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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로마서 강해 7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5:47

 

 

 

 

 

 

 

 

 

 

로마서 강해 7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목차>


로마서 61강(롬7:12-13절)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로마서 62강(롬7:14-15절) 미워하는 것을 행함
로마서 63강(롬7:16-20절) 내 속에 거하는 죄
로마서 64강(롬7:21-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로마서 65강(롬7:24-25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감사
로마서 66강(롬8:1-2절) 성령의 법이 해방하심
로마서 67강(롬8:1-2절) 예수의 살으심 안에서
로마서 68강(롬8:1-2절) 생명의 성령의 법
로마서 69강(롬8:3-4절) 완성된 율법의 요구
로마서 70강(롬8:3-4절) 율법의 요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로마서 61강(롬7:12-13절) 선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이로 보건데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롬 7 : 12 - 13)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상투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 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상투적인 표현은 여러번 나왔었습니다. 먼저 로마서 6 : 1에 이런 표현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15절에도 있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7 : 7에도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리고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노력과 선택과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긍휼과 자비의 선물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로마서 3장, 4장, 5장을 그렇게 이해할 때 다음과 같은 중요한 오해들이 생길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오해는 은혜에 관한 것과 율법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6 : 1에서 본 바와 같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가 거져 구원을 얻었고 아무것도 안하고 선물을 받았으니 우리가 무엇 때문에 믿음과 신앙에 대하여 열심을 내겠는가 하는, 은혜 지상주의적 발상에 의한 나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6장에서는 은혜가 우리를 의와 거룩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주어졌는데 어떻게 다시 죄로 돌아간다 말이냐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구 없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7장에 이르러서는 그렇다면 율법은 왜 주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죄만 더 짓는다면 율법은 왜 준 것이냐?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이 죄냐? 율법이 죄를 조작하느냐? 율법이 죄의 근거냐? 이유냐?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12절). 율법 자체는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13절의 지적처럼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선한 것이 내게 왜 사망을 결과시키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봐야 할 중요한 질문을 만났습니다. 율법이 죄가 아니라면 그 선한 것이 왜 나에게 사망을 만들어내느냐? 13절을 보시면 그 답이 나옵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율법은 죄가 아닙니다. 율법은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것으로 나에게 결과되는 것이 왜 사망밖에 없느냐? 그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나에게 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나에게 사망을 만들어내는 것이 죄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율법은 주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므로 우리는 사망밖에 열매 맺지 못하는 자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었더라면 이것이 확인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7절에 이미 이렇게 나와 있었던 말에도 답이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렸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롬 7 : 7 - 8).

 

 

 

율법의 기능이요, 목적입니다. 다시 한번 이렇게 정리를 합시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선하고, 의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구약에서 이미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후에 하나님꼐서 그들을 자기 백성 삼기 위하여 이렇게 요구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고 거룩할지니라.”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에 속한 백성도 거룩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당연한 표현이요, 그와 교제를 하며 그의 안에 안주할 모든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최소한의 수준입니다.

 

 

 

그러나 이 율법이 그 거룩하고 선한 대로 우리에게 작용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드러내는 역할밖에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의 참다운 기능은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를 몰랐을 것이고 죄를 몰랐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몰랐을 것이고, 그렇다면 복음은 죽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로마서 7장은 이렇게 긴 설명을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할애합니다. 그래서 13절을 다시 보시면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선한 율법으로 나를 죽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선합니다.

 

 

 

그런 ‘선한 것’이 선한 것을 열매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 안에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가 죄인인 것과 죄가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바 복음과 구원의 도리를 가르칠 때, 그리고 그것을 전파할 때 가장 크게 부딪히는 벽이 죄에 대한 개념입니다. 저들의 죄에 대한 개념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개념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에 대한 개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거룩에 관한 것이고 저들이 갖는 죄의 개념은 윤리와 도덕에 관한, 인간 앞에서의 상대적인 어떤 평가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크게 반발하는 것 중의 하나가 ‘왜 너희만 옳느냐’하는 것입니다. 왜 너희만 구원을 얻고, 왜 너희만 선하다고 하느냐, 불교 신자들이 너희보다 낫고 이슬람교 신자들이 너희보다 낫다는 이야기들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슬람 교도들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며, 불교신자들이 우리보다 더 자비하고, 더 나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가 전혀 다른 것은 그들은 율법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즉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모른다는 데서 저들은 율법의 기능을 혜택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혀 냅니다. 우리가 죄 안에서 이런 죄를 지을까, 저런 죄를 지을까 고민하는 동안은 우리를 구속하거나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 힘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까, 하나님 앞으로 갈까 하고 망설일 때는 큰 힘을 내서 우리를 압박하고 방해하고 핍박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내가 예수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스도 따라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일 때 죄는 있는 힘을 다 발휘해서 우리를 방해하여 죄 가운데 내려 꽂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닌 ‘나를 치장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 욕심을 채워서 재미를 볼 것인가, 재미를 사양해서 잘난 척 할 것인가’ 고민하는 동안 죄는 절대 나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둘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둘다 전혀 하나님과 전혀 상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의지의 사람이냐, 내가 얼마나 교양 있는 사람인가, 내가 얼마나 배운 사람이냐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치장입니다.

 

 

 

로마서 9장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딛힐 돌에 부딛혔느니라”(롬 9 : 30 - 32).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에 의지했는데 그 율법이 ‘내가 누구냐’로만 사용되고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10 : 1에는 이렇게 연결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 : 1 - 3).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율법을 사용할 때, 율법의 진정한 기능은 저들에게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죄인인가도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비유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감사합니다. 내가 저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노략질하지 않고, 남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토색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온전한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이는 율법의 진정한 기능, 우리가 이떻게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없는가를 깨닫지 못한 기도입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아서,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 교양과 지식과 여러 차원에서 남다른 온전한 사람인 줄 알고 있는 이상 죄는 비록 기도하는 사람일지라도 결코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게 내버려 둡시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은 바로 율법의 기능을 이렇게 연결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빠져 나오려고 하자 율법이 이르러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밝혀서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나와, 죄와 흑암의 권세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의와 거룩과 생명이신 하나님 존전으로 나아가려 하자 죄가 우리를 어떻게 붙잡는가를 이렇게 보여줍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 : 15 - 20).

 

 

 

율법이 등장함으로써 내가 옳고, 생명이고, 진리인 것을 선택하려 할 때 내 속에 어떤 거대한 세력이 나를 붙잡아서 그리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죄에 속했을 때는 이런 죄를 선택할 것인가, 저런 죄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염려나 고민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안에서 놀고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유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진리와 생명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선택하려고 하자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거대한 어떤 세력 하에 있는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로 나갈 수 없는 위치에 있는 내 처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일 이 율법이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와 거룩으로, 내가 어떻게 갈 수 없는 참담한 처지에 있는가를 밝히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십자가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필요성을 모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구원에 대한 이해들은 성경과 다른 것이 됩니다.

 

 

 

갈라디아서 3 : 10로 가보십시다. 율법은 구원의 방도가 아닙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러 온 것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 : 10 - 12).

 

 

 

율법에 관하여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한 번만 틀려도 실패하는 것이고, 율법 중에 한 가지만 저촉되어도 범법자가 되므로 항상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항상 율법 모두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 전부를 항상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한 순간도, 그 중에 한 가지도 지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저주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를 이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7장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율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겪은 신자들의 실패도 이것과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 : 13 -14).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말미암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구원이 우리에게 허락됩니다. 율법은 처음부터 그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계성에서 살필 때 율법을 먼저 주었는데 율법으로 구원 얻을 자가 없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 같은 오해를 할 가증성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 : 15 - 18).

 

 

 

구원에 관한 약속, 즉 믿음으로 의롭다는 약속을 얻는 것은 아브라함 때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약속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구원을 얻는 유일하고 영원하고 온전한 하나의 모델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그 이후 430년이 지난 뒤에 준 것입니다.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 도달하여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가지고 내려 왔습니다. 구원의 방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처음부터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왜 주었는지 살펴봅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갈 3 : 19 - 21).

 

 

 

율법은 구원의 방도로 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돕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낼 수 없음을 확인시키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기 위하여 온 것이 율법입니다. 범법함으로 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22절). 죄 아래 가두기 위하여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아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오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은 정확히 로마서 3장의 내용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로마서 3 : 19에 구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 : 19 - 20).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의로워질 방법이 없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율법이 있어야 비로소 십자가의 필요성을 압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 21 - 24).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확인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율법이 등장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인 것이 확인되지 않는 한,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하는 비명이 없고 그 비명이 없이는 십자가를 붙들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우리 모습은 모두 누가 더 잘 났느냐의 싸움밖에 안됩니다. 본장 서두에서 살핀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과 우리와 큰 차이가 있다면 율법이 작용해서 하나님 앞에 큰 죄인인 것을 안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인인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할 때 항상 이해 못하는 말이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왜 지옥갑니까? 내가 왜 죄인입니까?”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훨씬 더 나쁩니다. 워낙 불성실하게 살고, 교활하게 살고, 타협하고 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큰소리치며 사니까 상대적으로 우리는 착하게 보입니다.

 

 

 

우리 나라 대통령 선거시 후보에 나오신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을 찍을 것인가에 대해서 신문에 아주 좋은 조언이 나왔습니다. 원래 찍으려면 나은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문은 ‘’나은 사람, ‘’ 정직하고, ‘’ 성실하고, ‘’ 진취적이고, ‘’ 책임 있는 “더한 사람”이 아니라 “덜한 사람”을 뽑으라고 합니다. ‘’ 거짓말하고, ‘’ 돈 쓰고, ‘’ 타협하고... 이것은 잘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덜 악당을 뽑아야 되는 세상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무슨 마음이 드느냐면 ‘내가 나가는 것이 났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내가 나가면 이 세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지 않는 한 사람끼리 비추어 보면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이 복음과 우리가 믿는 이 구원에 대하여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지 않는 한 십자가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자랑할 수 없게 되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신자로 사는 것이 억울하게 됩니다. 이런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지?’ 첫 번째 불평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 할 때 내려왔다 어떻게 할래하시고 내려오셔서 뺨을 한 대 치고 열 두제자 데리고 로마로 진격해서 시저를 단칼에 죽이고 온 세상을 평정하고 지금까지 백마 타고, 흰옷 입고, 면류관 쓰고 다니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다면 틀린 생각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이 아니며, 성경이 가르치는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 있고 하나님의 영원한 징벌밖에는 기다릴 것이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내 대신 그를 죽이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구원 얻은 것과 비교할 다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불행하게 살고, 아무리 억울하게 산다 할지라도 억울하지 않은 것이 신자입니다. 그렇게 인정하십니까? 만일 그 인정이 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권위 앞에서 자신을 생각지 않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엄하신 권위를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그에게 불충하며, 그를 외면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감히 불만이 있고, 감히 억울하다는 소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거룩하심 앞에서 몸둘 곳이 없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여져서 그 앞에, 칭찬과 사랑 속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전생애를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신자만의 특권이요, 자랑이요, 감사거리라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율법이 한 일입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위치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정케 합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며, 주 앞에 엎드리게 하며 그 앞에서 우리가 얻은 이 구원을 감사케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우리는 핑계하면서 왜 선악과를 만드시고, 왜 예수님을 죽이셨냐고 묻습니다. 바로 우리의 못난 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이제 내가 사랑과 은혜를 입고 섰음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시고 남은 생애에 신자로서 사는 행복과 품위와 마땅한 인내와 충성을 놓치지 않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두셨으니 감사합니다. 우리로 자랑하는 자, 교만한 자, 헛된 일에 정신 파는 자가 되게 마옵시고 이제 하나님의 거룩하신 부름을 입은 자처럼 절제하며 경건을 연습하며 인내하며 충성하며 사랑과 자비와 온유와 겸손으로 옷 입고 우리 하나님의 새롭게 만들어내신 자처럼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의 생애를 충성되이 신앙으로 살게 하사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시고 생명과 영원에 이르는 향기를 발하며 또한 그 열매를 맺고 주 앞에 나가 설 수 있는 복된 신자의 삶을 마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2강(롬7:14-15절) 미워하는 것을 행함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롬 7 : 14 - 15)

 

 

 

로마서 이해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로마서 7장 후반과 로마서 9장 - 11장입니다. 특별히 11장에 중심을 두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의 관계 때문입니다. 14절에서 25절에 이르는 이 대목에서의 어려움을 살펴봅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 22 - 24). 이것을 외친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이 난제입니다.

 

 

 

물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쓴 것이고, 이것을 외친 사람이 바울이라고 일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자신의 현재의 심정을 이야기한 것이냐? 아니면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을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사도 바울이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사도 된 자기의 입장을 표현한 것으로 신학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어떤 처지에 있는 인간상을 그리려고 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수 있습니다. 그가 그려낸 실제적인 인간상의 위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세 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여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고 비명을 지른 사람은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 구원 얻지 않은 불신자, 자연인이라는 입장이 있습니다. 자연인이 죄를 깨닫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통탄하는 것이라는 것이 첫 번째 입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로서는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죄인인 줄 아는 자는 구원 얻은 자밖에 없습니다. 구원을 얻기 전에는 자기가 죄인인 줄 모릅니다. 죄인인 줄 깨닫는 것은 언제나 구원을 얻는 것과 함께 오는 깨우침이지 두 개가 따로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즉 성령으로 인하여 그 마음에 조명되지 않은 심령은 자신이 죄인인 줄 모릅니다.

 

 

 

같은 로마서 7 : 9에 이런 표현이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뭐가 뭔지 모를 때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사망의 몸에 있는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은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것은 이 계명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 심령을 제대로 찌를 때, 곧 죄를 깨닫았을 때뿐입니다. 그것은 구원 얻은 자의 입장이며, 구원 얻지 못한 사람은 이 부분을 전혀 모릅니다.

 

 

 

조금 더 폭 넒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를 논할 때에 종종 구원의 확신 문제와 결부되어서 많은 이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것을 봅니다.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의 확신은 ‘나는 주님을 찾았습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나는 이제 기쁩니다.’ 이런 측면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은 이런 율법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고백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신자들의 구원 확신이 ‘나는 기뻐요’하는 것입니다. ‘나는 찾았네. 나는 기뻐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라는 것이 어느 날 마음에 가득 찬 희열과 흥분과 감동과 그런 희심, 그런 잊을 수 없는 체험과 사건으로 각인되어진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구원의 확인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큰 혼동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아직 그런 기쁨이 없다. 그런 희열이 없다.’ ‘내가 정말 예수를 믿는 것인지 안 믿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믿어도 천국엘 갈까?’ 하는 처지에서 방황하는 신자들을 많이 만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속에서부터 뜨겁고 지체하기 어려운 감정이 폭발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 믿는 것에 눈을 부릅뜨고, 얼굴이 빨개지도록 흥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연애 시절로 돌아가서, 구혼할 때 무릎을 꿇고 옷을 찢으며 심정을 토로하는 것만 프로포즈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너무 드라마틱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되는데 보통 이런 열정과 흥분을 갖고 있지 않은 분들은 자신이 믿는 믿음이 믿음인지, 아닌지를 의심합니다. 이렇게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그러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혼동이 오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예수를 믿고 싶은가, 그런 경향이 내게 있는가? 그런 소원이 있는가? 그런 것입니다. 믿는다는 말로 내가 자신이 없다면 예수를 잘 믿고 싶은가? 잘 믿고 싶으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의심이 찾아올 수 있죠? 내가 잘 믿고 싶다는 것이 정당한 믿음인가? 그것 자체가 소원만 가지고 되는가? 언제나 충만함을 맛보는가?

 

 

 

그러나 확실하게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받는 것이 무서운가? 이거야말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외면당하는 것이 무서운가, 그게 끔찍한가?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확실히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나름대로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밝은 성향인 사람이 있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성향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낫다고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적극적이고 밝은 사람에 대해서 좋을 때는 명랑하고 진취적이라고 하고 그 사람이 틀리면 경망하다고 합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을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인 사람을 나쁘게 말하면 소극적인 사람이라고 하고, 좋게 말할 때는 신중하다고 합니다. 어떤 분위기가 우세할 때는 그렇지 않는 것을 너무 쉽게 함몰시키는 경향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것은 우리 신자들 사이에서 너무나 오해되고 시험받고, 서로간에 상처를 주는 문제입니다. 이쨌든 이 부분에 나오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비명을 지른 사람은 불신자일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 입장은 중생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입장과 세 번째 입장 둘다 중생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둘 사이에 차이점은 중생을 한 사람, 구원을 얻은 사람 중에 최고의 이상을 목표로 맹렬히 성화를 훈련하는 사람의 입장이 두 번째, 예수를 막 믿어서 어린 신자다 하는 것이 세 번째 입장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두 번째 입장은 평범하게 예수를 믿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완전을 추구하여 조금의 흠도 견뎌내지 못하는 가장 깊은 경지로까지 매진하는 신자의 갈등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23절에 있는 바와 같이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이 표현은 신자에게 쓸 수 없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살다가 실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분이 죄 아래로, 노예로 팔리는 일은 없습니다. 뒤에 나로는 내용으로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든가,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로마서 8 : 31 이하에 있는 이런 내용들에 의하면 신자는 한번 구원을 얻은 이후에 절대 하나님의 은혜와 의롭다고 선포된 지위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죄 아래 팔려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롬 6 : 12 - 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가 와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우리를 마치 노예같이, 그의 하인과 같이 주인 행세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번째 입장을 정답으로 채택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이것이 구원을 얻은 사람의 어린 신앙에서 일어나는 갈등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 근거는 고린도전서 3장에 근거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 : 1 - 3).

 

 

 

육신에 속한 자라는 이 표현과 신령하지 못하다는 표현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로마서 7장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신자의 성화의 정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떻게 실족하는가, 어떻게 힘을 내야 하는가라는 성화의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어떤 오류들, 거기서 필요한 격려, 이런 것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로마서 7장의 주제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수 없느니라” 7절 내용입니다. 율법이 죄냐라는 이 질문이 등장한 이유, 여러분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율법이 왜 있느냐는 문제야말로 아주 정확히 풀어내야만 할 문제입니다. 여기서 정확하지 않으면 신앙이 늘 흔들릴 위험이 있다는 것을 다신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의 노력과 자격과 조건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여태껏 로마서를 통해 배워온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 얻지 못할 것이면 왜 준 것이냐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유는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릇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입니다. 죄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율법은 죄를 어떻게 깨우칩니까? 율법이 등장한 후 율법을 곁에 두고도 실제 율법을 좇아 따르지 못하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율법을 통하여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까? 범법한 죄인이라는 것 이전에 성경이 가르치고 싶은 것은 죄의 권세 아래 팔려 있다는 것으로 이를 가르치기 위하여 율법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고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를 보자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내가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선택하느냐, 거부하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옳은 것을 앞에 놓고 선택하려는 나를 붙잡고 있는 세력이 정체를 드러내서 내가 의와 거룩으로 가는 것을 막고 힘으로 나를 잡아오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죄의 정체를 드러내고 힘을 다하여 우리를 붙잡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죄인이라는 것은 내 마음이 죄를 소원한다든가 내가 죄를 선택한다든가 내가 악당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죄 아래 팔려 있는 입장, 곧 죄 안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폭로시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졌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본 14절에서 25절까지의 내용들은 불신자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신자에 관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율법을 구원의 방법으로 받아서 그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게 되도록 요구되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인가를 상상하는 그림일 뿐입니다. 신자들이 절대 잊지말 것은 기독교의 구원은 도를 깨우치는 것도 아니고, 결정과 선택이 싸움도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붙잡혀 있고 죄의 힘있는 세력에 묶여 있는 노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오셔서 힘으로 이 결박을 풀고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구원해냈다는 것입니다. 도를 깨쳤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득도했다거나 해탈했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의 권세 아래 붙잡혀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를 짓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그래서 14절에서 25절에 이르는 이 일련의 진술들 중 우리가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란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선과 악의 구별이라고 자꾸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악과 죄가 하나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힘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구원을 얻으려면 힘으로 구출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가 힘이라는 것을 폭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이 오자 율법이 선한 것임을 알아도 내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왔는데, 선한 것이 왔는데 나는 사망밖에 결실을 못 합니다. 그 때 반대파들은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라고 야유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틀려서 그런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아닙니다. 율법이 악해서 내가 악을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선하지만 그 선을 행할 능력이 나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붙잡고 있는 죄와 사망이 더 큰 세력으로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율법을 가지고도 죄밖에 만들지 못하도록 죄의 주인이 나를 팔아 먹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앞의 로마서 7장에서 계속 살펴본바였고 14절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율법이 나타나서 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죄 아래 팔려 있었습니다. 내 마음이 죄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내가 죄를 싫어해도 죄를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더 큰 힘이 나를 조정하고 요구하고 밀어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가상법으로 14절에서 25절까지 우리가 율법을 구원의 방법과 혹은 성화의 방법으로 받았다면 어떤 일이 빚어질 것인가 그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본문이 설명한 동일한 표현으로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입니다. 신자냐, 불신자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의 기능, 율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 죄가 무엇인가를 여기보다 잘 설명하는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18절에 있는 바와 같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는 줄 알게 됩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원함은 있으나 행함은 없게 됩니다. 실천력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 큰 힘이 나를 붙잡아 죄 아래로 끌고 오기 때문입니다.

 

22절에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이것입니다.

 

 

 

이러한 가상법을 이렇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록들을 보고서가 아니라 사건을 쉽게 기록하는 소설 기법으로서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시제로 쓰는 법인데 이 부분에 와서 돌연하게 사도 바울의 기록이 현재시제로 바뀝니다. 15절부터 보시면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여기서도 끝까지 현재시제가 됩니다.

 

 

 

현재시제라는 것은 소설 기법에서 다음 예와 같은 가상 속에 쓰여지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성장한 사람이 도시에 이사하여 살면서 출세의 길을 목표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자기가 너무나 때가 많이 묻고 인간성이 파괴된 것을 보고 고향을 꿈꿉니다. 그래서 저녁에 허름한 골방에 누워서 외로움을 달랩니다. 그 때 고향길을 더듬는 장면을 현재시재로 그려냅니다. ‘옛집은 아직 그대로 있구나. 고향 역에 내리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을 나오네. 고향길을 따라 내려가니, 아, 저기 머리를 흩날리며 오는 저 처녀가 누구인가 그 옛날 그녀가 아니냐. 고향의 푸른 잔디여.’ 현재인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법을 소설기법에서 쓸 때 수사학적 방법에 있어서 마음에 그려진 이론들과 그런 가상들을 생각할 때 그럽니다. 현실적으로 그것이 있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초점이 아닙니다. 바로 로마서 7장 후반에서 하고 싶은 것은 바울의 목표와 이 내용 속에서 담고 있는 초점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죄의 사슬을 끊고 나를 꺼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혀 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이요, 구원입니다. 즉 구원은 죄의 세력 아래 잡혀 있던 자를 구출했다는 것이며 이것이 성경의 구원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구원을 얻었다’일 뿐, ‘깨달았다’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끊임없이 누구를 기다립니까?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메시아는 해방자입니다. 저들을 누르고 있는 악한 무리들과 원수들로부터 그 멍에를 끊고 구해 줄 해방자를 기다립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가장 중요한 상징 중 하나입니다.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 하시기 위해 실제로 오셨고, 그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죄와 사망이 우리를 힘으로 묶고 있었고, 붙잡고 있어서, 우린 혼자는 거기를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원함을 있으나 행함이 없습니다. 더더욱 우리는 이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이 죄와 사망의 속박에 속해 있을 때는 무엇이 옳은지도 모릅니다. 옳은 것은 안다 한들 나올 힘도 없으며, 알지도 못합니다. 인간의 처지의 처절함은 그가 무지하며, 무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언제나 ‘빛으로’, ‘힘으로’입니다. 알게 되는 것과 구원함을 얻는 것, 해방을 얻는 것이 언제나 함께 묶여 다닙니다. 둘이 따로 있는 법이 없습니다. 혹시 한쪽 표현으로 사용된다면 나머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로마서 5 : 17이하의 내용을 어떤 의미에서 다시 한번 자세히 설명한 것에 불과합니다. 로마서 5장은 8장에 직접 연결이 됩니다. 6장과 7장은 바로 이 문제, 은혜와 율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할애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 : 17 - 21).

 

 

 

분명한 대조가 있습니다. 죄가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힘으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구원도 은혜가 왕 노릇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죄가 힘으로 우리를 잡고 있듯이 구원도 힘으로 우리를 구출하고자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 : 31이하에서 말하는 것같이 이 세상의 어느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최고의 힘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힘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의가 되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구원 얻은 이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이제 알고 선택한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해서는 안되는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해, 이해가 안 가”하는 말인데 이 말은 쓰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의 신앙생활과 불신앙은 이상하고 이해가 안되면서 자신의 구원은 이상하지 않고 이해가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야말로 가장 이상하고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구원했는지 이해가 안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단어로도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이 언제나 근거이고 이유고 조건이지 우리는 구원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나는 왜 그렇게 예수 믿는지 이해가 안 가. 이상해.” 그것은 가장 크게 복음을 방해하는 표현입니다. 은혜를 훼방하는 단어고 자신이 얻은 바 구원의 은혜를 깨우치지 못하는 가장 교만한 표현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았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한 지 아십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에게 믿음의 시험을 들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 독사의 자식들아’ 이렇게 했던 심정이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꾸중에 신경쓰지 마시고 여러분이 얻은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상하게 내가 왜 은혜를 받았는가 그것을 좀 감사하십시오. 죄가 무엇인가를 똑바로 인식하시고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취소될 수 없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복된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에 능력과 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주의 사랑을 입었으니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습니까? 이 세상의 무엇도 우리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 못할 것을 다시 한번 믿사옵니다. 그러므로 신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신자답게 살게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에 부합된 자로 살아 주 앞에 서는 날 부끄러움이 없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시옵소서. 지혜 주시고 믿음 주시고 인내하게 하시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우리의 신자 된 인생을 살아 갈 수 있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3강(롬7:16-20절) 내 속에 거하는 죄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 : 16 -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라” 16절에서 20절은 어떤 의미에서 앞에 12절에서 14절을 다시 한번 풀어 놓은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12절은 이것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입니다. 16절로 돌아와서 12절을 풀어보면 ‘만일 내가 원치 않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라는 말이 됩니다. 율법이 하라는 것은 선이었고 나는 그것을 하기를 원합니다. 선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선하다는 것을 행하지 않습니다.

 

 

 

16절에서 설명하는 것은 정확히 ‘율법이 악을 행하라고 했느냐’입니다. 율법은 이상하게도 그것 자체가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죄와 사망을 결과시키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율법 탓이냐 하는 것입니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이 질문입니다. “율법이 죄냐?는 13절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와 동일한 질문입니다.

 

 

 

율법이 악을 행하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선을 행하라 하고 악을 행치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치 않는 것, 율법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합니다. 내가 그 선을 따라가지 못할 뿐 결코 율법이 죄를 조장하거나 죄를 명령하고 있지 않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17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죄가 그러더라는 말입니다. 위의 13절을 풀어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죄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16절에서 20절에 이르는 이 내용 속에서 죄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17절에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20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죄입니다. 이 죄는 이제 율법으로 말미암아 진상이 파헤쳐지고 그 실체가 폭로됩니다. ‘죄란 어떤 것인가’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가 볼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정체와 진면목이 가공할 만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17절과 20절에 반복된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말 속에서 죄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 특징을 살필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뿌리고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것은 외부적인 공격이 아니고 가끔 어쩌다가 일어나는 일과성이 아니라 늘 우리 속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죄는 우리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전부’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손가락에 낀 반지나 머리에 쓴 모자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나와 분리시킬 수 없는 나의 어떤 것들입니다. 내 본성이요, 내 뿌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6장에 인간의 죄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창 6 : 5 - 7).

 

 

 

인간이 죄지은 것은 하나님이 한탄하실 만큼 큰 죄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탄하시고, 근심하시고, 후회하셨다’는 표현들은 하나님이 일을 잘못하셨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어디가 실패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지은 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큰 죄인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가 잘못했을 때 그냥 웃어 넘길 것이 있을 때와 실제로 매를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속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때로 어떤 것은 근심케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가 낳았는가’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죄는 마음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함을 밖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뿌리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생각하는 것과 그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실감 있게 느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며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은 세상을 잠깐 돌이켜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믿는 자 되었으니 언제나 하나님만을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반대입니다. 그들은 전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하나님과 관계 없는 것만 생각합니다. 저들의 악함은 윤리적 도덕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만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하나님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삶을 추구하며, 그 모든 계획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는 관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증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생활을 주도하고, 영향을 끼치는 것이 텔레비전 문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머리 모양을 어떻게 하느냐 어떤 옷을 입느냐? 이런 것들은 다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이 무엇을 입고 어떻게 하느냐와 일치합니다. 그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늘 좇아서 합니다. 그런데 텔레비젼 문화는 어떤 진리와 어떤 경건함을 근본 목적으로 원리로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좋은 드라마를 한다고 합시다. 혹은 스포츠 중계를 한다고 합시다. 그 내용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프로로 얼마나 시청자의 눈을 붙잡느냐의 싸움입니다. 시청자의 눈을 붙잡아야 되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프로 앞 뒤에 실릴 광고비가 얼마나 비싸지느냐와 직결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드라마를 하든지 그 드라마의 내용이 얼마나 건전하고 유익하느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얼마나 시청률을 높이느냐만 관심이 있습니다. 시청률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 프로는 비싼 프로가 되가 그 프로에 붙는 광고비도 비싸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자들에 대한 TV관계자와 광고주들의 개념은 인격적으로 고매한 정신을 의도하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돈만 내고 이 상품을 사 주는 사람을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광고주와 TV 제작진들이 볼 때 시청자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개념이 인격적이지도 않고 고매하지도 않고 물론 거룩하거나 의롭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이익을 취할 것인가 외에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금년도 미국에서 최고 흥행 기록을 가지고 있는 1위 작품 영화가 무엇이냐면 ‘나홀로 집에2’입니다. 흥행 2위는 ‘알라딘’입니다. 두 개 모두 어린아이들을 향한 작품인데 이 두 개가 다 흥행에서 1, 2위가 되었습니다. 아이들 영화는 어른이 내는 영화의 거의 반 값입니다. 그런데도 흥행 1, 2위입니다. 미국 영화계가 새삼스럽게 놀란 것이 무엇이냐면 코 묻은 돈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연말에 하는 10대 가수상을 뽑을 때 보면 이제는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10대라서 다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수들이 뽑힙니다. TV 오락물과 TV 쇼에서 어른이 없어졌습니다. 사회도 아이들이 보고, 나와서 노래하는 사람도 아이들이고, 구경하는 자들도 아이들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10대들만이 열광하고 돈을 내기 때문에 방송도, 텔레비젼도 돈을 내는 사람의 취향에 맞는 것으로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가끔씩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쳐다 보는 어른들에게는 관심 없고 돈을 내는 청소년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을 우리도 모르게 받습니다.

 

 

 

세상이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귀고, 누구와 관계를 맺는가를 가만히 보십시오. 누구에게 시간을 쏟으며, 누구에게 돈을 내는가 보십시오. 이해 관계에 얽힌 사람이지 그 사람을 만나면 영적으로 도움을 받는 사람인 경우는 신자 외에 없습니다. 신자들도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한번도 의와 거룩을 추구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단편적인 예입니다만 더 들어가면 더 심각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세상 법칙이고 상황이지 이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알고, 의와 거룩을 추구하는 복된 자리에 나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좀더 좋아지면 종종 하나님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한걸음 세상에 나가면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멋대로 살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가 금방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것이 ‘선천적’이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질 때부터 있는 것입니다. 후천적으로 개발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환경으로 인하여 뒤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이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 : 1 - 5). 다윗의 회개시입니다. 그는 성경에 기록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칭찬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의 상황을 보면 경악할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한번도 범죄하지 않았고 사울왕이 이유도 없이 자기를 핍박을 할 때도 그를 향하여 대적하지 않고 늘 피하면서 사울왕이 죽자 애도했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물맷돌 5개로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모독하는 골리앗을 대항하여 나갈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중에 왕의 자리에 나갔다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커다한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은닉하려다가 제대로 되지 않자 우리야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입니다. 참으로 치사하고 교활한 짓을 다 합니다. 그렇게 해 놓고 다윗은 자기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음에 갈등이 없습니다. 범죄하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그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냅니다. 그를 꾸짖을 때 나단 선지자가 처음부터 다윗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비유를 말합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마치 자기 자식같이 아끼고 살고 있는데, 그 옆에 살고 있는 심히 많은 소떼와 양떼를 가지고 있는 부자가 자기 집에 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자기의 양떼 중에서 양을 잡아 대접하지 않고 이웃의 가난한 자의 자기 자식처럼 키우는 한 마리 양을 잡아 대접했습니다. 이 말에 다윗이 너무 화가 나서 ‘어디 그런 나쁜 놈이 있느냐? 그 사람을 데려다 죽여라’하자 나단이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하고 지적을 합니다. 다윗이 너무나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자기가 바로 그런 죄의 원형이며 죄를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윗이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 방법도 교묘합니다. 그 우리야 장군에게 편지를 밀봉해서 보냅니다. 사령관에게 그 편지를 갖다 주라고 명합니다. 내용은 이 장수를 제일 싸움이 치열할 때 선봉으로 세웠다가 그 사람만 놔두고 모두 후퇴해서 죽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들고 가게 하는 참으로 엄청난 짓을 다윗이 하면서도 죄를 짓고 있는 줄을 모릅니다. 때문에 놀라운 회개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여기에 머물지 않습니다. 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그의 놀라움이 제일 큰 초점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절). 죄라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본능적이고, 너무나 자연적인 것이라서 죄를 짓는 것이 나에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놀라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용서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참으로 죄가 자신의 뿌리라는 것을 절감하며, ‘하나님 이 뿌리를 뽑아 주십시오’라고 회개합니다. 죄를 지은 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번만 용서해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다시는 죄를 안 짓겠습니다가 아니라 ‘뿌리를 뽑아주십시오. 나를 바꾸어 놓아 주십시오. 나를 새롭게 만들어 주십시오. 나는 처음부터 잘못 만들어진 자입니다.’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나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항간에 목사들이 범죄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은 아직도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분입니다. 그것은 목사 아니라 누구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 가운데 지켜지지 않으면 쉽게 넘어가는 것이 죄의 가공할 힘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것은 가장 좋은 에덴동산에서였고 사탄이 사탄이 되는 이유는 그가 천사장으로 가장 놀라운 지위에 있으면서 거기서까지 욕심을 내어서 하나님께 대적하느라고 생긴 것입니다.

 

 

 

죄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굴복하지 않는 참으로 가공할 힘이요, 완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본문에서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말 속에서 죄가 우리의 일부분이 아니요 전부라는 것, 그리고 죄가 선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죄가 얼마나 큰 힘인가를 배웁니다. 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잘라 버릴 수 없습니다. 내 오른손이 범죄하면 오른손을 자르고,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속인데 속을 다 파내면 온통 다 죄인데 그것 파내고 남은 것이 있어야 파내든 말든 수술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죄를 파내면 남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지적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런 마음을 중심에 지녀야 합니다. 만일 율법이 구원의 방법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율법은 구원의 방법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제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이해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무도 이 죄의 가공할 힘에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해 낼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을 행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는 언제나 윤리적 도덕적 규범적 문제가 아닙니다. 선한 것을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죄의 권세 아래서 해방을 받느냐, 못 받느냐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인간이 처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14절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죄 아래 팔려 있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어느 누구든지 사람들을 대하여 볼 때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모르면 그는 아직도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 여러분은 아직도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왜 이 자리에 왔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에게 효력 있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또 죄의 권세에서 해방받았기 때문에 의와 거룩을 좇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족하나마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않은 사람들은 죄가 아직도 그들을 붙잡고 있기에 혼자서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단히 심각한 것입니다.

 

 

 

죄란 의지와 지성으로 풀 수 없을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알고 모르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과의 싸움도 아닙니다. 죄 아래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의와 거룩을 깨닫지도 못하고 깨닫는다고 가정할지라도 그것을 지킬 힘조차 없습니다. 죄가 그를 놓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가장 강조되었던 것이 ‘자랑할 수 없느니라’ 였습니다.

 

 

 

로마서 3 : 25로 가십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 : 25 - 28).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 내가 조건을 제시하고 조건을 만족시켜서 그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제일 많이 요구하는 것이 용서, 사랑, 긍휼, 기다림, 자비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그런 것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생각을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죄를 지적하기 위함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서 머물고 그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붙잡게 하려고 죄를 지적한 것입니다. 만일 율법이 없다면 십자가의 필요성을 그만큼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비참하게 합니다.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합니다. 우리의 꼴을 보게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복을 얻게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구원 얻게 하고자 원합니다. 모든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결단은 율법의 지적으로 말미암은 회개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 간에 어느 인생이 더 고단합니까? 신자의 인생이 더 고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가는 길에서 그가 헛된 목표를 향해 가고 있을 때는 그 헛된 것의 결국을 꼭 살아 생전에 직면하게 하십니다.

 

 

 

돈을 추구하고, 지위를 추구하고 세상의 헛된 명성을 좇아가면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없는 것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세상의 명예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 꿈을 깨게 한다는 말입니다. 꿈에서 안 깨는 것이 더 행복합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그 꿈이 깨어져야 돌이킵니다. 진실된 것을 찾으러 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꿈이 깨지지 않고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자기가 행복한 줄 알고 자기가 부자인 줄 알지만 죽고 나서야 자기가 잘못 좇아 온 것을 압니다. 죽고 나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삶이 고정되어 버립니다.

 

 

 

신자는 그런 운명으로 끝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의 인생에 간섭합니다. 신자들이 불신자들보다 슬프고 억울한 사건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영원을 깨우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슬픔과 고난과 절망을 직면케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의 자리와 영원한 멸망의 자리에 있게 하지 않으시려고 우리에게 기회가 아직 남아 있을 때 헛된 꿈을 깨도록 간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율법이 아니었다면 내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의 필요성도, 주를 믿어야 할 이 심각한 일도 모르고 우리가 의인인 줄 알았을 것입니다. 또한 율법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만하면 괜찮은 줄 알고 신자들을 핍박하고 다녔던 회심하기 전의 바울같이 그렇게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깨우치는 것이 무엇인가 직시하십시오.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죄 아래 있었는가? 그리고 이제 어떻게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인도하심과 사랑하심 안에 거하는 자녀가 되었는가를 제대로 인식하십시오. 그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수밖에 없고, 세상이 신자를 흔들 수 없는 건강한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여생이 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주 앞에 서는 날 부끄러움 없이 주를 만나고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이어가시길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영원한 나라의 기업을 이을 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살이를 믿음 가운데서 지켜 낼 것이며 주를 믿는 신앙과 주께서 요구하신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살아서 주 앞에 서는 날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신자들이 되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들을 외면하고 믿음의 군사로 싸워 신령한 승리와 거룩한 열매를 맺는 참다운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아직도 죄 아래 신음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의 사랑을 나타내게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믿는 바 구원과 우리가 가진 바 복된 생명과 진리들을 증거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신자로 살 수 있는 지혜와 믿음도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와 동행하는 충성된 삶을 허락하셔서 신자의 삶에 기적을 맛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체험하고 사는 저희 모든 심령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4강(롬7:21-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람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롬 7 : 21 - 24 )

 

 

 

본문 21절에서 25절까지의 내용에서 묘사된 것은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로마서 7:14로부터 끝까지 흐르는 이 전체 문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불신자에 관한 것이냐, 신자에 관한 것이냐 하는 것에 여러 견해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라면 23절에 묘사되어 있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힐 수가 없고, 불신자라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자신의 위치를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무게 있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신자라고도 하고, 불신자라고도 하는 팽팽한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1절에서 24절에 이르면 아무래도 신자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하는 주장이 강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는 23절의 묘사를 죄를 극복하기 위한 선한 생각과의 갈등으로 이해함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그러기에 신자가 고급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죄와 시험을 물리치려는 갈등, 그 도전과 유혹을 외면하려는 갈등, 그리고 여기 묘사된 것처럼 실패하기도 하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 근거로는 고린도후서 10:3입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3-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로 복종케 한다는 묘사가, 로마서 7:23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와 상당히 흡사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내용은 신자가 마음에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것을 성령님의 간섭하심으로 그리스도 앞에 복종케 되는 결론을 얻습니다. 또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대적한 것들을 성령님의 감화감동으로 이제 하나님 앞에 항복시키는 양면성을 가지고 묘사합니다. 그런 작업들, 즉 성령님의 간섭하시는 작업들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둘은 결과적으로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악한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생각을 묵살하고 죄의 법 아래로 실패시키는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처음 로마서 7:14 이하의 내용을 시작할 때부터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내용은 하나의 가상입니다. 신자의 이야기도 아니고 불신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율법의 기능이 무엇이며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려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인인 인간이 처한 입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느려는 하나의 가상법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오면서 자신이 곤고한 사람인 줄 아는 두 체험은 공존하지 않습니다.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오는 자는 불신자요, 그는 자신이 곤고한 자인 줄 모릅니다. 자신이 곤고한 자인 줄 아는 자는 신자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결단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이 신자 안에 일어나는 신앙의 갈등이라고 보지 않고, 오직 율법 앞에 사람이 그냥 내버려졌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가상적으로 그리는 묘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죄의 세력 앞에 붙잡혀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내용은 그것을 보여 주는 목적으로 만든 가상적 묘사입니다. 이 속에 있는 단어들로 인하여 그와 같은 해석을 분명하게 뒷받침할 수 있습니다.

 

 

 

23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에서 이 싸운다는 말은 군사적 작전을 말합니다. 군사적 작전이라는 말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힘이 총동원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일이 꼭 일어나도록 힘으로 간섭한 것입니다. 신자가 받는 죄와의 갈등은, 죄가 군사력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않도록 유혹하는 것으로 옵니다. 그래서 우리를 속이고 미혹되게 할 뿐, 힘으로는 못 옵니다. 거직으로 위협은 합니다. 힘이 있는 척하며 겁은 주지만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신자가 당하는 죄로부터의 위협과 유혹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죄가 그 결과를 얻기 위하여 실제로 힘을 발휘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사로잡아 오도다’, ‘사로잡는다’는 것은 창으로 위협해서 상대방을 굴복시켜 포로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깐 여기 묘사되고 있는 이 인물은 마음의 갈등을 일으켜서 ‘이쪽을 할까, 저쪽을 할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는 율법을 이해하고 율법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율법을 선택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죄만 짓도록 하는 법칙이었습니다. 그 법칙은 얼마나 강하지 그 마음의 법과 싸워 그를 사로잡아 갈 만큼 강했습니다. 그 법칙에 대해 21절, “그러므로 한 법을 깨달았노니” 이것은 이 법과 내 마음의 법, 이중적으로 대등한 두 개의 법칙이 내 마음 안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22절을 다시 봅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내 마음의 법, 내 육체 속의 다른 법, 이 두 법이 대등하게 내 속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이 전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하나의 가정입니다. “우리가 율법이 선한 것임을 안다 할지라도” 이러한 가정입니다. 내 마음으로 율법의 선한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힘으로 우리를 구해 주시지 않는다면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지체 속에 한 다른 법이 있는데 이 법은 내 마음의 법과 대등한 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온통 주장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법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일부분이 아니고 또 그 규칙이 적용되었다가 어떤 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적용되는, 언제나 그 결과를 이루고야마는 절대 불변의 법칙같이 나에게 힘을 쓰기 때문에 법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그런 하나의 원리, 또는 여러 원리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 마음이 있다는 뜻 역시 아닙니다.

 

 

 

내가 혹 율법을 좋아하고 진심으로 율법을 사모할지라도 내가 헤어나올 수 없는 이유는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가는 법칙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율법을 사모한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갈등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처지를 묘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는 언제나 죄뿐입니다. 언제나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혀 들어갑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것은, 율법이 주어졌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면 율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하나의 가상적 묘사입니다. 바울이 이런 묘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밝히려 하는 성격의 초점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3:19의 내용을 다시 확인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로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 죄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분명한 성경적 의도입니다.

 

 


로마서 7장까지 살펴본 것에서 죄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며 윤리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죄는 세력입니다. 죄가 윤리적으고 도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율법으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 아래 팔려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죄는 하나의 세력이었습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그르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나, 틀린 것을 배척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나를 아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이후 ‘죄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과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중 어느 쪽에 경험이 더 많은가로 죄에 대한 실패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 경험이 많고 거룩한 경험이 적으니깐 세상이 말하는 것이 더 그럴 듯하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하나의 실족이고 실패이지만, 끝은 아닙니다. 실패하고 나면 옛날처럼 생전 여기서 못 벗어날 것이라고 주저 앉습니다. 죄를 지을 때 ‘알고 짓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 중에 어느 것이 더 많은가 생각해 보십시오. ‘알고 짓는 죄’가 더 많습니다. 몰라서 짓지 않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로 있었던 그 뿌리는 굉장히 깊은 것이고 그 습관은 오래까지 남아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고려시대까지는 적극적으고, 활달하고, 상당히 낙관적인 좋은 민족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역사학자들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와서 유학에 얽매여 경직된 사고가 생겨나고, 결정적으로 일제 36년 통치 아래서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국민성을 갖게 되었다고 역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남의 침략 아래 놓여 있으면 내가 노력한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성실하게 일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모든 사회 문제 중에 제일 중요한 문제가 언제나 이것입니다. 제 1차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산업을 발달시키려면 맨 처음 중요한 것이 제 1차 기준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기준들, 1m, 1㎏, 1ℓ 이것이 같아야 되는 것입니다. 대우 자동차에서 쓰는  부속품과 현대 자동차에서 쓰는 부속품과 기아 자동차에서 쓰는 부속품이 최소한 볼트 너트는 같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1기준인 1㎝, 1g, 1㎏ 이것은 같아야 됩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법인데 법은 만인에게 힘을 평등하게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법이 힘있는 자에게는 맥을 못쓰고 힘없는 자에게만 세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접촉사고가 나면 신경질을 부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대로 처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험금도 법대로 지급되지 않고 경찰도 법대로 처리를 잘 안해 주기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싸움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가 일제 36년 동안 영향을 받아 생긴 대단한 피해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간 겪습니다. 70년이라는 기간은 우리가 당한 식민지 생활의 약 2배인데 그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나라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서 4-500년 시간이 흐른 다음인데도 자기 나라 말을 쓰지 못합니다. 아람어라는 바벨론 말을 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르짖은 그대로 ‘엘리 엘리라마 사박다니’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입니다. 대단한 후유증입니다.

 

 

 

우리 역시도 옛날 죄악된 세상에서 종 노릇하는 것이 너무나 뿌리 깊이 하나의 습관처럼 남아 있어 거룩한 싸움을 하다가 한 번 실패하면 “난 별 수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나쁜 버릇입니다. 예전에는 죄가 나를 총, 칼로 위협해서 포로로 만들고 굴복시켰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나에게 명령하지 않고, 직접 손을 내밀어 거기로부터 힘으로 꺼내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 로마서 7장의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로마서 5장의 구절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5:21,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함이라.”

 

 

 

잘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선택과 결심이 아니며, 예수를 믿는 믿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의 자비롭고 긍휼에 찬 의지와 힘이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의 자비롭고 긍휼에 찬 의지와 힘이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그분이 베푸신 자비와 긍휼과 베푸신 선물로써 우리를 흑암에서 불러내시고 끄집어 내셨습니다. 은혜가 왕 노릇한다는 세력적 표현입니다.

 

 

 

율법이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를 밝힐지라도 우리는 옳은 것을 선택할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무지한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선택을 우리가 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우리가 어떤 처지인가 밝히는 것입니다. 율법만 주어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을 것인가를 로마서 7장에서 밝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로마서 7장에서 거듭 강조하기를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라.”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이것이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옳은 줄은 압니다. 그러나 율법이 옳음을 안다 할지라도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14절에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지만,” 그러나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 죄가 나를 사로잡아 총칼로 위협해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로마서 7장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본문 23절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율법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무지한 것이 아니라 무능합니다. 우리는 죄의 세력 앞에 붙잡혀 있는 죄의 포로입니다. 따라서 도무지 구원을 얻을 방법과 벗어날 어떤 방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포로이기 때문입니다.

 

 

 

25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하반절은 24절에 붙은 것입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들어 왔느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가상법을 만들면서 인간이 처한 입장이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유일한 방법인가를 아는 감사가 비교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 대부분은 ‘내가 예수를 선택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믿는다’ 에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기능을 모르면 자꾸 “난 믿었다”고 그럽니다. “난 믿었다, 너도 믿느냐”, “난 믿었다, 난 했다.” 이것을 율법의 행위라 하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의 태도와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었다고 확신하는 자는 신앙생활에 실패했을 때 자기의 의지가 근거였기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밝히는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능력, 그의 힘과 그의 열심으로 불러냄을 받은 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포기되지 않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 51-52).

 

 

 

우리는 적어도 땅에 묻히고 썩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끝날, 우리가 기다리는 새 세상이 시작될 때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이 오시면, 죽었던 우리는 다 일어날 것입니다. 다 부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어 있는 자가 어떻게 나팔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것입니까? 귀가 있어서 듣습니까? 아니면 무릎이 있어서 일어납니까? 무엇을 듣고 일어납니까? 53절은 그것을 설명합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3-58)

 

 

 

우리가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나팔 소리가 나매 우리가 듣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이 그때 오셔서 우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부활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다시 변화시키시고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똑같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는 이김을 주시고, 멸망받을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사는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58절은 이런 결론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사람들은 인간을 평가할 때 끝이 잘되면 모든 것이 잘된 것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리 잘한 것이 많아도 실패자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결국 영광된 자리에 승리자로 올라갈 것입니다.따라서 신앙생활을 하다 때론 실패하더라도 실패한 것은 없어집니다. 실패 안하려고 몸부림친 것과 그때마다 실패한 것, 실패하고 좌절한 것은 모두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실패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승리와 영광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처지가 무엇인지, 이김을 받는 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이며,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며, 그의 능력으로 지키고 있는 그의 자녀이므로 결국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광된 자리에 설 자입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꼭 회개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윤리 도덕적으로, 혹 괜찮게 산다 하더라도 끝은 꼭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망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면 심판 때는 실패한 사실만 남겨질 뿐입니다. 우리는 예전에 죄 아래 있었던 것같이 이제는 은혜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오해하지 말라고, 좌절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 39). 이것이 신자가 얻은 구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막을 자가 없음을 믿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을 더욱 충성되이 주 앞에서 보내게 하시고, 헛된 생각과 하나님이 미워하는 길에서 등을 돌리게 하시며, 충성되이 우리 여생을 마쳐 주님이 허락하신 승리의 자리에 설 때 부끄럼 없이 주를 만날 수 있게 준비하는 지혜롭고 성실한 신자들로 삼아 주옵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이 나를 지키고 계시다는 믿음 속에서 승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사 이 할 일 많은 세상에서, 고난과 위협과 적대감이 큰 이곳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여 얻는 평안과 승리와 기적을 맛보는 신자의 삶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5강(롬7:24-25절)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감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날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4-25)

 

 

 

로마서 7: 24-25 말씀 역시 자주 오해되는 구절들 중의 하나입니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를 갈라진 마음을 감사하는 것처럼 이해하며 로마서 7: 14-25에 묘사된 인물이 더 높은 신앙의 갈등을 겪는 신자인 것으로 오해됩니다. 그리고 그가 죄짓지 않고 거룩한 것을 하려고 애쓴데 대하여 그 마음에 갈등이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시리라는 것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생깁니다. 특별히 고린도후서 10장에 가시면-성경 속에 오해할 만한 구절이 한두 곳은 아닙니다만-이문제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 10: 3-4).

 

 

 

결국 신자가 구원을 얻은 후 죄와 갈등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시는 제 2의 축북으로 승리한다는 논리를 만듭니다.그래서 이 본문을 통하여 제 2의 축복이론이 가능한가 살펴봅시다. 우리는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적인 갈등을 맛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대부분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실패하는 것이 잘못이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제 2의 축복이론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모두에게 허락된 것이지만 그 얻은 바 구원을 성화시키고, 영화시키는 싸움에서 늘 이기도록 하는 하나님의 이차적인 축복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고린도후서 10: 3-4에 허락된 것 같은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 있어야 된다, 성령님의 어떤 간섭하심과 성령님께서 온통 나를 주장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많고 우리도 그런 이론에 솔깃해 합니다. 예태희 목사님과 레마선교회 역시 그런 파입니다. 결국 구원을 얻었다고 다 똑같은 구원은 아니며, 천국은 가지만 계급이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7: 24-25뿐만 아니라, 14절 이하의 모든 내용은 신자에 대한 묘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만일 율법의 요구를 제대로 이행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죄의 권세를 이겨낼 수 없는 처지에 있는가 하는 죄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한 가상이라고 합니다. 왜나하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자기의 처지를 깨닫는 것은 불신자에게는 불가능하고, 내가 곤고한 사람인 줄 아는 곤고한 입장에 내버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버려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내 힘과 내 의지 하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실패해도 하나님이 실패하시지 않기 대문에, 혹 우리의 죄인됨과 우리의 미련과 완악함을 본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쁜 승리를 바라는 입장일 뿐 실패한 나의 처지를 의미하는 입장은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7: 25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자신이 처한 입장을 인간이 제대로 인식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는 ‘돌연한 찬미’라고 대부분의 학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7: 24에 소개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고백은 결단코 신자가 지르는 비명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 20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대표적으로 오해되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신자들이 로마서 7: 24에 있느냐, 갈라디아서 2: 20에 있느냐를 하나의 계급같이, 하나의 차별같이 격이 다른 모습으로 보는 것은 중요한 오해입니다. 갈라디아서 2: 20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믿음 안에서 승리했는가, 어떻게 주를 따라서 고급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표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화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구원 자체를 논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 19-21).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얻었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 된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라는 고백이 갈라디아서 2: 20입니다.

 

 

 

이것은 고급한 신앙과, 성화되고 영화된, 신비하고 거룩한 처지에 가 있는 신자의 고백이 아니라 신자 모두의 공통된 처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7: 24에 있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은 율법 아래에만 버려져 있다면 어떤 꼴이 될 것인가를 묘사한 것입니다. 신자는 결단코 곤고한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올바른 해석을 찾는 일이 왜 우리에게 소중하며 이 싸움을 왜 해야 합니까? 우리가 구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이 있고, 또 성화가 있으면 영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와 영화는 구원 속에 이미 다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일차적으로 구원을 얻고, 거기에서 합격을 하고 더 노력을 하면 성화에 달하고, 그 다음에 또 노력해서 영화를 얻고 이렇게 세 단계가 있지 않습니다. 세 계급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구원 안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 동시에 하나님 앞의 존귀한 존재로서의 영화가 한꺼번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처음부터 구원 안에 동시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을 죄에서 해방된 것과, 하나님의 자녀 된 것과, 거룩하게 되는 것과, 영광스럽게 되는 것을 시간과 경험 속에서 동시에 체험해 나갑니다. 그러나 없던 것을 하나씩 얻어가는 싸움은 아닌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고 성경에서는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한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발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롬 8: 26-27). 이 구절들을 보고 결국 성령이 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해야되는 것이지 나 혼자 노력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라는 이중 구조를 갖지 마십시오.

 

 

 

로마서 8장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스스로 책임지도록 버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율법만 주고 “너 이것대로 살라, 못살면 나 모른다.” 이렇게 버려두지 않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그 구원 자체에 내 삶을 그 분 뜻대로, 계획대로 성공하게 하고자 나를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나를 붙잡고 계시므로 더 이상 나혼자 내 자신을 책임지지 않아도 하나님이 책임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해도 성령님이 나를 위하여 빌고, 내 멋대로 살아도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그는 나를 간섭하시는 분으로써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바로 구원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다시 구별하여 구해야 되는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구원자체에 이미 허락되었고, 확보되었고, 영원히 변치 않을 하나님의 간섭이 머무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 28-30).

 

 

 

하나님 편에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불러 한 가지 시켜보고 거기에 합격하면 그 다음 단계로 데려가고, 불합격하면 버리고, 그 다음 단계를 시행해서 합격하면 또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감이 아닙니다. 29절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먼저 목적을 두고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 일이 끝날 때까지,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은 그 간섭과 능력을 중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에서 ‘작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리고 마지막 거룩하게 하시고’라는 말이 빠져 있습니다. 거룩하게 하는 성화가 없고 그냥 영화로 끝이 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영화롭게 되는가의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을 어떻게 끝을 내실 것인가 하는 의지와 계획의 신실성을 의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르심 속에서는 이미 결론과 결과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게하고 싶은 구원에 관한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제 2의 축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연약함과 미련함으로 하나님이 늘 우리를 간섭하시고 채찍질하시고 새롭게 하셔야 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새로운 내용이 아닙니다. 이미 주신 것을 확인시키고 깨우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 17-19).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 무엇을 주셨는가를 알기 원합니다. 앞으로 무엇을 주실까가 아니라 ‘무엇을 주셨는가’입니다. 그가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이냐? 불러서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가, 이미 그것을 우리에게 다 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고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알기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었는데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에는 하나만 받았고, 또 기도하고 매달리면 그 다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어디로 잡혀갑니까? “너희 교회에서는 이 부분까지만 가르치지만 나는 또 여기 있다.” 이렇게 부추깁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 여기에서 최상급들을 보십시오. 이것은 수사학적으로는 매끄럽지 못한 문장입니다. 그러난 사도 바울이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도록 감동 속에 있고, 저 역시 이 부분을 설교할 때 앞 뒤 말이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여기까지로 좋은 것을 다했습니다. ‘또 지극히 크심이라’ 우리에게 베푸신 것의 굉장한 것이 얼마나 굉장한가를 알기 원합니다. 여기에 아직 보류하고, 아직 덜 준 것이 없습니다. 다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것, 우리가 받은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가려 하지 않고 ‘주시옵소서’만의 기도를 할 뿐입니다. 이미 허락된 구원을 누리고 확인하는 작업이 없이 ‘주시옵소서’만 되뇌입니다. 밥도 굶고, 산에 올라가는 일만 열심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눈감고 처절하게 하지 마십시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에베소서 3장에 있는 말씀을 복 되게만 듣지 마시고 채찍질로 들으십시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 :14-19).

 

 

 

이미 다 주었습니다. 충만한 것을 모두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 깊이를 따라 내려가 보고 그 높이를 따라 올라가보고 그 넓이를 따라 가 보십시오.

 

 

 

우리 찬송에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더 깊은 바다로 가려다 찰싹 거리는 파도를 보고 맘이 졸여서 못가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대단한 찬송입니다. 우리는 전부 하나님의 부르심과 허락하심 속에 우리를 맡기지 않고 결국은 늘 세상을 의지하여 살면서 ‘믿음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하나님은 모르실 거예요. 하나님을 속이고 있어요 나는 이 세상을 살기가 싫은 사람이예요.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죽어 주께 가는 게 좋고, 말씀을 따라 살고 싶은 사람예요.’ 이렇게 스스로 속이는 기도를 합니다.

 

 

 

마태복은 6장으로 가보십시다. 신앙이란 어떤 것이냐?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 25-26).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에게 큰 믿음을 주시고 나의 마음에 평안을 주옵소서’가 아닙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 :27)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6: 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6: 29-30).

 

 

 

얼마나 논리적이고 얼마나 당연합니까? 우리가 얻은 구원은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밖에 없는 운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손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내 대신 죽게 하실 만큼 내 편이십니다.

 

 

 

로마서 7장의 모든 관심은 ‘우리가 얻은 구원이 무엇이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로마서 7장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 6장 역시 같은 뜻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 11-14).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죄는 신자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또다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련한 짓은 할 수 있지만, 결코 죄가 우리의 주인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곤고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핑계대지 마십시오.

 

 

 

로마서 7: 23에 있는 것같이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이런 일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죄는 더 이상 총칼로 우리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다만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가 그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핑계를 대기를 ‘죄가 너무 세서 내가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직도 세상이 더 좋아서 세상에서 즐기겠다는 표현일 뿐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죄를 좋아하는 구습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은 지지 말라, 죄가 너를 잡아가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직도 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고 모든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속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저기 어두운 곳에서 남의 동정을 바라며 울고 있는 처지여서는 안됩니다. 연약함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핑계 대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정당한 지위를 보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제 2의 축복이나 더 높은 신앙에 근거한 하나의 계급을 가지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어지고, 약속되고, 처음부터 다 맡겨진 구원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 3-4).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십시오”(벧후 1: 5-7). 하나씩, 하나씩 하십시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 합니까? 외우고, 외우고, 또 외우고, 또 외워서 잠꼬대를 영어로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면 영어를 잘합니다. 어떻게 하면 수학을 잘합니까? 풀고, 풀고, 또 풀어서 이해가 안되면 외워버리십시오. 수학도 끝에는 외웁니다. 꿈속에 수학이 나타나고 꿈속에 영어가 나타나야 합니다. 꿈속에 성경구절이 나타나고, 꿈속에서 여러분은 십자가를 붙잡고 싸우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이런 경건게 속한 싸움들을 안합니다. 이중에 하나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모든 것에 다 써먹고, 또 우리가 힘써야 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몫으로 밀어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 8). 이것이 신앙입니다. 허락된 모든 것을 밝혀나가고 내 것으로 만드는 싸움을 해야지 남들은 안 가진 것, 기도해서 나만 가진 것을 주장하는 것은 신자의 고급한 경지가 아닙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게 하심을 잊었느니라”(벧후 1: 9).

 

 

 

이런 모든 싸움은 처음부터 허락된 것입니다. 신자라면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며 처음부터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 1: 10-11). 이런 것들을 하십시오. 방언 못해도 괜찮고 입신하는 경험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구원속에 내포됨을 깨달으십시오. 구원을 얻고 그 위에 또 무엇을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구원과 분리된 것은 없습니다. 구원에의 부르심으로부터 영광의 자리까지 경건과 거룩에 속한 모든 것이 처음부터 허락된 선물이요, 복인 것입니다. 힘써 노력하셔서 여러분이 얻은 구원 속에서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 죄로부터의 자유, 의를 향한 자유를 제대로 시행하십시오. 그리고 신자다운 승리와 감사와 그 기적을 경험하시면서 성숙해 가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고 경건과 거룩과 영생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부디 우리로 주를 알아가며 우리에게 허락된 복들을 누려가는데 게으르지 말게 하시고 미련하게 하지 마시고 핑계대지 말게 하옵소서. 또한 신자다운 인생을 사는 승리와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큰 은혜가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하셨는지 깨닫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깨달음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부름에 합당한 훈련과 연습과 실천으로 우리 인생을 채우고, 마땅히 거룩한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게하사 주의 자녀다운 복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고, 주 앞에 서는 날 기쁨과 감사로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6강(롬8:1-2절) 성령의 법이 해방하심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 1-2)

 

 

 

 

8: 1 말씀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앞에 있었던 7장 후반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8: 22-25).

 

 

 

갈등과 갈라진 마음을 설명하다가 8장에서 갑자기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돌연한 선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로마서를 전체적으로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8장의 위치와 선언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은 5장을 이어오는 장입니다. 따라서 6장과 7장은 그 사이에 낀 일종의 삽입장들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8장의 논리적 연결성은 5장을 이을뿐 7장을 이어오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관한 설명을 3장에서 해놓고 4장에서 믿음을 설명하고 5장에서 대표 원리를 설명하고 6장에서는 은혜에 대한 오해를 풀고 7장에서는 율법에 대한 오해를 풀고 있습니다.

 

 

 

실제로 8장은 3장, 4장, 5장에서 그대로 이어온 장이며, 내용상 더 진전되지 않은 것입니다. 3장, 4장, 5장까지 설명된 구원에 관한 것을 좀더 자세히 실천적으로 신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파헤쳐진 것에 불과합니다.

 

 

 

5: 1의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여기 1절에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는 내용과 8: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하는 말은 똑같은 말씀입니다. 다만 하나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하나는 부정적으로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야기와 5: 1에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같은 뜻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서가 썼던 설명 중에 ‘구원을 얻지 못한 모든 인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된 자리에 왔음’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8장의 위치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로마서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구원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는 의도 같습니다.

 

 

 

신자들은 뜻밖에 구원에 관한 내용을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가 얻은 구원을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고, 더더욱 가장 큰 현실적인 문제는 구원을 칭의의 차원에서 ‘나는 예수를 믿었으니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신자로서 성화와 영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실패한 것을 성경적인 차원에서 다룰 줄 모릅니다. 성화에서의 실패가 칭의에서의 실패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신자는 대단히 많습니다. 예수를 믿고 잘 나가다가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면 구원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낙심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가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얻은 구원은 그 안에 완성까지 보장되어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곧 하나님의 존전에 영광스럽게 서는 그 날까지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야기를 지금 5장에 있는 식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정죄함이 일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로 우리는 넉넉히 받아들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이야기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운명적으로 실패되지 않는 어던 영원한 신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구원을 이렇게 다루어 왔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 19-20).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노력과 의지의 산물로 구원을 결실하는 자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로 되었느니라”(롬 3: 21-24).

 

 

 

너희가 얻은 구원은 선물이지 너희가 노력한 결과가 아니다’ 이것이 구원에 관한 기본 진리입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께 근거되어 있기 때문에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계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 4-8).

 

 

 

구원을 설명하는 근거 구절들을 보십시오.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자인 것입니다. 받은 결과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닌 자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라”(롬 4: 25). 핵심은 내 죄사함과  내가 얻은 구원은 내가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것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곧 내 구원에 대한 모든 근거와 이유가 예수님께 있지 나에게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려는 구원의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결국 우리가 얻은 구원은 구원의 문턱을 넘어선 것뿐만 아니라, 구원의 문턱을 넘어서면 최종 종착지까지 들어간 것과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구원은 얻었지만 성화와 영화를 분리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자로서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면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려는 이런 노력들을 자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고 우리는 다시는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성경은 구원 자체의 내용으로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8: 1, 2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성령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더 이상 내가 나를 책임지는 입장에 있지 않고 성령님이 나를 책임지는 입장에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이 얘기입니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이 내려오셨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살아나셨습니다. 지금도 내가 얻은 구원이 영원한 자리까지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 의지와 내 지성과 내 분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나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단계나 과정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준 구원이라는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는 약속이요, 내용이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신자로서 겪는 현실생활에서의 모든 어려움, 구원의 최종성, 구원의 영원한 안정성에 대한 무지가 우리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실패케 하는 이유인 것을 발견합니다. 이 구원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서 영원함과 최종적 안정성이 구원에 어떻게 보장되어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 1-2). 구원을 얻었으면 곧 하나님의 영광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내용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 3-4).

 

 

 

자, 이제 신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최종적인 영광의 자리에 세우기까지 쉬거나 중도에 포기치 않을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이 그가 계획하시고 약속하시고 시작하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비록 가장 나쁜 환경과 처지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는 실패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3절 이하에 있는 것같이 “환란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가장 나쁜 경우에 빠진 것을 상징합니다. 가장 나쁜 어떤 환경이나 처지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은 영혼은 절대 그가 얻은 구원,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한 구원이 취소되지 않을 것이며 최종적인 목적지에 가는 것을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환란을 당할지라도 그 환란은 그를 마침내 소망의 자리, 영광스런 목표의 자리에 이르게 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 5).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차원에서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과 최선의 능력으로 간섭하시는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하시며, 우리에게 시작한 것을 이루기 위해 성령님을 우리 안에 보내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실패치 않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의 사랑, 즉 가장 큰 열심과 능력으로 간섭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 6-8).

 

 


8장도 같은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 1-2). 성령의 법, 곧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 24-28).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과 환란 중에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라’와 무엇이 다릅니까? 똑같습니다. 5장에서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며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된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8장에서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비시기 때문에 성령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일에서 아니 당하는 일만이 아니라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패와 미련한 일 속에서도 그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십니다.

 

 

 

근본적으로 신자들은 환경이 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육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나쁜 환경에서 자라면 나빠지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면 좋아진다는 것은 사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워낙 문화에 깊이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으면 의아해 합니다.

 

 

 

인간은 제일 좋은 환경에서 타락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것입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시기도, 질투도, 배고픔도, 위협도,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는 곳에서 인간은 타락합니다. 가장 좋은 곳에서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것은 다 거름을 비료로 삼아서 큽니다. 농작물을 보십시오. 농작물에 알부민 주사를 놓거나 로얄제리를 먹여 키우는 것이 아니라 몹쓸 것을 갖다 뿌려 키우는 것입니다. 절대로 환경이 사람을 좌우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똑같은 일을 보고 어떤 사람은 좋은 결론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나쁜 결론을 만듭니다. 맨처음 소련에서 유인 인공위성을 쏘았습니다. 무신론의 국가에서 당시에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되었던 사람이 비행선을 타고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와서 한 이야기는 ‘제일 높은 곳에 올라가 봐도 하나님은 안 계시더라’는 것이 결론이었고, 미국에서 최초로 우주 비행사가 되어서 타고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똑같은 것을 보고 와서 서로 다른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뱀하고 소하고 똑같은 물을 마셨는데 뱀은 독을 만들고 소는 우유를 만드는 것입니다. 환경이 우리를 좌우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얻은 구원의 확실성과 그 영원성 그리고 최종성은 바로 이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사 나를 책임진다는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 31). 우리가 얻은 구원의 최종성은 우리 자신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지에 근거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하니님이 우리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내 구원의 책임자라면 나를 흔들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흔들리거나 실패할 확률이 너무나 높습니다. 우리는 인내심이 많지도 않고 절제를 할 수도 없으며 분별력이 뛰어나지도 의지가 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려면 하나님을 방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하시려는 고집보자 더 큰 힘으로 막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이 ‘내 편’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쪽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능력이 언제나 우리 구원의 근거요, 우리 구원의 확실한 증명서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실패했어도 결국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 32). 아들까지 주었는데 이제 무엇을 더 아끼겠으며, 그것보다 더 큰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신자들이 비록 현실 속에서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늘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지금 지은 죄는 거기에 비하면 죄도 아니다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죄를 우습게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절망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일 뿐입니다. 뒷 부분에 이어지는 구절들이 전부 구원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강조함으로 구원이 영원하며 실패될 수 없고 흔들릴 수 없음을 확인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 8: 33).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모든 신앙 출발의 기초를 기억하십시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 35). 이 구절에 ‘나의 못난 것과 변덕과 변변치 못한 것과 미련한 것까지라도’를 덧붙이십시오. 이런 것들까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여러분을 끊을 수 없습니다.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롬 8: 38-39). 앞에 있는 35절에서 나열한 것으로도 부족했습니다. 그 앞에는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나열했는데 38-39절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까지 다 등장시킵니다. 이러한 어떤 것이라도 우리를 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구원을 얻으셨으면 이것이 약속된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근거로 신자가 자신을 생각해야 하며 구원을 얻은 것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이야기를 긍정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부정적 차원에서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은혜와 율법의 차원에서도 알아야 합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가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러한 영원한 약속을 해 주셨으니 나는 이제 무사 안일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6장의 거룩과 영광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었는데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 때문에 엉망으로 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거룩을 향해 나가는 것이 은혜를 받은 이유입니다. 은혜가 목표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우리를 율법적 관점에서 보지 말라고 합니다. 구원을 선물로 받았다고 고백한 이후 성화의 과정에서 신앙생활의 실패를 하곤 합니다.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인가라는 생각으로까지 시험받습니다. ‘나는 구원을 못 받았던 모양이다. 난 아닌 모양이다’, ‘이런 꼴을 보니까 구원받았다 할 수 있겠는가?’ 자꾸 회전문을 도는 것입니다. 신자의 가장 큰 병은, 내가 분명히 들어왔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또 나가보는 것과 그 다음 단계로써의 실패를 극복하는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실패하면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 가다가 천안쯤에서 넘어지면 거꾸로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내려가려고 합니다. 언제나 회전문을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실패, 이 유혹에서 벗어나십시오. 이것이 8장의 위치입니다.

 

 

 

신자도 때론 죄를 짓기도 하고 실패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와 실패에 관해서 말할 때 율법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 24)라는 절망의 부르짖음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실패를 사랑과 하나님의 영 차원에서 말해야 됩니다.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자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지 못했구나 나는 왜 이렇게 미련할까?’라는 것과 ‘나는 아닌가 보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실패와 우리가 저지르는 모든 죄에 대하여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분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나폴레옹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습니다. 그가 이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다가 알프스에서 이만 명을 다 죽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한 봉우리에 올라갔는데 나폴레옹이 망원경으로 앞으로 보더니 ‘이 길이 아닌가봐’ 하니까 거기서 만 명이 졸도했다는 것입니다. 남은 만 명을 끌고 다시 악전고투 끝에 다른 산봉우리에 올라갔는데 다시 망원경을 보더니 ‘아까 그 길이 맞는가봐’ 하므로 나머지 만 명이 죽었다는 예화입니다.

 

 

 

산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신자의 삶에서 실패는 참으로 무안할 수 있고 무색할 수 있고 부끄러워서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닌가봐’ 그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신자의 신분이요, 운명이요, 위치입니다. 그러므로 분발하셔서 신자답게 삶을 영위하시고 승리하시길 성경이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있으며, 결국 하나님의 존전에 영광스럽게 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분발하게 하시옵소서. 새 사람을 입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없는 줄 알고 믿음 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가슴을 뜯으며 한탄하며 울며 동정을 구함으로서 부끄러움과 수치와 절망 속에 자신을 묻어두게 하지 마시고, 주 앞에 부끄러울 때마다 다시 분발하고 일어나 믿음 가운데서 실패될 수 없는 우리, 망할 수 없는 우리가 되어 마침내 의와 거룩의 삶을 살고, 주의 사람답게 열매를 맺고 주 앞에 서는 복된 신다의 길을 영위하는, 말씀으로 무장된 신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7강(롬8:1-2절) 예수의 살으심 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 1-2)

 

 

 

로마서 8장은 성경의 모든 내용 중에 꽃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많은 복된 장입니다. 기독교를 알기 원하는 이에게 성경을 전부 읽을 틈이 없다면 신약을 읽으라고 하고, 신약을 전부 읽을 틈이 없다면 로마서를 읽으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전부 읽을 틈이 없다면 8장을 읽으라고 권할 정도로 유명한 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서 8장만큼 오해되고 논란이 되는 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감까지 살펴온 바로 로마서 8장은 구원의 성격을 분명히 밝힘에 그 의미와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논란이 되고 있는 어떤 주장 중에는 로마서 중에 8장을 5장부터 시작하여 6장, 7장, 8장에 이르는 성화의 한 단계로 주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8: 2의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구절을 7: 24에 있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와 비교하여 7장의 수준과 8장의 수준을 신자의 구별된 어떤 성화의 단계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늘 주장해 왔듯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는 성화가 아닙니다.

 

 


로마서의 전체 시각은 구원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이 갖는 특성과 성격들이 낱낱이 파헤치는 데 그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들은 사실 로마서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8: 1에서 만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 1-2)라는 이 말씀은 구원의 특성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올바른 구원관을 가지고 제대로 구원관을 이해할 때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 사이에 사용되고 있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표현은 자기가 받은 구원에 대하여 얼마나 뚜렷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가를 판단 근거로 삼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확신은 내가 얻은 구원에 대하여 분명한가가 아니라, 구원의 성격이 어떻게 안전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주관적이기보다는 객관적이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신자들이 갖는 구원의 확신은 주관적이고 감각적이고 너무 감정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체험과 어떤 느낌과 어떤 확신 속에 있는가를 자꾸만 강조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구원의 확신에 관한 성경적 시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 8장에 이르러서 우리가 보는 구원의 성격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관한 시각을 성경적 시각에 따라, 어떤 이들과 같이 구원의 문제를 행복과 기쁨으로 끌고 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축복에 관한 문제를 행복과 기쁨으로 끌고 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축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정죄에 관한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로마서가 처음부터 구원을 논할 때, 바로 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했던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 :18)라고 구원의 설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 번 버스를 타기 위하여 정류소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어떤 부인 두 분이 논쟁을 벌이는 것을 옆에서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불교 신자였는데 두 분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를 믿으라고 강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절에 나가시는 분이 항변을 했습니다. ‘우리 절에 나가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들 보고 절에 가자는 소리를 안 하는데 왜 너희들 예수 믿는 것들은 절에 다니는 사람들을 못살게구느냐’는 것이 주요 논쟁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항변을 당한 신자가 설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믿는 부처는 사람에 불과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진짜 참신이다.’ 그러자 ‘너희가 믿는 예수는 거지이고 우리가 믿는 부처는 최소한 왕자다’라고 절에 다니시는 분이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신자가 변명을 합니다. ‘왕자가 아니라 왕자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한 번 살다 죽는 것이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죽고 난 후 세상이 있다.’ 절에 다니시는 분이 또 항변을 했습니다. ‘네가 보았느냐.’ 그런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적을 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을 설명할 때, 저들이 알고 모르고 틀리고 맞고 하는 시각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가장 큰 시각의 차이는 예수를 믿어서 얼마나 복을 받았느냐, 형통하게 되었느냐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가 하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일차적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지적과 하나님으로부터 형벌을 받아야 하는 죄 아래 있는 위치를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을 해야 맞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은 예수 믿는 것을 금상첨화의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냥 살아도 평범하게 사는데 예수를 믿으면 더 잘되는 것,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더 얻는 것, 더 행복해지고 , 더 기뻐지고, 더 가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로마서 8: 1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복받는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의 영광된 복음의 선포입니다. 로마서 3: 19에서도 똑같은 표현이 계속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밀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밀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을 우리는 확인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들입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하면 이 심판을 면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형벌을 면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위험은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이야기하지 않고 복만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부 복 일변도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는 크게 다릅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신자는 누구냐 묻습니다. 즉 정죄함을 받지 않는 자로, 결코 예수를 선택한 사람이나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중요한 성격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를 책임지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책임감과 함께 자신의 선택입니다. 원래 이런 식의 구원 초청은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국 사람들에게 맞는 방법일 뿐입니다. 오늘 예수 믿기로 결심한 사람 손을 드십시오, 일어나시오, 나오시오 하는 소위 말하는 구원 초청은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방법이지 성경이 그 방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 이 American Spirit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책임지지  남에게 맡기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결단이라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결단, 결단의 시간, 결심,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후회하지 않겠다는라는 이런 것들이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미국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아 문화와 함께 정신에도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우리도 예수 믿는 문제를 논할 때마다 결단을 대단히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결단이 구원의 한 근거인 듯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잡은 것이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의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논할 때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나라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신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5장에서부터 다루어 온 것입니다.

 

 

 

로마서 5장은 구원의 중요한 성격,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식의 이 표현을 강조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 10). 이 본문은 원문을 제대로 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복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 안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본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라고 하면 어떻고, ‘그의 살으심 안에서’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 해석은 구원을 이렇게 두 국면으로 살피도록 합니다.

 

 

 

첫째 국면은 우리가 우리의 처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국면입니다.

 

두 번째 국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국면입니다. 구원은 이 두 국면을 다 다루고 있는데, 앞에 했던 것을 칭의라고 한다면, 뒤엣 것을 성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구원 자체에서 이 두가지가 동시적으로 포함되지만 우리 경험상으로는 이 두 개가 하나의 과정과 단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처음부터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 8-9)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노 아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 죄 값을 나에게 요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내 대신 죄값으로 죽게 하셨고, 그러 말미암아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한 국면입니다.

 

 

 

동시에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른 다음을 9절이 설명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더 얻을 것입니다. 또 다른 국면이 있는데,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우리를 진노에서 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과 같습니다. 그의 살으심 안에서를 영어로 하자면 "by his life"가 아니라 "NASB(by his life), NIV(through his life) in his life"입니다. “그의 살으심 안에서”라고 바꾸면 앞에 것도 이해하기 더 좋습니다. 그의 생명 안에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구원은 전체 국면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를 내 대신 내 죄값으로 죽이사 우리를 죄 가운데서 꺼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꺼냅니다. 그리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넣어 버립니다. 그의 생명 안에, 곧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어서 죄와 사망과 하나님의 진노에서 꺼낼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는 죄에서 벗어나는 길이 내가 예수를 붙잡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결심, 내 결단, 내 노력, 내 지식으로 죄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됐으므로 구원은 얻었지만 자기가 계속 붙잡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붙잡고 있습니다. 달리는 기차 뒤꽁무니를 잡고 같이 뛰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내가 손을 놓으면 내 구원이 취소되고 무산되어 버리는 것같이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런 법칙이 어떻게 통용될 수 있습니까? 로마서 5장이 그 부분을 설명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가 아담안에 있었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었나 묻습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담 안에 있었기 때문에, 아담이 지은 죄는 곧 나의 죄였습니다. 그것은 죄를 짓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죽는 것을 볼 때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은 죄 값으로만 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아도 어린아이들도 죽습니다. 그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왜 죄인입니까? 그것은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로마서 5: 12-19까지 계속 되는 논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신자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 30).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내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지혜요, 의요, 거룩이요, 구속입니다. 구속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십시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 3-4).

 

 

 

예수님이 내 대신 죽었다는 의미는 우리는 죄인이므로 죄 값으로 죽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가 나에게 와서 사망을 집행하는데, 그 사망을 내가 당하지 않고 예수님이 당하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죄가 사망을 집행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난 것은 모두 나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내가 죄에서 벗어났다면, 예수님이 살아나는 동시에 나도 살아난다는 것이 성경의 논리입니다.

 

 

 

예수님께 일어난 것이 나에게서 일어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해서는 죽고 죄로부터 살아나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 6-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나도 죽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하여 살으심으로 나도 산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살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롬 6: 9).

 

 

 

죄는 우리를 사망으로 집행했습니다. 죄가 사망을 한 번 집행하고 또 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끝났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젠 사망에게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8: 2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더 이상 죄와 사망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죄와 사망이 그의 요구를 받아 갔고 우리에게 가졌던 자기의 권리를 집행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요구할 것과 권리를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 9-11). 이 내용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왜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까? 더 이상 죄는 우리에게 와서 무슨 요구나 무슨 권리를 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죄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할 것을 이미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새롭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있어 관계가 없는 자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실패합니다. 아직도 미련을 떨고, 아직도 유혹에 실족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죄 문제로는 취급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라는 관계에서만 취급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송하기도 하도, 부끄럽기도 하지만, 정죄되는 일은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아무리 잘못해도 사법적 관계에서 자녀를 다루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정죄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구원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가장 크게 논란이 되고 거침돌이 되는 것은 우리가 구원을 선택한 것같이 생각하는 오해인 것입니다. 이 오해가 있으면 정죄감으로 돌아오는 데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열심을 내고 내가 승리하고 있는 동안은 구원을 얻은 것 같지만, 내가 실패하고 내가 게으르면 구원을 다시 놓친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신자 된 것을 되짚어 보면서 점검할 때마다, 부끄러워하고 모자라하는 마음은 가져도 좋지만, 정죄감으로는 취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됨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한 번 구원을 얻으면 그 구원을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의 결과로 가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곧 내가 얻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로마서 8장에서 구원의 근거는 전부 하나님의 의지와 관련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 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 38-39).

 

 

 

구원의 근거와 구원의 확신 및 구원의 안전성 모두는 다 이 일을 허락하시고, 이 일을 진행하시고, 이 일을 완성하실 그분의 의지에 달렸습니다. 결코 우리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 구원의 특성인 것입니다. 이 구원의 성격은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안겼으면 자녀됨이 취소되거나, 실패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다운 삶을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확신과 감사를 가지고 수행해 나가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의 귀한 말씀으로 주의 자녀들의 영혼을 위로하셨고, 우리가 얻은 구원의 복된 것과 영원성을 확인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신자답게 하옵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답게 하옵소서. 마땅히 걸어야 할 신앙생활을 걷게 하사 신자의 영광된 것과 복된 것들을 누리며 살고, 영생에 속한 열매를 맺고 사는 저희들 모두가 되게 하시므로 신자된 특권을 빼앗기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8강(롬8:1-2절) 생명의 성령의 법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 1-2)

 

 

 

로마서 8: 1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하는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이 설명하는 복음, 구원에 관한 설명에 핵심이 되는 시각입니다. 구원을 복과 기쁨으로 정의하기 전에 정죄라는 시각에서 정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1-2절의 내용은 적지 않은 논란이 되고 있는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2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무엇이며,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것이 앞에 있었던 7: 22 이하의 말씀 때문에 깊이 오해되는 구절입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 22-24 )라는 선언과 8: 2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를 잘못 연결하여 틀린 답을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7: 22 이하에 있는 신앙의 수준과 8장에 들어와서 보는 신앙의 수준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자들이 죄와 거룩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의와 거룩을 향해 진심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과 달리 죄를 짓고 실패하는 현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 실패들로부터 어떻게 나올 것이냐 하는 소원이 신자에게는 있는 법입니다. 기도하고 노력하고 여러 가지 말씀을 따라서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연구합니다.

 

 

 

바로 8: 2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해결책이 아니겠는가라는 해석과 주장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즉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한다는 이 선언이야말로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죄악된 것과 사망, 모든 것으부터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는 성령의 감화시키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완전 성화라고 하며 신자들이 살아 생전에 완전 성화가 가능한가라는 문제까지 야기됩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완전 성화는 죽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어떤 이들은 완전 성화를 주장합니다. 여기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온전히 다 해결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주장합니다. 때문에 7장에 있었던 신앙의 수준과 8장에 있었던 신앙의 수준은 다른 것이며, 구원은 얻었지만 완전한 성화가 되기 위해서는 제 2의 축복이 필요하다라는 주장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성화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은 구원 자체를 다룰 때 구원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확인하는 관점입니다. 만일 8: 2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이 말이 완전 성화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로마서 8: 12, 13을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8: 12-13), 8: 2이 완전 성화에 관한 선언이라면 그 뒤에 성화를 향한 말이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본문 자체를 놓고 보아도 성격 자체 내용에서 완전 성화를 지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이 완전 성화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시점에서 더 큰 문제를 봅니다.

 

 

 

그럼 죄와 사망의 법은 무엇입니까? 이 8: 2을 완전 성화로 보는 가장 큰 오해의 발단은 죄와 사망의 법을 우리 인간의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솟구쳐 나오는 죄를 향한 욕망, 죄를 지으려는 욕심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8: 2의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의 본능도, 죄를 향한 욕심도 아닙니다. 죄와 사망의 법은 오히려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렵고 틀리기 쉬운 부분이라는 의미에서 신자들은 자기의 믿고 얻은 바 구원을 잘 정리해야 합니다. 율법이 어떻게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명칭으로 쓰여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다시 한 번 구원의 성격과 구원에서 사용된 모든 설명들을 되짚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7: 7에서 율법을 설명할 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 7-9).

 

 

 

율법이 죄냐? 이렇게 물을 수 있다는 것을 놀랍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율법은 의와 거룩을 가르치기 위해 왔고 죄가 무엇인지 지적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무엇인지 지적만 할 뿐, 모든 율법은 죄를 면하게 하거나 죄를 안 짓게 하는 가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곧 율법은 이것이 죄다, 이것이 의와 거룩이다를 가르치지만 그것을 해야 하는 힘과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노예로 있고 죄의 권세 아래 놓여 있을 때, 율법이 와서 죄를 가르쳐도 스스로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는 한, 율법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앞의 설명에서 확인했습니다.

 

 

 

로마서 8: 3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 율법 자체는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이 약하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권세를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때문에 율법이 죄를 짓지 말라 하여도, 우리가 하는 짓이 죄라고 가르쳐 주어도 그것을 거부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은 선하지만 육신이 연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육신이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죄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거룩함을 실천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 자체로 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 7: 10)인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생명을 가르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의 권세 아래 있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면서 의와 거룩과 생명을 가르치고 이것을 하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욕망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를 지적하는 율법과의 차이입니다. 즉 내가 죄를 짓고 싶은 욕심 속에 사로잡혀 있어도 이것이 죄라고 법적인 어떤 기준이 선포되어 있지 않으면 정죄되지 않습니다.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 죄라는 선언을 받고도 그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고, 그 법에 기준이 없었다면 내가 한 죄가 정죄되지 않을 것입니다. 죄가 법적인 어떤 범법 행위로써 정의되고 처벌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이것을 죄라고 지적한 후 죄를 지으면 반드시 형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뒤에 그 죄를 계속하면 우리는 법적인 근거에 의하여 판결을 받고 정죄됩니다. 율법이 지시하는 것을 따를 수 없는 우리에게 법이 주어지자 우리는 그것들을 사망의 판결로 객관적인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여러 번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 55-56).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는 묘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죄 값은 사망이라는 법적 근거에 의해서 죄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 죄를 지은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라는 형벌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망이라는 형벌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법적인 것에 의해서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는다는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서입니다. 죄가 힘을 발하는 것은 죄가 사망이라는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힘을 가지는데, 그 힘을 발휘하는 죄의 권능은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을 근거로, 우리가 죄를 지으면 사망이라고 하는 말은 죄에다 힘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는다고 경고하려고 준 법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없는 한, 율법은 우리에게 죄와 사망의 법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에게 주었던 율법과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었던 복음을 비교하는 다음 대목입니다.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이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 6-8).

 

 

 

6절에 있는 말씀에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옛 언약은 ‘의문으로 한 것’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의문은 글로 쓴 것입니다. 지금 것은 영으로 한 것입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의문이라는 것은 대표적으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온 십계명을 이야기하고, 또 폭넓게 율법 전체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손으로 돌판에 써서 주었던 것이 십계명이요, 친히 모세에게 가르친 것이 율법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 내용 자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야 하는데 그것을 지킬 힘이 없으므로 결국 죽음을 초래했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 즉 죽게 하는 직분이라고 합니다. 9절,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있으리라” 정죄의 직분,, 죽게 하는 직분, 돌아와서 지금 로마서 8: 2 보십시오. 죄와 사망의 법, 죽게 하는 직분, 정죄하는 직분 정확히 같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결국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것은 율법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본성적인 죄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이 다루는 것은 우리의 감정 상태가 아니고 주관적인 우리의 위치 또한 아닙니다. 구원이 가져다 준 객관적인 지위를 설명합니다. 즉 앞에 있었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2절에 ‘이는’이라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선언입니다. ‘율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율법의 기준, 율법의 요구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않습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처음부터 복음을 설명할 때 율법을 왜 끌어들였는가를 다시 한 번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 19-20).

 

 

 

율법은 죄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죄다’, ‘이것은 하면 안된다’, ‘너희는 이런 의와 이런 거룩을 좇아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는 없습니다. 우리들의 행위로 울법을 지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없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 21).

 

 

 

율법의 기준이 아닙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 율법에 의한 구원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 24).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기준을 세웁니다. 그 기준에 모자라면 형벌이고, 그 기준을 넘어서면 상입니다. 우리는 이 기준에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에게 이 기준을 묻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는 선물로 그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일 뿐 결코 우리에게 잘잘못을 따지는 법칙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라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너는 내 자녀다’, ‘너는 내 아들이고 내 딸이다’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소유로 불러내셨습니다.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시킬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죄를 전가시켜 내 대신 죽게 하시고 그의 피로 깨끗하게 하사 자녀로 부르신 것, 곧 구원입니다.

 

 

 

구원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장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은 ‘우리는 더 이상 율법적 차원에서 취급되지 않는 자다’라는 것입니다. 잘잘못으로 취급되지 않음은 구원 자체도 그렇고 성화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거듭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너희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 14). 왜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법을 적용받지 않습니다. 법을 기준으로 해서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묻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5: 56에서 보았듯이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죄가 힘을 발휘하기 위한 법적 근거가 율법입니다.

 

 

 

그러나 신자란 율법으로 다스림받지 않는 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의 근거가 아니고 기준이 아니고, 요구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대접받는 자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대접받고 취급받는 자들입니다. 죄가 우리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죄가 무슨 말을 하려면, 죄가 힘을 발휘할 법적 근거를 가져야 되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용하시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법은 사랑과 은혜의 법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에서 자녀를 다루는 법과 회사에서 직원을 쓰는 법은 다릅니다. 회사에서는 직원에게 잘잘못과 능력을 요구해서 쓰기도 하고 처벌을 하기도 하고 혹은 내보낼 수 도 있지만 자녀에게는 그럴 수 없습니다. 자녀도 잘못했을 때에는 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계를 단절할 법은 없습니다. “저걸 내가 왜 낳았던고” 때론 불평도 하지만, 결코 버리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생명의 성령의 법’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니라”(롬 7: 6). 영의 새로운 것, 생명의 성령의 법 같은 맥락들인 것입니다. 의문의 묵은 것, 율법으로는 안한다는 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것으로 취급받고 평가받는 위치에 우리는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과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에 대하여 늘 틀리는 이유는 아직도 정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죄감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성화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법적 차원에서 따지는 것입니다. 결국 남남이라는 생각을 가진 탓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로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냉냉한 법으로 관계되어 법에 의해서 관계가 호전되었다 멀어졌다 하는 그런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라서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내 편에 서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는 자기 자신을 정죄감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 20-21).

 

 

 

즉 로마서 8: 2 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했습니다. 죄를 벗어날 길이 없었고 우리 모두 사망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으므로 죄를 벗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율법으로 취급하시지 않고 그의 은혜로 취급하는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이젠 우리는 법으로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따집니다. 옛날에 율법으로 취급을 받을 때에는 죄가 우리의 왕노릇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죄인이요, 죄인이면 사망의 형벌을 벗어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따지기로 했기 때문에 과거에 범법한 자가 이제는 안타까운 자로 바뀌었습니다. ‘안타까운 것’과 ‘범법한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정죄에 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사랑과 은혜로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생명이 성령의 법 아래 있지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자녀됨을 이렇게 당연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래야 복음이 제대로 전달될 것입니다. 신자가 거룩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여전히 악한 행실을 계속하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단코 다시는 정죄되는 처지에는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 2을 이렇게 바꾸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의 통치를 받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은, 생명의 원리 또는 생명의 직분 또는 새 언약의 은혜 이런 것들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속에 내가 있지 않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신자의 위치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을지라도 부끄러워하거나 절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포기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 자신도 우리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부끄러워하는 자세는 좋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와 은혜와 사랑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한 이상 신자의 지위와 운명이 취소되거나 바뀔 수 없음을 성경이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번복되지 않기 때문에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인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갈 것이므로 근신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이 복된 우리의 운명이 영원한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근신하며 경건을 연습하여 주의 자녀답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게하여 주옵소서. 자랑하게 하시되 성실하게 하시고, 근신하게 하시되 믿음 위에 굳게 선 마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부름을 항하여 열심히 하루하루를 사는 성실한 신앙생활이 이어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못난 것을 회개하되 절망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의 운명을 감사하되 하루하루를 인내함으로써 신자된 도리를 다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정죄할 것이 세상에 없는 줄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신자된 것을 감사하며 기뻐하며 충성을 약속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69강(롬8:3-4절) 완성된 율법의 요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 3-4)

 

 

 

로마서 8장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구원을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는 자라고 정의해 왔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8: 2에 있는 것과 같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율법으로 우리를 점검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문을 보시면 4절에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 율법으로는 우리를 점검하지 않는다는 것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은 구원의 목표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으로 돌아가셔서 처음부터 사도 바울이 이 부분에서 구원을 얼마나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는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 19-20).

 

그래서 구원이 어떤 것이었느냐면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 21-22).

 

율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기로 하고 믿음으로 우리를 구원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으로 구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율법의 방법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선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기준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 아래 있다는 그것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법이란 언제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렇게 하라’. 혹은 ‘이렇게 하지 말라’라고 정하는 것이 법입니다. 그래서 법이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 이것을 하지 말라’라고 기준을 정하고 요구를 정했을 때 나 혼자 하는 것을 율법 아래 있다고 합니다. 성경이 밝히 말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우리 힘으로, 우리 혼자서 이루어낼 수 있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율법의 방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 27-28).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니느라”(롬 3: 31).

 

 

 

이것이 어려운 대목입니다. 율법이 구원 문제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차지하는가를 분명히 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그르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의 목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하며, 선하며, 의로운 것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그것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두 국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필요없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요구를 이루기 위하여 구원이라는 것이 도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를 율법 안에서, 율법으로, 율법의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러 오셨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요구되는 내용과 목표는 율법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으로 가셔서 9절을 봅시다.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에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 9-11).

 

 

 

우리가 7장에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에게는 율법이 제시하는 것처럼 이것은 하지 말고 이것은 하라고 하는 것을 하며 살 능력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 아래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죄를 지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율법의 선한 것을 가지고도 반발하게 하고 우리의 무능함으로 그것을 지킬 수 없게하여 우리를 사로잡아 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롬 7: 12-14).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죄 아래 팔려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문제를 논하면서 로마서 8: 3, 4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면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죄로부터 힘써 나와야 되는데 우리는 그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도말하셔서 죄 아래 종의 신분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죄는 우리 주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 아래 있던 몸에서부터 벗어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구원 속에는 그 율법이 요구했던 것을 적극적 차원에서 이루게 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도 구원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고 그뿐 아니라 성경이 요구하는 의와 거룩을 만들어 내는 것도 구원 안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죄로부터 우리를 용서하고 심판받을 자리를 면하게 하고 죄의 종으로부터 풀어낸 것만 구원 속에 있고 그 다음은 내가 전부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의 거룩을, 성화를 이루어내는 데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며, 나를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우리가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죄가 우리의 왕이었듯이 은혜가 우리의 왕이라고 가르치고 있고, 구원을 얻은 것 속에는 바로 이 거역할 수 없는 은혜가 이제 우리를 주도하는 그런 자리에 우리가 와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관한 내용을 이야기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의와 거룩의 자리에 오게 한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며, 율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구원은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멸망과 심판의 자리로부터 옮겨 온 것이 다가 아니라 의와 거룩으로 의인의 자리에, 복된 자리에 옮겨 와 있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가 얻은 구원을 사죄라는 차원에서는 이해해도 이 복된 운명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으로서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구원이 의도되어 있다는 것을 놓칩니다. 그런 차원에서의 율법의 기능, 좀더 깊이 이야기하면 그 율법에 의와 선과 거룩과 생명과 진리가 이루어지도록까지 어떤 안전장치 속에 붙잡혀 있는 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로마서 7: 4로 가봅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은 죄 가운데서 죄의 열매밖에 맺을 수 없던 우리를 의로운 열매를 맺게 하려고 죄의 열매를 맺던 자리에서 꺼내어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리까지 갖다 놓은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구원은 옛날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자리로부터 이제는 의를 열매 맺을 수밖에 없는 자리로 옮겨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동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있다면, 서쪽을 향해 앉아 있어도 기차는 동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 기차에서 내려서 서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동쪽으로 돌아 앉아 있어도 서쪽으로 갑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여기 있는대로 구원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여, 다시 말하면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도록 나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묶어 놓은 것입니다. 의와 거룩을 향해 가는 기차 속에 나를 넣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국면을 놓치면 여러분은 자꾸 스스로의 힘을 기준으로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가 혹 죄를 짓는 한이 있어도, 그러니까 서쪽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걸어가도 전체적으로 보면 서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코 거기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내가 옆으로 앉아 있든지 뒤집어 앉아 있든지 기차는 달립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부분을 자꾸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5절을 잘 보십시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것이 옛날 상태입니다.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죄가 나를 죄짓게 합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기차는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롬 7 :6). 얽매였던 것에서 벗어나서, 즉 죄의 노예로부터 벗어나서, 의문의 묵은 것이 아닌 영의 새로운 것, 즉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주장하십니다. 나를 지키십니다. 나를 강권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을 혼자 책임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무엇이냐고 할 때 구원의 이 두 국면, 죄로부터의 구원과 함께 의로운 국면에 들어가 있는 이 두 번째 국면을 동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죄를 향해 달려가는 기차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는 기차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죄를 이야기하고 심판을 명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제나 그것이 그 자리로부터 나와서 구원이 목표로 하고 있는 어디로 이전, 이사, 이동한 것을 전제로 하지, 사죄를 받고 심판을 면한 것만으로 구원을 정리해 버려 우리가 구원으로 얻은 지금의 운명, 지금 우리가 들어 와 있는 위치, 이것을 놓쳐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 29에 가면 구원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롭고 거룩하고 영광된 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본질적으로는 동등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영광과 구원의 궁극적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삼고 우리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는 동등한 반열에 세우고 있는 영광의 자리를 구원의 목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구원의 내용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처음부터 약속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8장에 와서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도 있었던 것인데 지금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5: 17을 봅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 17-19).

 

아담 때문에 그의 후손이 모두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같이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이 전부 의인이 될 것을 비교하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에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사죄를 받으리라가 아닙니다. 지었던 죄를 없게 하는 차원으로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고 ‘저들은 죄인이었다’, ‘이제는 의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중립지대를 연상해 보십시오. 중립지대에 있었던 사람이 죄를 지어 죄인이 되고 착한 일을 하여 의인이 된다고 할 때, 우리는 구원을 죄인 되었던 자리에서 용서받아서 백지 상태로, 무흠한 상태로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지 의인이 된다는 적극적인 지위로서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의인이라는 지점이 무엇을 해서 인정함을 받고 합격을 받고 칭찬을 받아 도달하는 노력의 결과로 되어 있지 않고, 허락된 구원의 내용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의인의 신분은 선행을 하고 열심히 살아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값없이 받은 구원 속에, 죄를 면하고 심판을 면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 존전에서 영광된 지위의 신분을 말하는 의인이라는 신분도 선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은 모든 자는, 죄를 용서함받은 것만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복되고 영광된 자리에 이미 있는 것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 17-19).

 

 

 

옛날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구원을 얻은 자는 의의 종이라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신앙생활을 할 때 이 부분의 이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소극적인 신앙관을 갖습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지’, ‘죄를 짓지 말아야지’. 이런 시각에 더 많이 붙잡혀 있고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기준이, 죄냐? 아니냐?라는 것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의 종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적극적인 신앙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신앙관은 마치 절벽 끝에, 낭떠러지 끝에 서서 한 발만 오른쪽으로 짚으면 떨어지는 그 절벽을 따라 걸어가면서 ‘한 발만 오른쪽으로 가면 떨어지지’ 이렇게 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절벽 끝을 따라 걷지 마시고 반대편으로 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의와 거룩을 따라 의의 종으로 살아가면 낭떠러지와 멀어집니다. 죄냐 아니냐, 그 옆에서 요만큼 가면 떨어지냐, 안 떨어지냐 이렇게 걷지 마시고 반대로 깊은 은혜와 생명과 진리의 자리로 쭉 나가면 죄냐 아니냐를 언급할 필요가 없는 자리로 갑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 끝에 세워 놓고 저리로 가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떨어졌던 저 낭떠러지 끝에서 주워서 복된 자리에 갖다 놓은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멀리 하셨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을 적극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하며, 혹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면으로 ‘죄를 짓지 말 것, 이런 것은 하지 말아라’라는 것은 전부 반대 쪽을 강조하기 위해 나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엡 5: 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옛날 어두움일 때에는 우리가 가는 어디나 흑암으로 덮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빛입니다. 빛이 해야 할 일은 어디든지 그 빛을 발하여 환하게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빛을 끄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이 신자들의 큰 약점입니다. ‘빛이 꺼지지 말게 해야지’하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한 번 얻은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빛을 어디에다 비출까? 어디 어두운 데는 없는가? 이 빛을 들고 나가야 될 때는 없는가?’입니다. ‘빛이 꺼지지 말게 해야지’하고 꺼지지 않게 품고 들여다 보다가 눈썹이나 태우고 정작 빛을 비출 곳에는 비추지 못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 8-10).

 

 

 

그러니까 자꾸 빛이 꺼질까, 안 꺼질까, 이리로 가면 빛이 꺼지나, 안 꺼지나 이런 것을 시험하지 말고 빛을 들고 어디를 가야 되는가, 주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이런 데 신경을 쏟아야 합니다. 죄냐, 아니냐보다는 하나님이 무엇을 좋아하시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신앙에 가장 필요한 생각이요, 원칙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본적인 이해의 결여 때문에 생기는 여러분들의 실패일 수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이미 내 안에 확보되어 있는 의인으로서의 지위, 거룩함에서의 운명으로 기억한다면 실패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 15-17).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왜냐하면 이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이 빛이 꺼질까봐 걱정을 하거나, ‘내가 이것을 들고 나갔다가 깜깜하게 만들면 어떻게 할까?’라는 미련한 생각들을 하지 마십시오. 마땅히 해야 될 것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구원에 관한 이해가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결국 육신이 약하여 율법이 하지 못했던 일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한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의와 거룩과 진리와 생명과 영광에 이르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것을 하도록 이제 우리가 허락받고 있고 그 원리 안에 있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주관합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이고 우리가 얻은 확고한 구원이 우리에게 의를 결실하도록 요구하고 있고 그것을 할 수 있게 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신자된 운명, 우리의 지위가 우리의 미련함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됩니다. 신자답게 지혜롭게 말입니다. 로마서 12장에도 같은 요구가 나옵니다. 이 로마서 12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로마서의 결론입니다. 이 결론은 구원을 자세히 설명해 놓고 그것을 근거로 하여 내린 결론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 1-2).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는 말 속에는 “너희가 그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의의 종이 된 것을 기억하라”, “그것을 근거로 하여 너희를 요구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생각만 바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실제로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너희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다하여는 몸을 다하여라는 것과 뜻이 같습니다. 말로만이 아닌, 우리의 중심을 바치는 헌신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본 바와 일치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이유는 우리가 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죄를 받고 용서를 받은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의가 우리를 다스리기를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거룩을 명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지금의 위치입니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자라면 더 이상 죄 문제에 연연하지 마시고 성경이 요구하는 신자다운 부름에 응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와 이제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경의 요구들을 우리가 혼자서 책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의의 종이기 때문에,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것이 처음부터 모든 신자가 동시에 소유한 구원 속에 내포되어 있었던 기본적인 우리의 선물이요, 약속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 성경이 구원에 대하여 설명하는 복된 내용인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든지 거룩하게 사는 일에 아무도 자신을 주저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옛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아무리 연약해 보이고 미련해 보여도 여러분은 주춤거리면 안됩니다. 옛날에 여러분이 연습하지 않고 배운 적이 없을 때에도 죄를 지었던 것같이 지금은 마땅히 의의 종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믿음 안에서 여러분의 구원을 확인한 대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순종만 하신다면 당연히 여러분의 인생과 존재를 통하여 의의 열매가 맺히리라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확신하시고, 여러분의 신앙을 풍성하게 하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한 구원이 의의 열매를 맺는 자리에 있는 것을 이제 확인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지혜롭게 하시고 주의 뜻을 살피게 하시고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혼자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은 가운데서 든든한 마음을 가지고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받으사 복되게 하시며 의와 생명과 진리의 열매를 맺는 줄 아는 신앙으로 우리의 남은 생애를 신자답게 살고 주 앞에 서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70강(롬8:3-4절) 율법의 요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 3-4)

 

 

 

로마서를 하는 동안 계속 구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인가 정확하게 인식될수록 우리가 얻은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고 자랑할 수 있게 되고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봅니다. 8장에 이르러서, 우리는 여태껏 해왔던 성경의 설명들을 따라 정리한 구원을 좀더 분명하게 확인하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어떤 목표를 갖게 하며 어디로 인도하는가를 좀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펴본 첫 번째 국면이, 구원을 인간적인 행복과 형통과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진리와 사실 앞에 자기 위치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2절에 있었던 바와 같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자연인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로 들어간 우리의 구원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우리는 구원을 먼저 적극적이기보다 부정적인 면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는 행복, 쉽게 이야기하는 기쁨, 쉽게 이야기하는 자랑 이런 것들 이전에 회개해야겠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비명과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징벌 아래 있는 우리를 확인하는 작업이 우선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때로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서 벗어나서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다는 자랑을 인식했었어야 되었습니다. 죄를 면하는 것, 형벌을 면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이 외치는 대로 죄와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의와 거룩의 자리에 부름을 받았고 마땅히 거룩의 열매를,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운명과 지위와 능력을 부여받은 것이 같은 구원 안에 포함되어 있는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확인하려는 것은 3-4절을 통하여 4절에 있었던 율법의 요구를 어떻게 이루시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이것까지가 다 구원의 기본적인 약속과 내용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다라는 이 표현을 통해서 신자들 중에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다고 구분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을 차별하는 것도 아니고 신자 사이에 계급을 논하는 것도 아닙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 자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영을 좇는 자는 구원을 얻은 자의 운명을 논하는 것이지 신자들 사이에 육신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가 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들 사이에 신앙의 차이가 있어서, 신앙이 깊은 자도 있고 신앙의 초보 단계에 있어 늘 흔들리고 실패하는 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고린도전서에서 평한 것과 같은 표현을 쓸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계급이 아닙니다. 처음 구원을 얻으면 제 1단계 구원이 있고 그 다음에 2단계 구원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의 약속된 것속의 과정이란 말입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도 모든 구조와 지체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아직 연약하여 튼튼하지는 못하고, 지능으로나 기능으로나 아직 자기가 가진 것을 제대로 쓸만한 힘과 지식은 없지만 불구는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누구나 모두가 동일하게 같은 약속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숙하고 힘이 있어지는 것은 물론 과정으로 차이가 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처음에는 팔이 없었다가 나중에 팔이 생기고 처음에는 다리가 없었다가 다리가 생기는 그런 식의 신자간의 차별은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가 사죄, 면책, 징벌을 면하는 것, 멸망의 자리에 가지 않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의와 거룩과 영광의 자리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3절, 4절에 의하면 율법을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는 그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구원이 준비되고 허락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구절과 만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가를 이제 파헤쳐서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더 분명해지라라고 기대되어집니다. 그래서 우선 여기 있는 4절식으로 말하자면,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좇는다’는 표현 때문에 많은 오해가 야기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느냐, 영을 좇느냐가 내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같이 표현되어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을 좇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육신을 좇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육신을 좇는 것의 반대가 영을 좇는 것임을 알게 될텐데 그러기 위해 육신이라는 표현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 1-3)입니다.

 

 

 

구원을 얻기 전 불신자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데. 그 때 인간들은 불순종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불순종하는 자, 즉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3절에서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자라고 합니다. 육신을 좇는다라는 뜻입니다. 육신을 좇는다는 것이 물질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물질 자체가 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대해 형이하학적이라고 하는 표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상당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하나님이 지은신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계를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정신을 말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사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지 않고 자기가 자기에게 주인이 된 상태, 이것이 육신을 좇는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꼭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된 상태를 육신을 좇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6장에 가면 같은 표현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창 6: 1-3).

 

 

 

왜 하나님의 신이 인간과 함께 하지 않기로 했냐면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자기 마음대로 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일에 관한 한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육신이라고 표현되는 하나의 정신, 원리, 어떤 성향입니다. 육신을 좇는다는 말의 가장 핵심된 표현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을 좇는다는 것은 꼭 이것의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 45-49).

 

아담에게 속했느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느냐 하는 것은 로마서 5장에서도 누누이 강조된 구원에 있어 핵심되는 내용입니다.

 

 

 

아담에게 속한 자는 아담과 같이 죄인의 신분으로 태어나서 죄가 왕노릇하는 권세 아래에서 신음해야 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듭난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를 대표자로 삼아서 의와 그의 거룩에 동참하는 복된 자리로 옮겨진 것을 로마서 5장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은 산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 주는 영입니다. 즉 아담은 살아 있는 사람이요, 영혼이 있고 인격이 있고 고급한 만물의 영장이지만 그는 자기 일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인간이 창조되던 때를 상기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들어 놓고 명령을 주셨습니다. 선악과는 따먹지 마라, 먹으면 죽으리라. 그들은 영생하는 운명에 있지 않고 자기들이 이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처지에 있었던 것 아닙니까?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을 하고 있는 한 죽지 않을 것이며 복락을 누리고 있을 것이되, 언제든지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들은 죽을 것입니다. 끊어질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입니다.

 

 

 

우리 옛 사람들, 구원 얻기 이전의 우리는 우리가 바로 우리의 문제와 운명을 결정해야 하고, 의와 거룩과 생명을 택할 능력과 자유가 없었다는 것이 더더욱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려 주는 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으면 우리 스스로 문제를 혼자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는 상태와 그런 지위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의 육신을 좇는 자가 율법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육신이 연약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과 명령과 요구를 혼자 책임져야 하는 그런 조건에서는 우리가 율법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도 힘이 없을 뿐 아니라 게다가 우리가 우리를 혼자 책임져야 할 때에는 사망과 죄의 권세 아래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었던 것과 같이, 즉 아담부터 시작된 그 때의 위치, 자신을 자신이 혼자 책임져야 되는 상태가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를 책임져 주는 상태로 옮겨다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영을 좇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결심을 하고 내가 노력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이 ‘육신을 좇느냐’, ‘영을 좇느냐’로 표현되어 있지만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에베소서 2장 이야기나 창세기 6장, 고린도전서 15장 이야기를 맞추어 보면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떤 상태와 어떤 원리 속에 있느냐를 나타낸 것으로, 육신을 좇는다는 이야기는 나 혼자 책임지는 상태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영을 좇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우리 운명을 혼자 책임지지 않는 상태에 들어와 있다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어, 우리 혼자서는 죄로부터 나오지도 못하고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없게 연약하고 미련한 것을 아시사 구원 속에 이제는 우리를 혼자 있게 하지 아니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지키시고, 인도하셔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영광의 자리에 우리를 세우시고야 말며, 의와 거룩과 영광의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라는 여기까지가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 문제,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다는 것, 나를 더 이상 나 혼자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등에 대해 성경이 과연 정말 그렇게 약속했고 그런 안전책을 보장하고 있느냐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1: 15로 가 봅시다.

 

이를 인하여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 15-19).

 

 

 

17, 18, 19절에 계속 설명되어 있는 구원에 관한 설명,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어떤 구원을 주셨는가 알기를 원하노라는 구원의 국면이 부정적인 쪽에 초점이 없고 여기서는 전부 긍정적이고 완성적인 면에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을 보십니까? 너희가 어떻게 구원을 얻었는가, 너희가 어떻게 용서를 받았는가가 아니라 너희가 얻은 구원이 어디까지 가는가를 알기 원한다는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18절을 다시 보시면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이렇게 미래적이고 완성적인 것으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일이 어떤 힘으로 된 것인지 알아서 그것이 기어코 되고야 말 것을 기억해서 너희 믿음이 더 강건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이 이 내용의 초점입니다.

 

20절,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엡 1: 20-21).

 

 

 

그 능력, 우리를 영광의 소망, 복된 완전한 자리에 세우고야 말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면 ‘과거를 돌이켜 봐라, 그 능력이 바로 예수를 보내시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의 뜻이다. 그의 의지다. 그의 열심이다. 그 능력이 그 열심이 바로 너희를 영광의 소망의 자리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을 무엇으로 보고 압니까?

 

22절.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온 천하의 주인이신 모든 권세를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8: 18 이하의 대위임 명령을 주시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할 때도 ‘아버지께서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므로 내가 너희에게 명한다 세상과 너희는 대등하니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권세를 갖고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을 간섭하고, 내 뜻을 이루기 위해 너희를 보낸다’ 이것입니다. 승리하고야 말 일에 부름을 받아 보냄을 받은 것이 전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문제도 되고야 말 일,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권세 위에 제일 뛰어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제일 큰 힘을 가지고 이 일을 하셔서 이렇게 우리에게 약속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 23).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셔서 그 몸이 되는 신자들과 신자들은 유기적인 연합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권세를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갈라설 수 없는 유기적인 결합을 하셨습니다. 머리와 몸뚱아리는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을 좇는다’는 말입니다.

 

 

 

예전에 아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모두 자기 일을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한 일의 결과로 자기 운명이 결정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 혼자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왜나하면 우리는 이제 몸뚱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내가 나를 혼자 좌우하거나 혼자 결정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을 좇는다는 말의 뜻입니다.

 

 

 

에베소서 4: 15을 보십시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 15-16).

 

성화는 언제 어디서나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꼭 우리 혼자 책임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머리에까지 자라느냐?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어 자란단 말입니다. 몸뚱아리를 자라게 하고 몸뚱아리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머리입니다. 머리는 명령하고 머리의 수준까지 가는 것은 몸입니다. 이것이 영을 좇는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우리 자신을 책임지거나 혼자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고, 우리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지키사 그에게까지 자라도록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그로부터 도움을 입어 그에게까지 자라고야 말 것입니다. 구원은 어떤 상태, 어떤 지위, 어떤 안전이 보장되는 상태에 있는가를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육신을 좇았습니다. 육심을 좇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일차적으로 포함하지만 동시에 자기의 운명과 자기의 결과를 자기 혼자 책임져야 되는 상태입니다. 이제 육신을 좇지 않고 거룩을 좇고 의를 좇는 것뿐 아니라, 더 중요하게 나를 나 혼자 책임지지 않고 하나님이 책임지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 되어서 머리가 그 몸을 자라게 하며 그 필요한 것을, 온 몸이 필요한 것을 머리가 명하고 인도하는 것같이 우리의 운명과 우리의 모든 결과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보호하심과 힘 주심 안에서 안전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구원입니다.

 

 

 

골로새서 1: 24로 가 보십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 24-29).

 

 

 

27절,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라.” 그런데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어떻게 그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는가, 멸망을 면하는가, 징벌을 용서받는가를 말하지 않고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해놓고는 영광의 소망,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 그 최종적 완성과 연결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그가 우리를 영광의 소망의 자리에 인도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28절 하반절에서도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떤 체제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혼자 우리 자신을 책임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책임지는 뗄 수 없는 유기적인 연합체가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의 대상이며, 그의 모든 능력과 권세로 지키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영을 좇는 자라고 합니다. 내가 영을 좇는 것이 아닙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육신을 좇아 육신에 속한 신자, 영을 좇는 영에 속한 신자, 이런 등급은 없습니다. 신앙의 높낮이를 이야기할 때 ‘아직도 육신에 속한 것 같다’라는 표현을 쓰지만 신자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혼자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신자의 상태, 신자의 지위, 신자에게 허락된 안전보장이 어떤 것인가를 이야기할 때는 누구를 막론하고 영을 좇는 자요, 그리스도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신자는 육신을 좇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때 쓰는 육신을 좇을 수 없다는 표현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를 짓기도 하고 실족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들을 좇아 가기도 합니다. 이것을 육신을 좇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육신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고, 로마서 8: 3-4에서 언급하는 것은 신자가 자신을 혼자 책임지느냐, 예수님이 책임지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같은 골로새서 2: 1부터 봅시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 1-3).

 

 

 

예수 안에는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 합니다. 이것은 지금 예수를 모르는 자들, 구원얻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렇지, 너희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재미있고 전부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모든 보화는 예수 안에 있는 법이란다. 너 예수 믿어야 된다.’ 이런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 골로새 교인에게 쓴 편지란 말입니다. 구원을 이미 얻었고 예수를 믿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비밀과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느니라라고 말함으로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구원을 얻었지만 너희가 맛본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그 안에 얼마나 더 많은 것이 허락되어 있고 약속되어 있는지를 깨닫기를 원한다.’ 이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셔서 로마서 8장이 이야기하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로 우리보고 영을 좇으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무엇인가, 신자라는 이름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깨닫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혼자 우리를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고 미련을 떨기도 하고 게으름을 부릴지라도 우리의 영원한 영광의 자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복된 자이에서 떨어지거나 실패하거나 중도 탈락하는 일은 없는 자라는 말입니다.

 

 

 

같은 로마서 8: 24을 보시면 이렇게 연결해 나갑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 24-27)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대신 기도를 하고 그것을 내가 한 기도로 간주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미련한 짓을 해도, 잘못된 일을 해도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회개를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잘못해 놓고도 하나님 앞에는 잘 한 것으로 평가되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혹 여러분은 이렇게 이야기하실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나 하고 싶은 거 하고 성령님은 성령님 하고 싶은 거 하세요’ 그러면 고달픕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어느 날 자신이 절망스럽고 밉지만, 우리는 자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실패한 것만으로 나를 평가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버리고 싶어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기 때문에 나는 나를 어떻게 할 수 없어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나를 결국 어떻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나를 용서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끄럽고 아무리 죄송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내가 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고칠 것을 믿고 내 미련과 내 변덕과 내 연약과 내 게으름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능력과 자비와 긍휼과 그 부요하심을 따라서 나를 결국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세우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구원에 내포되어 있는 약속입니다. 모든 신자가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대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닫는 대로 우리의 신앙을 열심히 주 앞에서 지켜내고 미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찬송하며 감사하며 힘을 다하여 신자된 우리의 신분에 걸맞는 신앙생활을 하여 결국은 주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날에 부끄럽지 않기 위하여 애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우리의 운명이 영원히 주 앞에 있는 것을 인하여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지혜롭게 하시고, 게으르지 말게 하시고, 열심을 다하여 주를 섬겨 주 앞에 설 때 부끄럽지 말게 하옵소서. 우리로 우리를 포기하지 말게 하시고, 체념하지 말게 하시고, 절망하지 말게 하시며, 우리를 지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 가운데서 굳게 우리의 인생을 신자답게 지켜 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주님 앞에 서는 날, 칭찬과 복된 상급 속에서 우리 하나님을 기쁨으로 만나게 하시고, 그러기 위하여 이 짧은 인생 동안 충성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께서 허락한 구원이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지게 하시고, 그 허락한 말씀과 약속들이 우리의 힘이 되고 지혜가 되고 소원이 되고 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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