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그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기에도 충분하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神性)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생각을 신중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충분히 나타내지는 아니하셨을지라도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두 특성을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제거하시며 인간 마음의 교만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하는 곳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불가해하신 분이시면서 또한 땅 위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여 완전히 세상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세상 위로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니교도들의 오류가 실패로 돌아가는데,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오류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며 그의 무한성을 제한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로 저들이 감히 성경의 확실한 증거를 남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이는 오류 그 자체가 저주받을 광란에서 생긴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论者)들은 하나님을 육체적인 존재로 상상하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발과 같은 것들을 가지신 분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자라도,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 못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미약한 수용 능력에 알맞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위엄에서 훨씬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맴돌 뿐 결국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 더우기 아무도 하나님께서 세 분이시라는 공상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서 우리는 일체의 오류에서 막아 줄 간명하고도 알기 쉬운 정의를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위"(位, Person)라는 말이 인간의 고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와 같은 비난이 참으로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도는 성자를 가리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 : 3)고 하였는데, 그는 이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어떤 실재로 보았다. 왜냐하면, 본체(hypostasis)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은(어떤 이들이 해석한 대로, 마치 밀초 위에 찍은 도장과 같이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성부의 본체를 재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을 포함 하시되 부분적으로나 파생적으로가 아니고 아주 완전하게 포함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성부는 비록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있어서는 구별되었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같은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 : 3)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사도의 이 같은 말을 통하여,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본체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자에게도 본체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를 성부와 구별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성령에게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곧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 본질을 다양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은 이 말을 "위"(位, person)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와 같은 명백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처사요 심지어는 완고한 일로 생각된다. 구태여 이 말을 직역하기 원한다면 "실재"(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똑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위"(位)라는 말은 라틴 교부들만이 아니라 희랍의 교부들도 사용하였는데, 아마 이 교리에 동의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prosopa, 얼굴)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희랍의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비록 용어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위"(位)라는 같은 표현은 성경 해석에 용이하게 하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단자들은 "위"라는 말에 대하여 악담을 토하고 또한 어떤 까다로운 사람들은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 그 용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분쟁과 논쟁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어를 유포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경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사상과 용어를 제한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래어가 유포되면 우리는 말의 논쟁으로 극도로 지치게 되고 언쟁으로 진리를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악한 말다툼으로 사랑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외래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여 성경의 구조에 맞추지 않은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래어"라는 것이, 신기하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고 계몽보다는 논쟁을 일으키며 불순하고 무익하게 사용되고 또 거친 말투가 경건한 자들의 귀를 거스리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저들의 건전한 의견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실례가 충분히 있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만일 이와 같이 불려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교묘하게 빠져 달아나 버린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그릇된 교리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황설을 늘어놓는 불경한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쉬지 않고 말하였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인간들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지은 것이었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또한 하나님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운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하여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한 교활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근거 없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배척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매장시켜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에 집착하여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하게 이 문제를 취급한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도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힐라리(Hilary)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조문(条文)들을 무어라고 변명했던가?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었던가? 희랍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 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 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였다.
제롬(Jerome) 역시 다마수스(Damasus)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제롬은 "본체" (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어떤 독(毒)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성실하게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는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보았는데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히포스타시스" (hypostasis)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삼부사(三部史,Tripartite History )권에서 "히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이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 적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 될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공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 용어를 제시한 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Gaul)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떠한 신앙고백도 만들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해서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毒笔)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게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회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자.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으며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비록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곧 세 신(神)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多辩)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 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관계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뜻
그러나 나는 이제 용어에 대한 논의는 그만 두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다.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 : 1)라고 한 요한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 올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성자의 영원한 신격. 7-13)
7. 말씀의 신격
그러나 말을 더 발전시켜 나가기 전에, 나는 여기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해야 하겠다. 그리고 나서 각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의 차이점을 살피고자 한다. 확실히,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에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 편에서부터 나온 단지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증거한 대로, 사도들(벧전 1 : 10-11)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위해 일한 후대의 모든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예언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던 까닭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靈)이 말씀의 영이었다고 하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중재자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창조 사역에서 이것이 있으라, 저 것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모세는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이 사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남의 허물 찾기를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말씀"은 명령이나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쉽게 피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다 훌륭한 해석가들인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 : 2-3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지혜롭고 진실한 사람은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조금도 모호한 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솔로몬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统辖)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 : 22).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의지의 일시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분별없는 천박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자신의 계획과 심지어는 한층 더 은밀한 것까지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 : 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성부와 더불어 계속 일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모세가 간략히 언급한 것을 한층 더 명확하게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양자의 공유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말하였는데 곧 "말씀"을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시며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요 1 : 1-3).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특수한 것을 귀속시켰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우주의 창조주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말로 불리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계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말씀은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고 동일하시고 또한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8. 말씀의 영구성
여기 몇몇 개들이 짖고 있는데, 그들은 말씀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감히 부인하지 않지만 은밀히 그의 영원성을 훔치고 있다. 그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을 여셨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경솔하게 하나님의 본체 안에 일종의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부적인 사역과 관계되는 여러 명칭들은 창조 사역이 있은 후에 그에게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 불린 것). 그러나 하나님에게 새로운 무엇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말하는 그런 명칭은, 경건한 마음은 인정도 용납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무슨 우발적인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주장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 : 17)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하나님이시요 후에는 만유의 창조주가 되신 바로 그 말씀이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납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고 모세가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하나님 안에 어떠한 말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리석은 말은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결론을 지으려 한다. 즉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 : 3)고 말씀하신 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러나 말씀은 벌써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얼마나 오래 전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시작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 : 5)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벌써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 : 1)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토록 그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신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의 영원성과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은 입증이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더 나아가 나는 여기서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는 구속의 문제를 다룰 때까지 미루어 두고자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바로 그 말씀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소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시편 45편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시 45 : 6)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를 왜곡한 채 "엘로힘"(Elohim)이라는 명칭을 천사들과 최고의 권력자에게도 적용시켰다. 그러나 피조물을 위해 영원한 보좌가 세워진다고 하는 구절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지배자로도 불리는 분에게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명칭은 어떤 부가어(附加语)가 없이는 결코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출 7 : 1)이라고 하신 경우이다. 어떤 이들은 "바로에게"를 소유격 "바로의"라고 읽는데, 그것이야말로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비범한 탁월성 때문에 뛰어난 것이 자주 "신적"인 것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그러한 해석은 곤란하고 무리한 해석이며, 더욱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의 특징적인 표지인 지상 대권을 가진 분으로 아주 분명하게 공표하였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 9 : 6).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그를 부르시는 이름이라"고 고쳐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들은 성자를 다만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시키기 위해 명백한 표지들로 그리스도를 장식하는 것이 이 선지자의 의도일 뿐인데 이 구절에서 그렇게 많은 칭호들을 성부이신 하나님께 쌓아 올린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전에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것과 같이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 23 : 5-6, 33 : 15 -16)고 한 예레미야서의 이 한 구절보다 더 명백한 말씀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다른 명칭들은 다만 칭호에 지나지 않으며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여호와"라는 명칭만이 그의 본질을 나타내는 데 실질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하신 성자만이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아니하리라" (사 42 : 8)고 선언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신이 세운 제단에 이 명칭을 붙였고 에스겔도 새 예루살렘 성에 이것을 붙였다고 지적함으로써, 여기서도 애써 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단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올리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붙여진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겔 48 : 35).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출 17 : 15) 표현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다른 구절에 대하여는 더 큰 논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예레미야는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 : 16)고 하는 구절에서, 위와 똑같은 이름을 예루삼렘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는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지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가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오, 의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이것을 명백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구절에서는 의의 근원과 원천이 설명되었고, 나중 구절에서는 의의 결과가 덧붙여 설명된 것이다.
10. 영원한 하나님의 천사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증거로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면,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떤 교묘한 이론을 내세워 피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에게 나타난 어떤 천사는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삿 6 : 11, 12, 20, 21, 22, 7 : 5, 9). 만일 이것이 천사의 임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난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는 종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천사는 식물을 먹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삿 13 : 16). 실로 이 사실은 그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입증한다(삿 13 : 20). 그러므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러한 표적을 통하여, 자신들이 본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마노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 : 22)라고 외쳤다. 이에 대하여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 : 23)라고 답변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들이 조금 전에 천사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분이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 : 18)라는 천사의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이나 그 밖의 족장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은 것은 천사였다고 주장한 세르베투스(Servetus)의 불신앙은 더욱더 가증하다 하겠다. 그러나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이 최고의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직은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중보자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해 그 분은 천사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지속하셨던 것이다.
호세아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말하였다. 즉 그는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을 서술한 후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 : 5)고 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이것을 다시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을 취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마치 이 예언자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창 32 : 29)라고 한 모세의 말을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족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 32 : 30)라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바울 역시 그리스도는 광야에 있었던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 : 4). 왜냐하면, 그의 낮춤의 때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벌써 그 영원하신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가랴 2장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른 천사를 파송한 그 천사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천사에게 지상 권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슥 2 : 3,9). 나는 우리의 신앙이 안전하게 채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을 더 이상 열거하지 않겠다.
물론 이 증거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거의 감동를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 : 9)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말씀이 바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은,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말 3 : 1)라고 예언된 말라기서의 구절이다. 확실히 성전은 유일하시며 지고하신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성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하였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더우기 신약성경에는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증거들을 전부 다 수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몇 개의 증거를 간단하게 선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이미 육신을 입으시고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증명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적절한 증거가 될 것이다. 첫째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가, 혹은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사도의 교훈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사 8 : 14)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롬 9 : 32-33).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만군의 주라고 선언한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롬 14 : 10-11, 사 45 : 23)고 말한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 말씀을 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자신 안에서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여기에서 그가 바로 그 영광이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인용한 시편의 말씀 또한 분명히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 : 8, 시 68 : 18).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나타내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방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하게 하셨을 때, 그 위로 올라가심이 벌써 예표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요한은 이사야의 환상을 통하여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요 12 : 41, 사 6 : 1). 물론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성자에게 드린 하나님의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1 : 26). 또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6 : 7)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가 이러한 명칭들을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은 결코 남용이 아니다. 실로 시편에서 찬양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취하신 것들이다. 일어나서 시온에 긍휼을 베푸신 분이 그 분이시며(시 102 : 13), 모든 나라와 모든 섬들의 지배권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시 97 : 1). 요한은 말씀이 항상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요 1 : 1, 14), 어찌 그가 하나님의 위엄을 그리스도께 돌리기를 주저하였겠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 : 5)이라고 불러 공개적으로 그의 신성을 주장하였는데, 어찌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히기를 두려워하겠는가?(고후 5 : 10)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모순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기록하였다. 그가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홀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아야 할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딤전 1 : 17).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 2 : 6-7).
그리고 요한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방 신이라고 트집잡을까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 : 20)고 말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한 한 증인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하나님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신 6 : 4). 더욱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 5-6).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 28)고 하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바울이 전혀 인정하지 않은 제2의 신을 상상하겠는가?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 모두가 이와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데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마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 : 28)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그 분이 바로 자기가 항상 예배드리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하심 가운데 입증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 신성(神性)을 판단한다면, 한층 더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태초로부터 성부와 함께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시자(요 5 : 17), 주님의 다른 말씀에 대하여는 극도로 둔감했던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을 행사하신다고 느꼈다. 그 결과 요한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 : 18).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는데도 이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리고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 것들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만 속하는 일들이다(히 1 : 3). 그리고 그는 성부와 함께 세계 통치에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다른 개개의 직무도 수행하셨다. 주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 : 25)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는 이 말씀에 따라 이 권세는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주장하셨으며, 이적을 통해서도 이를 증명하셨다(마 9 : 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죄하시는 일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죄권을 소유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능은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결코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살피시고 꿰뚫어 보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 역시 이 권능을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다(마 9 : 4, 요 2 : 25).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결론 짓게 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이적에서 얼마나 명백하고 얼마나 확실하게 입증되어지고 있는가! 선지자나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이적과 똑같거나 그와 비슷한 이적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 준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적과 그리스도의 이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성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가끔 기도를 하셨다(요 11 : 41).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님 자신의 권능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다른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것을 위탁하신 분이 어떻게 이적의 참된 창시자가 되지 못하겠는가?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을 권능을 주셨다(마 10 : 8, 막 3 : 15, 6 : 7). 더욱이 그들은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할 때에, 그 권능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기 위해 이 사역을 수행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 : 6)고 말하였다. 혹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깨뜨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신성을 가장 완전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5 : 36, 10 : 37, 14 : 11).
더우기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의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소유하신다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반대하여, 생명과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주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원 받은 분이 아니라 바로 구원 자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면(마 19 : 17),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인간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과 의의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따라, 창조의 시초부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 1 : 4)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를 신뢰하여, 감히 우리의 신앙과 소망은 그에게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누구든지 피조물을 신뢰한다고 하면 이는 신을 모독하는 불경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 : 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로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해석하였다. 곧 그 한 구절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 : 11, 사 28 : 16)는 말씀이요, 다른 한 구절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롬 15 : 12, 사 11 : 10)는 말씀이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 : 47)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데도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성경의 증거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신앙에서 나오는 기도는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이다. 어떤 무엇이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기도야 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 요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 : 32). 다른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 : 10).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그러한 호소의 한 실례를 보게 되는데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 : 59)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도행전에서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행 9 : 13- 14)라고 증거한 것처럼, 이와 같은 실례는 그 후 모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육신으로 거하신다는 말씀(골 2 : 9)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교리도 고린도인에게 소개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전 2 : 2).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고 명하셨는데(렘 9 : 24), 성자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의 근거라면, 누가 감히 그분를 가리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이 외에도 바울의 여러 서신 첫머리에 있는 인사말을 보면, 성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롬 1 : 7, 고전 1 : 3, 고후 1 : 2, 갈 1 : 3)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성자의 중재를 통하여 온다는 것뿐만 아니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세우게 된다. 이 실제적인 지식이 아무런 쓸모 없는 어떤 사변(思辨)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견실한 지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로 경건한 마음은 자신이 생명의 깨우침을 받았으며 조명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성화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영원한 신성. 14-15)
14. 성령의 신성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증거도 이와 같은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 : 2)고 한 모세의 증거는 실로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 보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단장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 : 16)고 한 이사야의 말을 아무도 교묘하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그 일에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령의 신적 위엄이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우리를 위한 최상의 확증은 익숙한 경험에서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께 돌리는 것과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가 배우는 것들은 모두가 피조물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 하시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신다. 또한 성령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분명히 그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또한 만일 썩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현재의 성장하는 어떤 생명보다도 더 우수하고 탁월하다고 하면, 중생케 하시는 능력의 원천이신 성령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은 빌려 온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창시자이시며, 중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성령에게도 성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신성에 속하는 기능들이 주어졌다. 피조물 중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되지 못하지만(롬 11 : 34)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 : 10). 성령께서는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신다(고전 12 : 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은 자신의 역사에 의해서만 된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출 4 : 11).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므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성령의 사역이다. 능력, 성화(참조, 고전 6 : 11),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2 : 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 : 4)라는 바울의 말은 특히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창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곧 이어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 : 11). 만일 성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면, 선택을 하고 또 의지(意志)한다는 것은 결코 그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명백하게, 신적 권능을 성령에게 돌리고 그가 하나님 안에 실재적으로 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5.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라고 칭호를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殿)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전 3 : 6-17, 6 : 19, 고후 6 : 16). 우리는 이 사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전으로 택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약속 하셨지만 이 약속은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말하였다. "만일 우리가 나무와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령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 그리고 사도는 가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3 : 16-17, 고후 6 : 16)이라 불렀고 또 어떤 때는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성령의 전"(고전 6 : 19)이라고 불렀다. 성령을 속였다고 하여 아나니아를 책망하면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 : 3-4)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를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한 구절 중에서 바울은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 : 9, 행 28 : 25-26). 실로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이 만군의 주의 말씀이라고 변함없이 말하였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이를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였다(참조, 벧후 1 : 21).
그러므로 탁월한 의미에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이야말로 참되신 여호와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노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사야는,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사 63 : 10)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 12 : 32, 막 3 : 29, 눅 12 : 10)면, 이 말씀은 분명히 성령의 신적 위엄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그 위엄을 범하고 훼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옛날 교부들이 사용한 많은 증거를 일부러 생략하려고 한다. 저들은 우주의 창조가 성자의 사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 : 6)라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사야서에서는 "입술의 기운"(사 11 : 4)이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 주장은 논거가 빈약하다. 그리하여 나는 경건한 영혼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들만 진술하기로 하였다.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16. 하나님의 동일성
더우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신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 : 19)라고 하신 이 엄숙한 명령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 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 한다는 사실이다.
실로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세례는 신앙의 성례전 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서는 세례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아리우스파가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서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다. 마케도니우스파 역시 이와 같은 광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만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참조, 사 11 : 2) 그리고 은사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성령도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주장 한 대로 아무리 은사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같은 한 성령"(고전 12 : 11)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17. 삼위성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내게 대단한 기쁨을 주는 구절이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유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유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位)의 삼일성(三一性)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슥 13 : 7)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 : 32, 8 : 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요 1 : 3, 히 11 : 3).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도 아니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 : 18)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가 인성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벌써 그 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요 17 : 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 : 26, 참조, 14 : 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 : 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18.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점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교부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활동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없다. 여기서는 동일한 영이 아무 차별 없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9절)으로, 때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11절)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고 증거하였으며(벧후 1 : 21, 참조, 벧전 1 : 11), 또한 성경은 자주 성령을 성부 하나님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9.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더우기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똑같은 영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재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요 14 : 10)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교회의 저술가들 역시 본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분할된다고 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구별을 제시하는 이 명칭들은 각자의 상호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 하나이신 실체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방법으로 생각 할 때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대 교부들의 견해가 조화를 이룬다.
저들은 어떤 때는 성부가 성자의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느 때는 성자가 신성과 본질을 스스로 소유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와 함께 한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ay) 제 5권 전(全)권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였다. 숭고한 신비 속을 교묘하게 파고들어가 많은 공허한 사색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진술한 그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욱 안전하다.
20. 삼위일체 하나님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두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즉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들의 독자적인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 : 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 : 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위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실례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2 : 21, 욜 2 : 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 : 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전체적 본질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반(反)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21-29)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
더우기 사단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으로부터 뒤집어 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위(位)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하여 왔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은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의 그 왜곡된 헛소리들을 반박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나의 특별한 목적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었지, 강퍅하며 논쟁적인 사람들과 맞부딪쳐 싸우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지금까지 평화스럽게 해석되어 온 진리를 사악한 사람들의 모든 비방에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끝까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진실로 성경의 감추인 신비에 대하여 논할 경우가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마땅히 냉정하고 아주 신중하게 사색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적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도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왜냐하면,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증거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그를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께 맡기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아노모에오스파(Anomoeans)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아직 다섯 편이나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교들은 그 건방진 궤변론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 보다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불행한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보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들의 이해력에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의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말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한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거추장스럽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수와 같이 헛소리하는 너무나 많은 이단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전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무식자들을 불안하게 하며 혼란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실로 이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즉시 많은 분파가 생겨났으며,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위의 구별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입증된 대로 한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 이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해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자도 성령과 구별되신다는 점 등을 확고하게 고수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를 주장한 자들에 대하여도 문은 굳게 닫혀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르베투스나 그의 부류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저들의 오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삼위일체론자를 가리켜 보통 무신론자라고 불렀다. 나는 여기서 그가 삼위일체론자들을 공박하기 위해 생각해 낸 몰상식한 말들을 생략하려고 한다. 그 일로 이것은 그의 생각의 전체였다. 즉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진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组)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위(位)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동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오심에 따라 그로부터 다시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불합리한 주장에 대해 비유로 착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 안에와 심지어는 나무나 돌 속에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중보자의 위에 대하여 그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실로 "위(位)"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구에 대하여 구태여 장황하게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여 놓았기 때문이다(요 1 : 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셨다고 하면(요 17 : 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광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재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우기 천지 창조 역사 이외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여기서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소개되었다. 모세는 혼돈한 덩어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창 1 : 2).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이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셔서 아주 조심스럽게 천지의 혼돈한 물질들을 유지하시며 또한 여기에 미와 질서를 가하셨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확실히, 세르베투스가 꿈꾼 것과 같은 하나님의 한 모양이나 표현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불경건한 사상을 더 공공연하게 드러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을 위해 눈에 보이는 아들을 작정하심으로, 자신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세르베투스는 실재(实在)를 환상물로 바꾸어 이를 변형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새로운 우연적인 특성들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거짓되게 첨가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아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보통 피조물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고 있는데, 이들 각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는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신자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동질적이며 영원히 하나님과 공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게까지도 실질적인 신격을 부여하였다.
23. 성자는 성부로서의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늪에서 또 다른 비슷한 괴물이 나왔다. 어떤 악한들은 세르베투스의 불경건이 저지른 그 오명과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로 또한 당연히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셨다고 해석하였다. 실로 저들은 이 가공스런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한 "본질의 수여자"이시며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그 가식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해서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다 우월하므로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를 한 위격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답변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 : 7), (아직은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이니다). 그리고 더욱이 명확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격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성부 이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하거나 하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 : 1), 이 하나님을 가리켜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요 12 : 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거라고 증거하신 분도(사 8 : 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었다(롬 9 : 33).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사 45 : 23)라고 말씀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14 : 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하였다. 곧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2 : 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7 : 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므로(히 1 : 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께 옮겨진다고 하는 궤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명칭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 예레미야의 말 또한 주의할만하다 즉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렘 10 : 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때부터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 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물에게 존재를 부여케 하신 창조주가 어떻게 자존하지 않으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부터 빌어 올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성부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런데 만일 전체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든가 아니면 성자에게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든가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까닭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 되든가 또는 전체에서 끌어 낸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롬 8 : 9)고 한 바울의 증거에 의하여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체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은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성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였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하면 성부가 이 본질을 성자와 공유하였는가 공유하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답변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반만 신이라고 날조하는 것은 가증스런 죄악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곤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같이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공통된다는 사실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하면, 본질에 관한 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들이 해석한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 : 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제한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여러 구절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함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한 마디 말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논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었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중보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성자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19 : 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人性)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이냐 선하지 않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들의 불경건은 그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것을 시인한다면 그들은 또한 자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신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주장을 한층 더 확증시켜 준다. 확실히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나는 또한, 바울은 하나님만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 : 17), 지혜로우시며(롬 16 : 27), 참되시다고(롬 3 : 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에까지 끌어내리는 가고 묻고 싶다. 태초로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우신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으시다는 말인가? 더욱이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당연한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마땅히 자기에게 꿇기를 정당하게 요구하셨다고 하면(빌 2 : 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금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0 : 3). 만일 그들이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고 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써 그들을 반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다는 점에 있었다고 교묘하게 구별짓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 또는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중보자의 전(全)인격에 까지 미친다 하더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에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하게 마무리지어 놓았다(빌 2 : 6-7). 실로 그가 여호와로 불리시고, 그룹들을 타시며(참조, 시 18 : 10, 80 : 1, 99 : 1) 온 땅의 왕이시며(시 47 : 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이 아무리 넋두리를 한다 하더라도, 이사야가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 : 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수는 없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내실뿐만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까지 회복시키시는 구속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이었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원작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본질이 다양하게 되든가 아니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만 이름만의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지만 성부 다음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 : 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자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하나님 안에 위가 여럿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모세의 이 언급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독자들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이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되게 속한다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자들에게 말씀 하셨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 반론을 즉시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 (요 4 : 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는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란 명칭이 성부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하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은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나는 결론짓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 : 23).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25. 신성한 본질은 삼위에게 모두 공통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에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位)라는 점에서는 발생된 분이 아니시다. 또한,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사위일체(四位一体)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하면 아마 그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제신(诸神)의 삼위일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이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하였는가 아니하였는가 라고 묻는 그들의 그 무가치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成员)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우리는 그가 성부로부터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옛날의 정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오직 위에만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본질을 이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불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 성령의 본질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동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면, 성부는 이때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반증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격의 근원이신 성부에게 한정된다고 대답했었다. 물론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위격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위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웠다고는 하지만(빌 2 : 7),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춰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였다고 하였으나(히 2 : 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 : 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 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 : 28, 참조, 16 : 7, 20 : 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빛나는 광채의 그 완전함이, 육신을 입으신 자신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해 휠씬 뛰어나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 : 24,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셨으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들어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서는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 : 1, 요일 5 : 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제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이들 새로운 신(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그를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들은 마치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참되신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는 이입(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Irenaeus)에게서 많은 구절을 수집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자들을 다루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현재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해야 할 경우,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누가 그는 사실상 성부였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은 종식을 고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3권 제6장을 읽으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2권 제46장에서 밝혀진 대로,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외에도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성자와 성부를 다같이 하나님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제3권 제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하나님이시며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제3권 제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세의 손을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분이라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합 3 : 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3권 제18장, 제23장). 제4권 제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읽게 된다. 그리고 같은 책 제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28. 터툴리안을 인용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들이 터툴리안(Tertullian)을 그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의 표현 방법이 때로는 거칠고 모호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애매하게 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삼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다만 위를 구별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가 말씀인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位)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그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는 성부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位)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Praxeas)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러한 구별에 대해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은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위격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그는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9. 교회의 모두 정평있는 교부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였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를 지지한다. 저스틴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 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할 것이다. 힐라리(Hilary)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더 예리하게 역설하였다.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가? 아니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 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연결이 안 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그들의 파렴치함에는 더욱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게 된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회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와 이전 학자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 않았다. 이 악한들이 가장 적대시하였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들였던가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그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이론(异论)도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친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Christion Doctrine)라는 저서 제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어거스틴이 그때 자신을 망각하였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비난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여,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갖 궤변으로 오늘날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나는 이상의 고찰이 이와 같은 사탄의 일체의 궤변을 충분히 물리쳤다고 경건한 독자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만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은 충실하게 설명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무분별하게 헛소리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나는 내게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덕성을 열망하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다든가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는 그런 여러 일에 대하여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실로 발생의 계속적인 행위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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