18절도 우리가 어떻게 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 아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 곧 일차적인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일차적 구원의 의미는 앞의 11절에서 이미 설명했던 것입니다. 11절, 12절, 13절에서 계속하여 우리가 하나님 아래 있으며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고, 15절 질문 이후에 나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있으므로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이 6:1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면 15절에서 등장한 질문과 답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죄짓는 것을 어떻게 불가능하게 만드는가? 죄짓는 대로 너희를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7-18). 이 말씀의 논지는 신자들이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의에게 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차적인 구원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 죄의 대칭이 생명도 아니고 영생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고 ‘순종’이었습니다.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른다는 데 대한 사망의 대칭이 생명이나 영생이 아니라 ‘’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18절에도 죄에 대한 대칭이 하나님이 아니고 영생이 아니고 의라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슨 결론을 얻게 합니까? 17절의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를 살펴보면 ‘교훈의 본’이란 복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값없이 선물로 구원을 거저 주셨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이것이 ‘교훈의 본’입니다. 본문의 이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했다고 설명하는 부분으로 인하여 마치 이 복음을 우리가 믿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마음으로 믿었다. 마음 깊은 우리의 중심, 즉 내가 믿었다. 외부에서 나를 잡아 끈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선택했다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구원의 설명이 아니라는 것은 앞에서 누누히 설명했습니다.

 

 

 

신자가 얻은 구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구원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대목이기 때문에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했다’는 이 부분은 우리가 어떻게 복음과 예수를 선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대목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해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을 바르게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본문은 원문을 조금 잘못 번역한 것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의 본문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였다”라고 되어 있는데 전부 능동태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그 본문을 원문으로 직역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가 이끌림을 받은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어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로 번역됩니다.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도 수동태로 “너희가 이끌림받은 바 교훈의 본”이 옳습니다. “그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도 “마음으로 순종하게 되어”의 수동태가 옳은 이유는 능동형으로 번역하면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수동태로 고쳐 보면 이렇게 다릅니다.

 

 

 

먼저 마음으로 순종했다’의 ‘마음’부터 풀고 넘어갑시다. 여기서 마음이란 마음으로 저 깊은 곳으로부터 혹은 외부에서의 어떤 설득이나 권면에 의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부터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데 여기서의 마음으로라는 것은 ‘전인격적으로, 근본적으로, 온전히’라는 뜻입니다. 우선 마음이라는 말은 그렇게 설명해 놓고 이 본문을 성경이 의도한 대로 풀어 봅시다.

 

 

 

온전히 순종하게 되었다는 무엇에 순종했다는 것입니까? 교훈의 본에 순종했다고 합니다. 교훈의 본이라는 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어떻게 인류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가? 우리 스스로 구원 얻을 능력이 없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은혜와 긍휼과 자비로 구원을 하셨는가가 교훈의 본입니다. 좀더 포괄적으로 본문에 맞는 설명을 하자면 이것이 교훈의 본이란 틀에 우리를 부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일차적인 구원, 우리가 하나님을 진노 아래 있었는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았다는 그 구원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의 구원은 우리를 ‘그의 자녀 삼았다’라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 또 죄를 지어도 되지 않겠느냐라는 질문을 하는 신자들에게 너희가 받은 구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그 질문을 하는구나라는 답을 주려는 의도입니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삼고 구원을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을 설명할 때, ‘교훈의 본을 순종케 했다’고 하는데 ‘교훈의 본’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틀에 우리를 부어 본래 죄의 종으로서 죄의 틀에서 구워낸 제품이더니 그 크신 은혜로 인도되어 교훈의 본 속에, 교훈의 본이라는 틀 속에 들어가서 새로운 제품으로 나왔구나! 이제는 죄에게서,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어 의에 종이 되었노라는 설명입니다.

 

 

 

여기 17절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말은 선택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죄 아래 있던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 아래 온 그 둘을 비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둘에 대한 비교는 10절 이하 11절에 강조되었던 것같이 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 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15절 이하에서는 ‘하나님 아래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천국 가고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이별이나 상하고 해하는 것이 없는 곳에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 구원이란 옛날에 우리가 죄의 틀 속에 부어져서 마음으로부터 죄의 형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인식케 합니다. 나아가 아제는 생명과 진리와 영광과 거룩의 틀 속에 부어져서 마음으로부터 근본적인 사상과 생각과 전인격이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마음으로 순종하여’라는 말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는 말은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우리를 순종시켜야 되는가라는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의지와 책임에 관한 부분을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만들어진 바 계획과 의도에 필연적인 결과를 설명하는 것으로도 순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 자신에 뭔가 하나 더 붙여진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한 후 시편 51편에서 “모친이 죄악 중에 나를 잉태하였으며”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 중에 잉태됩니다. 죄 중에 잉태된다는 것은 죄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죄의 틀 속에 부어져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의 모든 생각과 하는 짓이 그대로 ‘죄의 마음으로부터’란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전인적으로 죄에게 순종된 모양이란 말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새 사명으로, 거룩과 의와 영생으로 마음으로부터 순종된, 근본적으로, 전인적으로 바뀌어진 제품 됨, 바로 그것이 순종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는 얻은 구원의 틀에서 찍혀 나온 우리들이 어떻게 순종치 않고 어떻게 딴 짓을 하느냐입니다.

 

 

 

성경은 지금 15절 이하에서 ‘어떻게 은혜 아래 있고 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죄로 가겠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원을 천국 가는 표를 받은 것으로밖에 생각 안합니다. 우리는 그런 틀 속에 부어져서 새롭게 만들어진 자라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의 구원에 관한 설명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십시오.

 

 

 

에베소서를 보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자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엠 1:3-5).

 

 

 

4절에 있는 것은 의도요, 계획이요, 목표입니다.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은 5절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은 이유는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것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구원은 그런 의도, 그런 목표를 위하여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 속에는 이 목표가 이루어질 어떤 안전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심입니다. 언제나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비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이야기 속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제물이 되신 것이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거기는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란 하나님의 의도하심 앞에서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하여 우리를 죄에서 ‘꺼낼’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틀 속에 ‘넣는’것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골 1:24-28).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 표현을 잊지 마십시오.

 

 

 

27절에서는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또 28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 등의 표현으로 훨씬 궁극적인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속제물이 되셔서’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얻으므로 우리는 그 틀 속에서 새롭게 빚어진, 새롭게 형성된 제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대로 찍어낸 어떤 복사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죄를 지으러 갑니까? 제품이 달라졌는데 말입니다. 성경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에서는 구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우리를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구원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형상을 말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때문이며, 또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게 세우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어느 부분만 강조합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대속사역으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 영생을 얻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만 알고 있기 때문에 값없이 선물로 이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부터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지 않은가?라고 묻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 본문을 통하여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이 어디까지 였느냐를 알고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는다든가 불순종으로 간다는 것은 신자로서는 참으로 어리석고 어처구니없고 우수꽝스러운 짓입니다. 미련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구원을 순종이라는 것과 자꾸 연결시킵니다.

 

 

 

로마서 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5). 이 구원 얻는 부분에 대하여 믿어 순종케 한다는 순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순종한 이후 결심하여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게 된 이후 그가 구원을 얻는 것이 그에게 어떤 필연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밖에 존재가 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춰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쫓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쫓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여기 나타나는 바와 같이 믿어 순종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새사람으로 만든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십시오. 마음으로 믿어 순종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의지와 무슨 결단과 무슨 선택을 논하는 것조차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틀, 영생과 의와 거룩의 틀 속에서 새롭게 찍혀 나와 완전히 바뀐 존재가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은 이런 것입니다. 신자 된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것, 그래서 여러분 안에 의와 거룩이 신자 됨의 소원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을 이루어내셔야 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신자들 스스로는 새롭게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신자된 특권과 그리고 하나의 책임, 놓치지 마시고 승리하셔서 주 앞에서는 날 부끄러움이 없이 다 서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한 노력과 의욕과 열심이 샘솟게 하시고 인내하고 순종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이 복된 영광의 특권들을 다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미련함과 게으름과 어리석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허락된 특권과 영원한 소망을 힘을 다하여 완수하여 열매 맺고 풍성히 누리고 아버지 앞에 칭찬받는 자로 주 앞에 서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47강(롬6:19절) 거룩한 몸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롬 6:19)

 

 

 

로마서 6:19에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받은 우리의 구원 때문에 마땅히 걸어야 할 성화에 대하여 중요한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우리는 앞에서 성경이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해 우리에게 권면하는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에 관한 문제, 그리고 구원에 포함되어 있는 성화 문제가 오해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부정적인 차원에서의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해 보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적극적인 면을 한가지 생각하겠습니다.

 

1절에서나 19절에서나 동일하게 나왔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얻은 바 구원 이후에 마땅히 살아야 할 신앙인의 삶에 게으르게 핑계 삼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 구원 문제를 더 철저히 파헤쳤던 것이 로마서 6장의 기본적인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 19절에 이르러서 일어나는 문제는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면 이러저러한 변화가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성경이 약속하는 변화와 권면과 거리가 먼 오해거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첫 번째는 개성과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나님과 화목되었다는 의미에서 새사람입니다. 죄의 노예가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새사람이지 그가 새로운 지체나 새로운 기능이나 새로운 본질이나 새로운 능력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중간을 살펴봅시다.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입니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어떤 개성, 기능, 성질, 능력 모두를 옛날에 불법에다 우리를 바친 것같이 의에게 바치는 것이지 이것들이 전부 새것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새것으로 바뀌는 것으로 기대하는 이가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자가 된 이후에도 죄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고 죄를 실제로 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옛날에 죄짓던 우리와 도대체 뭐가 변했나 싶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런 실패를 할 때마다 아직 중생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하곤 합니다.

 

 

 

먼저 개성과 능력의 차원 중 개성적인 측면을 봅시다. 이 개성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옛날 죄인으로 살 때의 개성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 개성의 기능이 죄의 노예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서부극 같은 것을 보면 맨 나중에 악당과 주인공이 한판 승부를 합니다. 둘 다 똑 같은 총입니다. 똑같은 총알로 쏘는데 그 총이 누구 손에 있느냐입니다. 주인공 손에 있는 총은 마음만 먹으면 나가고 악당 손에 있는 총은 쏴도 이렇게 돌아와서 자기에게 맞고 하는 그런 총이 아닙니다. 똑같은 총인데 지금 누구 손에 있느냐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죄와 사망의 손아귀에 있었고 지금은 하나님 손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르지 우리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 면에서 구원과 성화 문제를 오해하여 개성 문제를 획일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좀더 거룩해지고 좀더 경건하자는 핑계로 그런 실수는 자주 일어납니다.

 

 

 

저는 좀 급한 성격과 함께 약간 쾌활한 쪽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슬픈 얼굴하기에 익숙치 않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개성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볼 때 어떤 이가 목사 같으냐면 눈을 다 안뜨고 약간 내리고 무게 중심이 아래쪽에 있고 고개를 돌려도 고개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서서히 돌아가는, 이런 사람을 ‘목사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굉장히 큰 오해 중에 하나입니다.

 

 

 

혹자들은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경건한 사람일수록 심장에 가깝게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그럴 필요없습니다. 떨어지지 않게만 들고 다니면 됩니다. 뜻밖에 우리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인데도 중요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개성은 안 바뀝니다. 그게 어느 방향으로 어떤 원리와 어떤 내용을 담느냐에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으로 가 보시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에도 상당히 다혈질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사람인 듯 합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맨 앞장섰고 다메섹에까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자 그 성격이 온순해지고 침착해진 것은 아닙니다. 그때와 같이 왕성하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의 서신서들을 보면 심장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의 내용은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일을 하면서 돈 문제로 인하여 야기된 문제입니다. 왜 복음을 전하고 대가를 받느냐?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목사는 설교하고 왜 월급을 받느냐? 그런 식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을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3-14).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15절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고전 9:15上). 변명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의 성격이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예전의 성격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혈기 왕성한 사람인가를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16:21,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1-22上). 사도가 이런 말을 쓰면 되겠습니까? 옛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할 때의 바울의 극성스럽던 모습이 이제 주를 위하여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보십시오. 개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형태라는 것은 그릇이고 나르는 수단이기에 변하지 않습니다. 나르는 수단은 언제나 담은 내용이 달라지고 그 내용을 어디로 운반하며 누구를 위해서 하는가에 의해 달라져 보일 뿐입니다. 개성은 그대로 남는다고 했더니 그 개성말고 원래 담겨 있었던 내용, 옛 성품을 계속 고집하면서 ‘내 성격은 아무도 못 고쳐’라고 합니다. 그것은 성격이 아니라 성질입니다. 옛날에 가졌던 옛 성품을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휘하는 모습은 같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능력이라는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능력이 급작스레 생기거나 바꾸지는 않습니다. 옛날에 작은 그릇이었던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도 작은 그릇입니다. 큰 그릇이었던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도 큰 그릇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큰 그릇과 작은 그릇의 차이를 성경은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서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계 3:8).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밖에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그 앞에 열린 문을 둔 그런 복된 교회였습니다. 예수를 믿고 매달린다고 능력이 커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예수 믿고 난 다음에도 작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을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비웃지 마십시오. 목사의 능력이란 삼천 명, 삼십 명의 구별이 아니라 삼십 명을 주님의 마음으로 기쁘게 감수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나는 왜 삼십 명밖에 안되느냐? 나도 삼천 명 모이게 늘 뛰겠다. 이러면 넘어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고 저도 그렇습니다. 제 실력이나 능력에 비해서는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많은 일을 하게 되었는데 바울은 끝까지 자신을 능렸있는 사람으로 찾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은헤의 표준으로 섰다고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도 삼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 주었다고 고백할 뿐 자신의 힘이 많거나 능력이 많아서 하나님이 미처 못 구하신 영혼을 대신 구해 왔다고 기록한 성경 구절은 한 절도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과거에 여러분을 불법에 바친 것같이 이제는 의에게 여러분을 바치십시오. 그 외에는 성경이 요구하는 것도 없고 약속하는 것도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 다음 두 번째, 부정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가 새것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성화는 여기에 말씀한 것같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린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이지 그것을 체험하거나 감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울거나 기도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기도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조심스럽게 이해하십시오. 우선 다음 내용을 무슨 뜻인가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4-6). 이것은 내가 감정적으로 진심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하는 감격에 나를 몰아 넣는 것이 아니라 하라는 것을 내 손과 발로 실제로 하는 것입니다. 내 손과 발로 해야 되는데 우리는 감정적인 감동으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가 그 중에 가장 오용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난 기도했다. 난 울었다. 이것입니다. 기도하지 말고 울지 말고 그렇게 사십시오. 온유하고 겸손하십시오. 신자끼리 싸우다가 한 쪽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다 아실 것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냥 말이 나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러십시오. “하나님은 다 아십니 다. 저는 사랑하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울지 마십시오. 그러면 나는 정당하고 상대방은 악당이 됩니다. 그러지 말고 겸손하고 온유하십시오. 우리는 기도하고 웁니다. 그러나 겸손하고 온유하고 인내하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고 근면하지 않습니다. 뭐만 합니까? 방구석에 앉아서 울고 기도만 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재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3-7).

 

 

 

실제적인 것입니다. 성화는 우리가 실제로 해야 됩니다. 결심하고 감격하지 말고 울지 말고 그것을 ‘해야’됩니다. 혈서 쓰고, 머리 깎고, “충성”, “오직 신앙으로 살자.” 이렇게 이마에다 혈서 쓴 수건 매지 말고 그렇게 사십시오.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쌓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부흥회나 집회에 가서 한바탕 울고, 그리고 돌아와서는 엉망이라는 말입니다. 변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울고 오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감격하고 오시지 말고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가셔서 그렇게 하나씩 사십시오. 설교자의 외모보다 말을 듣고 고칠 것을 확인해 가지고 와서 바꾸는 삶이 중요합니다.

 

 

 

8절 보십시오. 뒤를 이렇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게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8-9). 구원 얻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이랍니다. 이런 것을 안하고 있는 원수들은 분명해졌습니다. 이것을 하셔야 됩니다. 뭐하라 했습니까?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한 단계, 한 단계 하십시다. 이런 내용들을 외우기만 하는 자들은 그가 구원을 얻은게 무엇인지를 잊은 자들입니다. 1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10-11).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의 큰 병폐 중에 하나는 “나는 예수를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 죽어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면 금방 전도하러 내보내는 것입니다. 본인이 커야 된다는 것도 도무지 없습니다. 믿음에 있는 지식과 덕과 절제, 인내 어떤 이런 고급 신앙의 부요함이 없습니다. 뭘 몰라서 그러는지 아십니까? 한국 교회는 아직도 구원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은 물론 분명히 갖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 부요함을 모르기 때문에 신자가 갖는 책임이 너무나 가벼워졌습니다. 헌금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면 다 되는 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불법에 드리지 않고 의의 종으로 바치는 싸움을 해야 됩니다. 굉장히 어려운 싸움입니다. 매일 이 싸움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네끼리 모여서 꼭 울고 기도하고 사우나한 것같이 시원하다고 하고 나서 또 다음 죄로 옷 입을 때까지 마음껏 노는 것입니다.여름 수련회를 해마다 가면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여름수련회는 부흥회나 신앙 수련회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신자끼리 휴가 가는 것입니다. 좋은 교제를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가서 노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것입니다. 오늘날 제가 한국 교회에서 보는 병폐 중 하나는 교회 안에서 친구를 못 사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부 가면을 쓰고 오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과정을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완성품만 인정하지, 모두가 실패와 부족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공식적으로 외교적인 관계는 가져도 실제 친한 사람은 교회에서 못 가집니다. 그것을 없애고 교회 안에서 정말 친구를 사귀게 하고 그런 성도간의 교제를 허락하기 위해서 여름수련회를 갑니다. 휴가란 말입니다. 어떤 방장은 자기 방에서의 독재권을 이용해서 저녁에 모아가지고 기도회를 하기도 합니다. 그것 하지 마십시오. 저녁에 그 기도회를 안하고 성경 안 보고 자면 불안한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꾸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문제들을 적극적인 면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라는 이 권면 속에서 우리는 상당한 정열과 열심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능이나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지도 않고 새로운 능력을 받지도 않습니다. 원래 우리가 갖고 있었던 것을 이제 의에 바쳐야 되는데 이것이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려고 했는데 안되었다는 한탄을 많이 하고 회개와 함께 그 변명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래서 이런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하는 이 말은 무엇과 비교됩니까? 전에 너희가 어땠느냐 살펴보고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와 비교하라는 것입니다.

 

 

 

옛날, 여러분 대학생 때 캠핑 가서 3박 4일 동안 잠잔 적 있어요? 축제를 한번하고 끝내 본 적이 있어요? 얼마나 열심히 불법과 부정에 여러분을 다 바쳐서 힘써서 불법을 낳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부정과 불법에 우리를 바칠 때 얼마나 우리가 지극하게 정성을 떨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테니스를 아주 좋아해서 취미 생활로 하고 있는데 테니스를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8월 더위 때 나타납니다. 가장 더울 때 가장 더운 시간에 나가서 테니스를 칩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러죠. 옛말에도 있잖아요. “하인이나 시키지 왜 자기가 하고 그래.” 여러분은 해외여행 가는 것을 하인 시키겠습니까? 어디 놀러 갈 때 하인 시키겠습니까? 아니요, 직접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이 문제에서만은 하인을 시킵니다. 주님 보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안하고 난 옆에서 돈 댈테니까, 기도할테니까 대신 해달라고 그럽니다. 의에게 자신을 드리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큰 자기 기만입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습니다.

 

 

 

똑같이 여러분은 지극한 정성으로 밤을 새워 여러분을 의에게 바치는 연습과 열심을 내야 됩니다. “무엇 때문에 안됐다, 무엇 때문에 안했다” 그것은 다 아닙니다. 우리가 부정과 불법에 우리 지체를 바칠 때의 열심을 여러분은 아시죠? 요만큼만 틈이 나면 뛰어갔던 생각 안 납니까? 무엇 때문에 안된다. 무엇 때문에 안된다, 그러는 것은 전부 다 핑계입니다. 그것은 핑계입니다.

 

 

 

이규태 씨가 쓴 『한국인의 의식구조』속에 이런 예화가 하나 나옵니다. 한국 사람들은 핑계를 잘 댄다는 이야기 속에 한국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도 그 피해를 입은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만 우리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문교부 장관이 바뀔 때마다 한문 교육을 해라, 한문을 없애라, 이렇게 한문을 넣다, 뺐다 하는 동안에 한문을 제대로 배운 게 없어서 제 이름 정도밖에 모릅니다. 신문을 보면 대강 눈치로 때려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피해를 본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해인가 연말에 11명의 야구선수에게 시상하는 골든 글러브상 시상식에서 유격수 부분 수상자를 발표하던 한 여자 가수가 쪽지를 열고 크게 읽었습니다. 김재박을 김재전으로 불렀습니다.

 

 

 

누가 누구 책임인가를 묻지 말고 이렇게 한번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누가 손해인가? 한문 모르는 내가 손해입니다. 문교부 장관이 무슨 손해입니까? 똑같은 권면을 여러분에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의에게 여러분을 순종시켜서 거룩을 만들어내는 이 싸움을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손해입니다. 어느만큼 열심을 내어야 하느냐면 예전에 여러분을 부정과 불법에 드렸을 때의 열심과 비교하십시오. 아무것도 여러분을 말릴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무것도 여러분을 말릴 수 없었습니다. 옛날에 우리를 부정과 불법에 드리는 열심을 아무것도 막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열심이 의에게 여러분을 바치십시오.

 

 

 

이렇게 해 놓고 보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여러분이 왜 거룩해지지 않느냐, 왜 그동안 의로운 열매를 못 맺었는가는 여러분 탓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탓도 아니고 목사 탓도 아니고 성가대 탓도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게으름이요, 미련함이요, 완악함밖에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이 일을 하지 않아서 여러분이 지옥으로 반송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부끄러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만나는 그날 부끄럽게 그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만날 날은 조금 남았습니다. 여러분에게 허락된 구원, 여러분이 서 있는 신자라는 위치를 부디 지혜롭게 이해하시고 지혜롭게 분별하셔서 신자다운 길을 걸어 기쁨과 자랑 속에 주 앞에 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고 성화의 길을 걷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지혜를 주시고 분별을 주시며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목숨과 정성과 마음과 뜻을 바쳐 주를 사랑하게 하사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그날 부끄럼 없이 서도록 지혜롭게 인내하며 충성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48강(롬6:20-21절) 돌아갈 수 없는 삶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롬 6:20-21)

 

 

 

로마서 6장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1절에 질문으로 나왔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하는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그것은 15절에도 다시 반복되어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라는 질문으로 재등장합니다. 이 질문은 신자들에게 있어 구원이 값없이 얻어진 것이라는 것 때문에 되돌아가고자 하는 미련한 생각의 말로입니다. 이 자리에 이를 때 내가 아무것도 치른 것이 없으니까 돌아간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것도 없고 또 다시 올 때도 공짜로 올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대해 성경이 지적합니다. 이제 우리가 죄의 종이 아니고 의의 종이 된 신자의 삶을 격려하는 장면입니다. 20절과 21절에서는 죄에게 종이었을 때 삶이 어떤 모습인가를 되돌아봄으로써 의의 종으로 살아야 할 신자의 삶을 격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절과 21절에 있는 말씀은 의에게 떠나 자유하였을 때, 다른 말로 죄에게 종이었을 때의 모습을 상기시켜 우리로 하여금 의에 종 된 생활을 성실하게 살도록 권면하려는 것입니다.

 

 

 

먼저 죄의 종으로 살고 죄에게, 불법과 부정에게 우리 지체를 내주며 살던 모습을 되돌아봄으로써 열매 없는 삶이었고 부끄러운 삶이었던 그때의 삶의 특징을 상기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의로운 삶에 성공케 하려고 합니다. 20절에서는 21절에 나타난 열매 없고 부끄러운 사람의 특징의 기준은 의에 대하여 자유했기 때문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합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모습은 의에 대하여 자유하기 때문에 죄의 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의 구체적인 특징을 이야기 하자면 열매 없는 생활이 되고 부끄러운 생활이 된다라고 지적합니다.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라는 말의 뜻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저 사람은 법없이도 천국 갈 사람’이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하곤 합니다. “저 사람은 교회는 안 나가지만 나중에 예수님 다시 오실 때 천국 갈 것이라고 확신해.”이런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듣는 경우가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은 참으로 기독교를 오해한 까닭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마저도 신앙 생활을 도덕과 윤리적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의에 대하여 자유해서는 안되는 삶, 곧 의의 종이어야 되는 삶입니다. 다시 이야기해서 윤리 도덕적 기준으로 신자는 평가받지 않고 영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혹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의는 하나님의 의와는 관계가 없는 의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로마서 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에 대한 공격 장면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1-3).

 

 

 

중요한 표현입니다. 자기의 의를 세웁니다. 자신의 정당함, 자신의 괜찮음을 가지고 의라고 하고 있지 ‘하나님은 누구신가? 진리가 무엇인가? 생명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에 대하여 자유한 세상 사람들의 의입니다.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대적 의입니다. 나는 저사람보다 낫다는 의미일 뿐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점검하는 의가 아닌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인간의 자기 의에 대한 고집이 잘 설명된 예화가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여기 바리새인의 의가 바로 자기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상관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정당함을 믿는 근거는 11절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릅니다”입니다. 그 기준이 다른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기껏 세상 사람들이 갖는 의입니다. 자기 의이고 인간을 기준으로 하는 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고 이 의의 기준과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입니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3-10).

 

 

 

이 팔복은 전부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한 점검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의에 관하여 가난한 자인 것을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하며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밖에 없다고 성경은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자기 의를 하나님의 의와 비교해 볼 때 내세울 수 없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다는, 죄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의 모든 사람의 형태와 성격의 근거들입니다. 이것이 죄를 짓고 살 때, 하나님을 모르고 살 때의 인간의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선 안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했던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 화목된 자리로 돌아온 것이 구원입니다.

 

 

 

물론 그 방법에 있어서는 공짜였습니다. 값없이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예전에 살던 삶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이고 지금 삶은 하나님과만 관계된 삶입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삶에서부터 하나님을 몰라야만 살 수 있는 삶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 왔던 과정과 조건이 은혜요,선물이었다는 것 때문에 우리가 쉽게 지금의 삶으로부터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이냐 하는 것이 로마서 6장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의 처참함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더 이해하기 좋도록 실제적인 삶의 형태를 21절에 설명하는 바를 따라서 한번 추적해 봅시다. 이 의에 대하여 자유했던, 죄의 종으로 살던 그때 모습에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을 살펴봅시다.

 

 

 

열매 없는 삶이란 어떤 절대적인 목표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축적되어 가는 삶이 아닙니다. 뭔가 누적되지를 않습니다. 어떤 목표를 향하여 모든 사람은 행복을 구합니다. 만족을 구합니다. 그러나 신자 이외에는 진실된 만족과 진실된 행복을 갖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행복을 구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행복 추구와 자기 만족을 위한 삶을 자세히 추적해 보십시오. 그 만족이 기껏 좋은 차, 좋은 옷, 커피 마시는 것, 이런 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어떤 행복의 조건들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TV에 나오는 모든 광고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그 물건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더 큰 냉장고가 없고 더 큰 에어콘이 없고 더 큰 자동차가 없고 어디 놀러 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행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정당한 답이 아니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유행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압니다. 유행이라는 것은 머리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고 치마가 내려왔다, 올라갔다 할 뿐 하나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또한 유행의 내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돌고 돕니다. 유행이 바뀌는 가장 큰 이유는 내용으로 만족을 줄 수 없기 때문에 변화라는 것으로 감추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가 긴 머리를 하고 왔을 때 누구 하나가 빡빡 밀고 나와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그 충격은 어떤 내용을 갖고 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충격일 뿐입니다. 그래서 다 빡빡 밀고 다닙니다.

 

 

 

옛날에 우리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다 빡빡 깎고 다녔다가 요즘은 깍은 다음에 다시 길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니까 변화로 가리는 것입니다. 변화로 가린다는 것은 무엇 입니까? 내용이 없다는, 스스로의 자기 가난함에 대한 폭로입니다. 만족할 무슨 방법이 없으니까 다른 것으로 온갖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술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술 먹고 그 다음날 아침에 토하면서 내가 다시 술 먹으면 인간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또 먹습니다. 왜요? 무슨 해결책이 없으니까 술이라도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멀쩡한 정신으로는 문제 해결이 되지 않고 고만은 쌓이고 방법은 없으니까 이 머리를 술로 채워서 잠 재우려 합니다. 답이 없는 생활, 곧 열매 없는 생활이라는 것은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의 모습에 대한 정확한 지적입니다. 우리는 그때 절대적인 목표를 정할 수도 없었고 그것을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 좇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람이 부는 대로 날려 다니는 겨와 같고 검불 같았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입니다. 요즘은 그 유행이 없어져서 다행입니다만 여자들에게 한동안 닭벼슬머리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참으로 흉직한 머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닭벼슬 머리를 안하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모두가 기를 쓰고 했습니다. 좀 지나면 도대체 뭘 할지 모르겠습니다. 단정한 것만큼 실력 있는 것은 없습니다.

 

 

 

21절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종으로 살던 삶의 두 번째 특징은 그것은 부끄러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삶입니다. 우리가 죄의 종으로 살 때는 온통 거짓과 파렴치함이 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거짓 되고 누구나 파렴치합니다.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악을 갖고 노는 것에 대한 양심이 가책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양심을 약화시키고 마비시킴으로써 짐승화되어 갑니다. 사람들이 질서와 생명을 잃고 떠드는 축제를 가보면 사람들이 짐승 흉내 내는 것을 어디서나 쉽게 발견합니다. 짐승 흉내를 내기 때문에 즐겁자고 모인 모든 교제가 마치 미친 짓과 흡사합니다.

 

 

 

미국이 그런 일에 첨단을 걷는 나라로서 부패의 일등 국가가 되었기에 어떤 프랑스 사람이 미국을 이렇게 평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발전기가 있고 도덕과 문화가 정점에 이른 기간이 있고 그 다음 타락기로 접어든다고 합니다. 새로운 힘으로 시작한 시작기에는 힘찬 생명감이 있고 부흥 발전으로 꽃이 피는 때가 있으며 그 다음에 타락으로 가는데 인류 역사상 미국만 유일하게 부흥기 없이 타락으로 간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실감나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여느 나라와 달리 미국은 철학 위에 서 있지 않고 부요한 물질 위에 서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미국의 비극 중 하나입니다. 너무 부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유함 때문에 노는 일에 미국만큼 열심있는 나라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프로화 되어 있습니다. 미식 축구, 농구, 야구, 볼링등 없는 게 없습니다. 골프, 테니스, 뭐든지 프로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좋아하는 미식 축구에서 그들이 응원하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완전히 짐승 가죽의 탈을 쓰고 나옵니다. 짐승탈을 쓰고 나와서 짐승소리를 내면서 응원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도날드 덕이라든가 미키 마우스라든가 이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뭐가 되냐면 염소, 사자, 더러운 짐승들이 나오고 스스로 머리를 이상하게 페인트 칠하고 얼굴에다 무언가를 해 가지고 저게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르게 나오기 시작을 했고 그것이 어디에나 만연되고 있습니다. 더럽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스스로의 양심을 약화시킵니다. 미국의 악당들은 얼굴을 더 이상 긴장시키지 않습니다. 요즘은 ‘손들어. 있는 것 다 내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껌을 질겅질걸 씹으면서 한쪽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어가면서 돈 내놓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폭력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심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겁을 줄 때 어떻게 합니까? 껌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는다든가 담배불을 켜 가지고 손등에다 끈다든가 칼을 꺼내 가지고 배에 들이대는 등 더 이상 인성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겁을 줍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인간의 인성이 없어 진 것이 왜 힘이되고 자랑이 됩니까?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을 잘하라고 권유하면 금방 하는 대답은 그래서는 못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 때 가장 처음에 하는 것은 신앙 양심을 상하면 안되니까 주일날 교회 갈 때까지 냉장고에 넣어놓고 그 동안 양심 없이 살며 뻔뻔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곳에서 누가 여러분을 교회 집사로 알아 보면 양심이 금방 살아나서 그때부터는 주눅이 들어 꼼짝 못하고 다 양보하고 옵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나를 알아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신자로서 부끄럽게 살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에베소서 4장에는 이런 불신자들의 삶, 죄 가운데 젖어서 사는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엡4:17). 허망하다는 것은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열매없는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4:18). 무지하고 굳어져 있습니다. 뭘 해야 될지 모르는 일에 마음을 굳힙니다. 양심의 감각을 받지 않기로 합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9). 더럽게 삽니다. 이것이 정확히 죄의 종이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자유했을 때의 삶의 정확한 특징입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았을까요? 상대가 나보다 더 더럽게 살고 나는 그보다 덜 더러우면 깨끗한 것 같고 상대방보다 좀 덜 악하면 나는 정직해 보입니다. 즉 죄의 종이었을 때는 하나님의 의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덩달아서 악한 일에 휩쓸려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더럽게 사는 것을 다른 더럽게 사는 불신자와 비교하여 핑계대선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비추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자신들을 변명하느냐 하면 공짜로 이 자리에 왔으므로, 더 이상 우리는 벌 받을 수  없으므로 죄에게 다시 가자는 것입니다. 다시 더러운 데로 가자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말이 안되는 이야기 입니까? 우리는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더러운 데로 가선 안되며, 그것이 더러운 것인 줄 알았으면 안 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화를 격려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지해야 될 이유는 생명과 거룩에 대하여 살아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답게 사는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고 우리의 권리이며 우리의 영광입니다. 여러분, 깨끗한 음식을 받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진흙을 퍼 담겠습니까? 먹을 식사를 한 번 길바닥에 던졌다가 다시 쓸어담아 먹습니까? 그것 자체가 손해입니다. 그것은 부끄럽고 그것에 쓸데 없는 짓입니다.

 

 

 

신자가 참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것에 격려받지 못한다면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삶입니다. 거룩이 뭔지 모르고 그 거룩이 갖는 영광이 무엇인지 모르는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구별이 안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자는 저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천국에 가는 게 다 좋지만 천국에도 음악이 있을까요? 거기도 커피가 있을까요? 이 무슨 무식한 질문입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가치 있고 아무리 행복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기준을 미각이라든가, 청각이라든가 어떤 예술이라는 것 등과 비교를 못합니까? 천국도 자연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거기 가도 스포츠가 있고 거기 가도 예술이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육체가 있고 거기도 물질계입니다. 단 원리가 영적입니다. 그리고 예술이니, 스포츠이니 그 모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거룩이라는 생명과 영적인 것으로 기초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기껏 예수를 믿고 나서도 원하는 것이 병 걸리지 말자, 남에게 지지 말자, 이런 세상적인 기준으로서 신앙을 자꾸 점검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질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 좋은 학교를 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그런 처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가는 모르고 말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 더러움에서 벗어났다는 감격과 기쁨으로 난 다시는 거기 가지 않겠다고 결심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옛 삶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의미 심장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이 표현을 잘 보십시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 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사도 바울이 예전에 주를 알기 전에, 중생하기 전에는 자기가 완벽한 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입니다.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생명과 거룩과 하나님 앞에서 그는 옛날에 자기가 가졌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옛날에 그가 자랑했던 모든 것을 부끄러워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합니다.

 

 

 

목사 된 자로서 저도 여러 가지 옛날에 실패했던 일, 그리고 부끄러웠던 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많이 괴롭힙니다. 이제 목사로서 더 많이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제가 정죄받지 않을 사람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다시 그리로 돌아갑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저는 할 수만 있다면 옛날에 부끄러웠던 일들마저도 지워버렸으면 좋겠습니다. 그 생각만 하면 참 부끄럽고 잠이 안 오고 등골이 서늘합니다. 그때 큰소리친 것, 그때 자랑스러워 한 것, 그것이 무슨 자랑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가 여름이 되면 꼭 생기는 일 중의 하나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란 말을 들을 때 즉각 좋은 상상이 일어납니까? 거기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던 삶 속에서 자랑스럽고 다시 하고픈 일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딴 상처받지 않고 처음에 바로 멋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사람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저는 고르고 고르고 애써서 한참 있다가 만났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전에 만났던 여자들하고 얼마나 깊이 사귀었는가, 그런 것들을 누구에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옛 삶의 내용들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라고 권면합니다. 그 수치스러운 일로, 그 부끄러운 생활로 돌아간다는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은혜라는 이름으로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몰 상식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신자를 의와 거룩으로 부르셨습니다.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힘써 의의 종으로 여러분을 거룩으로 바쳐야 됩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럽고 희망에 찬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그 더러움과 부끄러움에 돌아가겠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더럽고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룩한 삶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면서 옛 생활이 무엇이었는가를 기억함으로써 분발된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한 삶은 기도하고 매달려서 어떤 신비한 묘약이나 마술적인 방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신자는 성경대로 생각하고 비교하고 노력하고 결심함으로써 자신에게 채찍질하셔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옛 생활을 상기하여 그때 무슨 열매를 얻었으며, 이제는 그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느냐? 생각하십시오. 다시는 부끄러움에, 더러움에 여러분을 방임하지 마십시오. 이 거룩과 영광의 길, 의와 거룩의 길, 이 길을 갈 수 있게 된 여러분은 구원 얻은 바 특권들을 날마다 감사하시고 채찍질함으로써 승리하십시오. 신자가 마땅히 걸어야 할 도리입니다. 주 앞에 서는 날, 실패자 없이 주님의 칭찬 속에, 영광 속에 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영광과 거룩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부디 우리로 지혜롭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주어진 시간들과 기회들을 지혜롭게 그리고 인내와 순종과 충성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 의와 거룩으로 열매맺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태하지 말게 하시고 미련하거나 어리석거나 고집을 부리지 말게 하시옵소서. 오직 분별하게 하시고 거룩과 생명과 영원을 준비하는 일에 우리의 남은 여생을 주 앞에 바쳐 열매 맺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 주 앞에 서는 날 칭찬과 영광을 받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49강(롬6:22) 신자의 거룩함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롬 6:22)


 


22절의 서두는 다음의 대조되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 22).이 설명을 통해서 신자의 정의를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이라는 기준에서 이해해야 됩니다. 즉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신자를 점검해야 됩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소속감, 어느 권위 아래 있느냐 하는 것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점검하지 않고 자기의 결심으로 점검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다,’ ‘선택했다’이런 식으로 신앙을 갖는 것은 그것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위험성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특별히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볼 때 두드러집니다. 예수를 믿도록 하나님께서 극적인 변화를 입도록 했던 사람들의 간증을 자주 듣습니다. 사회 저명 인사가 극적으로 예수 믿게 되었거나 유명한 연예인들이 예수를 믿게 된 극적인 상황들을 간증합니다. 그런 간증은 다 옛날에 악하게 살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에서의 극적인 요소가 간증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신자된 표는 지금 어떻게 하나님의 종으로 살고 있느냐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즉 죄의 종으로 살던 사람이 이제 하나님을 만나 자녀가 된 이후 어떻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고 있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간증 대부분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강조되지 않습니다. 그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변화되는 과정의 드라마만 너무 강조되고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간증을 듣는 이들 마음에는 고의로 교통사고를 당했으면 좋겠고 불치의 병이라도 한번 걸린다면 간증과 같은 과정에서 어떤 드라마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이것은 참 나쁩니다. 왜냐하면 그런 요소 속에는 ‘나는 남다르다’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신자인 가장 중요한 기준, 원리, 사고는 하나님의 종이란 개념으로서 로마서 14:7이하의 표현과 같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주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이런 표현은 상당히 장렬한 표현같지 않습니까? 있는 힘을 다 내고 모든 의지를 모아서 하나님앞에 자신을 헌신하는 장렬한 모습으로 비춰지기 쉽지만 실상 바울이 이 글을 쓰는 입장은 일종의 보편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한 것으로 일종의 ABC같은 것입니다.

 

 

 

감히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 9). 이 말씀은 로마서 6:22 본문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신자란 예외없이 죄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삽니다.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자신을 위하여 살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개념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것과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의 결심, 선택 이런 개념에서 신자 된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신앙이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더 이익을 보게 되었는가라는 개념으로 오해합니다. 나를 불러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익을 보신다고 구체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방향과 그런 사고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예를 공공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제가 증명할 수 있느냐면 여러분들의 기도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좀더 신앙적으로 살고 싶을 때 여러분은 자주 이런 식의 표현을 씁니다. 모세같이, 엘리야 같이, 바울 같게 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 사람을 만나서 못할 일을 더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뭐든지 더 하고 싶은데 힘이 부족하니 하나님이 저에게 주실 것은 힘밖에 없다는 기도입니다. 힘만 더 주시면 제가 하나님께 보답하겠다는 개념의 요구인데 굉장히 우습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나, 엘리야나, 바울이 그런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종종 사람들이 오해하는 첫 번째 사람인데 그는 40년동안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로의 왕자로서 왕궁에서 모든 교육을 받았으나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냈을 때는 하나님 앞에 딱지 맞았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애굽 관원을 때려 죽였을 때 하나님이 편 들어 주지 않았으므로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 그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동으로 허송세월하고 드디어 이에 모든 희망과 꿈을 버리고 이제는 틀렸다고 생각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내 백성을 인도해 내라.’ ‘못 갑니다.’ 그때 들어 쓰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모세를 적용하고 이해합니까? 40년동안 바로의 궁에서 세상준비 다하고 또 미디안 기도원에서 40년동안 영적인 훈련을 다 쌓으니까 결국 하나님이 쓰지 않았느냐? 이것이 우리의 이해입니다. 그러나 인간 모세는 훌륭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썼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쓰기 위하여 인간의 모든 욕망과 능력과 헛된 것들을 버리는 시간을 그에게 허락했을 뿐, 우리가 아는 것같이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다 잡고 죽일 때 늘 도망다녔던 인물입니다. 아합이 엘리야가 필요해서 만나자고 할 때 겁이 나서 ‘하나님 불을 내려서 죽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나중에 아합이 엘리야를 데려오라고 누굴 보내면 신하들이 떨었습니다. 가기만 하면 죽으니까요. 그래서 마지막에 엘리야를 불러오라고 보냄을 받은 신하는 엘리야를 부를 때 처음 이야기부터 “날 죽이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 죽이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제발 날 죽이지 마십시오.” 그러고서야 만났던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승리한 것 때문에 엘리야는 너무 크게 미화되고 있고 오해되고 있습니다. 그가 내려와서 이세벨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놀라 도망가서 광야 길 로뎀나무 밑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절 죽여 주십시오. 난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즐겨 ‘엘리야 같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신자들이 ‘나를 바울 같게 하소서’ 이것은 어디서 나온 망상인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많은 서신을 남기고 그래서 우리 후세 신자들에 의해서 그의 이름이 높아진 것 때문에 부러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를 생각할 때 죄인의 괴수로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 1:12-16).

 

 

 

우리는 바울을 어떻게 오해합니까? 바울이 워낙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바울을 놓치면 손해라서 누구 누구를 보내고 여느 사람을 보내도 안되어서 예수님이 친히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을 스카웃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쓰임받은 사실에 대해 모든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얼마나 은혜스러운가가 증명되는 일에 쓰임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과 다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여전히 기도할 때 ‘바울같이 되게 하소서’합니다. 끊임없이 엘리야같이, 모세같이,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세같이 되고 엘리야같이 되고 바울같이 되는 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만히 있으면 그 사람들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똑같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유명하게, 능력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있는 사람을 쓴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가 능력을 요구하는 것은 신앙으로 말미암아서 자기 자신이 영웅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드렸고 다른 신자 100명이 예수 믿은 것보다 휠씬 많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골치아픈 신앙입니다. 옛날에는 내가 모르고 이 좋은 능력과 이 좋은 머리를 가지고 죄 중에 살았는데 하나님이 날 알아보시고 구원해 주셔서 이제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것이니 ‘하나님 이제 가서 주무세요. 이제부터는 나오실 것이 없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골치아프게도 우리의 결심, 우리의 열심 이것이 얼마나 신앙의 쓸데없는 근거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다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기로 되어 있는 자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우리를 판단해야 되고 권위 질서라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위치를 지켜내야 됩니다.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

 

 

 

딴 사람들이 바울을 보면 놀라는 것입니다. 아니 저 원수가, 저 악당이 하나님 앞에 벌받지 않은 것만 해도 기적인데 거기다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거야? 바울은 한번도 자기가 똑똑하다든가 능력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2절부터 16절에 이르는 이 디모데전서의 고백 속에는 이렇게 결론이 나옵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딤전 1:17).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뭔지 모릅니다. 응석받이들 같고 그래서 기고만장한 사람들 같습니다. 귀순한 간첩과 같습니다. ‘내가 옛날에 속아서 김일성을 위해서 살았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이 나를 용서해 주었으니 물론 내가 잘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너 잘한 것이다. 나를 용서한 것은 잘한 것이다. 이제부터 가만 있어라. 내가 알아서 할테니’, 이런 신앙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살든지 죽든지 주를 존귀케 해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영광입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이 더 영광을 얻거나 여러분이 없다고 하나님께서 할 일 못하시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살펴봅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사도 바울에게는 어떤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학자들은 간질병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바울 사도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생명 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를 전할 때 은혜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권면하고 병자도 고치지만, 갑자기 자기가 뒤집어져서 경련을 일으키면 누가 은혜를 입겠습니까? 우리 교인들은 제가 살이 조금만 더 쪘어도 은혜가 두 배는 넘칠 것 같다고 말해 주지만 만일 간질로 교회당 한가운데 갑자기 넘어지면 누가 은혜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이 안타까워서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이 간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네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네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만날 사람이 있으면 나부터 만나보라는 목회자나 은사받았다고 칭하는 이들은 오히려 아무도 하나님을 못 만나게 막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넌 만날 자격 없어, 또 하나님 만날 자격이 있으면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는 망상이 현대 기독교 신앙인들의 큰 약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내가 약해지고 부족할 그때에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일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신자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성공해야 하나님이 성공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요즈음 한국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어려움을 겪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경제가 어려워지면 교회를 떠납니다. 어려워지면 교회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교회도 체면이 설 때만 나온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아무런 영적인 질서도 영적인 근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어려워지면 교인들을 볼 낯이 없고 하나님 보기 창피해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게 됩니다. 고3이 되면 교회 못 나오게 합니다. “야, 네가 일 년 동안 괜히 예수 믿어 봤자 얼마나 더 믿겠냐? 그러다 네가 학교 떨어지면 너도 나도 창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얼마나 창피하시겠냐?” 자기가 만든 말입니다. “네가 이 일 년을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에 척 들어가 봐라. 너도 나도 좋고, 하나님은 또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겠느냐?” 하나님께서 대학교 배지 갖고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이 재수, 삼수해서 대학 못 간 분입니까? 모두 우리가 만든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된 표는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의 종으로서, 나의 욕심과 나의 영광을 이루도록 전락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이제 내가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된 이후에도 여전히 옛날에도 죄의 원리를 따라 살면서 그 욕심의 명분과 용어만 기독교적인 것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하나님 절 부자로 만들어 주신다면 헌금 많이 하겠어요.” 언제 여러분에게 헌금 많이 하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왜 헌금 많이 하겠다고 돈 많이 달라고 기도합니까? “건강 주세요, 나가서 매일 청소하겠습니다.” 청소하지 마십시오. 청소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십시오. 겸손해지고 온유하게 사십시오.

 

 

 

아무도 하나님의 종으로 변하지를 않습니다. 신자 된 모습으로 도무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약해지지를 못합니다. 주인이 종보고 너 화장실 청소하라고 할 때 그때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도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지위가 낮은 것조차 아닙니다. 주인이 시킨 일을 열심히 하는 것보다 더 멋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로마서 6:22에 있는 말씀은 바로 지난 번에 우리가 생각했던 옛 생활, 죄악에서 살던 생활과 이제 비교했던 달라진 신자의 생활입니다. 신자란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거기서 이것보다 더 정확한 신자의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은 달리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은 자입니다. 열매라는 것은 자기가 열심을 내 가지고 뭘 만들어서 하나님께 갖다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열매라는 것은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성경에서 열매는 항상 어디에 붙어 있는가를 증명하는 상징입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들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라는 것은 전부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자신들이 직접 나가서 무엇을 해 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입니다. 1절에 있듯이 이 참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으면 당연히 포도가 가지 끝에 열립니다. 오늘날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느냐면 모두가 하나님이 내 능력을 알고 나를 불러서 동업자로 삼았다고 오해합니다. 때문에 자신이 나가서 일을 하되 자기가 아니면 못할 일을 하나님께 해 드릴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전부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 전부 아르바이트 나갔습니다. 무슨 방법이든지 상관 않고 무조건 돈을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돈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런 포도나무를 보셨습니까? 아주 어리석고 미련하고 무식한 신앙입니다. 모두 누가 더 많이 내느냐 하는 경쟁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누가 하나님께 더 도움이 되는, 능력있는 돈 그릇이냐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여기서 나열되어 있는 것은 죄악의 목록도 아니고 이런 것을 하면 안된다는 어떤 불신앙의 대표적인 행위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왜 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는 한 이런 것밖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밖에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6:22과 같이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은 자입니다. 이 거룩함이라는 것, 생명, 영원은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는 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6-21).

 

 

 

죄악에 연합되어 있는 자들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상)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들의 열매들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만 이것을 맺습니다. 따라서 이 둘을 비교할 때 육체의 열매를 맺지 말자라든가 성령의 열매를 맺자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넌센스입니다. 그것은 맺자, 맺지 말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열매를 보고 지금 누구에게 붙어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증거요, 표증입니다.

 

 

 

우리가 신자되었을 때 신자 된 표는 능력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거룩한 인격, 거룩한 원리, 거룩한 소원, 영에 속한 것들, 경건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온 것이므로 경건과 생명과 영원에 대하여 우리는 가진 것이 없을 뿐입니다. 물론 능력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자가 능력 경쟁을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신자는 모름지기 경건에 열심을 내야 되고 이 경건으로 자신을 점검해야됩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거룩해지고 경건해지는 것으로 그가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진리와 거룩과 경건을 보급받고 있는 자들임을 증명해내야 됩니다.

 

 

 

결단코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에 붙었을 때, 죄가 우리에게 공급하고 우리를 파멸시키던 것으로 내가 소속된 나를 노예로 부리는 우리 주인이었던 죄의 악함을 증명했었습니다. 그때 열매 없고 부끄럽게 살았던 것같이 우리가 이제 거룩함에 이르러서 새로운 소속이 된 것, 이제 우리의 주인이 된 분이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신자의 존재와 삶과 모든 행동과 사고 속에서 증거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신자의 책임일 뿐 아니라 책임 이전에 당연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자의 자랑과 특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성경의 요구에 따라서 사십시오. 사업에 실패하거나 아이가 학교 떨어졌다고 창피해서 교회를 못 나오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짓을 삼가십시오. 신자는 죄에서 자유함으로써 거룩해져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진리와 거룩을 공급받고 있어야 되고 그것이 증명되어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자랑이고 기쁨이고 구원 얻은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우리를 이제 거룩에 이르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로 지혜롭게 하시고 말씀 가운데 서게 하사 우리가 내놓을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과 진리와 모든 복을 허락받은 줄 이제 알고 순종하게 하시고 온유하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며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옵소서. 우리를 보는 이들이 우리를 거룩케 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케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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