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시편 1:1-6 복있는 사람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본문>
<설교>
하지만 성경은 무조건 믿을 것을 요구하지도, 종교적인 도리를 다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가령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에 대해서도 무조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우리 역시도 십자가에 죽는 길로 인도하시고 능히 그 길을 걸어가도록 하실 것임을 아는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십자가에 죽는 길로 인도받는 것은 거부하는 것이 현대 교인들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바로 이것이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믿음으로 산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우리를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는가를 알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시편에서 고난 중에 있고,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하고 있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고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시편의 말씀을 통해서 다윗이 만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위로를 얻고 힘을 얻으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이 결코 고생의 길이 아니며 참된 생명의 길임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은 참 복있다.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할 때, 대개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합니까? 아마 세상적 시각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무엇인가가 주어졌을 때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공부도 잘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가정적으로도 평화로울 때 그것을 부러워하면서 ‘저 사람은 복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그런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1,2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 복 있는 사람과 대비해서 등장하는 것이 악인입니다. 그리고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망한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곧 의인으로도 일컬음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서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결국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 즉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다운 사람을 무엇으로 기준하여 평가합니까? 그 사람의 인격과 인품, 즉 도덕과 윤리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도덕과 윤리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오직 복 있는 사람으로서 의인의 길에 서 있는 자만을 사람다운 사람으로 여기실 뿐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고와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사고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착각과 오류에서 벗어나 세상을 참되고 바르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참되고 바른 시각을 가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의 죄인 됨을 철저하게 발견하고 인식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복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시편 1편에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으로 살기를 소원하십시오. 그것이 신자입니다. 하늘이 인정하는 복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세상이 인정하는 복 있는 사람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곧 하늘이 인정하지 않는 악인의 길을 소원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에 동참하여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런 사람으로 고쳐 가실 것이고, 이러한 길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오만하지 않고 겸손한 것이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이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누가 자기의 뜻과 자기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소원에 순종하였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님 한분 뿐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인데 왜 이런 길을 가게 합니까?’라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공로로 여겨지는 것이 있으면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며 원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세상에 예수님 외에 복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편 1편은 예수님만이 복 있는 분이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복 있는 사람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부르셔서 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는 예수님의 복에 참여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가신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길로 부름 받았고 인도 받을 사람이 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신자라면 예수님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걸어가게 하고자 하시는 복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하고 그것이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복으로 추구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무익하며 헛된 것들임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복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고 현대 교회에서도 예외 없이 복을 외치고 있지만, 한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누구도 하나님께 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일컬으면서 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는 오직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보시고 심판에서 건시지고 생명으로 인도하셨다면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증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겨우 종교적인 도리 몇 가지를 힘쓴 것을 근거 삼아 복을 달라고 아우성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자들의 종교적 모습입니다.
세상의 눈에는 땅의 것들이 자신을 구원하고 힘 있고 생명을 누리는 자로 만들어 줄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땅의 것들로 풍족해지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땅의 것은 힘도 생명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참된 생명을 공급받는 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이 귀한 땅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은 우리와는 좀 더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가 있고, 그 오아시스에 심겨진 나무 한그루와 같은 느낌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에 참여된 신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시내로 인해서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나무가 과실을 맺기 위한 물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푸른 잎사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물을 얻기 위한 노력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냇가에 심겨져 있는가에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져 있다면 물은 시내로부터 무한히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즉 나무는 시냇가에 심겨져 있다는 것 때문에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는 것 역시 세상이 말하는 만사형통의 의미가 아닙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형통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형통입니다.
그런데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말합니다(4절). 바람에 나는 겨는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를 뜻합니다. 스스로는 열매가 있다고 자랑하고 그 열매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열매를 열매로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시내로부터 공급되는 물로 인해 맺어진 열매가 아니라 나무가 스스로 맺은 열매, 즉 육의 열매이기에 열매로 인정되지 않는 것입니다. 결과는 바람에 날려갈 뿐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 있는 사람의 복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복에 참여된 자로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곧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예수님의 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이 바라는 복의 모습은 예수님에게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악인의 길에 서지 않으신 분이었고,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며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한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복임을 믿으신다면 여러분 또한 그 복에 참여된 자로서 그러한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오직 예수님만 원하고 말씀만을 원할 뿐입니다. 말씀으로 인해서 열매를 맺고 마르지 않는 심령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이 가신 길이 복의 길임을 믿으신다면, 현재의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 불평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가신 길에 참여되고 그 길에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람이 복에 참여되고 복의 길을 가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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