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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강해 6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6

 

 

 

 

 

 

 

 

 

로마서 강해 6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로마서 51강(롬7:1-4절) 7장개요 
로마서 52강(롬7:1-4절) 율법의 가치
로마서 53강(롬7:4절)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1)
로마서 54강(롬7:4절)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2)
로마서 55강(롬7:5-6절) 죄로 얽매였던 몸
로마서 56강(롬7:6절) 영의 새로운 것
로마서 57강(롬7:7절) 율법이 알게 한 것
로마서 58강(롬7:8절) 죄가 기회를 탐
로마서 59강(롬7:8-9절) 죄가 탐심을 이룸
로마서 60강(롬7:10-11절) 계명으로 나를 죽임

 

 

 

 

 

 

 

 

 

 

로마서 51강(롬7:1-4절) 7장개요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1-4)

 

 

 

로마서에서 제일 유명한 장은 7장일 것입니다. 그 까닭은 22절 이하에 나오는 다음 내용 때문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2-24).

 

 

 

이 구절은 도대체 이 한탄이 신자의 것인가? 아니면 불신자의 것이냐로 오래도록 신학자들간에 논쟁의 초점이 되어 왔던 구절입니다. 로마서를 읽던 열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바로 이 고백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로마서 7장이 유명해져 있는 셈입니다. 그러마 로마서는 5장이 제일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는 우리가 예전에 죄의 종이었고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나고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확인합니다. 또 구원이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이므로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않고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는 위치에 왔음을 확인합니다.

 

 

 

로마서 5:21로 가시면 “이는 죄가 사망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왕노릇하여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생에 이를 것입니다. 이런 복음에 대한 성경의 설명은 즉각적으로 두 가지 오해를 야기시킵니다.

 

 

 

첫째 오해는 6:1에 있는 것과 같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으로 대표되는 은혜 지상주의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부터 율법도 필요없고 어떤 규범도 필요 없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고 우리를 은혜로 다스리시니 무엇을 해도 괜찮다는 반율법주의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이 구원의 궁극적인 결과에 이르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요, 지금도 우리 중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우리는 의와 거룩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고 영광된 결국을 위하여 우리를 근신하며 거룩케하며 채찍질해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목적이요, 은혜의 이유입니다.

 

 

 

둘째 오해는 은혜 지상주의에 대한 하나의 의문점으로 “그러면 율법은 왜 준것이냐? 즉 율법의 가치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제부터 7장에서 다루는 율법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율법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율법을 주셨습니까? 죄를 지적하고 죄를 점검하고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준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7장을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율법 안에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7절부터 12절까지는 율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지도 못하고 율법으로 성화되지 못한다면 로마서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라는 질문에 봉착하여 율법의 기능과 목적을 설명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12절에 이렇게 결론이 나옵니다. “이로 보건데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 자체는 잘 못이 없습니다. 잘못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13절에서 끝절까지는 24절로 대표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는 표현이 신자가 하는 표현이냐, 불신자가 하는 표현이냐가 아니라 율법 아래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성화가 불가능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화는 오직 25절에 나오는 결론으로 나오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관성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구원이 뭐냐’하는 문제에 대한 성경의 일관된 5장, 6장, 7장의 작업들을 꿰뚫어 보십시오.

 

 

 

로마서 5:10에서 구원을 이렇게 설명했던 것을 상기하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늘 말씀 드리다시피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표현은 그것을 넒은 의미로 쓸 때와 좁은 의미로 쓸 때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그 표현에 있어서는 언제나 같은 표현을 쓰고 있기 때문에 혼동의 여지가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구원을 쓸 때에는 신분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의의 종이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하는 것, 그 운명이 변하는 것이며 전문적인 용어로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의롭다고 법정적인 선고를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한 내용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 구원이 신분의 변화만이 아니라 수준의 변화가 있음을 성경은 즐겨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칭의만 받지 않고 성화되고 영화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흠도 없고 점도 없는 거룩하고 영광된 모습으로 설 것입니다.

 

 

 

10절의 말씀처럼 이야기를 하자면 구원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죄의 종으로부터 은혜 아래 끌어와야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끌어와야 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로부터 죽어서 탈출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넓은 의미로 볼 때 구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것은 중생한 것으로 하나의 출생입니다. 갓난아이같이 출생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안에서 자라나야 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과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우리를 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10은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이라는 칭의와 그 뒷부분에서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라는 성화와 영화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뒷부분의 오해 때문에 적지 않은 신자들이 많은 혼동을 한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 구원을 약간 잘못 소개한 것입니다. 앞의 칭의 부분은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겠지만 칭의를 성화와 영화을 제외해놓고 강조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을 향하여 교회가 요청하는 것은 구원의 확신을 얻은 후에 곧 구원 사업에 힘쓰는 일입니다. 이것만큼 한국 교회가 실패하고 혼란에 빠진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너무 쉽게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물론 은혜가운데 얻은 것으로 생각하면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전도한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책임입니다. 신자들은 개인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전도하는 일을 한시도 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도가 신앙 생활은 아닙니다. 신자가 져야 할 책임인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생활은 전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전도하려고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화되고 영화되려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신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죄 가운데서 구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 하나님이 그 신자를 향하여 갖는 궁극적인 목표는 그의 신앙 인격입니다. 전인적인 거룩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영광의 완성입니다. 그것이 전도 사업을 통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인격이 완성되기 위하여 그 잡다한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성숙되기 위하여 영어를 잘 한다든가 수학을 잘한다는 것만으로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신자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 복잡한 삶입니다. 그러나 전도라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삶이 없다고 정죄를 뜻밖에 쉽게 해 버리는 것을 자주 대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국내전도위원회와 해외전도위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번도 우리 교회 목표를 선교나 전도나 교육이라는 목표로 세운 적이 없습니다. ‘세계를 그리스도에게’ 멋있습니까? 그렇다고 그 사람이 훌륭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천만을 그리스도에게’, ‘이 땅에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 그럼 멋있지 않습니까? 멋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로서의 교회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이란 여러분들이 이웃에 거짓을 행치 않고 겸손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콩나물 장사와 싸우지 말고 작은 수박 하나가 오천원인데 오천원 주고 큰 것을 요구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백만원짜리 밍크 코트는 빚을 내서라도 사오면서 고구마 장사하고 싸우고, 아이스크림 장사하고 싸우고 그러지 마십시오. 싸우려면 밍크 코트 장사와 싸워야 됩니다. 그것은 백만원, 이백만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고 이쪽은 오천원, 천원인데 이것을 깎으면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신앙 인격이 변해야 합니다. 겸손하며, 온유하며, 자비하며, 인자하며, 정직하며, 인내하는 이런 사람이 됩시다. 예의가 있으며 남을 시기하지 않으며 교만치 않는등 이런 것은 하나도 변하지 않고 교회든, 개인이든 전도, 헌금, 철야기도, 이런 것만 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런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뭔지 몰라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구원이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죄의 종으로 전락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사 하나님과 화목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화목된 이후에 하나님의 사람답게 키워내고 완성시키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 5장 10절이 6장에서는 같은 일관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1-22).

 

 

 

신자란 구원을 얻은 이후에 그 구원이 거룩함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며 이 일을 완성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켰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고 그것만 만족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만족하시는 자리까지 떠밀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자가 된 이후에 신자와 불신자중 누가 편안하며 누가 더 고달픕니까? 신자가 고달픕니다.

 

 

 

욥이 오죽 고달프면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침 삼킬 동안도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까?’ 얼마나 고달픈가를 히브리서 12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히12:8 上).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밥을 손으로 먹든 아무데서나 싸든 내버려 두십니까? 아닙니다. 어른에게 인사 똑바로 해라, 경어를 써라, 밥을 먹을 때는 말하지 말라, 젓가락질 똑바로 해라.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키우는 동안 옳게 살도록 많은 것으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완성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실패되지 않고 그 결국에 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묶으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하지 못합니다. 나 혼자 내 의지, 내 노력에 의지하는 율법만 갖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죄를 짓습니다. 가끔 죄와 세상의 악한 것에 우리를 잠시 집어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거기서 장기 체류를 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집 짓고 살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신자들 스스로 경험한 것이고 주변에서 얼마든지 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죄 아래에서는 마음이 불안해서 못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회개하고 돌아와야 속이 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자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여러분을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 미련한 사람이 ‘난 모르겠다’라고 주저 앉아 있으면 하나님이 직접 인생에게 간섭하시는 것을 보시지 않습니까? 멀쩡했던 사업이 망하고 몸이 다치고 자식이 집을 나가기도 하고 그런 일이 탁 터지자마자 누구나 맨 처음 고백하는 것은 “아이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자주 경험했고 주위에 얼마든지 있는 사례들입니다.

 

 

 

언제가 저희 교인의 가까운 친구분이 고속도로에서 심장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간신히 도로변에 차를 세워놓고 정신을 잠깐 잃었다가 고속도로 순찰대에 구조를 받았습니다. 그 부인께서는 대단히 열심있는 신자입니다. 그래서 이 기회다 하여 “당신, 하나님이 경고한 줄 알고 회개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저희 교인인 친구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경고인가? 그래서 우리 교회 교인도 열심히 공갈을 쳤습니다. ‘마지막 경고인 줄 알라. 다음에는 죽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그 부부와 우리 교인 부부와 저희 부부가 만났습니다. 정말 분위기가 살벌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 한사람을 놔두고 나머지 모두가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정말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까? 우연입니까?” 제가 대답을 했습니다. “아마 우연일 것입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제가 마지막 결정타를 먹일 것으로 생각했던 그 부인이나 저희 교인 부부나 제 아내나 당사자까지 모두 놀랐습니다. 본인 스스로 예상한 것과 달리 저의 대답은 예기치 않은 답이었습니다. “아 괜찮습니다. 그것은 우연입니다..” “아니, 그럼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어떻하긴 어떻게 합니까, 우선 저녁부터 먹읍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못꺼내게 했습니다. 내내 저녁을 먹으면서 불안한 것입니다. 이게 진심일까, 아닐까? 제가 끝에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은 한두 번 가지고 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이 분명하지만 아닌 것으로 합시다. 이것 한번으로는 당신이 돌아올 것이라고 저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습니다. 앞으로 열 댓 번 더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이것입니다. 몇 번 간섭하셨느냐가 아니라 돌아오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무서워하셔야 됩니다. 그것을 첫 번이자 마지막으로 삼는 사람은 별 것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몇 번을 다시 도망가든 하나님이 그래서 나중에 이제는 “나도 이 사람을 포기했노라”하시는 것을 보셨습니까? 역사상 그런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끝은 언제나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하나님에게 붙잡힌 바 된 그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열매 맺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일관된 핵심중에 하나이고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될 구원관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로마서 7장을 오해할 것이 없음에도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로마서 7장에 대하여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과 실패를 맛보곤 합니다. 구원을 너무 너무간단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 믿었다. 나는 이제 천국갈 것을 믿는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잔재들을 뽑아내는 싸움을 하면서 죄를 이길 거룩한 인격의 넉넉한 경지로 나가는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을 향하여, 영광을 향하여 나가는 이 길에서 성경이 요구하는 어떤 모델, 율법이 제시하는 어떤 기준을 배워갑니다. 그러나 삶에서 그 기준들과 스스로를 비교해 보아서 실패했다고 느꼈을 때 갑자기 그 자신을 율법 아래로 끌고 오는 우를 범합니다. 이것이 7장 성경 내용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는 목표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실패했을 때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자인데,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데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자신의 신분에 비추어 본 부끄러움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신자가 아닌가 보다’라고 느낄 뿐입니다. ‘나는 신자가 아닌가 보다’, 이것만큼 신자들을 실패케 하는 것은 없습니다. 신자는 신앙생활에서 한 번의 실패, 아니 거기다 ‘0’을 몇번씩 붙여서 100번의 실패, 200번의 실패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아니 천 번, 이천 번이라도 좋습니다. 신자는 실패를 부끄러워하셔야 됩니다. 단지 부끄러워할 뿐 ‘나는 아닌가 보다’하면 안됩니다. 결코 갈 수 없는 길을 혼자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실제적인 유혹은 바로 자포자기인 것입니다. ‘난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으로 여러분을 몰아가는 것은 죄의 유혹입니다. 여기에 지지 마십시오.

 

 

 

그래서 7장이 끝나고 8장을 시작할 때 이런 것으로 시작하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여러분은 정죄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이 이제 우리에게 하는 것은 뭐가 죄인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의 수준이 최소한 어느 정도인가? 나를 점검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미흡하다고 해서 내가 구원을 못받았고, 하나님이 나를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종종 시험을 봐야 됩니다. 시험을 보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에 약한가? 내 실력이 어느 만큼 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시험에서 성적이 나쁘다고 죽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은 죽이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서 더 보강하려는 의도에서 보는 것입니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의 정죄를 위한 용도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신자는 율법을 ‘이제 내가 어디가 약한가? 어디를 더 노력해야 하는가?’를 위한 것밖에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율법의 정죄 아래로 끌고 오지 마십시오. 자신이 신자 된 것과 신앙생활 속에서 자신을 점검할 때 “난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난 왜 이렇게 미련할까? 난 왜 이렇게 게으를까?” 이렇게 자책하시는 것은 좋습니다. ‘난 아닌가 보다’ 이것은 안됩니다. 그것은 신자가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을 이해 못한 증거가 될 뿐입니다.

 

 

 

구원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로마서 7장과 6장은 은혜 지상주의와 율법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의심하는 이 두가지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을 틀린 것이 됩니다.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은혜가 신자에게 죄를 조장하게 만든다든가 율법이 신자를 아직도 정죄하게 만드는 유혹이 올 때 신자는 그 두 가지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인도하심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연합시키는 것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성공하고야 말 우리의 운명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이해를 제대로 했든, 못했든 이런 것이 구원인 줄 알고 분명히 이해하십시오. 하나님이 포기하시지 않는 여러분을 자신이 포기하여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신자로서 감사와 소망 속에서 그리고 믿음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영광된 자리에 세우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것도 이 일을 막을 수 없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래서 그 가운데서 든든히 서서 승리를 구가하게 하시옵소서. 찬송과 감사로 우리 인생이 이어지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요구하시는 것으로 채워가서 거룩과 의로 주를 만날 준비를 하고 주 앞에 서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2강(롬7:1-4절) 율법의 가치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7:1-4)

 

 

 

성경이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 제일 먼저 강조했던 것이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은혜로 구원한 것이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표현이요, 내용입니다. 그랬을 때 신자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을 오해하기도 하고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율법과 무관하다는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6장에서 이미 은혜에 관한 오해를 풀어 보았습니다. 7장에 들어와 율법과 관계가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을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7:1은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주장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제 율법에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율법이라는 남편과 결혼했다가 이제 우리가 죽어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초점은 우리과 율법과 무관한 자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무관하게 되었다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자들은 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굉장히 큰 오해를 하곤 합니다.

 

 


성경이 주장하는 것은 4절에서 있는 바와 같이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율법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종종 율법과 무관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인하여 무법한 자가 되곤 합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말로 무법한 자가 되는데 참으로 곤란한 문제입니다. 성경이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율법의 정신을 이야기할 때가 있고 구원과 관계하여 구원의 조건으로 율법을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서 7장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율법의 정신이나 내용이 아니라 우리 구원과 연관된 행위 언약이라는 차원에서 율법을 다루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율법으로 우리의 구원의 조건을 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 우리 구원의 조건과 자격을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의 내용을 만족시키라고 구원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골자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내용을 만족시키는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분이 조그만 가게에서 금전출납을 위하여 계산기를 갖다 놓은 것과 같습니다. 계산기를 두드려서 이것은 값이 얼마고 상대방이 얼마 내었으니까 얼마 잔돈을 주어야 된다라고 계산기에 나오지만 그것이 돈을 만드는 기계는 아닌 것입니다. 계산기가 돈이 얼마 들어오고 얼마 나가고 잔돈은 얼마 내주어야 하는가를 나타내 주는 것과 돈을 만드는 것과는 다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가 거룩한가, 안 거룩한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가, 안 사는가를 지적하고 나타내는 눈금입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게 사는 방법은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로마서 7장에서 설명하려는 것은 구원에 있어서 첫 단계인 칭의의 단계에 있어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화에서도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이제 나는 율법과 상관이 없다. 은혜아래 있다. 내 마음대로다. 내 마음에 선한 생각이 들기만 한다면 진심만 가지고 있으면 다 된다’라는 개인 주관적인 세계로 빠져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생명과 거룩을 산출해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내가 거룩하게 살고 있는가, 의로운 길로 가고 있는가를 점검해 주는 가장 정확한 하나님의 눈금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율법이 행위 언약적 차원에서 우리와 상관 없는 것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과 원리적 차원에서는 항구적인 구속력이 있음을, 그 양면성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을 보십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분명히 해 두셔야 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만드는 방법이 없습니다. 율법은 의롭게 만드는 어떤 도움이 되거나 무슨 방법이 되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의로운가, 안 의로운가를 나타내는 눈금입니다. 같은 갈라디아서 3:15로 가 봅시다. 왜 율법을 주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법 합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5-17).

 

 


원래 구원에 관한 약속이 우리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에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 3장에서 구원에 관한 설명을 하고 난 다음에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를 말합니다. 온통 그 이야기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무엇으로도 분명하냐면 구원의 조건을 믿음으로 삼으시고, 율법은 430년 후에야 주셨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준 어떤 방법도, 조건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왜 주었느냐?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 한 것이라” 우리가 너무 죄밖에 모르고 죄만 짓고 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시키기 위해 준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범법함으로 인해 더한 것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원래 성경은 이혼을 원칙적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혼을 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도 예전에 칠거지악(七去之惡)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쳐다볼 때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왜 만들었느냐하면 부부간의 관계를 돈돈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자기 욕심을 차리는데 편리한 구실을 찾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율법을 받아서 이혼을 할 때는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법을 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혼증서만 써 주면 되는 것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크레디트 카드 긁듯이, 개인수표 끊듯이 이혼증서 하나로 ‘나는 이 여자와 이혼했음’도장만 찍어 주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뜻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움에서 그 문제를 뭐라고 논증하냐면 “너희 완악함을 인하여 그렇게 한 것이라”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것은 쉽게 부인을 버릴 수 없는 까다로운 절차라는 말입니다. 이혼증서만 써 주면 아무때나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전에는 싫으면 “나가”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되었던 것이 더 어렵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부부싸움을 하면 “나가”이러는 사람들, 몹시 좋지 못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쉽게는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쉽게 벌어지지 못하게 하려고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것과 같이 왜 율법이 주어졌느냐 하면 우리가 누군가를 확인시켜 주기위해서입니다. 로마서 7장으로 갑니다.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죄가 드러나도록, 어디가 고장인가, 어디가 문젠가를 지적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요, 목적입니다.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죽을 목숨,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지적하는 것,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이지 율법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고쳐 놓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타고 다니는 차에 기름이 바닥나면 ‘주유소에 가십시오’하고 경고들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경고들을 째려본다고 기름이 채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가서 넣어야 합니다. 경고등이 켜지는 것이 기름을 생산해 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율법으로 우리가 새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율법으로 생명을 만들어낼 수도 없고 율법으로 의와 거룩을 열매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꾸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무슨 반발을 합니까? 무슨 오해를 합니까? 율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 율법이 필요없다는 오해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 항구적인 정신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알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7-19)입니다.

 

 


자, 우리는 은혜로 구원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율법으로 얻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과 은혜가 대치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이 반대 편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자가 아니다, 나는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율법의 양면성, 우리에게 새 생명을 입게 하거나 우리로 거룩과 의를 만들어 낼 생명을 주는 기능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지고 있냐하면 ‘네가 지금 거룩하냐’, ‘네가 지금 의로우냐’, ‘네가 생명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지적하는 것, 이것을 율법이 하는 기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가 된 후에 우리가 율법의 눈금에 비추어 볼 때 만족시키는 자가 되어야 되는데 그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것을 이제 신자가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7장의 가장 중요한 싸움 중의 하나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되는가, 왜 율법과 연합하면 되지 않으냐, 율법과 연합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극단적인 차이가 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이렇게 다루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의와 거룩은 율법과 연합된 의와 거룩과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만드는 의와 거룩은 율법과 연합하여 만든 자의 의의 수준과 거룩의 수준에서 비교가 안되게 차이가 납니다.

 

 


누가복음 18:9입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9-12).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우리는 이것보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율법과 연합되어서 만드는 의는 이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나는 저 사람보다 낫습니다’, ‘나는 저 사람이 하는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 즉 율법의 진정한 요구는 이것입니다.

 

 


율법사가 주님께 와 묻습니다, “계명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네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그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사랑이라는 단계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과의 관계로는 그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의와 거룩을 갖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나는 저 사람과 다르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는 마태복음 5:20에서 본 바와 같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높아야 되고 그것은 율법과 결탁해서는 만들어내지 못하는 의입니다. 율법과 결탁해서는 기껏 “저 사람이 하는 것을 나는 안합니다”뿐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것, 아니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의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면, 즉 그의 생명으로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어느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율법에서 무엇을 읽느냐?”, “네, 이 율법은 내가 다 지켰습니다.”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네가 오히려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네 재신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물론 이것은 사유재산을 갖고 있으면 안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한 것은 이것입니다. 너를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은 있지만 아직 사랑하는 마음으로까지는 가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가 있지 않다는 것은 너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생명과 연합되어 있지 않다는 이것입니다. 그것은 율법과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청년은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근심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곧 이 비유를 베풀었습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보고 거기까지 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과 연합하여 만들어 내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만들어내는 것과의 차이를 보라는 말입니다. 율법적 사고방식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을 만들어내서 “어때요. 이만하면 됐지요”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자기 의를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율법을 가지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최선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네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지 않은 자들은 이 율법을 가지고 뭘 만들고 있다구요?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를 만들어 내고는 ‘율법을 지켰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이러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저 사람과 다릅니다.’ 이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율법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는 율법을 만족할, 우리의 어떤 수준과 내용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들어낸 것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3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분명합니까? 율법을 좇아서는, 육신을 좇아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합니다. 율법을 좇고, 육신을 좇는다는 말이 같이 오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있지 않기 때문에, 생명을 부여받지 못하고서 율법을 이루려고 할 때는 자기 의를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능력, 나의 남보다 다름, 이것을 증명하는 것에 그칩니다. 무엇을 못 만들어내느냐? 거기에는 생명도, 거룩도, 의도, 진리도, 영원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있습니다.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생명과 의와 거룩을 공급받았을 때 비로소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눈금인지 모릅니다. 율법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켜 율법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율법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요, 거룩이요, 영광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는 가를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육신과 영을 나누고 있고 이제 두 사람을 나눕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7-9).

 

 

 

육신에 속한자, 영에 속한 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그가 만들어내는 것이 그가 만족시키려는 율법을 그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어떻게 채우고 있는가 하는 극단적인 두 대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은 자들과 불신자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율법을 가지고 가서 자기 치장밖에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율법의 가장 높은 수준, 가장 분명한 목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이루어내지 못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구원이 무엇이냐는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모두가,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내가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것들로 말미암는 열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남다른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율법으로 빠져듭니다. 우리는 율법을 방법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채워서, 율법을 행함에 있어 내가 남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차원에서는 우리는 죽은 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뿐이라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자랑밖에 없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율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로우며, 거룩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데로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혼동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끊을 자가 없는 것이 우리가 구원 얻은 자로서 맨 먼저 확인해야 될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끊어지지 않는 한 내가 나태하든, 내가 바람에 흔들렸든, 끊임없이 거기로부터 생명과 진리와 거룩한 것과 능력이 공급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크게 잘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을 잊고, 내가 남다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꾸 율법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으로 가서 다시 율법과 연합하여 나의 남다른 것을 증명하든가 아니면 “주님 가만히 계세요. 여태껏 주님이 고생하셨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보답하겠습니다.” 이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것이 신자의 모든 숨쉬는 것, 한 걸음 발을 떼어놓는 것, 눈동자 하나를 돌리는 것까지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 자임을 아는 순종, 귀 기울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함께 일하는 연습, 그와 호흡을 맞추는 법 이런데에 아무런 개념이 없기 때문에 훈련을 받지도 못하고 할 생각도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인삼각이라는 놀이가 있습니다. 둘이서 발을 하나씩 묶고 뛰는 것인데 완전히 따로 뛰면 둘 다 넘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자들의 가장 큰 잘못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서 이제 그리스도와 나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이 신자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며, 자랑이며 무기인지 아는 앎이 없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신자의 자랑은 자식이 학교 붙는 것보다 더 큰 행복도 없고, 또 학교 떨어지는 것보다 더 큰 슬픔도 없는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아무런 기쁨도, 감사도, 자랑도, 힘도 없고 애가 붙느냐 떨어지느냐로 심장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이런 신앙은 신자가 아닙니다. 그의 모든 감사와 희망이 구름위에 올라갔다가 바다 속에 빠졌다가 하는 것은 애 학교 붙는 것, 입학이냐, 탈락이냐, 재수내, 삼수냐에 달려 있습니다. 참 부끄럽고, 치사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그로부터 틀림없이 생명과 진리와 능력이 공급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있고 우리가 거룩할 수 있고 남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이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억울하다고 하소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기쁨을 누리는 신자가 적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결론에서는 어느 부분에다 초점을 두고 있는지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야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우리는 율법과 기술제휴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신령한 것과 모든 영원한 것과 생명되는 것이 공급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고갈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생산하지 않습니다. 그는 포도나무고 우리는 그 가지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게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 얻었다는 것이 무엇이냐? 신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부분에서 감사하고 자랑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것 놓치면 애가 학교 붙으면 행복해지고, 학교 떨어지면 절망하게 되는 데로 간다는 말입니다. 그리로 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혹, 삼수하고 사수하고, 오수, 육수…구수를 하는 한이 있어도 여러분을 하나님 안에서 끊을 수 없으며, 여러분 자녀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한 이상 여러분의 자녀의 운명이 실패하거나 절망에 빠져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확인된다면 신자의 삶에서 누가 감사와 찬송과 승리를 막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신자가 얻은 구원입니다.

 

 


구원을 얻었다는데 왜 밤낮 인상쓰고 다닙니까? 구원은 얻었는데 왜 밤낮 울려고 그럽니까? 여러분이 의와 거룩으로 쓰임받고 있고 죄에서 해방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남을 위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안타까우며 불쌍한 자를 향하여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런 복된 일에 여러분이 쓰임받고 있고 그렇게 되어 있다는 감사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것이 신자가 확인해야 될 구원 얻은 특권입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신자의 자랑입니다. 이것으로 여러분의 여러분 된 것을 확인하셔서 매일의 삶에서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흔들든지 여러분 마음속에 평안과 확신과 소망과 그리고 이 승리와 자랑과 감사를 놓치지 않는 신자가 되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 되었고 주 안에 있으며 영원한 나라에 마침내 설 것을 믿습니다. 잠시 사는 인생에서 세상의 풍파에 흔들릴 때 우리 마음에 의심과 불안과 걱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승리와 기쁨과 감사할 것만 있음을 알게하사 우리로 믿음 가운데서 든든히 우리에게 맡겨진 인생을 살아가는 승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나누어 주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이요, 베푸는 것이요, 그리고 우리의 모든 필요를 감사함으로 주 앞에 아뢰는 것임을 알게 하사 우리로 우리 남은 여생 동안 신자답게 살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사 주의 영광과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보호하심과 베푸시는 능력이 이웃들에게 남김 없이 전파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3강(롬7:4절)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1)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7:4)

 

 

 

우리가 로마서 6장에서는 죄에서는 해방되고 의와 거룩으로 거듭났다는 식의 표현을 접했었습니다. 구원에 관한 설명에서 가장 많이 듣고 아는 것이 다음의 표현들입니다. 예전에는 아담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주 예수 안에 있다. 예전에는 죄 아래 있었으나 지금은 은혜아래 있다. 예전에는 진노아래 있었으므로 마지막이 형벌이었으나 지금은 생명과 영생과 영광에 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오면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았다’는 이 표현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왜 이런 식의 표현이 필요합니까?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표현이 왜 필요한가를 본문에서 살펴봅시다. 우리가 갖는 구원관은 성경적이기 보다는 율법적인 면이 상당히 강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얻은 결론들을 우리의 노력과 조건으로부터 출발해서 획득하려는 본성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율법에 관한 설명 중에 신자와 율법과의 관계, 율법을 방법으로 우리가 구원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고 왜 그런가를 이제 추적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로마서 7:4에서 첫 번째로 신자가 자신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어떤 내용을 ‘새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가 하면 옛날에 있던 것에 무엇을 덧붙인 존재가 아니고 무엇을 보완한 존재도 아니고 완전한 새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와 관련해서 아주 분명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새로 태어났다는 것, 옛날 것은 죽어버렸고 지금 우리의 존재는 옛것과 불연속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필요한 사상입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개념 때문에 우리의 신앙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구원관에 있어서 쉽게 좌절하곤 합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율법이 남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다가 절망할 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사망이 우리에게 왕노릇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은혜아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 두 내용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와 같은 내용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같습니까? 우리에게 절망이 없다는 의미에서 같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구원을 선택했고, 우리가 얻은 바 구원에 만족할 만한 조건을 구비하려고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 금방 좌절하는 이 악순환을 계속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우리에게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율법은 이제 우리가 거룩하게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밝혀 주는 하나의 척도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만족시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근거로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율법을 방법으로 하여 거룩하여지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새로 태어나서 거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율법으로 새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 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 낳다’라는 이 개념이 우리에게는 매우 희박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본성이 그렇고 또 미국식 사고 방식을 전래받았기 때문에 그런 줄 압니다. 우리 나라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는 미국입니다. 미국의 다른 물질 문명이나 이런 것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신 문명까지도 영향을 받고 있는데 그 미국식 사고 방식의 핵심에 ‘결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결정, 나의 책임, 그래서 그들은 계약이라는 것을 중요시 하고 약속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시간 약속을 안 지키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다릅니다. 동양권은 관대성을 더 중요시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입니다. 상대방에 따라서 배려를 하고 보조를 맞추는 것이 동양의 사고 방식일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제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다음 예화로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서양 선교사가 우리 나라에 와서 전도 집회를 열었습니다. 어떤 교회당에서 전도 집회를 열고, 이웃집 사람들을 모셔오기를 권하고, 복음을 전하고 “오늘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일어나시오, 나오시오”라는 구원 초청을 합니다. 눈감고 있다가도 ‘처음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 일어나시오’할 때부터 눈을 뜨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합니다. 저 금발의 눈 파란 사람이 산 넘고 물 건너 여기까지 와서 저렇게 애끓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혹 손님이 적으면 어떻게 하나 싶어가지고 두리번거리다가 숫자가 적으면 한 사람, 두 사람 나옵니다. 전도 집회가 끝난 후 선교사들이 늘 한탄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Mr. 박,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은 왜 벌써 여섯 번째 나오냐?”하는 것입니다. 그 서양 선교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들의 상식으로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인간의 깊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저쪽으로 가면 냉정해 보이지요.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정하고, 책임을 지기로 한 이상 후회하지 않고 투덜거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믿는문제 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영접한다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고 결심한다는 것을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This is makin g’ 이라는 것이 미국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흔한 정신적인 하나의 전통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원래 삐뚤게 살고 있다가 내가 어느날 마음을 바꾸어서 내가 이제부터는 신자로 살기로 한 것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옛날에는 죄를 따라 살다가 이제부터는 생명을 따라 살기로 결심을 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연속적이므로 단절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들이 구원 못받았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리함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 되는 성경의 가르침은 옆으로 밀려나 있고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 위치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들이 생기냐면 ‘내가’ 결심을 하고, ‘내가’ 결정을 하고, ‘내가’ 의지력을 발동했기 때문에 내가 좌절하는 날 구원이 흔들려 버리고 맙니다.

 

 

 

지금 로마서 7:4에서 발견되는 구원에 관한 이 설명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에서 분명하게 환기시켜 주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가 나를 포기했을지라도 나는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도를 가르쳐서 그 도를 이해하고 부족한 우리의 어떤 부분을 그것으로 메꾸는 것 역시 아닙니다. 나를 개과천선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나는 없어졌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만들어낸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신자에게는 분명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죽었습니까? 죄에 대하여 죽음이 있고 하나님과 불화했던 존재로서의 죽음입니다. 자신의 필요와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율법과 연결되어 있던 신분에서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입니다. ‘전적으로 새롭다는 것’은 노력과 의지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신분과 운명의 차원에서, 여러분이 받은 선물로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강조하는 한 국면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회의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해서 하나님의 신자들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고, 놓을까, 말까 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함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라는 표현 속에 포함된 내용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깨닫는 만큼 신자들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기독교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찾아오셔서 그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으로 구원해냈다는 것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생긴다’는 방법론이나 도(道)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깨달은 것과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이런 데서 감동하셔야 합니다. 괜히 이상하게 불 끄고, 분위기 잡고, 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불 켜놓고, 아니 맨정신으로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 하나님께서 역사에 간섭하시고, 우리에게 간섭하셔서 이루신 - 것을 바르게 아십시오. 신자가 인정하거나 말거나 동의를 받아야 되거나

승낙을 받아야 될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는 신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 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4-17).

 

 

 

이전 것은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는 딴 사람입니다.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간다고 할 때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방향성입니다. 말하자면 남쪽으로 간다는 방향입니다. 그가 대구에 있는 것과 수원에 있는 것은 다릅니다. 대구에 있는 사람이 남쪽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수원에 있는 차가 남쪽으로 가고 있고 대구에 있는 차가 북쪽으로 간다면 현재로서는 대구에 있는 차가 부산에 가깝지만 시간이 흐른 후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볼 때 나의 방향성에서 상대방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가 지금 머문 그 곳만 볼 뿐, 어는 곳을 목표로 향하고 있는가를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즉 신자라면 신의주에 있더라도 부산에 오고야 말 것, 그가 신자라면 현재 불신자 같은 무절제한 모습일지라도 결국 영광의 자리, 영생의 자리에 가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율법을 만족시켜야 구원을 얻거나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만 무엇을 얻는 자리에서 빼어다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생명으로, 영광의 자리에 세우기로 작정하여 그의 자녀로 붙잡아 오셨습니다. 때문에 그의 능력과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목적지에 가고야 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합니까? 주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의 자리에 갈 것이요, 주를 믿는 자는 결국 영광의 자리에 갈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형편없는 신앙인을 바라보면서 “왜 저 사람이 예수는 믿어서 속을 썩이나”, 그리고 믿지 않는 자 중에서 착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저렇게 살아야 되지. 신자도 저런 사람은 본받을 필요가 있어”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기꺼이 합니다. 그런 말을 하는 생각의 근본 이유는 신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이 아무리 착해도 우리가 볼 때 불쌍합니다. ‘저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어야 되는 건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고 저러다가 결국 지옥가는 것을 모르고 있겠지? 자기가 착하게 사니까 자기가 의인인 줄 알겠지?’ 여러분은 이런 안타까움이 있습니까? 아니면 ‘그래, 예수 믿으면 뭐해 착하게 살아야지’ 이런 생각이나 하십니까? 그것은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생각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향해 가는 차가 잠시 수원에 머물고 있으면 저 차는 북쪽으로 가는구나, 이렇게 애기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 기억해야 할 본문 내용은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연합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바로 이것입니다. 앞에서 한번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곧 우리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옛날에 우리는 자신의 의지에 속해 있던 자였습니다. 때문에 내가 착하게 살아야 했으나 착하게 살 방도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노예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일에 대하여, 자기 자신밖에는 자기를 도울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다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이제는 우리 안에 의와 거룩을 만들어내는 모든 힘을 공급받으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가지는 성품과 뜻과 생각을 우리의 것으로 소유합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0-11).

 

 

 

신자를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표현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입니다. 주님과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게 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게 됩니다. 그 내용이 요한복음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자신의 신앙생활속에서 자신에 대해 싫고, 자신이 밉고, 자신을 포기하면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과 그의 영원성과 그의 성실성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함께 계신 주님을 포기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를테면 적극적으로 신앙을 격려할 때 우리 보고 거룩하라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가 너희 것이 아니라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지적했던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지금 확인하는 로마서 7:4의 형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신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이별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이 설명을 통하여 여러분은 여러분이 얻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좀더 깊게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을 포기시킬 자가 없으며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28에 이런 설명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리고 다음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재미있는 것은 다 완료형이라는 것입니다. 작정하신 것이 과거라면 우리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미래적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완료형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작정속에서 마쳐진 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의 작정을 완료형으로 쓸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을 말릴 무엇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28절을 다시 보시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이 자포자기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해보십시오. 다 합력해서 선(善)을 이루고 맙니다. 그런데 경고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자포자기하면 아프게 선을 이룹니다. 같은 신앙의 깨우침이라도 병석에 누워서 눈물을 흘려가면서 이젠 알았노라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 구원 얻은 이 복들을 확인하고 누리는 길을 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고 아무리 반항하고 아무리 못되게 놀아도 우리의 인생은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야 말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에 관한 세 번재 우리가 확인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여기 로마서 7:4에 기록된 바와 같이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 맺는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세 국면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결별된 자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아직도 한국 교회에는 이 문제가 전도 일변도로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전도 일변도로 되기 때문에 허황된 꿈이 많습니다. 교회마다 사람 많이 데려 오는 것, 숫적인 팽창, 그래서 능력 일변도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 신앙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능력과 의욕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전도하는 일, 의욕적인 일을 하는 것, 사업을 크게 벌리는 것이 교회에 커다란 일로 되어 있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0-21).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의 모습입니다. 신자라면 이 요소가 꼭 있습니다. 그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자입니다. 사나 죽으나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히 하려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지만, 보통 이런 것들은 우리 한국 교회에서 도외시되고 있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을 일을 함으로써 나타내어 자신의 마음에 주를 사랑함이 있는 것을 증명합니다. 교회 안에 허풍을 떠는 자, 교회 안에 중책을 맡았으면서 신자답게 살지 못해서 교회에 누를 끼치는 자를 보면 우리는 펄펄 뜁니다. ‘저런 사람이 하필 우리 교회 나왔나. 절에나 다니지.’ 그런 생각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주가 당하는 영광이 가리워짐을 싫어한 까닭입니다. 신자가 자신에 대해 가장 절망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자신의 절망 이전에 이런 못난 것을 하나님이 사랑했다는 사랑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왜 자포자기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희망이 없어요. 저를 더 사랑해 주셔서 제게 부담주지 마세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 신앙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지옥에 가면 지옥으로 같이 가시겠다는 분이니까 어떤 상황속에서든지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저를 놔두세요. 절 포기하세요”하고 지옥가면 지옥까지 주님을 모시고 가는 꼴이 되니까 그런 일은 하지 마십이오. 물론 그럴리는 없을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속에서 그런 자포자기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이야말로 구원 얻은 신자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어져야 할 부분입니다. “이 민족을 저에게 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 이사야라든가 엘리야라든가 모세라든가 이런 사람들만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지 마세요. “내가 신자냐, 아니냐”할 때도 ‘내가 한 것이 무엇인가’로 묻지 마십시오. 비록 한 일이 없다 하여도 신자의 마음속에 주를 위한 이 열심과 사랑이 있는 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잊지 마시고 큰 일을 하려 하지 마십시오.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려고 하지 마세요. 죄에서 벗어나고, 율법에서 벗어나서 주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의와 거룩을 따라 사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동안 삶 속에서 오해를 받으면, 그 오해를 감수하고, 숨겨지고 작은 자로서 묻혀지는 인생을 기쁨으로 감수하십시오. 나의 묻혀짐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라면 기꺼이 “살든지 죽든지”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 그것 이상 더 중요한 신앙의 실천은 없습니다. ‘어느 교회 아무개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고아원을 10개나 돌아보고 양아들을 20명이나 들이고’ 이런 일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 하면 다 시험 받습니다. “아이고, 나도 해야지 나는 무엇을 하나”하지 마시고 여러분이 그저 집에서 하루 종일 서서 다리가 퉁퉁붓도록 아침밥 하고 점심밥하고 또 설거지 하고 저녁밥하고 “당신은 밥밖에 할 줄 몰라” 그러는 남편의 몰인정한 이야기를 그저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수하기도 하며 살아달라는 것입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누라가 바가지 긁으면서 “어떤 사람은 돈 몇푼 안가지고 그룹을 일으켰는데 당신은 구멍가게 하나 없이 이게 뭐요” 이럴 때 “여보 어쩌다가 당신이 나에게 시집을 와서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소.” 이렇게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리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말고 감수하십시오. 내가 질 수 있는 것, 그런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받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놓치지 마십시오. ‘한 알의 썩는 밀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어린 아이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보시고 빼앗기지 마십시오. 높은 자리에 가지 말고 능력 있는 자가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그 사람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즐거이 이 길을 갑시다. 신자는 자녀들에게도 신자만이 아는 비밀과 신자만이 아는 특권과 영광된 사람을 가르치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남을 디디고 누가 얼마나 높이 섰는가로 영광을 받지만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생애 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심을 받으시는가에 우리의 자랑과 기쁨이 있고 이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7:4에서 우리에게 설명하는 구원의 핵심입니다. 허황된 신앙에서 벗어나셔서 여러분이 얻은 구원을 성경을 통하여 확인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심과 그 크신 능력과 사랑 속에 있는 기쁨을 누리시고 감사하는 신자가 되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로 주의 크신 사랑과 주의 능력가운데 살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감사하며 살 줄 알게 하시고 충성과 성실과 인내와 사랑과 우리 목숨과 정성과 뜻을 주 앞에 바치나이다. 주님, 기뻐 우리를 열납하시고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주님, 영광받으시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사랑과 베푸신 은혜와 구원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넉넉히 드러나는 삶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4강(롬7:4절)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2)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7:4)

 

 

 

우리는 이미 로마서에서의 구원에 관한 설명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을 익히 살펴왔습니다. 로마서 6장 전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고 7장에 와서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고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로 왔다고 표현하는 4절 말씀을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 우리의 신자 된 것을 우리의 인식, 우리의 감격, 이런 면에 너무 초점을 맞추지 않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설명하는 식을 따라서 그리스도와 우리가 어떻게 연합되어 있는가 하는 연합의 성경적인 설명, 연합의 본질에 대하여 우리가 무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구원의 확신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자의 구원의 확신은 너무 실존주의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의 느낌이나 자신의 인식에 너무 많이 의존하므로 진리에 대한 이해는 사실 조금 부족한 감이 었어서 전후가 바뀐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피려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도의 구원에 본질이 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살펴봅시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집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 5:25-28).

 

 

 

여기는 분명히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부부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지금 로마서7장 서두에서 만나는 신자의 표현이야말로 이 결혼 비유를 근거로 합니다. 전 남편이었던 율법과 사별하고, 새로운 남편,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을 하였다. 이런 결혼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그것이야말로 연합이 어느 만큼 실제적이고, 긴밀한가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결혼이라는 비유를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25에서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대목에서 그 사랑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준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치르는 대가가 목적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는 법은 없습니다. 대가를 치러서 그 이상의 보상이 있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는 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라는 표현속에 교회가 갖는 주님께서 보고 있는 교인의 위치를 우리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28절에서는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만납니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 5:29-30). 훨씬 직선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의 몸이요, 그의 지체라고 되어 있습니다. 30절에 그 몸에 지체임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본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사본에는 여기에 이런 말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뼈요, 그의 살이라” 이것은 예전에 인류가 처음 하나님의 손에 창조될 때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 짝 하와를 지은 다음에 아담이 하와를 가리켜서 표현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입니다. 그의 뼈요, 그의 살이라 표현될 만큼 어떤 긴밀한 무엇으로 갈라 놓을 수 없는 하나된 연합의 존재가 되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연합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이 신앙을 깨우침과 선택으로 치중하여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거듭 표현하지만 내가 이 신앙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확신이 서고 열심히 있고, 내 마음이 거기에 대하여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을 때 내 구원이 확실하며 반면에 내가 의심이 가고,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면 또 내 구원이 아닌 것 같고, 즉 우리가 얻은 -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 이 구원이 결국 나에게 달려 있는 것 같은 기준이 설정되더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것 자체의 기준과 조건이 나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치기 위하여 설명하는 대목이란 말입니다. 내가 사지를 잘라 버릴 수 없듯이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된 우리와 이제 결별하지 않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신자의 구원의 안정성과 영원성을 확인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신자 자신이 구원을 얼마나 절실히 공감하느냐, 얼마나 큰 기쁨과 확신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어떤 방법으로 어떤 식으로 그 안전 장치가 되어 있는가를 확인합시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1-32).

 

 

 

그래서 우리가 이 대목에 이르러서 하나 부언하고 지나갈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정이라는 것은 상당히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부부는 하나입니다. 부부가 서로 꼭 놓치지 말아야 되는 원칙은 남편은 아내가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아야 되고, 아내는 남편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최소한의 조건이 그렇습니다. 적극적으로는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 되고, 아내는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부부입니다. 왜냐하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다가 고춧가루를 넣을 사람은 없습니다. 눈이 싫어할 뿐 아니라 결국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심심하다고 망치로 이빨을 툭툭 건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아프고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하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헤어지는 일들이 점점 쉬워지고 있습니다.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내 팔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팔을 잘라 버리겠다는 발상이고, 내 다리가 흉하니까 다른 다리로 바꾸겠다는 발상입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의학적으로 장기를 교체한다든가 어느 부분을 쓸 수 없어서 바꾸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불가불리의 관계에 있는 자기의 한 부속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부부고,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인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 가시면 좀더 깊고 확실하게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표현입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1:22-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는 예수님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은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는 ‘자의 충만이니라’ 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입니다. 예수님만이 충만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이 교회로 말미암지 않고는, 교회와 함께하지 않고는 충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충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조직체가 아닙니다. 신자 일반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총칭입니다. 신자 없이는 충만하지 않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요, 그 연합의 긴밀성입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이야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너무나 많이 복, 영생, 형벌을 면하는 것, 천국에서 사는 것, 이런 세상적 가치관으로 설명되는 것으로 나열하고 있고 선택, 감격 이런 인식적 차원에서 붙잡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나라에 데려가실 것이며, 거기서 살게 하실 것이며, 그것이 방해받거나, 취소되거나, 파괴되지 않도록 지금 간섭하고 계시는 이야기가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쪽에 너무나 많은 조건과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여러분들은 혼동이 없어야 됩니다.

 

 

 

영생 역시 죽지 않는 것, 아프지 않는 것 등 이런 부정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합니다, 요한복음17장에서 영생을 표현하는 것을 만납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2, 3).

 

 

 

영생은 죽지 않는 것, 벌받지 않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이런식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을 포함합니다만 영생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깊은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깊은 교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표현은 부부가 서로 안다라는 것과 같은 긴밀한 연합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17장 전체가 ‘아버지를 알게 하옵소서와 우리가 하나 되게 하옵소서’ 이런 내용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켰는가? 우리가 어떻게 그의 사랑과 더 긴밀하게 연합되어 있는가라는 차원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근거로 구원의 감사와 확신과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스스로의 기분이나 혹은 실패나 혹은 미련함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와 분리시키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구원을 폐기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확신의 방법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문제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이것, 즉 우리의 신자 된 어떤 확신, 위치, 신분, 운명을 깨닫자마자 신자에게는 이런 것이 요구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랑입니까? 거룩입니까? 의입니까? 열심입니까? 믿음입니까? 능력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은 순종(順從)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7:1이 부부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처음에 나오는 표현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부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남편이 그 부부 됨에 주권자라는 것입니다. 부인들이 남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금해 있습니다. 여자 된 것을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여자가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뜻도 부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역할이 그렇단 말입니다. 손과 발 중 누가 높으냐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보 같은 질문이듯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높으냐 하는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남자는 남자가 맡은 책임이 있고 여자는 여자가 맡은 책임이 있는데 다스리는 책임과 순종하는 책임 중 어느 것이 더 영광스럽다는 것은 아닙니다. 둘다 고귀한 신분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마치 목사와 평신도 중 누가 하나님 앞에 더 높은 신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직분이 없습니다. 사람의 높고 낮음이 직분과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남편으로 맞이했다는 표현속에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왜 순종이 생기냐면 무조건 맹종하는 것을 가르치고 무조건 굴복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우리가 연합되어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영원한 길이 확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정당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복종이란 말을 어떻게 추출하느냐 하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위와 진리를 만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 질서 속에 최고의 권위자라면 다스리는 것만 있겠지만 그 질서 속에서 나는 최고의 권위자가 아닙니다. 최고의 권위자, 절대 권위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 절대 권위아래 구원을 얻은, 그의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의 위치입니다. 당연히 우리를 다스리는 분 앞에 복종해야 되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절대 권위와 질서 속에 있기 때문에 성경은 비로소 우리에게 경고하고, 권면하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전 내 마음대로 살 때와 구원을 얻고 난 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때의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 4:17-19).

 

 

 

불신자의 삶을 자세히 보시면 거기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절대권위도, 질서도, 목표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는 어둡고, 무지하다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어두움 속에서는 일관된 길을 걸을 수 없고 어떤 목표를 설정할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잘 묘사된 불신자의 삶입니까? 자신을 방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을 수밖에 없고 이리저리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서가 없으니까 그날 아침 눈을 떠서 눈길이 가는 데로 가다고 쉬고 싶은 데 쉬다가 기분이 나쁘면 돌이켰다가 꼭 가야 하는 곳도 없고 특별히 안할 것도 없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달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4:20)로 금방 달라집니다. 배울것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비로소 절대가 있고, 진리가 있고, 가야 할 곳이 있고 그래서 그 가야 할 곳을 방해하거나 아닌 길로 갈 때는 가는 데에 대한 경고가 나올 수 있습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엡 4:21). 그 안에서 배우고 받고, 추종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19절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있고” 그러나 지금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언제나 순종인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 절대, 진리, 생명, 영원으로 가는 이 일을 위하여 신자에게는 절제할 것이 주어지고 꾸짖음이 있고, 징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왜냐하면 24절,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 목표로 가기 위해서는 목표를 방해하고, 못가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핵심은 순종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쉽게 신앙의 핵심을 바꾸어 놓고 있느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권위와 질서 속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꾸만 기쁨, 감격,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절대 권위자의 위치가 망각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우리는 복을 좇아가고 있고 기쁨을 좇아가고 있고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한 신비한 방법을 좇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습니다. 부부가 결혼한 것과 같습니다. 여자분들 중에는 결혼하기 전까지 밥 한번 실제로 해보지 않고 시집을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 흉도 아니고 꾸짖을 문제도 아닙니다. 부모 아래 있었고 보호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서도 밥을 해본 적이 없다면 이것은 안됩니다. 남편이 식사를 해야 할 때 식사 준비를 해야지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하는 부인은 없습니다. 혹 있다면 오늘 중으로 회개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인이 자기가 먹고 싶은 반찬을 준비하는 것보다 남편을 위주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과 어떤 목표와 어떤 색깔을 가지느냐 하는 것은 다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앙에서 주를 배워나가는 것이어야 됩니다. 주를 아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내 기분과 내 욕망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종교성이나 도덕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순종의 문제입니다. 우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주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 거기에 대한 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왕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가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거기에 있는 소와 양의 살찐 것들을 남겨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남겨 왔다고 핑계합니다. 사무엘이 꾸짖습니다. 사무엘상 15:22에서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을 하라는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어떤 종교적인 일로, 도덕성이 있는 것으로, 메꿔놓고는 ‘나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다했다’라고 이야기하셔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부언하지만 현대 사회의 제일 큰 병폐는 가정의 파괴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므로 가정의 자녀들은 권위와 사랑, 순종과 행복을 맛보지 못하고 자랍니다. 강팍한 마음으로 커서 보호를 받아본 적도,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고, 명령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때문에 유치한 마음이 성숙할 틈이 없이 그저 자기 마음대로, 거칠어져 사회문제화되고 있습니다. 점점 범죄 연령층이 낮아지고 있고 그 행태 또한 참혹합니다. 이유는 아버지의 권위와 책임,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과 복종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편들이 먼저 잘하기를 빕니다만 혹 부부싸움을 할 때 남편들이 무엇을 집어던지고 혹 때리는 등 몹쓸 짓을 할지라도 부인들은 애들앞에서 남편에게 대꾸하지 마십시오. 따로 하십시오. 물론 남편들이 폭력을 쓴다는 것은 치사한 것입니다. 여자와 힘쓰기 내기를 한다는 것은 바보같은 짓입니다. 그런데 왜 남자들이 폭력을 쓰느냐면 여자들이 남자보다 언제나 말을 잘하기 때문입니다. 말 대답하고, 조목조목 따지지 마십시오. 그것을 절대 똑똑한 것이 아니라 매를 사는 것입니다.

 

 

 

이 일을 남편과 부인을 무슨 개인적인 문제로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신자가 가져야 되는 최고의 핵심이며, 그 일에 가장 중요한 배역을 맡은 사람이 남편보다 부인 쪽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의 배역으로 따지면 부인이 주인공입니다. 남편은 책임과 권위의 배역입니다. 신자의 신앙의 배역이 순종에 있기 때문에 여자가 맡은 배역이 더 중요한 배역이란 말입니다.

 

 

 

지금 사울이 하는 변명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제사하려고 남겨왔습니다.” 사무엘은 순종이 번제와 다른 제사보다 낫다고 꾸짖습니다. 순종이 나은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은데 “이를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같으니라”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권위아래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며 그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일을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영원한 것이며, 취소되지 않으며, 실패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나의 어리석음과 나의 게으름과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해야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는 지혜로운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종교성이 있는 것, 옳은 것, 착한 것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우리의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물론 자존심도 내어 놓을 수 있고 묻혀 지낼 수도 있고 작은 자로서 평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주님이 함께하는 기쁨이 늘 충만할 것이요, 그것을 막을 자가 없을 것을 믿습니다. 큰 일을 한다는 명분 때문에, 거창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내어놓고 스스로를 속이는 미련한 일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된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 마땅히 그 앞에 순종해야 되는 자녀인 것을 기쁨과 자랑과 책임으로 누리게 하시옵소서. 늘 귀를 기울이고 주 앞에 엎드려 그 말씀을 묵상하게 하시고 우리 주님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옮겨 놓게 하시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열심을 품고 주를 사랑하여 우리의 평생을 충성 속에 그리고 주님의 기뻐하심 속에 마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5강(롬7:5-6절) 죄로 얽매였던 몸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롬 7:5-6)

 

 

 

로마서 7:4로 신자란 율법과 결별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라는 것이 7장에 가장 중요한 요점임을 확인했었습니다. 5절, 6절에 이르면 그것이 왜 중요한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있지만 5절은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롬 7:5-6).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왜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 육신에 있는 것이 이렇게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원래 육신을 들먹이지 않았고 율법과의 결별을 강조했습니다. 5절에서는 육신으로 나옵니다만 ‘육신에 있다’는 말과 ‘율법에 있었다’라는 말이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다”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일, 죄가 우리에게 사망을 열매 맺게 했다는 이 중요한 내용으로 5절과 6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이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 육신에 있다는 말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정신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마음속으로 가끔 착한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실천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사람은 사실 악한 생각을 선한 생각 이상으로 합니다. 또한 정신은 악한데 육체가 선하다는 사람은 아직 못만나 봤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정신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말은 변명으로 쓰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래뵈도’라는 말을 합니다. ‘겉으로…속은…’어리석은 이야기를 자랑삼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헛된 이야기입니다.

 

 

 

사람을 이해하는 것 중에 육신이라는 말, 육체라는 표현을 대단히 죄악시하는 버릇은 그리스적 발상입니다. 성경에서는 육체를 한정된 것, 영원한 가치를 갖지 않은 것으로 ‘육체는 풀과 같다, 이슬과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본문의 ‘육신’이라는 말은 사람이 자신을 혼자 책임져야 되는 존재로서 사용되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것’도 ‘은혜아래 있다’는 말과 대치된 말이고,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가 자기를 책임져야 하므로 외부로부터 다른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를 표현할 때 ‘율법 아래 있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이 육신이라는 말이 그런 표현, 어떤 원리하에 있는가, 어떤 체제아래 있는가에 상징적인 표현인 것을 증명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4-5).

 

영을 좇는 자, 육신을 좇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8-9).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다고 하면 예수 믿는 자들은 다 귀신입니까? 아닙니다. 영에 있다는 것은 영적 원리 하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했다와 영에 속했다는 말을 결부해서 육신을 죄악시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인간을 설명할 때 ‘하나님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셔서 지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가 사람이 되었으므로 인간 존재 중에 육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육체를 죄악시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에 이 육체로 한 번도 선한 일의 도구로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인간이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쌓았던 모든 것이 죄를 지은 것밖에 없고 그 죄를 이 몸으로 지었기 때문에 죄를 지은, 그리고 죄를 따라 산 대표적인 표현으로써 육신, 육체라는 말을 쓸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를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적 사고방식에 의한, 영이 갇혀 있는 육체로부터 해방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 사람의 모든 존재가 끊기고 죽어서 생명이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체를 인격과 결부하여 표현하는 것을 잊지마십시오. 죽었어도 누구누구라고 하지 훍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죽은 시체가 다 썩어 뼈만 남아 있어도 이것은 누구의 머리카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인격과 분리되어서 인식되거나 호칭되지 않습니다.

 

 

 

육체에 대한, 물질계에 대한 어떤 거부감, 부정시하는 것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고 세상적인 개념인 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즉 성경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육신이 죄인으로 태어나서 여태껏 죄밖에 지어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죄를 짓고, 죄 아래 있고 그래서 죄를따라 사는 그 원리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것으로 ‘육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은 ‘’으로 표현합니다. 영과 육신 이 두 가지를 상징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영은 공유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7:5,6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즉 죄를 따라서 살 때, 율법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간섭하시지 않고 스스로 책임져야 했을 때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앞서 로마서에서 살펴본 것같이 죄가 우리의 주인이었고 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죄를 거부할 수 없고 선을 마음에 갖는다 할지라도 그것을 지킬 의지력도 힘도 없었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에는 죄가 어느 만큼 우리를 좌우하고 흔들었느냐면 율법으로도 우리에게 사망을 열매 맺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죄의 가공할 권세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원래 이것은 크다, 이런 것은 하지 말라,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 이것이 의다’라고 가르칩니다. 죄는 우리에게 그것으로 죄를 짓게 만들었습니다. 선한 것을 갖다가 입력시켜도 결국 열매 맺는 것은 어쨌든 악과 사망밖에 없습니다. 육신 아래 있을 때는 우리가 스스로 책임져야 했던 것이 인간의 현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로마서 7장의 전체 내용입니다. 4절, 5절, 6절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 로마서 7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율법으로도 우리는 고쳐지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율법을 가지고도 의를 맺지 못하고 , 죄밖에, 사망밖에 열매 맺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 아래 있으므로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

 

 

 

자기가 자기를 책임져야 했던 사람들, 자기밖에 자기를 보호할 수 없었던 입장이었을 때 인간은 도덕과 율법이 그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려고 해도 선을 행할 힘이 없고 그 선을 행하도록 마음에 어떤 법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선한 율법을 가지고 (율법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만들어냈습니다.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율법을 들이대면 우리는 좋은 것을 가지고도 죄를 만들어낼 줄밖에 몰랐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9-11). 이것이 육신에 속한 자, 율법 아래 있는 자의 처지였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가 군에 갔을 때 처음 훈련소에 가니까 훈련소 소대장이 거듭거듭 이런 경고를 하더군요. 담요 갖다 주고 떡 바꿔 먹거나 총 갖다주고 떡바꿔 먹는 군인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이죠. 저 같은 사람은 정신도 없지, 군인이 어떻게 담요를 갖다 주고 떡을 바꿔 먹고 총을 갖다 주고 떡을 바꿔 먹을 수 있겠느냐 생각했습니다. 두 주일쯤 훈련을 받고 보니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하지 말라고 가르친 그 경고를 듣지 않았으면 모포 갖다주고 떡 바꿔 먹는다는 발상은 안 일어났을텐데 그 경고를 들었기 때문에 ‘아 이것을 주면 떡이 생기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사격장 철조망 바깥으로 “떡 사세요”하는 것은 그것 주고 이 떡과 바꾸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고 다니는 군장비 중에서 삽, 수통, 탄띠 무엇이든지 바꾸어줍니다. 얼마나 큰 유혹이었는지 모릅니다. 의지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기회가 없어서, 늘 서 있는 자리가 철조망과 멀어서 못바꾸었지 가까이 있는 이들은 예외없이 바꿔 먹고 밤새 기합받는 그런 일의 악순환이었습니다.

 

 


요즈음 영화나 TV에 폭력물이 난무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그것을 재미있게 보는 것은 내가 그것을 직접 사용할 이유가 없는 동안만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누적되어서 얼마나 나쁜 일을 만드는 지는 나중에 화를 내야 할 일이 생길 때 알 것입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황야의 무법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태껏 보아 왔던 것이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때는 즐기는 오락에 불과했지만, 분노를 터뜨리면 여태껏 보았던 모든 것이 갑자기 무기가 되고 방법이 되어버립니다.

 

 

 

미국 영화들을 보면 욕들은 예사 낮춤 정도로 된 것이 많습니다. 요즘은 조금 없어졌습니다만 저희가 클 때는 이런 욕이 많았습니다. 누구누구를 부를 때는 ‘새끼’라는 말이 꼭 붙곤했습니다. 그때는 그게 예사 낮춤이었고 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욕입니다. 너무 흔하게 쓰이고 아무나 써서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썼습니다. 그러면 친구를 부를 때 그렇게 불렀으면 욕을 할 때는 그것 가지고는 안될 것 아닙니까? 욕을 할 때는 그것보다 더 강한 것을 써야 됐습니다. 그러면 싸울 때 써야 하는 것을 욕할 때 써먹었으니까 싸울 때는 전쟁할 때 쓸 것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혼자서 책임져야 하고 육신에 거하며 율법 아래 있을 때가 얼마나 절망스러운 상태인가를 각자가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것과 구원 얻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인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지금 세상 속에서 성경과 반대되는 영향을 받고 있는 것중의 하나가 교육학인 것 같습니다. 교육은 사람은 무지해서 죄를 짓는다고 가르치고 사람을 교육시키고, 계몽시키고, 좋은 환경과 조건들을 제시하면 고쳐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타락은 제일 좋은 환경에서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낙원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인류가 지구상에 사는 동안 범죄가 제일 많은 곳은 환경이 좋은 곳입니다. 자연과 싸워야 되는 곳에서 범죄가 적습니다. 자연과 싸울 필요가 없는 곳에서 범죄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조건을 좋게 만들어 주고 환경을 개선한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교육계에서는 끊임없이 인간을 인간답게 대접하는, 이것이 인간의 선행을 격려한다는 의미이며 그가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반발심이란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좋은 일에 대하여 반발심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억울하다는데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과 의와 진리에 대하여 반발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합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이 공통적으로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모든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자를 향하여 불평하는 것 중 으뜸은 왜 너희만 옳으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을 봤을 때 정답 쓴 사람은 맞다고 하고 틀린 사람은 틀렸다고 했는데 틀린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왜 너하나만 정답이냐고 하는 것과 같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틀립 답은 똑같이 틀리지 않습니다. 만약 정답이 10이면 틀린 답이 9, 16, 8로 다 다릅니다. 그나마 수학에서는 그것을 인정하지만 더 큰 진리에서 사람들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네 숫자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도덕적인 교육의 한계, 사람이 이 육신에 거하고 율법 아래 있을 때의 절망감에 대한 뼈저린 인식이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는 이런 좋은 교훈이 나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리라.” 신자들이 꼭 기억해야 될 중요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죄라는 것이 더러운 모습을 하고 있고 부패한 꼴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죄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는 형태가 아니고 마음의 상태이고, 마음의 경향입니다. 죄가 고상하고, 명분 있는 데는 끼어들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죄는 어느곳에나 끼어듭니다. 남을 돕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금식할 때도 끼어드는 것이 죄입니다. 가장 고상한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에도 끼어듭니다. 그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치장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자기 자신을 치장하기 위하여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자신을 숭배케 하기 위하여 금식할 수 있습니다. 내 자신의 잘난 것을 증명키 위해서 구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로마서 7장에서 본 바와 같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입니까? 가장 선한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그 선한 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구제 불능입니다. 오죽하면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했겠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자리에 오지 않고는 가독교가 무엇인지 이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피해가야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도움 없이는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방법도, 자신을 고칠 방법도 없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에서의 절망에 찬 부르짖음이 어떻게 연결되는 가를 보십시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24-25). 바로 예수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예수를 떠나서 있을 수 없습니까? 그가 어떤 이상을 갖고 있거나 어떤 선행을 하고 있거나 어떤 도덕성에 의하여 고취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것으로 육신에 거하며, 율법 아래 있는 처지일 뿐 혼자서는 그 문제로 절대 영생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는 그것으로 사망밖에 만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처한 이 절망을 제대로 인식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일에 대한 그 진정한 핵심을 이해하게 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감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다른 사람보다 선해서 선택받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가운데 살고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멸시의 눈을 보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혼자서는 그 이상의 답을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입은 은혜가 무엇이냐 우리가 얻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이것이 여러분과 저의 처지입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신자들의 복된 운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을 확인해야 합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이 자기 자신만 믿고 사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고 난 이후에 신자들이 여전히 자기 자신만 의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셨으니까 구원 얻은 자로서 또 다시 ‘나 혼자다’라고 이렇게 살지 마십시오. 그것이 아니라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입니다. 그 전에는 혼자였습니다. 그 때는 무엇을 주든지 다 나 혼자 책임을 졌던 것입니다. 그 전에는 혼자였습니다. 곧 율법 아래 있다는 것,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 나에게 아무리 좋은 지도와 좋은 내용과 무슨 좋은 것들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나 혼자 그것을 결심하고, 그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책임져야 했을 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사망으로 끌고 갈 뿐이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므로 그의 간섭과 은혜가 우리를 통치하십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으로, 영생으로 열매맺게 되어 있는 것, 바로 이것이 신자입니다.

 

 

 

예수안에는 자랑이 없고 감사만 있습니다. 낙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성경이 설명하는 대로 분명히 인식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하면서 실패될 수 없는 운명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십시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의 신앙에 제일 중요한 순종, 거룩을 놓치지 마시고 수행하여 열매 맺으시길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를 주 안에 묶어 두셨습니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며 우리 자신만이 우리를 책임지지 않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책임지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순종하게 하시고 두려워하게 하시고 기뻐하게 하시옵소서. 주의 자녀 된 우리의 이 복된 운명을 인하여 남은 여생, 주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주 앞에 서는 날 칭찬과 영광 속에 그리고 감사와 찬송 속에 다 서게 하시옵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6강(롬7:6절) 영의 새로운 것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롬 7:6)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신자들이 가지는 구원에 관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나는 이제 지옥에 가지 않는다’, ‘나는 죽어서 천국을 간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은혜와 영생의 자리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우리의 구원을 설명할 때 그런 차원말고도 다른 차원이 있는 것을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와 사망으로부터 은혜와 영생의 자리로 옮겨졌을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삶과 신분이 부동한 이유가 무엇이야 하는 것입니다. 곧 구원이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신자에게 허락된 복된 하나님의 사역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율법에 관한 차원에서 신자된 안전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율법과 결별했다는 뜻을 알려면 본문에서의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표현으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설명 속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 다시 말해서 의문에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 신자된 원리들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피려고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따질 때에 잘못하면 율법과 영이라는 두 개의 실체를 놓고 둘을 대조하고 적대하는 오해를 할 수 있지만 내용을 따라 들어가보면 그런 뜻이 아닌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3장부터 찾아봅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안한다’의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입니다. 글자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3:3입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여기에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먹으로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 돌비에 쓰지 않고 심비(心碑)에 썼다라는 평행을 이루는 이 두 비교말입니다.

 

 

 

먹으로 썼다고 하면 우리 자신의 내부가 아닌 바깥 어디엔가 기록한 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우리 안에 기록했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두 번째로 나오는 것과 같이 돌비에 쓰여진 것이 아니고 심비에 쓴 것이라는 데서 드러납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의 영으로 썼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밖에 있는 하나의 지표가 아니라 우리 안에 내면적인 원리와 내면적인 방향과 내용으로서 우리의 것이 된 것임을 대조합니다. 율법과 영,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율법을 논할 때마다 강조했던,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내 의지와 내 노력으로 선택하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바깥에 있는 어떤 목표를 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안의 내용과 원리로 속에 있는 것이어야 함을 이렇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3의 내용이 고린도전서 2장에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이 말은 정확히 같은 것입니다.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세울 때입니다. 기독교에 대하여 전혀 들은 바 없는 항구 도시 고린도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할 때입니다. 바울은 어떤 원리와 사상을 전하고, 그 사상을 상대방에게 설득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죽어 있는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전도의 하나의 수단으로 삼으시길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저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으시고, 죽은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갔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내용을 듣고 알았고 선택했다는 잘난 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내 지혜를 전한 것도 아니고 또 너희가 내 말을 알아 들은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이 일에 대하여 자랑할 수 없다. 왜냐? 내 스스로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에 역사하사 너희의 죽은 영혼을 소생시켜, 하나님께서 누구시며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불쌍히 여기시며 너희에게 무엇을 허락하셨는가를 알게 하기를 원해서 내가 심히 떨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말로 전하고 인간의 사상이 되어 너희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역사하여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오직 한 마음으로 갔기 때문에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5절)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으로 쓴 자들이라고 합니다.밖에 써 있는 무엇을 보고 너희가 ‘아 그렇구나’라고 깨달아 신자가 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수술하시고 바꾸어 놓고 새로 태어나게 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문(儀文)의 묵은 것으로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한다는 뜻입니다. 내용에 있어서 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스스로 책임지고 내 능력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것을 만들어 주셨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레미야의 글을 살펴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이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3). 유명한 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이 있으면 그 전에 있었던 옛 언약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 언약이라는 말이 붙었으면 옛 언약과는 다를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내용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새 언약의 내용을 봅시다. 33절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 새언약의 내용은 옛 언약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약속이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 되고 저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고 모세 입을 통해 약속한 계속 반복되고 확인되는 동일한 약속입니다.

 

 

 

새 언약이 옛 언약과 같으면 새 언약일 필요는 없습니다. 언약을 성취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방법에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옛 언약을 봅시다. 32절 “나 여호와 말하노라 이 언약은”에서 ‘이 언약’은 새 언약입니다. “새롭게 세울 언약은 옛 언약과 다른데 옛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이라” 이것입니다. 옛 언약은 하나님이 어떻게 세우셨습니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라는 동일한 내용으로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남편이 되어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가장 가깝게, 가장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언약을 파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새 언약을 주십니다. 이 새 언약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후에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동일한 내용을 바꾸어 놓기로 한 것입니다. 외부에서 압력을 넣고 좋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인도하며 끌어당기시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순종할 마음과 하나님의 요구대로 좇아갈 마음이 없는 자들을 성공시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이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법을 우리 ‘마음’에 두고 우리를 변화시키기로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합니다. 그 뜻은 신자란 이제 영원히 죽을 신분과 운명으로부터 영생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바뀔 수 없는 영광된 신분의 자리에 처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죄만 좇아가고 죄 아래 있고 자기밖에 몰랐던 우리를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 뜻에 부합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바꿔놓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킨 것입니다. 같은 예레미야 31:34을 보시면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서 새 언약의 결과를 말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우리 내부로부터 주를 사랑하는 것과 의와 거룩을 향한 생각과 그런 원리와 소원과 능력이 생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시오,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신자 된 것을 점검할 때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자신 안에 주를 사랑하며 주의 뜻을 사모하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려는 소망과 원리가 들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마음속에 죄를 사모하는 것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배우고, 교육을 받고, 무엇을 알아서 행동하려 했지만, 점점 더 죄를 따라서 삽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자가 된 지금도 우리는 연약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고 실패할때가 많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내가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렇게 하고 있을까? 옛날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제 주를 향한 내부로부터 소원이 있습니다. 주를 사모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의와 거룩에 대한 우리 자체의 본성적인 열심과 지향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성화의 단계에서 훈련의 문제일 뿐이지 근본적으로 중생했다, 구원을 얻었다 하는 자일지라도 시험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왜 필요하냐면 여러분이 신자가 된 이후에도 실패했을 때 이런 시험에 빠져들곤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구원받은 것 같지 않아, 아직도 죄에게 지는 것을 보니까 죄된 성품이 하나도 변화되지 않고 죄가 아직도 나를 주장하고 있고 내 속에 죄가 아직도 그냥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옛날에는 죄가 주인이고 의와 거룩이 손님이었다면 지금의 의와 거룩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주인이고 죄가 손님입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신자들을 계속 유혹하고 있고 갓 태어난 신자이기 때문에 이 죄를 이길 힘이 없곤 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구원 얻은 자입니다. 죄에 대하여 시련과 유혹에 빠지는 일이 있을지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가 확인할 영으로 삶을 사는 신자의 현실이며 신분입니다.

 

 


두 번째로 기억해야 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본문의 표현은 율법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를 가지도록 시사하고 있습니다. 구원 얻은 신자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니다. 그 이야기는 율법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지를 그전에는 몰랐으나 이제는 압니다. 예전에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길 때는 다른 사람과 비교된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우월감밖에 없었습니다. 윤리를 지키고, 도덕을 지키고 혹 종교를 가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잘난 것을 증명하는 그런 시각과 그런 기준으로 율법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가에 대해 깨우침과 중생한 자로서의 주님의 마음과 연결된 어떤 본능을 가지게 됩니다.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이의 율법관을 누가복음 18장에서 살펴 보십시다.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눅 18:18-25).

 

 

 

이 말씀은 결단코 부요함에 대하여 꾸중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요함 역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지금 중생하지 못한, 죄인으로 남아 있는 시점에서 인간이 율법을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습니까? 율법을 지켰느냐? 이렇게 물어봅니다. “예, 지켰습니다.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거짓증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냐, 그럼 네 재산을 네 이웃에게 다 주어라.” “그것은 못하겠습니다”이렇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결론내리셨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6-40).

 

 

 

율법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율법을 지켜라.” 그런데 주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그러면 네 재산을 네 이웃에게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곧 부자는 율법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너는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는 물으심은 바로 “네 재물을 다 팔아 네 이웃에게 주어라”하는 이야기 속에 내포된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것은 못하겠습니다.”하고 도망간 셈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율법을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느냐,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느냐의 차이입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결단코 율법을 배척하거나 율법을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 대신 영이라고 말할 때는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서 하나님과 직통하는 어떤 신비한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는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광과 영생을 약속받고 있고 취소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과 뜻이 통하는 자녀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그의 생각 속에 어떤 변화를 크게 받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신자는 그렇게 변한 자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차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으로 변화된 자임을 느끼고 구원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에 의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자들에 대한 재미있는 설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3-15).

 

 

 

모세가 40일동안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앞에서 법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오자 영광의 하나님과 마주했던 것만으로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내려왔을 때 모두 그 얼굴을 주목하고 모세에 대하여 평가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너무 높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놀라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온 율법이 전달되어야지 나를 보지 말라.” 그 광채를 보고 사람의 마음이 미혹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얼굴을 가렸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얼굴을 보았던 것 같은 오해를 율법에 대하여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아직 수건이 덮여 있는 것같이 가리워졌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을 때 여러 가지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번은 블레셋과 싸우다가 졌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실로에 있는 장막 가운데 안치한 벱궤를 가져오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궤 자체가 어떤 신통력을 가진다고 믿었습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 법궤 자체의 어떤 신통력을 믿었기 때문에 그걸 갖고 와서 싸워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죽는 대패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법궤는 빼앗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졌던 오해, 즉 불신자들일 때 우리가 율법을 보는 개념, 신에 대한 개념, 종교에 대한 개념 그것은 다 진리와 생명으로의 접근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 치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지켰다는 자기 의지의 높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도덕적, 윤리적 고결함을 나타내는 것이지 하나님과 연결된 어떤 원리와 내용, 생명과 진리, 영원 등 그 어떤 면에서도 하나님과 연결된 것은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원을 얻고 나면 의문의 묵은 것이 우리의 원리가 아닙니다. 영의 새로운 것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서 율법의 정신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사람들은 의지의 화신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잘못 미화된 사람 하나가 욥입니다. 욥은 마치 인내의 화신같이 되어 있습니다. 욥이 얼마나 믿음을 지키고 인내했는가 욥기를 보십시오. 욥은 하나도 인내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처음 며칠은 좀 참고 있다가 그 다음부터 소금맞은 지렁이같이 원망을 합니다. ‘왜 내가 태어난 날이 달력에 있었는가?’ ‘왜 우리 어머니가 건강해서 나를 낳았는가?’ ‘왜 내가 튼튼하게 자라났나?’ 자기 자신을 향해서 별별 악담을 다합니다. ‘왜 내가 살아서 이 꼴을 당하는가?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는 것입니까?’ 얼마나 아우성을 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욥을 인내의 화신이요, 믿음의 화신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즉 기독교 신앙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옛날의 본성, 종교든, 도덕이든, 윤리든, 교양이든 다 우리의 의지를 근거로해서 획득되려고 하는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 말하려 하는 것은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홀로의 노력으로 우리밖에 있는 어떤 가치 있는 것을 잡는 식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뀐 자들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권면하시며, 지키시며, 인도하시는 힘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이하에서 보았을 때 옛 언약은 내가 그들의 손을 잡고 남편이 되었어도 나의 말을 안 듣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은 우리 안을 바꾸어 놓기로 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 생각을 바꾸어 놓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것이 구원 얻은 자의 지금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받은 것인가를 잊어버린 채 노력 일변도로 가려고 합니다. ‘나는 희망 없어’ 하고 무너집니다. 지면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공하도록 만들어 진 존재인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자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만 섬겨라 함이 아니라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산다는 것은 이제 우리는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요인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옛 동기는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삶의 동기요, 요인입니다. 로마서 8:15 말씀을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무서워하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신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자녀로서 사랑이 기준이 되고, 모든 문제의 판단의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정죄가 없습니다. 사랑의 매와 형벌의 매는 이야기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율법이 무엇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내용입니다.

 

 

 

우린 율법에 매여 있지 않지만 율법의 정신을 이해합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명하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사랑이 동기고, 사랑이 기준이고, 사랑이 목표입니다. 신자는 그가 잘못했을 때도 부끄러움과 죄송스러움으로 그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야지 나는 이제 희망이 없다고 자포자기 하면 안됩니다. 부끄러운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죄송스러운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실패하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끝장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4:18말씀을 한번 보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마음에 두려움이 있는가를 보십시요. 형벌의 두려움이 있는가, 그것이 있다면 아직도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자꾸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두려워한 만큼 신자에게 손해일 뿐이지 두려워해서 이익 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사랑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여자 성도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거기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목사님의 가르침을 따라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축하전을 보냈습니다. 글자 수가 많으면 돈이 많이 들어서 ‘요일 4:18’라고 보냈습니다. 결혼식 할 때 축전이 도착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축전이 온 것을 보고 부부가 허니문을 떠나면서 차 안에서 성경을 펴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우체국에서 실수를 했는지 ‘요4:8’이라고 써있었어요. 1자가 없어졌습니다. “여인아 네게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니라”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 유명한 요한일서 4:18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따라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니라’는 우리에게 명령이 아닙니다. 그런 자가 된 것을 일깨우기 위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 속에 포함된 자로서 허락된 우리의 몫이며, 우리의 신분이요, 우리의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빼앗기지 마십시오. 신자에게 가장 큰 병은 자기가 누구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허락된 것을 사용할 줄 모르고, 누릴 줄 몰라서 많은 것을 가졌으나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도하면서 늘 울기만 합니다. 감사와 찬송이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복된 신자로서 살아가기를 원해서 이 말씀을 증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있는 것을 확인합니다. 이제 우리도 두려움을 내어 쫓고 사랑 가운데서 우리 주님과 동행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기쁨으로 주를 만날 것을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승리를 맛보게 하시고 구원 얻은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우리의 기도에 더 많은 감사와 찬송이 있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에 더 많은 사랑의 열매가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이들로 주 앞에 사랑을 입은 자요, 구원을 받은 영원한 나라에 속한 시민임을 알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7강(롬7:7절) 율법이 알게 한 것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롬 7:7)

 

 

 

7장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 전에 있었던 로마서의 표현들, 즉 사망과 죄에서 벗어나서 생명에 이르렀다는 표현과는 달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을 접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책임지지 않고 다른 힘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를 주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아래 있을 때 사망이 우리를 주장했고, 죄가 우리를 주장 했지만 이제는 은혜가 우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이 강조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죄 아래 있던 우리가 어느 날 깨우침을 받고 ‘영생을 선택했다, 구원을 결심했다.’하는 식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내가 나를 더 이상 혼자 책임지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으로 말미암아 나를 책임지는 것이 내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옛날에 율법을 나 혼자 책임져야 했던 그런 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로운 힘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곧 성령께서 계시며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의와 거룩에 대한 소원과 은혜가 우리를 주장하는 자가 되었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율법을 준 큰 이유를 설명할 때 소극적으로 율법이 죄였느냐고 7:7에서 질문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율법이 못나서 율법이 우리를 유혹해서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은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7:5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하였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율법마저도 죄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율법에 죄를 짓게 하는 어떤 요소가 있느냐, 율법에 어떤 결함이 있느냐,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알게 하는데 가장 큰 목적과 의의를 가진다고 답합니다. 이것은 이미 로마서 3장에서도 등장했던 표현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울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은 범죄함으로 더한 것이고 죄를 깨닫게 하려고 준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도덕과 양심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도덕과 양심은 율법의 기능에 훨씬 못미치는 죄책감을 줄 뿐입니다. 인간의 어떤 가능성과 인간의 적극적인 가치를 인정한 것 위에 양심과 도덕은 그 힘을 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살펴보면 인간의 가능성과 인간의 적극성을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데 그 목표와 기능이 있습니다. 로마서 7:7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율법이 우리에게 지적해 줄 수 있는 것은 문제가 어디에 있으며 그 잘못된 것이  어디 있는가를 지적할 뿐입니다.인간이 죄인된 것은 인간의 잘못이지 밖에 있는 조건이나 환경의 잘못은 아니라고 율법이 지적합니다. 게다가 인간에게 있어서는 행위에 잘못이 있지 않고 그 행위를 결과하는 마음에 잘못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할 때 저들의 모든 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죄인인가?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필요성을 인정치 못하게 합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를 납득시키려면 우리가 어떻게 죄인인가를 본인이 납득하도록 해야 하는데 죄인이라는 말에 대하여 자연인은 윤리적, 도덕적, 행위적 차원으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어떤 의미에서인지 본문처럼 이야기하자면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다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집약한 십계명을 보면 앞의 네 계명은 ‘하나님만 섬기라’ 뒤에 여섯 계명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통괄해서 어떤 뜻이 됩니까? 앞에 있는 네 계명에서 ‘네 하나님만 섬겨라, 하나님 외에 다른신을 두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는 이 말들은 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대표적으로 한 문장으로 압축을 하자면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시고 나를 인도 하시는것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고, 불평할 것이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37에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족한 분입니다. 우리 쪽에서 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뒤에 여섯 계명은 전부 ‘도적질하지 말라,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곧 네게 준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자식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분 자식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왜 넌 저 애같이 못하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넌 왜 저 애만큼 공부 못하니’ 그런말은 하지 마세요. 공부잘하는 자식만 꼭 복이 아니고 공부 못하는 자식도 꼭 손해는 아닙니다.공부 잘하는 자식을 둔 부모는 더 이상 속 썩을일도 없고 훌륭해지지 않지만 속 썩는 자식을 둔 부모는 훌륭해집니다.

 

 

 

그래서 부부간에도 왜 내 남편은 이럴까? 왜 내 아내는 이럴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대부분의 여자가 훌륭해지는 이유는 남편이 일찍 죽었기 때문입니다.이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인하지 않았다. 도적질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전혀 반대로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이 내용에서 주님이 지적하는 것은 결국 살인이라는 행위는 마음에 있는 증오심과 미움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매달고 있어야만 꼭 사과나무인 것은 아닙니다. 열매가 맺히지 않을지라도 사과나무는 사과나무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지적해 주었느냐? 우리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내가 짓는 모든 죄는 지음으로써 죄가 아니라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말 속에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가 다 포함되었습니다. 우리가 남의 것을 탐내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명예, 상대방의 부, 상대방의 행복을 탐냄으로써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살인을 하며, 거짓 증거를 하며, 도적질을 하며, 누구를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나는 죄라는 것을 행위에 관한 것인줄로 오해할 뻔 하였도다. 율법이 탐심에 대하여 지적했고, 탐내지 말라 하였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죄라는 것의 문제가 하나의 행위와는 관계가 없고, 행위 이전부터 내 속에서 이미 탐심의 씨앗으로, 소원으로 들끊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어디서나 나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서 노아의 홍수라는 심판이 왜 일어나는가를 보십시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 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1-7).

 

 

 

5절에 있는 바와 같이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더라’입니다. 율법이 들어와서 그 문제가 심각하냐 하는 문제에서 우리 마음이 부패했고 우리 생각이 썩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하다못해 율법의 고상함을 가지고도 우리는 좋은 것을 만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잘못은 우리 생각 속에, 우리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 제일 깊은곳에 있는 우리의 생각이 더럽고 추하고 악하기 때문에 인간은 결국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 그것이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죄를 행동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근원에서, 이유에서, 원인에서 따져볼 때 우리는 율법이 어디에 잘못이 있는가를 밝혀준 하나의 등불임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탐심은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이 탐심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탐심이 죄인 줄 몰랐을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에서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않았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는 내용에서 첫 번째 문제는 우리의 속 깊은 소원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는 그 말 속에서 탐심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 악한 소원은 대단히 힘이 있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7-30).

 

 


이것은 얼마나 대단한 힘인지 이 탐심을 거역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눈이 잘못했을 때 우리 눈을 빼버리고 손이 잘못했을 때 손을 자르지 않고는 이것을 이기지 못합니다. 눈을 빼버려서 안 봐야 되고 팔을 찍어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어야 우리는 간신히 이것으로부터 우리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속에 있는 마음을 고칠 방법은 없습니다.

 

 

 

속에 있는 탐심을 뽑아야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신체를 자르고 마음을 파내라는 것입니까? 손톱, 발톱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의 덩어리입니다. 탐심이 얼마나 크냐? 죄의 소망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으로 작용하느냐를 분명히 알아들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도박으로 망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술로 망한 사람도 많고, 여자로 인하여 망한 사람도 많은데 그 모든 것을 도중에 중단한 사람이 없습니다. 도박에서 딴 돈은 공짜로 생긴 것 같아서 함부로 씁니다. 잃을 때는 필요한 돈을 잃습니다. 그래서 늘 망하는 것이 도박입니다. 도박처럼 사람은 자기의 의지만으로 죄를 이겨내지 못합니다. 죄란 훨씬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이 로마서 7장은 바로 그 죄의 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8-11). 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로 이용하도록 만드는 것이 죄의 힘입니다.

 

 

 

요즈음 발표되는 조사 중에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여성 흡연자가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중학생 흡연자가 고등학생 흡연자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여학생 흡연자가 남학생 흡연자보다 적지 않다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러한 통계 조사를 들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 미쳤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 해도 괜찮겠네’라고 합니다. 죄라는 것은 이리로 가면 안된다기보다 ‘이리로 가도 잘가면 되겠구나.’로 우리를 붙잡습니다.

 

 

 

예를 들면 ‘태양은 가득히’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랑 드롱이 나온 범죄 영화입니다. 어렵게 자라난 청년이 부자집 친구의 부를 빼앗기 위해 작전을 세워가지고 접근합니다. 어느 날 요트를 타고 나갔다가 친구를 죽이고, 그의 애인과 부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죽은 친구의 사인을 위조해서 그 재산을 전부 애인에게 넘어가도록 합니다. 그 다음 이 여자를 유혹해서 결혼하여 재산과 여인을 차지하려는 그런 영화입니다. 마지막에 해안 벤치에 앉아 이제 다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시체가 발견되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그때 대부분의 관객이 누구 편을 드냐면 ‘왜 바보같이 해서 들켰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저게 사람이야’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아랑 드롱, 너 뭐하고 있냐’고 하는 것입니다.

 

 

 

죄의 힘입니다.우리가 그런 죄의 힘 아래 있었고 그것이 우리 속에 있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율법이 그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벗어날 방법을 제시하거나 그것을 벗겨 줄 힘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그것을 벗겨 준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그것을 벗어나게 하지 못했다 해서 율법이 잘못 했다는 말입니까?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무엇이 죄며, 그 죄가 어디 있는가를 몰랐을 것 아닙니까? 벗어나게 해주지 못하고 지적만 하는 데 대해 불평을 한다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렇게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14-17).

 

 

 

자꾸 죄가 내 속에 있고 죄가 나를 주장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롬 7:18-22).

 

 

 

바로 하나님의 법이 옳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

 

 

 

항거할 수 없는 더 큰 힘, 이것이 죄의 힘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죄를 나 홀로 대적한다면 죄를 이길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의 의지, 그의 이성, 무엇으로도 죄의 힘을 이길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5 - 8:2).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인가를 이제 분명히 확인하십시오.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죄는 이제 우리를 유혹하는 자리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좌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고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담대히 서서 이기시고 하나님의 자녀된 의와 거룩과 영광을 누리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복된 자리에 세우사 의와 거룩의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되었은즉 마음을 굳게 하고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고 의와 거룩의 삶을 누리는 자가 되게 하시옵소서. 결국 영광의 자리까지 갈 것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과 우리가 실패할 수 없는 인생인 것을 기억하고 승리하는 자들 되게 하시고 혹 넘어질지라도 분연히 몇 번이라도 다시 일어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8강(롬7:8절) 죄가 기회를 탐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 7:8)

 

 

 

성경이 구원에 관하여 설명할 때 죄와 사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원한 형벌 아래 있는 우리들이 천국의 시민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원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살피고 있는 로마서 7장에서는 그것을 ‘율법에 대하여 죽고, 영에 대하여는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내용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율법의 가치가 무엇이며, 율법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로마서 7장은 율법에 관한 설명과 함께 우리가 어떻게 율법 아래 있을 때 무지하며, 무능하며, 곤란한 처지에 있었는가를 다시 한 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의 잘못으로 인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선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야 할 때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해낼수 없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신자란 구원을 얻은 이후 주의 영이 우리안에 계셔서 주장하시기 때문에 죄의 권세를 이기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의와 거룩의 경지에 가게 됨을 깨닫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로마서 7:7에서 출발된 문제, 곧 율법이 죄냐? 율법이 무엇을 잘못해서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이냐? 그래서 율법과 헤어져야만 되었던 것이냐? 8절은 그것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율법에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권세가 우리에게 이렇게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8절에 설명된 표현들을 우선 이해해야 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에서 ‘기회를 탄다’는 말은 죄라는 것이 행위가 아니고 행위 이전에 그 행위를 산출해내는, 우리 안에 역사하는 원리요,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 조금만 약한 구석이 있으면, 어디 조금만 빌미가 주어지면 터뜨리고 나오려고 하는 원리와 세력으로 있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든지 튀어 나오려고 하는 세력이요, 우리의 잘못된 소망이요, 원리인 것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입니다. ‘계명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계명을 출발점으로 하여, 혹은 ‘계명을 본부로 삼아’라는 뜻입니다. 전쟁할 때 사령부로 근거지를 삼는다는 뜻입니다. 혹은 어떤 큰 돌을 움직이기 위하여 지렛목으로 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지렛대로 쓴다 해도 좋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의와 선을 가르치는 이 계명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것을 베이스 캠프로 쓸 수 있고 그것을 지렛목으로 쓸 수 있습니다. 이것 자체는 문제될 수 없습니다. 즉 계명 자체는 의롭고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그것을, 우리를 움직이는 지렛대로, 정복하는 근거지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각양 탐심을 이룹니다. 탐심이란 마음과 인격 상태가 악한 욕망에 지배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게 열병이 들게 만듭니다.

 

 

 

문제는 왜 우리가 율법과 헤어져야 하느냐? 율법으로부터 구출을 받아야 하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라고 표현된, 율법과 우리가 연합되어 있는 성경의 내용, 즉 우리에게 요구된 객관적 목표를 나 혼자 성취해야 하는 조건 속에서 구출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혼자서 계명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속에 있는 죄가 얼마나 강하고 얼마나 악하며 얼마나 센지 좋은 조건을 제시해가면서 우리를 악한 욕망에 휩싸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룹니다. ‘이루었다’는 것은 ‘시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철저한 작전을 말합니다. 그 의도하고 욕심내는 일을 철저히 이루고야 마는 것, 이것이 죄의 세력입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 우리의 조건이요, 상태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까? 이에 대한 근본적인 첫 번째 질문의 답은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의를 모르기도 하지만 생명과 진리와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설사 안다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 속으로 붙잡고, 그 뜻으로 살 능력과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구원을 선포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지금 설명한 죄가 실제로 우리 안에서 어떻게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는가 봅시다. 현실 생활 속에서 그런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설명하는 이 일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이요, 스스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어떻게 우리를 항복시키나 봅시다. 죄가 이런 일들, 즉 계명으로라고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는 이 방법에 제일 많이 동원 하는 첫 번째 방법은 반항심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옳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옳아도 거기에 대한 반항심은 모든 인간에게 생래적(生來的)으로 있습니다. 죄인으로 출생하기 때문에 반항심을 가지고 출생합니다.

 

 

 

반항심은 살아오면서 인생의 실패와 배신과 상처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원한이 아니라 생래적이라는 것을 여러분의 자녀를 키워보시면 알게됩니다. 자녀들이 꼭 이렇게 대답하기 때문입니다.공부해라 하면 자녀들은 “막 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그 말을 하니까 하기싫어” 이것입니다. 이 변명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당한 이유있는 변호로 채택되고 있는 답 중의 하나입니다.

 

 

 

신앙 좋은 부인과 그렇지 않은 남편 사이에 티격태격은 어느 가정이나 있습니다. “교회를 가자. 그러면 술 먹고 온 것 용서해 주겠다.” 하면 “그러지 않아도 미안해서 내일은 교회를 가려고 했는데 당신의 말 때문에 이제부터는 못간다. 내가 교회 안 가는 것은 당신 탓이다.” 이러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어서 않 왔을 것이고, 말을 하면 말을 해서 못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갖는 반항심의 죄가 우리가 생명과 진리로 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 반항심이 ‘정말 감정 상했겠다. 정말 나 같아도 하려다가 말았겠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말래도 하고 누가 하라고 했다가 일 터지면 “네가 하라고 했잖아”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의와 진리와 생명에 관한 한 우리는 끝없는 반항심으로 불의를 변호합니다.

 

 

 

로마서 8:7을 보시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죄가 우리안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정당한 것을 가지고 의와 거룩과 진리로 가는 우리를 방해합니다. 이런 방해는 자주 경험했고 지금도 자주 넘어지고, 자녀를 키울 때,이웃과의 사이에는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옳고 그름을 모르기 때문에 틀리는 것이 아니라 하기 싫기 때문에 안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줄은 압니다. 처음에는 대들어서 반항을 합니다. 권세로는 한풀 꺽여도 불평이라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이 불평이란 대단히 교묘한 방법입니다. 첫 번째 반항심이라는 방법이 독사가 머리를 쳐들 듯이 항거하는 것이라면 이 두 번째는 미꾸라지 도망 다니는 듯한 방법입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에 대하여 외면하는 죄의 교활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3장에 가시면 지금 살펴보는 이 성경에서 죄의 원리의 핵심이 되는, 불평에 관한 좋은 예와 죄의 기원을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1-5).

 

 

 

죄의 유혹의 큰 원리 중 하나가 ‘하나님은 너에게 불공평하시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이지, 너희 편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개념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큰 고집 중에 하나가 나를 나 외에 누가 더 편을 들며 잘 알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우리 편을 더 들고 자신이 자신을 아끼는 것 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아낀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내가 나를 더 잘 알지’하는 마음이야말로 죄의 커다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이 말은 죄가 우리를 넘어뜨리는 세력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는 장면에서 사탄이 찾아와 여자를 유혹했을 때 그에게 주었던 의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편이 아니다. 다 주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너희에게 주지 않았다. 이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도 신이 될 것이기 때문에 못먹게 한 것이니라.’ 이러한 사탄의 불평은 우리에게 언제나 많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저에게 신앙적인 상담을 해 올 때 바로 이 불평을 합니다. ‘왜 저보고만 지라고 그래요. 왜 저보고만 정당하게 살라고 하세요. 불공평합니다.’이럽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많은 것이 신자끼리의 충돌입니다. 그때 누구보고 참으라고 하겠습니까? 형하고 동생하고 싸우면 형보고 참으라고 합니다. 동생보고 참으라고 할 때는 형이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정도의 경우이고 제대로라면 형보고 참으라고 합니다. 신자끼리 싸움이 나면 나은 사람에게 참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저에게 “목사님까지 저를 괄시하기입니까? 제가 늘 참으니까 저를 바본 줄 아십니까? 목사님까지도 저를 불공평하게 대접하시기 입니까?”이것을 불공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의 모든 불만이 “왜 하나님은 악하게 사는 자는 내버려두시고 정직하게 사는 자를 치십니까? 내 열심에 대하여 보상해 주지 않고 총칼 들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몇 배 이익을 찾아가게 내버려 두십니까? 하나님은 불공평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정당한 줄 알지만 억울해서 못하겠습니다. 나도 이제 내 마음대로 살아보렵니다. 내가 왜 남편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며 내가 왜 자식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합니까?” 이것은 나쁜 생각입니다. 자녀 때문에 속을 썩어야 되며, 남편과 아내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며 혹 부모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합니다. 그 짐을 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주님의 일 때문에 오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문제, 불공평하다는 문제로 언제나 정당한 신자의 가는 길을 방해받고 있습니다. 이 유혹에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 방법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죄의 세력 앞에 굴복시켰는지 모릅니다. 불신자의 경우는 물론이고 신자가 된 이후에도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얼마나 많은 방해가 되는 죄의 교활한 방법인지 모릅니다.

 

 

 

세 번째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라는 이 표현이 무섭습니다. 계명이 우리를 각양 탐심으로 이룹니다. 우리를 악한 욕망에 지배받게 합니다. 그 방법은 상상이라는 방법인데 우리를 나쁜 상상으로 유도하는 것입니다. 계명은 의로운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았을 때 사람들이 그 옳은 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렛대로 하여 헛된 방랑을 하게 합니다.

 

 

 

미국에 가서 교육학을 공부할 때 배웠습니다. 교육학은 인간의 가능성에서 출발하고 그 가능성을 어떻게 개발하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철저히 죄 아래 있다는 것과 선한 것이 없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교육학의 가능성은 많은데 원석들을 제대로 캐내지 못하고 제련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성교육을 예를 들어 봅시다. 건강한 성교육을 시켜야 된다고 하지만 성경학자들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성교육을 시키면 건강한 성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호기심이 생기게 됩니다. 늦게 알수록 좋습니다. 일찍 배워서 좋은 점이 없는 것이 성지식입니다. 애들이 묻거든 나중에 크면 다 안다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죄가 계명까지라도 지렛대를 삼아 우리를 어떻게 흔드냐면 이렇게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우리 나라 문화와 사회 전반적인 풍토와 폭력성은 분명히 미국으로부터 넘어오는 것입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와 TV 때문입니다. 헤비메탈 그룹이라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화면에 꺼내놓고 상품으로 팔아 애들의 넋을 빼앗고 애들의 욕심과 아우성의 손길로 부모님의 주머니를 꺼내 가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이 ○태지 앞에 맥을 못쓰는 것은 정말 무서운 현실입니다. 기껏 해달라고 하는 게 오토바이 사달라는 것, 차 사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람보가 되고 로보캅이 되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죄가 계명을 근거 삼아 우리를 각종 악한 욕망에 지배되는 상태로 집어 넣습니다. 여러분이 죄의 욕망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것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이 불건전한 호기심, 죄악의 망상으로, 욕심과 난폭함의 화염 속으로 가장 거룩한 내용을 가지고도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 바로 이 죄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잘 아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던 중세시대에 성지 예루살렘을 놓고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 간의 수차례에 걸친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이슬람 교도들이 성지를 빼앗았을 때와 십자군 쪽에서 성지를 탈환했을 때 피정복자인 적대 국민에 대한 처리가 기독교쪽이 훨씬 잔악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기독교 세력이 성지를 탈환해서 회교국들을 손아귀에 넣었을 때는 가차없이 죽이고, 눈을 뽑고 참혹하게 처형을 하였지만 이슬람 교도들이 기독교도들을 포로로 잡았을 때는 훨씬 자비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신자는 내가 옳을 것을 위한다 할지라도 실수합니다.

 

 

 

죄는 우리를 옳고 맞는 것, 고급한 목표를 설정하게 해놓고서 실상 우리를 죄의 구렁텅이에 밀어넣을 수 있는 간교함이 있습니다.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신앙은 누가 갖는가? 아니 누가 신앙이 좋은가?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부르짖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알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더 깊이, 더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착하게 살면 되지 나쁜 짓 않하면 되잖아’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십시오. 누가 잘못하면 그가 죄 아래 신음하는 노예임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십시오. “저거 왜 저래” 그렇게 이야기 할수 없습니다.

 

 

 

성경이 언제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서나 스테반의 죽음에서나 다같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죄가 저들을 붙잡아 매었고 죄가 저들을 불태우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모릅니다. 우리는 구원 얻은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나를 나에게 맡기면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이 문제에 관한 좋은 표현이 나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1-14).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교양,지식,신념,의지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우침이 아닙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꺼내어 줄 도움입니다.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로마서의 시작 부분인 1:16에서는 복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하나의 힘입니다.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꺼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꺼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는 혼자가 아닙니다. 자기 혼자 자기를 책임지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계시며 우리를 죄로부터, 그 권세와 교활함으로부터 지키시고 의와 거룩으로 살 수 있게 하시고 마침내 영광의 자리에 세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성경의 표현이요, 신자가 분명히 인식해야 될 복된 자리입니다. 이것은 구원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이런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죄에게 맡기지 마십시오. 신자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을 필요가 없는 자입니다. 새로 태어난 자로,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죄의 소욕과 죄의 헛된 욕망에서 자신을 구별하고, 빼어내고, 정결케 함으로써 신자에게 허락된 의와 거룩의 생활을 하십시오. 신자로 양보하고 살면서 주의 뒤를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한 알의 썩는 밀알로 거룩한 열매를 추수하십시오. ‘왜 나보고만 그러세요’하지 마시고 신자이기 때문에, 우리들만 맡을수 있는 일이라고 기쁨으로 감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고 의와 생명으로 살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지고 참고 당하게 하시옵소서. 그 속에 생명이 있고 의와 진리와 거룩과 영원과 생명에 관한 씨앗이 뿌려지고 열매 맺혀지는 것을 알게 하사 우리로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주를 의지하여 승리하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우리 인생을 주 앞에 맡겨 승리와 찬송과 영원을 향하여 오늘도 묵묵히 충성되이 걸어나가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우리 된 것, 우리의 맡은 인생의 고귀함을 알게 하사 죄의 시험과 유혹에 지지 말게 하시고 세상의 교활과 핍박과 협박에 지지 않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빛과 소금으로 생명과 진리로 우리에게 맡겨진 신자의 삶을 완주하고 기쁨으로 주를 만날 수 있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59강(롬7:8-9절) 죄가 탐심을 이룸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 7:8,9)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는말을 앞 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죄란 얼마나 큰 세력인지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고 의와 선으로 인도하는 계명을 지렛대, 또는 작전본부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악한 일에 우리의 온몸과 마음을 살라버리는 상태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7:8의 내용 중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에서 시작되는 내용을 살펴봅시다. 죄는 계명을 가지고도 죄를 짓게 할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계명이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죄가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는 의미는 법이 없으면 죄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 속에서 신자 된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결론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이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9절에서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하는 표현 속에 답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법을 깨닫지 못할 때’와 ‘계명이 이르므로 법을 깨달았을 때’의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고, 법을 깨달았을 때는 죄가 삽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사도 바울에게도 법을 깨닫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고 그 때는 자기가 법을 다 지키고 썩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법의 의미를 깨달은 이후 죄가 얼마나 무섭고 자기가 어떻게 죄에 대하여 저항할 힘이 없는가를 인식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 가시면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그는 자신이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물론 바울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는 율법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런 것을 요구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기 오해 속에서 자기는 흠이 없는 자였고, 열심 있는 자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이 지시하는 요구와 우리에게 밝히는 사실들을 제대로 이해한 후 스스로 율법을 지킬 힘이 없음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킬 수 없는 이유가 죄가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누가 복음 18장에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깨닫지 못한 것을 만나보게 됩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9-12).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 있는가를 보십시오. 이 바리새인을 보십시오.‘나는 저들과 다릅니다.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 간음을 행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는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인인 것은 예수님께서 저들을 정죄한 데서 단적으로 증거가 됩니다. 저들은 다 죄인입니다. 저들이 죄인인 것은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에 있습니다. 계명이 이르자 저들은 죽습니다.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있고 내가 의인이고 합격하는 것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정한 율법의 요구와 뜻이 밝혀지자 우리는 그 앞에서 죄인인 것과 우리의 죄인 된 처지를 벗어날 방법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18-22).

 

 

 

본문 로마서 7장에서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계명이 이르면 죄가 죽어야 옳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내가 몰라서 그랬지 알면 죄를 안 짓겠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몰라서 죄를 지었을 뿐, 알았다면 왜 죄를 짓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바로 여기서 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진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들 앞에 나오셔서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율법의 진정한 요구인지를 밝히자 저들은 하나같이 증오와 시기와 분노로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계명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오히려 자기네들이 스스로 의인이라고 칭했습니다. 실제로 율법의 진정한 요구가 밝혀지고 진정한 진리와 의와 거룩이 요구됨으로써 진상이 밝혀지자 저들은 모두 손을 마주잡고 그리스도를 배척하여 드디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몰아내고야 말았습니다.

 

 

 

이 실제적인 현상을 보십니까? 인류는 지금까지 이 꿈을 버리지 못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유일한 이유는 무식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나쁘기 때문이다. 알면 죄를 안 짓는다.” 고 말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교육학에서 가장 많이 발전한 것이 심리학과 상담학일 것입니다. 심리학과 상담학은 원래는 인간이 좋은 사람인데 자라날 때 겪었던 어떤 상처들이 그의 성격을 이지러지게 만들어서 좋은 것에 좋게 반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풀어 주는 것, 그리고 그에게 고상한 생각을 심어 주는 것, 저들 마음속에 있는 어려서 가졌던 그늘진 어떤 경험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시중에 내적 치료라고 해서 정신과 의사들이 이것과 기독교 신앙을 접합해서 심리적, 상담적 차원에서 시술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인간은 가장 좋은 환경과 조건 속에 있을지라도 죄를 짓습니다. 인류의 첫 타락은 파라다이스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시궁창 속에서 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들이 좋은 부모 밑에서 성장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곳에서 타락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이 좋은가를 몰라서가 아니며, 옳은 것을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 잡혀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릅니다. 같은 요한복음 8:31로 가보십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31-44).

 

 

 

바리새인들의 의를 보십시요. “나는 저사람과 다릅니다. 나는 토색하지 않고 불의를 행치 않고 간음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나는 온전한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저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요구 앞에 섰을 때 자기들이 옳고 누가 틀렸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될 것 중에 중요한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계명의 요구가 무엇입니까? ‘계명이 이르매 나는 죽었도다’ 이 한탄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죄의 세력을 모릅니다. 계명의 진정으로 의미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생명과 진리의 차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룩한 화목이 이루어져 죄와 등을 쌓는 일이 아닌 일들,즉 윤리나 도덕,자기 자존심을 살리는 일, 이일을 하고 있는 동안은 즉 죄를 벗어나지 않는 동안 죄는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그 세력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경우에서 본 바와 같이 그들은 주를 만나기 전에는 민족의 정치적, 정신적, 민족적,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민족적, 종교적 모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나타나시고 계명이 이르자 저들의 진면목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내가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살았으나 계명이 이르매 죄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계명의 진정한 의미가 밝혀져서 의와 거룩과 생명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치장하지 않고 나를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죽기로 합니다. 그때 죄는 비로소 힘을 발동합니다. 과거 우리가 죄의 울타리 속에서 왔다갔다 머무는 동안 죄는 우리에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그러나 울타리를 벗어나서 그의 휘하에서 떠나려고 하면 죄는 비로소 그 힘을 가동하는데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철조망에 고압전류가 흐르며 감시탑에서 쏘는 연발총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시 철망 주위에 지뢰가 매설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7:15 이하에 바로 이 일을 실제적인 상황으로 나열해 놓고 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헹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15-23)

 

 

 

잘 보십시오. 사람들은 법을 깨닫기 전에는, 즉 법이 이르기 전에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 문제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법이 이르러, 계명이 내게 이르러 진실된 삶을 요구하자 빛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을 선택할 때 갑자기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발견합니다. 내가 빛으로, 생명으로, 진리로 가려고 할 때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뒤에서 나를 붙잡고 있는 큰 세력이 있는것을 압니다. 여태껏 나 혼자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한 법을 깨닫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절). 이 말은 내가 나에게 주인이 아니고 내 속에 강력한 어떤 감시인, 통치자, 명령자,주인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없으십니까? 실제로 신자들은 이런 고통을 한 번씩 겪었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모든 것이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통한 생각이 들어서 예수를 믿기로 합니다. 예수를 믿기로 하자 여태껏 편안했던 집 일들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자꾸 생깁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불신앙인 친척 중에서 누군가 답을 합니다. 두 신을 섬겨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태껏 하나만 믿고 있을 때는 편안했는데 네가 예수를 믿자 이 일이 생겼으니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냐라는 핍박을 우리 주위에서 봅니다.

 

 

 

여러분들이 믿어도 그만, 안믿어도 그만 하는 상태로 예수를 믿을 때는 별 탈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감동을 받으시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열심을 내려고 할 때 갑자기 하던 사업도 망하고 멀쩡했던 몸도 건강을 잃고 여태껏 말 잘 듣던 자식들까지 괴롭힙니다. 계명이 이르자, 즉 내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진리와 영원의 차원에서 깨닫고 그것을 선택하려고 하자 나를 여태껏 붙잡고 있었던 죄가 힘을 발동하여 그것을 막습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죄의 권세를 맛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는 거기서 물러나되 편안한 지경까지 물러납니다. 그러나 지지 마십시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 원리를 깨닫고 난 다음 결론을 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 안에 있는 다른 법, 죄 아래로 나를 붙들어 오는 그 세력은 내가 이길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죄는 더 큰 세력으로 나를 압도하고, 나를 내동댕이칩니다. 우리는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습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저 죄는 나를 내버려두지만 내가 거룩으로, 생명으로, 진리로 나아가려고 하면 죄는 있는 힘을 다해서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죄의 크기를 봅니다.

 

 

 

여러분이 나쁜 생각을 했을 때가 아니고 신앙으로써 정당한 생각을 했을 때 죄는 휠씬 무서운 힘으로 여러분을 흔들어 댑니다. 남편이 신령한 결심을 하면 할수록 아내가 공격하게 되어 있고, 아내가 신령한 결심을 하면 할수록 남편이 공격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가장 큰 힘을, 영향을 미칠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그 힘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물러선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죄의 힘을 우리는 깨우쳐야 합니다. 혼자 죄를 이겨내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로마서 7장은 이 목표 때문에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8절) 계명을 가지고도 각양 탐심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것임이니라.” 법이 와야 죄가 정체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알고 거룩과 진리와 생명을 모를 때는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무엇인지, 정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하면 눈을 휘둥그레 뜹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의 경지에 들어가 있는 신자들도 늘 하나님 앞에가면 가슴을 치면서 ‘이 죄인을 용서하십시오’라는 법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입니다. 율법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 : 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분명하게 하려고, 그 정체를 드러내려고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비로소 무엇을 아느냐면 내가 나를 주장하지 않고 죄가 나를 주장하고 있다는 이 무서운 현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함이니라”(갈 3:17-22).

 

 

 

율법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 것입니까? 율법이 우리를 절망케 하지 않으면 십자가를 찾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찾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릴 이유는 내가 죄인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구원은 회개를 수반합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주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나를 더 이상 책임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우리는 신자의 현실을 분명하게 깨우칩니다. 우리의 걷는 길이 평탄하지 않을 것은 자명합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본 것같이 세상이 나를 미워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끊임없이 믿음을 여기에 붙여 간구합니까? 열심히 주를 섬기겠으니 편안케 해 주십시오. 열심히 주를 섬길테니 남들에게 비난받지 않고 자존심 상하지 않고 살게 해 주십시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열심히 주를 섬길테니까 내 안에서 쓸데없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열심을 내고 더욱 거룩을 추구하면 죄는 있는 힘을 다하여 여러분을 공격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헌금이나 내고 교회 출석이나 할 뿐 실제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으니까 죄가 공격하지 않는 것입니다. ‘너는 예수 믿어서 그래 너 하나 천국가라 내가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넌 그대로 있다가 열매 하나도 맺지 말고 그냥 가라. 한 달란트 받은 것 그대로 손에 쥐고 있다가 죽어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죄가 여러분을 공격도 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돌이켜 생각하셔야 됩니다. ‘왜 죄가 나를 놓아두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늘 아무 일도 없는데 당신은 왜 그렇게 밤낮 어려운 일만 생깁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결심하면 할수록, 의와 거룩을 소원하면 소원할수록 깊은 좌절에 빠집니다. 주님을 붙잡고 주의 손에 의지하여 정말 십자가를 지고서 그 한 단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주께서 요구하신 이 길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시작해야 됩니다. 시작하지 않고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 된 여러분의 특권과 책임, 그리고 이 교묘한 시험에 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는 다 신념과 의지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써 은혜가 우리를 다스림을 기억하고 죄와 사망을 벗어난 신자의 아름다운 인생을 허락하시옵소서. 편안함을 구하지 말게 하시고 의와 거룩과 생명과 충성을 요구하는 복된 신자들이 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0강(롬7:10-11절) 계명으로 나를 죽임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롬 7:10~11)

 

 

 

로마서 7장에서 우리는 율법의 기능, 죄의 정체를 보고있습니다. 율법이 등장하여 우리를 선하고 의로운 데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사망으로 끌고 간다고 성경은 설명합니다. 로마서 7장을 보시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5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8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11절)입니다.

 

 

 

율법은 결국 죄와 사망으로 가도록 인도하는 어떤 것이 되고 말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이 확인시켜 주는 것은 7절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현실과 그 현실을 자칫 잘못 오해해서 율법 때문이라고 결론 짓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율법 자체는 본문에서 나타나는 것같이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 이끌어가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느냐를 로마서 7장이 밝히고 있습니다. 죄의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그 촛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율법이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죄로 책망하고 심판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자체가 그것을 하고 있는것은 아닙니다. 율법 자체는 생명을 위하여 의도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과 우리가 믿음과 은혜로 얻은 구원과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율법은 죄를 지적할 뿐이지 죄를 이기게 하는 방법은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죄를 이기게 하며 우리를 건져내는 힘인 것입니다.

 

 

 

레위기 18장으로 가시면 율법의 성격이 아주 잘 드러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너희는 나의 규레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아니라”(레 18 : 5). 율법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면 삽니다. 로마서 7장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율법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에 익숙하기도 하고 익숙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삽니다. 그러나 지킬 수가 없습니다. 신약에서 비슷한 답이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 : 25-28).

 

 

 

이것은 율법입니다. 이것을 행하면 삽니다. 그러나 이것을 행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하려는 일이고 우리가 발견했던 우리 자신의 현실입니다. ‘이를 행하면 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할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 질문을 했던 누가복음 10 : 25 이하의 이야기는 이 질문과 답을 받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 10 : 29)라는 질문이 계속됩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 “율법을 지켜라. 율법이 무슨 뜻인지 너 모르느냐?” ,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해라”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겠습니다. 그럼 어디까지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이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비유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제사장이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는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보기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 ,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 “옳도다. 너도 가서 그리하라.” 쉽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 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 “율법을 지켜라.” , “율법을 지키겠습니다. 어디까지가 내 이웃입니까? 한계를 정해 주십시오.” 주님은 어디까지가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쪽에서 볼 때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지켜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알면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 우리가 베푸는 자비는 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요,이해 관계가 얽힌 사람에게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 쓰다버린 휴지 한 조각도 주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물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사랑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남은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관대한 것은 우리가 그 일에 대하여 별로 아픔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 손해에 대해서 우리가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에 관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차 몰고 가다가 길에 떨어진 100원짜리 동전을 보고는 차를 세워 돈을 집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돈에 초연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100원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타러 나가다가 길에 버려진 100억을 보면 미국 가는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주울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힘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바로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옳다고 해도 지킬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 : 3이 그것을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우리가 더 이해하기 좋게 하자면 ‘율법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입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몸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에 팔려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것으로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우리가 죄 아래 팔린 종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도 이런 일들은 신자들에게는 성경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고 여러분들에게는 익숙한 것입니다만 불신자들에게는 아직 익숙치 못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뿌리 깊은 옛 생각들이 있습니다. 중세 시대를 끝마치고 르네상스를 맞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전 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흐름은 계몽주의입니다. 계몽주의 사상은 무지해서 죄를 지었다는 것 아닙니까? 알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즉 기아로부터의 해방, 무지로부터의 해방,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인류는 이러한 자유와 평등으로 그 모든 방향을 초점 맞추어 흘러 왔습니다. 옛날 같은 억압도 없고, 옛날같은 무지도 없고, 옛날 같은 배고픔도 우리 주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때보다 우리가 더 거룩하며, 의로우며, 진실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을 찾아 볼 수는 없습니다. 어느 것에도 없습니다. 우린 모두가 죄를 짓기에 바쁩니다. 현대는 중세시대보다 더 암흑기입니다.       

 

 

 

그 때보다 지금 죄를 더 많이 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 자체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 잘못이 없습니다. 그 잘못은 인간이 옳은 것을 알아도 ‘옳은 것을 할 수 없는 존재’ 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기 때문에 이 생명에 이르게 할 계명을 가지고도 사망으로 달려갑니다. 그 처절한 우리의 위치를 아십니까? 이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오지 않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는 고백이 없는 한 우리는 주님을 필요로 할 이유가 없고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필요성을 알았고 죄의 세력과 그 아래 있는 처참함을 알았으며 죄에서 해방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좀더 알아야겠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얻었다는 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아야겠습니다. 8절에서 이미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여기 ‘각양 탐심을 이룬다’에서 ‘이룬다’는 말은 군사적 용어입니다. 특공대를 보내어 틀림없이 이루고야 마는 군사 작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의 세력과 힘을 봅니다.

 

 

 

본문 11절에서는 8절과 거의 똑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얼마나 똑같습니까? 8절에서는 죄의 힘이었습니다. 11절은 다릅니다.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죄의 사악성, 그 교활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죄는 힘이며, 사악합니다. 이 두 방법에서 이겨낼 방법이 없습니다. 죄의 힘과 사악성에서 우리는 빠져나올 재주가 없습니다.

 

 

 

죄의 교활함, 기만성을 성경은 너무나 자주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로 가봅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같이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미혹케 한 것같이입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그 속임이 참으로 교활하고 우리는 이 시험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잘 영위하다가도 실패하면 자기의 믿음 부족한 것과 연약함을 주 앞에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도 할 만큼 다 했어요. 이제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라고 배짱을 부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뿌리 깊은 죄의 습성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어려운 시험을 만나 실패하면 우리의 잘못을 꾸짓지 않고 핑계를 대는 것, 그 원형이 여기에 있습니다. 뱀이 하와를 미혹케 한 그 타락의 현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늘 선악과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으로 이런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 선악과는 도대체 왜 만드셨어요?’ 우리 마음속에는 아주 악한 마음이 하나 있습니다. 왜 만드셨을까요? 뱀이 하와에게 무엇이라고 속였습니까? ‘저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못먹게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 편이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너희에게 주지 않는 분이다. 불공평한 분이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시험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 1,2장에 걸쳐서 기록된 천지창조 기사를 보면 그 천지창조 기사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어떠한 마음이 나타납니다. 여러분들도 잠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창세기 1,2장에 걸쳐 있는 천지창조와 인간 창조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호의적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악의적인 것 같습니까? 아니면 중립인 것 같습니까?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된 찬지창조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호의적입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마련한 후에 인간을 창조합니다. 인간에게 먹을 것을 만들라든가, 옷을 해 입으라든가, 집을 지으라든가 하는 의식주를 자기 손으로 해결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다스리는 것뿐입니다. 영광된 지위를 주었지 생존 경쟁의 치열함에 대한 어떤 것도 인간에게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 아직 사시사철도 없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아마 사람이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이 상온이 유지되는 그런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디나 먹을 것이 있을 뿐 결코 해하는 것이나 상하는 것이 없습니다. 악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 주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합니다. ‘저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하셨느니라’에 넘어갔습니다.

 

 

 

오늘날 사탄이 미혹케 하는 아주 좋은 전략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옛날 아담과 하와가 살고 있는 에덴보다는 못한 곳입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우리는 땀을 흘려야 되고 우리를 공격하는 적대 세력과 싸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때보다 더 나은 것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조건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실과를 먹지 않는 한 죽지 않을 것이지만 이것을 먹으면 죽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조건적인 상태속에 있었다면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안에 있습니다. 아무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는 산상설교를 보면 마태복음 6장에서 “공중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요구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받은 명령과 방불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의식주에 대해서 염려하거나 그것에 대해 우리의 마음이 산란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복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우리는 무엇에 미혹됩니까? 왜 하나님은 나를 가난하게 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나에게 건강을 주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내 자식만 떨어지게 하는가? 입시철만 되면 애 학교 붙이는데 아주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가장 비신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열심히 매달리셔야 됩니다. 자녀가 하나님을 의지함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떨어지면 그것이 복이고, 붙으면 그것이 복이고, 삼수하면 삼수해서 세 배 복이고 사수하면 네 배 복이고 그게 신자가 가져야되는 자기 존재와 삶에 대한 믿음의 승리입니다. 그것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 미련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게 잘해준 것이 무엇이냐? 네가 열심히 신앙생활해 왔고 받은 것이 무엇이냐? 남들의 손가락질이 아니냐? 남들이 너를 우습게 보지 않느냐? 네가 양보해 봐라 아무도 너를 귀하게 여기질 않지 않느냐?” 우리는 홀딱 넘어갑니다. 미혹케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1로 가보십시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에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1-24).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 유혹입니다. 죄라는 것의 사악성과 심각성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죄는 우리를 힘으로도 끌고 갑니다. 그 교활성을 우리가 다 경험하였던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저렇게 하면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 좇아가는 게 죄입니다.우리는 결과를 뻔히 알면서 이것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짓는 죄중에 죄의 결과를 모르고 짓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 지을 기회를 주지 않고 막아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내일 아침이라도 일간신문 첫면에 날 것입니다. “남포교회 모 집사, 이상한 행동 하시다 돌아가시다.” 주보에 낼것도 없이 매일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면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 일을 당해서 이기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밝습니까? 거기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우중충 합니까? 교회에 앉아서 이 우중충한 내용을 서로 나누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가서 좋은 옷입고 좋은 자리에 앉아서 인생을 얼마나 살 만한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데 우리 아들보고 엄마가 “너 공부 못하면 장가도 못가”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세상은 넓고 여자는 많다”라고 합디다.

 

 

 

여러분 텔레비젼에 나오는 광고 중에 울고 나오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안약 광고하는것만 울고 나옵니다. 그 광고 외에는 다 행복한 것 같고 제일 잘 사는 것을 찍지 우는 장면은 안찍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기는 행복이 있을것 같애.’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저것을 안주기 때문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그래서 광고한 대로 다 삽니다. 차도 더 좋은 차로, 집도 더 좋은 집으로, 가구도 더 좋은 것으로 우리는 발버둥을 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거기서 빠져나오질 못합니다. 행복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행복은 주 안에만 있습니다.

 

 

 

히브리서 3:12 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히 3:12-13).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강팍케 되는가, 여러분이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원망합니까? “내가 뭐 큰것 달랬어요. 애 하나 서울대학도 아니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여달라는 것도 안 들어 주시니....” 이것이 우리의 원망입니다. 여러분들의 최고의 소원이 돈많고, 건강하고, 시간 많은 것인데 돈 많고, 건강하고, 시간 많으면 할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어요.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습니다. 지금의 아내와 지금의 남편말고 누구 딴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아휴, 한번 살아보셔, 나니까 살지”라고 말합니다. 저 사람이 내 마누라 보다 낫고, 저 남자가 내 남편보다 나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그거죠. 생긴것만 다르지 속은 다 똑같습니다. 누가 이런 걱정을 다 하더라구요. 하도 남편이 속을 썩이니까 시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이렇게 대들었답니다. “아니, 어머니는 애를 키우다 말고 보내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것입니까? 그냥 데리고 사세요. 남편 하나, 아내 하나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나님이 둘 데리고 살라고 했으면 어떻게 할 뻔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이 진실하게 살고 말씀대로 사는것이 복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를 끊임없이 속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라면 행복할 것 같고 이 일만 해결된다면 살 만한 것 같지만 실제는 아닙니다. 세상에 평안이 있을것 같지만 아닙니다.

 

 

 

모든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의 90%가 사랑노래입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게 왜 그렇게 처절합니까? 행복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는 곳에 행복과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속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죄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가 우리를 속이고 죄가 우리를 힘으로 사로잡아 사망과 진노 아래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점에서 분명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결정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빠져 나올수 없는 이 세력, 우리가 이겨낼수 없는 이 유혹에서 우리를 건져낸 ‘’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6에서 시작하면서 사도바울은 구원을 이렇게 정의 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0-21)

 

 

 

신자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죄 아래 있었듯이, 이제 우리는 은혜 아래 있고 은혜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막무가내인 것을 그냥 놓아두지 않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놓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다시 사망의 자리로 가거나 하나님의 진노의 자리로 가는 실패는 없습니다. 아직도 신자답게 살지 못하는 실패는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났습니다. 죄는 우리를 다시 사망으로 끌고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들수는 있습니다. 우리를 자포자기하게 만들수는 있습니다. 실상은 아닌데 그렇게 믿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죄를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죄에 유혹을 당하고, 죄의 무서움 앞에 직면할 때마다 성도들은 다시 한번 구원을 상기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심을 상기하십시오. 세상이 유혹하는 유혹의 진상을 꿰뚫어 보십시오. 복음이 나에게 약속하는 행복, 승리로 여러분을 재조정한다면 여러분은 죄에 질 일이 없고, 그 유혹에 빠질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질 이유가 없습니다.

 

 

 

신자는 비로소 의와 거룩으로 사는 삶의 기쁨과 승리를 누리게 되고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저 헛된 것들에 시간과 정열을 낭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기는 승리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남은 생애를 이 시험에 져서 실패자로 살지 마십시오. 헛된 일을 악순환 속에 보내지 마십시오. 신자된 참다운 승리와 보람과 자랑을 누리고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자녀들에게 어떻게 복주시는가 지켜보십시오. 성경이 약속한 대로 감사가 끊이지 않을 것이며, 찬송이 끊어질 틈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부름받은 모든 성도를 향한 우리 하나님의 뜻이요, 약속하신 복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우리 마음대로 살게 놓아 두시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은혜로 다스리시고 주의 사랑으로 간섭하시나이다. 이제 우리의 영광을 입게 하시고 우리의 자랑을 입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거룩과 의를 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의 승리를 누리게 하시옵소서. 세상의 유혹과 저 헛된 욕심들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 안에 주어진 영생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나누시는 영광과 증거해야 될 주의 사랑과 자비와 구원과 복음으로 우리의 생애를 수 놓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사 기쁨과 찬송과 칭찬 속에 주 앞에 설 수 있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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