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우상을 세우는 자는 누구나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
(예배에서의 형상(形象)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1-4)
1.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가시적(可视的)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거칠고 우둔한 지성을 감안하여 보통 대중적인 방법으로 말하기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고자 할 때에는 특별히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시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철학자들이 교묘하고 재치 있게 가르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자기 공론(空论)에만 집착하고 있는 한, 우매하게 된다는 것, 아니 발광하게 된다는 것을 보다 더 잘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보게 되는 그 독특한 정의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일체의 신성을 무(无)로 돌려 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하여 유일하며 참된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또 한편, 동시에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갈망하여 나무, 돌, 금, 은, 그밖에 생명이 없고 썩어질 물질로 신(神)들을 조형화(造形化)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야수적인 우매가 전세계를 팽배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손상된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서에서, 자신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고 요구한 후 자신이 어떤 예배를 받아들이고 어떤 예배를 거절하시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즉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 : 4).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우리의 방자한 행동을 억제시키셨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키기 시작한 일체의 형태를 간단히 열거하셨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미련한 이방인들 역시 하늘의 별들을 보고서 그것들을 신들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에게는 동물이라고 하는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었다. 실로 희랍 사람들은 인간의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는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들을 마치 하나는 종교, 하나는 나쁘거나 한 것처럼 서로 비교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미신 숭배자들이 하나님을 그들 가까이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일체의 형상, 화상(畵像) 그리고 그 밖의 상징물들을 예외 없이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의 모든 형상적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지령에 더하신 이유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모세의 책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만들까 하노라"(신 4 : 15-18). 이렇게,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형상을 적대시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예언자들 중에서는 이 문제를 가장 강조한 이사야 한 사람만을 예를들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비물질적인 하나님을 물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무생물로, 무궁하신 하나님을 나무 조각이나 돌, 혹은 황금 조각과 같은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의 위엄은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허상(虚像)으로 더렵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사 40 : 18-20, 41 : 7, 29, 45 : 9, 46 : 5-7).
바울도 또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 : 29). 이 말씀에서 명백한 것은, 인간이 세운 조상(雕像)과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그린 화상(畵像)은 모두가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만일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로부터 외치신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성령께서는 비참하고 맹목적인 눈먼 우상 숭배자에게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인용한 세네카의 불평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가장 천한 물질을 사용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 신들에게 인간의 형태를, 어떤 이들은 야수의 형태를 입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남녀 혼성의 형태로, 어떤 이들은 몇 개의 다른 몸으로 형태를 입히고 그것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런 것들이 생기(生气)라도 얻어서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아마 괴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미신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상이 금지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우상 옹호자들의 변명은 한낱 천박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본질과 자연의 영속적인 질서에서 제시하신 것을 다만 한 국민에게만 국한시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제로 바울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그 오류를 반박할 때, 그는 유대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들을 상대로하여 말한 것이다.
3. 신적(神的) 존재로부터 직접적인 표징이라도 형상적 우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실로 하나님은 결정적 표적들에 의해서 때때로 자신의 신적 위엄의 임재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대면하여 보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난날에 보이셨던 그 모든 표적들은 모두 다 인간의 교육을 위해서 적절히 고려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불가해한 본질을 인간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는 것들이었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 : 11)은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모세에게 더 친밀하게 자신을 드러내셨다(출 33 : 1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못하고 단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 : 20)고 하는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성령이 한번은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나셨다(마 3 : 16). 그러나 그 비둘기는 곧 다시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순간적인 상징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성령을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그리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만족할 것이요 그에 대해서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모를 자가 누구이겠는가?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실 것에 대한 서곡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로 신격(神格)의 상징을 세우려고 하는 어떠한 구실도 유대인들에게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하에서 속죄소로부터 그 권능의 임재를 보여 주셨는데, 이 속죄소는 그 마음이 감격하여 자기를 초월하게 될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응시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그룹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그 속죄소를 덮었다. 속죄소는 휘장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속죄소가 안치된 장소는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 : 17-21). 여기서 완전히 명백해지는 것은, 이들 그룹을 본보기로 해서 하나님과 성자(圣者)들의 형상들을 수호하려는 자들이야말로 광란의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나는 도대체 그 하찮은 작은 형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는 데 그것들은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로 속죄소를 가림으로써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사람의 눈과 일체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인간의 만용(蛮勇)을 시정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선지자들은 환상에서 "그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스랍들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사 6 : 2).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찬란하여 천사들도 그것을 똑 바로 볼수 없으며 따라서 천사들에게서 비치는 그 희미한 섬광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룹이 율법의 옛 후견기간(後见期间)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룹을 우리 시대를 위한 실례로 끄집어 들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유치한 시대, 말하자면 그러한 종류의 초보를 배우도록 의도된 시대는(갈 4 : 3)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교의 저술가들이 교황주의자들 보다 훨씬 더 능숙하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유베나리스(Juvenalis)는 유대인들이 흰 구름과 하늘의 신격을 예배한다고 비난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 존재를 부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요 경건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가시적인 형상이 있었다고 부질없이 꾸며대는 교황주의자들 보다는 더 진실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이 국민은 마치 물이 큰 샘에서 맹렬한 힘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또는 재빠르게 계속 우상을 요구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강렬하게 우상 숭배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알도록 하자.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공통적인 실패의 죄를 유대인들에게만 전가시키고, 죄에 대한 허망한 유혹에 빠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다.
4. 우상과 화상(畵像)은 성경과 반대된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 있다. 즉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시 135 : 15 참조, 115 : 4)고 하는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요 신이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서 생각해 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가 흙이나 돌보다도 금과 은을 들어 말한 것은, 그 물질의 광채와 가치가 우상에 대한 존엄을 더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는 일반적으로 생명이 없는 물질로 신들을 만드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지 못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동시에 그는 이에 못지않게 다른 문제 하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순간 순간 덧없이 호흡을 하며 불안하게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너무도 우매하고 무분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영을 우상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일시적인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속(金属)이 하나님으로 간주되어 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신격의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상의 기원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대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저 이교 시인의 다음과 같은 조소는 가장 정당하다고 하겠다.
한때 나는
하나의 무화과 나무의 줄기, 쓸모 없는 나무 토막이었네.
일꾼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신(神)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네.
이와 같이 순간마다 생명이 꺼저 가고 있는 이 지상의 인간이 자기의 재주로 하나님의 존영과 그 이름을 죽은 나무 줄기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저 에피큐로스학파의 시인은 재담을 늘어놓기는 하나 종교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에 그와 그 동류의 풍자를 묵살하기로 하자. 오히려 극도로 어리석은 자들을 견책한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자극을 받으며 각성하도록 하자. 즉 저 어리석은 자들은 동일한 나무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고기를 굽거나 삶기도 하며, 또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 자들이라고 그는 책망하였던 것이다(사 44 : 12-17).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그들을 율법을 범한 자라고 규정 지을 뿐만 아니라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깨닫지 못한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사 40 : 21). 왜냐하면 무한하시면 불가해하신 하나님을 5척의 키로 축소시키려는 것보다 더 부당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습은, 이 가공할 일이 비록 자연의 질서에는 거스리는 것이나 인간에게는 본래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언어로 미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상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사 2 : 8, 31 : 7, 37 : 19, 호 14 : 3, 미 5 : 13). 이 말씀으로 보아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형태는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확립된다. 선지자는 시편에서 이와 같은 비난을 한층 더 맹렬히 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만사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지성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명이 없고 무감각한 물질에게서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의 부패가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특수하게는 각 개인을 그와 같은 광란에까지 몰고 가기 때문에, 마침내 성령께서는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 : 8)라고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화상도 조상(雕像) 못지 않게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희랍인들의 그 어리석은 궤변을 반박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조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훌륭하게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국민들보다 더 방종하게 화상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조각가가 그를 위하여 어떤 조상을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예술가가 어떠한 것도 조형(造型)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는 그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거짓이요,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함. 5-7)
5.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는 옛 속담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바로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성령의 학교에서 이에 대하여 배웠더라면, 결코 그러한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렘 10 : 8)고 하였으며, 하박국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합 2 : 18)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다같이 무익하고 거짓 되었다고 하는 일반적인 교리를 결론지을 수 있다.
불경한 미신을 위해 형상을 남용한 자들이 선지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만일 어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확실한 원리로 결정한 것, 곧 우상은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주장을 예언자들이 전적으로 정죄한 것은, 모든 사람이 명백하게 아는 것이라고 나는 첨부한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위에서 인용한 몇 구절에서 이와 같은 비교가 제시되었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분은 오직 유일하신 참되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구하는 것이 거짓이요 허망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 되었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우리는 단지 예언자들이 가르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 교회의 교리도 역시 부분적으로 달리 판단한다
이 외에도 라탄티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가 이 문제에 대하여 쓴 글을 읽어 보라.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주장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 뿐 만 아니라, 그 형상을 신으로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오래 전에 엘비타 교회 회의(The Council of Elvira)에서 제정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중 제36장에는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이 있어서는 안되며, 예배를 받든가 찬양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이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Varro)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 하였다는 사실이다. 곧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하였다"라는 말이다. 만일 바르로만이 이 말을 하였다면, 아마 그 말은 거의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더듬어 이와 같은 광명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히려 오류를 더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그것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된 것이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둘째로, 형상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 이외의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形象物)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형상물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더 이상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게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하여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 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와 화상, 혹은 조상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体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는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 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우상은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그 거짓된 주장을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의 우상을 적당하게 장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 의무를 다했더라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거룩한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방법이 아니라고 우리는 또한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쓰레기 같은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거기서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시선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해서 마음의 주의를 성실하게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
다면 무지하여 다만 우상 이외에서는 배울 수 없다고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무식자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 제자로 인정하신 자들이며, 하늘나라의 도(道)의 계시로 영광의 옷을 입힌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을 교육하기에 적합했던 그 교리를 탈취당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임무를 우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실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 : 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 : 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 10 : 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며(계 1 : 5), 요컨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을(롬 5 : 10) 충분히 또는 진실하게 배웠다고 하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다 세웠겠는가? 이 한 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 개의 십자가상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그들의 마음과 눈을 더 집착하게 될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은 예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8-16)
8. 우상의 기원 : 유형적인 신성(神圣)에 대한 인간의 욕구
다음으로 우상의 기원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创始)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 나는 이 왜곡된 습관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더욱 부채질한 도화선이라는 것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의 최초의 원인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죽은자들의 형상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버지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으로 기록하였다(창 31 : 19).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은 말하자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홍수 후에는 세계는 새롭게 갱신 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들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족장이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 그 자손들이 우상 숭배에 바쳤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가장 무서운 심판으로 그 타락을 정화시킨 땅이 다시 우상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노아는 쓰라린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었기 때문이다(수 24 : 2). 만일 셈의 자손이 매우 빨리 타락하였다면, 이미 조상 안에서 저주받은 함의 자손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되겠는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한 것으로 꽉 차 있어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에 완전히 젖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악에는 다시 새로운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수공(手工)으로 표현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우상 숭배의 기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례가 입증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32: 1)고 하였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국행진(故国行进)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하였다. 우리는 일상 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항상 자기와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무분별하게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상(像)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그것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어 왔다.
9. 형상을 이용하고자 하면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공상에는 즉시 숭배가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게 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숭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 마치 거기에 신적(神的)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 대해 완전히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한 생각에 물들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그들은 그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을 상(像)으로 표현하여, 이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로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떠한 봉헌도 금하셨던 것이다(출 20 : 25). 같은 이유에서 역시 제 2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 마침내는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우상만을 예배하든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든지, 거기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 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던 그 저주받을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 : 4),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레 26 : 13).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을 바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뻔뻔스럽게 동의하여(출 32 : 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금송아지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이 하나님을 나무나 돌로밖에 이해하지 못할 만큼 우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우상을 바꾸기는 하였으나 언제나 동일한 신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많은 형상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많은 형상의 수만큼 많은 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형상에게 봉헌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신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우상 숭배자들이 구실로 삼았다고 어거스틴이 말한 그 변해서(辩解书)를 읽어 보라. 즉 민중들이 우상 숭배의 비난을 받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한 것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형상물 속에 보이지 않게 내주하는 한 실재라고 답변하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소위 "순수한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우상이나 그 우상에 의해서 표현된 영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하여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의 한 기호를 바라보았을 뿐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면 어떻다는 말인가?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우상 숭배자는 누구든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형상물을 통하여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일단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즐겨 만들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새로운 계교에 미혹되어, 마침내는 하나님이 우상을 통하여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재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와 같은 형상으로 예배한다고 확신하였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 하였다.
10. 교회에서의 우상 숭배
이러한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들에게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어찌하여 우상 앞에 엎드려 부복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기도하려 할 때, 하나님의 귀로 향하는 것처럼 우상에게 향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이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서 어떤 것은 무시당하고 혹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방법으로 존영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을 모방해서 만들 상(像)들에게 이렇게 심한 차별을 둘 수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들을 보기 위해 서원의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오늘날 마치 제단과 화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릅쓰면서까지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쉽게 떠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거의 무한하고 또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사로잡고 있는 일반 대중의 우둔한 오류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에 대해 특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할 때 고백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도 옛날에는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 : 27, 겔 6 : 4이하, 사 40 : 19-20, 합 2 : 18-19, 신 32 : 37).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감추어서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좀더 충분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형상물에게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dulia) 곧 영광이라는 것이 조상이나 화상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는 "예배하다"라는 뜻을 지니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둠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 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해서 다른 별명(别名)을 붙인다 하더라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무니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이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기지(机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들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들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그러나 나는 절대로 어떠한 상(像)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까닭에, 이 양자를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나는 원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주신 이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거나 우리를 파멸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 20 : 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만 이러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처술가들은 누구나 다 우상 숭배 행위를 한결같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하나님을 유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한다는 일은 더욱더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 짓는다. 즉 인간의 시야에서 멀리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보기에도 흉한 형상물로 말미암아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표현 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사건들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형상 또는 형태이다. 전자는 교육하며 교훈하는 데 다소 유익을 주나, 후자는 내가 보는 바로는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오늘날까지 교회내에 장식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형상물은 후자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그들의 이와 같은 형상물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상물의 대부분이 얼마나 사악하게 또는 꼴사납게 조형되었는지, 또한 조금 앞에서 말한 문제로 화가와 조각가들이 이 작업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탕녀의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비록 형상물의 사용이 어떠한 악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13. 교리가 순수하고 견고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별은 제쳐 두고라도 과거사의 표현이든 인간의 신체를 표현해 놓은 것이든, 어떠한 형상을 교회당 안에 두는 것이 과연 마땅한지에 대해 검토해 보자. 첫째로 우리가 만일 초대 교회의 권위에 감동을 받고 있다면 종교가 아주 번창하고, 순수한 교리가 우세하던 약 500년 동안 기독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형상물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의 순수성이 점점 쇠퇴하여 감에 따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형상의 최초의 창시자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전시대(前时代)와 후시대(後时代)를 비교해 보면, 독자는 형상이 없었던 전시대의 고결성에 비해 후시대가 심히 타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는가? 이들 성스러운 교부들이 유용하고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을 교회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없이 지내도록 그들이 허락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교부들은 형상물이 전적으로 무익하거나 혹은 거의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큰 위험성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심사 숙고한 끝에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들을 거절하였던 것이요, 그것들에 대한 무지와 나태 때문에 그대로 지나쳐 버린 것이 아니었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사실을 명백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즉 형상물을 숭고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은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와 감각 있는 것과 흡사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다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우상이 수족(手足)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나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조금 지나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상은 입과 눈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데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걷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상 예배 뿐만 아니라, 우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경고한 이유인 것 같다(요일 5 : 21 참조). 그리고 경건을 거의 전부 파멸시킬 정도로 지금까지 세계를 점령하였던 그 무서운 광란으로 말미암아 교회당 안에 형상물들이 세워지자마자, 소위 우상 예배의 표준이라는 것이 세워진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경험하여 왔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매하여 자신을 제재하지 못하고 오히려 즉시 미신적인 예배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 위험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고의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그 말씀으로 성별(圣别)하신 바 살아 있는 상징 이외의 어떤 형상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의 신성에는 전적으로 부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례와 성찬과 다른 의식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능으로 날조된 어떤 형상물 이상으로 우리의 눈을 강력하게 붙잡으며 생생하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보라! 교황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게 되면, 어떤 것을 가지고도 대신할 수 없는, 곧 비교할 수 없는 소위 형상물들의 혜택을 찾게 될 것이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니케아 회의(Nicene Council)가 내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라도 이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Empress Irene)의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 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 내가 무엇을 말하건 이 회의의 권위는 반대편에 유리한 편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심을 가진 자들의 그 발광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망만큼 나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하자. 오늘날 형상물의 사용을 옹호하는 자들은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Carolus Magnus)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반박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기에 당시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John)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라고 말하고(창 1 : 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 : 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마땅히 형상물을 제단 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마 5 : 15)라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더욱이 어떤이들은 형상들을 우러러보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 : 6)라는 시편의 말씀을 인증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하였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 : 8)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 : 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정관(静观)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데오도투스(Theodorus)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시 67 : 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시 16 : 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어리석음이야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된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误用)
그들은 예배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반드시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한 것(창 47 : 10),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창 47 : 31, 히 11 : 21)한 것, 야곱이 스스로 세운 돌비에 기름 부은 것 등을 들추어낸다(창 28 : 18). 그러나 이들 중 세 번째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였다.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 : 5),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 : 9),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 : 12). 이 여러 구절들은 그들에게는 가장 적절하며 결정적인 구절들로 생각되었다. 만일 누가 형상의 옹호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려고 한다 해도 아마 이 이상 더 그 어리석음을 들 수 있었을까? 미라(Mira)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 sius)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제거하기 위해 그의 부감독의 꿈에 의해 형상물 숭배의 타당성을 확신하였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직접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나 되는 것처럼 신중히 다루었다. 이제 형상물의 조장자(助长者)들은 우리에게 그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역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존경할 만한 교부들이 성경을 그렇게 유치하게 다루고 불경건하고 악랄하게 찢어 놓고도 자신의 신용을 전적으로 상실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충격적인 주장
나는 이제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들이 이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을 감히 입 밖에 토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혐오를 가지고 그들에게 대항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악한 광태가 공적으로 폭로되고, 교황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고대의 주장들이 적어도 형상 예배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Bishop of Amoriurm)는 형상 예배를 싫어한 사람들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어떤 이들은 희랍과 동방 나라가 당한 일체의 재난은 형상 예배를 하지 않은 죄 탓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시대에는 형상이 일체 없었는데 이들은 대체 무슨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만일 사람들이 황제의 상(像) 앞에 분향을 한다고 하면 성자들의 상에는 더욱더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부언하였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의 감독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형상물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는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배와 영예를 이 형상물에게 드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도나 마르키온과 동류로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합심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실로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이에 열중한 나머지 형상 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 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형상 반대자들이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이 소극(笑剧)이 박수 갈채 없이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한 문구를 첨가하였다. 곧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는 구절이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속이려고 사용한 라트리아(la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이 회의는 예외 없이 형상물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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