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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권 14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하나님과...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29. 06:20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14 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뚜렷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세계와 인간의 창조, 1-2)

 

1. 우리는 인간의 사색으로써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진실한 의도를 살필 수도 없고 또 살펴서도 안 된다.

 

이사야가 거짓 신을 예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의 기초와 하늘의 운행을 보고도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사 40 : 21). 하지만 우리의 이해력이 더디고 우둔한 까닭에 신자들이 이교도들이 꾸며낸 거짓 형상(figmenta)에 빠지지 않도록 참 하나님을 더욱 더 명백히 묘사해야 한다. 철학자들의 판단에 있어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서술, 곧 하나님을 우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은 허무맹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불확실성 속에서 혼돈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좀더 상세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창조의 역사가 명백해지며, 교회의 신앙이 이것들을 근거하여서 모세가 우주의 형성자요 창조자로 표현한 분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 창조 역사에는 제일 먼저 시간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연속되는 연륜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와 만물의 최초의 기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지식이 특별히 유익한 점은, 그것이 옛날 애굽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 만연하였던 기괴한 이야기들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초가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고, 또 우리가 넋을 잃고 그것에 경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 사악한 자들의 우롱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우롱이란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전에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일찍이 천지창조를 하시려는 생각을 갖지 아니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기간을 헛되게 지내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6천년도 되지 않았는데 세계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처럼 오랫동안 천지창조의 시기를 연기 하셨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정당한 일도 아니요 이치에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그 이유를 깊이 캐어내려고 노력한다 해도 백 번이면 백 번 모두 중도에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겸손을 시험하시기 위해 고의적으로 감추어 두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 못 된다. 어떤 파렴치한 자가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고 어떤 경건한 노인에게 조롱 삼아 물었다. 이때 그 노인은 재치 있게, 하나님은 그런 호기심 많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답변하였다.

 


엄격하면서도 위엄 있는 이 경고는, 많은 사람을 자극하여 그들을 사악하고 유해한 공론(公论)으로 몰아가는 방종을 제어해 줄 것이다. 요컨대, 지혜와 권능과 의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 눈으로서는 감히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아있는 형상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 모세의 역사를 우리 앞에 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년이나 허약, 혹은 어떤 다른 결함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면 안경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무능함도 그와 같아서, 하나님을 찾을 때 성경이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실로 방종에 빠져 있는 자들은 경고를 받고서도 그것을 묵살해 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파멸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모독적인 언사로 하늘나라의 일을 흐리게 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사물의 원인을 찾되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행하는 것이라고 개탄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공간과 시간의 끝없이 뻗쳐있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똑같은 잘못이라고 조심스럽게 경고하였다.

 

 

사실 하늘의 범위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어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만일 어떤 사람이, 공간이 하늘보다 백 배나 더 컸으면 하고 하나님께 아뢴다면, 이 무례한 언동에 대해 모든 경건한 사람이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셀 수 없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세계를 창조하시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그와 같은 광란의 소행임에 틀림없다. 저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는 마치 하늘과 땅의 광대한 주위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명으로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독점할 만한 충분한 사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또 이는 마치 6천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매우 진지한 명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시지 않으셨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한하기를 원하시는 울타리, 말하자면 우리가 제멋대로 방황하며 헤매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가두어 두시기를 원하시는 그 울타리 안에 즐거이 머물자.

 

 

 

2. 6일간의 사역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선하심을 보여준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엿새 동안에 완성되었다고 기술한다(창 2 : 2). 이러한 사실에 의해 우리는 일체의 허구를 떠나서 창조의 사역을 엿새로 나누어 일하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끌려가게 되므로, 그 창조 사역을 명상함에 전 생애를 바쳐도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의력이 얼마나 변하기 쉬우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어떤 경건한 사상도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함을 알고 있다. 여기서 또한 인간의 이성은, 신앙에 순종하여 제7일의 거룩하게 구별하여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안식을 배워 환영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과정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한 것처럼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에 모든 선한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만물의 창조 순서에서 인류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무것도 없는 텅빈 땅에 두셨다면, 또는 빛이 있기 전에 그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인간의 복지를 충분히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해와 별의 운행을 조정하시고 땅과 하늘과 물에는 생물로 채우시고 식량으로 풍부한 과실을 맺게 하실 때에, 앞을 내다보시며 열심히 일하시는 한 가족의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셨다. 비록 나는 여기에 대해 간단히 말했지만  이 문제를 보다 더 신중히 생각하기만 한다면, 모세가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확실한 증언이며 사신(使臣)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앞서서 모세는 하나님의 본질뿐만 아니라 그의 영원하신 지혜와 영에 대해서도 말했으며 또한 모세가 이를 말한 것은 분명한 형상으로 자신을 인식시키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고자 한다.

 

 

 

(천사. 3-12)

 

3.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충분히 논하기 전에 먼저 천사에 관한 것을 잠시 언급해야 하겠다. 확실히 모세는 일반 대중의 무지에 고려하여, 창조의 역사 중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그가 천사를 하나님의 봉사자로 소개했을 때, 저들이 수고와 직분을 바쳐 봉사해야 할 분이 바로 저들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모세는 통속적인 방법으로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저작 첫머리에서 천사를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넣어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은 성경이 여러곳에서 천사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명백히 또는 확실히 가르치지 못하게 막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한 결코 그렇게 훌륭하고 고상한 표본이 생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교리는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 데 매우 필요하다. 천사의 성질의 탁월성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기 때문에, 만일 천사를 한 분 하나님의 권위 밑에 예속시켜 억지로 그와 같은 지위에 처하도록 강요한다고 하면 그것은 천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천사들은 신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되었다.

 


마니(Mani) 역시 자기 일파와 함께 일어나서 스스로 만들어 낸 두 원리, 즉 하나님과 마귀를 제기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선한 것들의 기원이라고 하고, 악한 성질의 창시자는 마귀이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광란에 미혹된다면 우주 창조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영광은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특성은 영원성과 자존성 - 즉, 스스로 존재하는 것 -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속성들을 마귀에게 돌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귀를 하나님의 칭호로 장식해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며 저항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그러한 주권이 마귀에게 주어진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니교도의 유일한 기초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 우주에 어떤 악한 성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정통 신앙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탄의 부패와 악의, 혹은 여기서부터 나오는 죄는 본성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부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와 의의 예증을 보여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왜곡된 거짓사상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시야가 미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높이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니케아 신경에서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라고 부르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쓸데없는 무익한 사색에 빠짐으로써 독자들이 신앙의 단순성에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도록, 경건의 규범이 명령하는 그 한계를 지키도록 계속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성령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항상 우리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나 덕을 세우는데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든가 혹은 가볍게 또는 대충 그것들을 다루실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기꺼이 단념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창조와 천사의 직능. 4-12)

 

4. 우리는 천사에 대하여 추상적 사고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임명받은 하나님의 봉사자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시 103 : 20-21). 천사들의 창조된 시간과 순서에 대해 무슨 논쟁을 일삼는 것은 열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악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모세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 : 1)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별들과 유성들 이외의 다른 종류의 천군들이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열심히 묻겠는가? 이 이상 더 길게 논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모호한 문제에 대하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도록 겸손과 진실에 관한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더우기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명상하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하며, 호기심에 빠지거나 무익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용없는 문제들이 아니라 건전한 경건과 자기에 대한 경외, 참된 신뢰, 그리고 성결의 의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원하시므로, 이러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참으로 현명해지기를 원한다면, 쓸모 없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천사의 성질, 계급, 수에 대하여 가르치는 그 공허한 사색을 떠나야만 한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문제에 더 집착하고 그러한 일에 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시하신 방법을 따르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말자.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교훈으로 만족하고, 그가 일깨워 주신 그 전적으로 공허한 사변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이를 몹시 증오하게 될 것이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어떤 사람이든간에 하늘의 천사계급(Celestial Hierarchy)이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매우 교묘하고 예리하게 논하였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좀더 엄밀히 검토해 보면 그 대부분이 서툰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며 유익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 저자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눈으로 실제로 본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고후 12 : 2) 바울도 그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기가 본 그 은밀한 것을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고후 12 : 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리석은 지혜를 버리고 주께서 천사에 대하여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바를 성경의 그 단순한 교훈 안에서 검토하도록 하자.

 

 

 

5.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천사는 하늘의 영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봉사와 임무를 통하여 자신이 작정하신 바를 모두 수행케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시 103 : 20-21). 이와 같이 하여 이 명칭이 천사들에게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기 위하여 천사들을 중재(仲裁)의 사자(使者)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는 다른 명칭들도 또한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나왔다. 그들이 "천군"이라고 불리는 것은(눅 2 : 13) 호위병처럼 왕을 에워싸 왕의 위엄을 장식하며 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병들처럼 지휘관의 신호에 항상 주의를 집중하여 언제라도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을 지휘관의 신호만 떨어지면 즉시 일에 착수한다.

 

 

아니 이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선포하기 위해 다른 선지자들도 그의 보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지만, 특별히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대 위에 오르실 때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 7 : 10)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권능과 능력을 놀랍도록 발휘하시며 선언하시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저들은 권세라고 불린다(엡 1 : 21; 고전 15 : 24). 하나님은 세계에서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시고 집행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정사(政事), 때로는 권세, 때로는 주관하는 자로 불린다(골 1 : 16; 엡 1 : 21; 고전 15 : 24). 마지막으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또한 보좌라고 불리기도 한다(골 1 : 16). 그러나 이 마지막 명칭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또 다른 해석이 있는데, 이것은 동등하게 적합한 해석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천사의 사역의 고귀함을 높이기 위해 이 명칭을 제외하고 앞의 명칭들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적 위엄의 임재를 특별히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사용하신 이 기구들을 존경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더우기 그들은 한 번 이상 신들이라 불려졌다(시 138 : 1). 이렇게 불려진 이유는, 그들의 사역에 있어서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마치 거울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창 18 : 1), 야곱(창 32 : 2,18), 모세와 다른 사람들(수 5 : 14; 삿 6 : 14; 13 : 10,22)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성경의 언급에 대하여 고대 교회의 저자들은 그 사자가 바로 그리스도였다고 해석하였는데,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자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더욱 자주 "신들"이라는 명칭이 그 모든 천사들에게 적용된다(창 22 : 11-12). 그것을 무슨 신기한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왕들과 통치자들이 지고하신 왕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라고 해서 그들에게 존영(尊荣)이 주어진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이유에서 그 존영은 마땅히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한층 더 풍부히 빛내는 천사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6. 신자의 보호자이며 도움을 주는 자로서의 천사

 

그러나 성경은 위로와 신앙을 강화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교훈에 강조점을 둔다. 즉, 천사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분배자요 관리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천사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밤을 새우고 우리를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으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고 따라서 어떠한 재앙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아 준다고 상기시킨다. 성경의 다음 두 구절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첫째 말씀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둘째 말씀은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즉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 : 11-12)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말씀이요,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 34 : 7)라는 말씀은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상의 두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키기로 하신 자들의 보호를 천사들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의 천사는 도망자 하갈을 위로하고, 그녀의 여주인과 화목하기를 명령하였다(창 16 : 9).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에게, 천사가 그의 여행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창 24 : 7).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지금까지 자기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신 주의 사자가 그들을 번창케 해 주시기를 기원하였다(창 48 : 16).

 

이와 같이 천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阵)을 보호하도록 명령을 받았다(출 14 : 19, 23 : 20).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셨을 때에는 언제나 천사들을 사용하여 원수에게 보복할 자들을 일으키셨다(삿 2 : 1, 6 : 11, 13 : 3-20). 간단히 말하자면 이 이상 더 다른 실례를 열거할 필요가 없고, 다만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섬겼으며(마 4 : 11), 그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와 함께 있었다(눅 22 : 43)는 점을 말해 두고 싶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렸으며(마 28 : 5-7; 눅 24 : 5), 그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해주었다(행 1 : 10). 이와 같이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우며, 우리를 해롭게 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보복을 수행한다. 성경에서 본 대로, 하나님의 사자는 예루살렘을 그 포위에서 건져내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185,000명을 쳐서 죽였다(왕하 19 : 35; 사 37 : 36).

 

 

 

7. 수호 천사들

 

그러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개개의 천사가 그들 각자에게 지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감히 단언할 수 없다. 다니엘이 바사인들의 천사와 헬라인들의 천사를 소개할 때(단 10 : 13,20, 12 : 1), 특수한 천사들이 왕국과 지방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그는 명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천사들이 항상 성부의 얼굴을 뵈옵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마 18 : 10), 이것은 어린이의 안전을 위탁받은 어떤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그들 각 사람에게 자기를 보호하는 특수한 천사가 있다고 단정해야 할지에 대하여는 나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주장해야 할 것은, 한 천사만이 우리 각자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천사가 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한다고 했는데, 기뻐하는 자들이란 사실 모든 천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눅 15 : 7).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 16 : 22)라는 말씀 역시 많은 수의 천사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엘리사가 특별히 자기를 위해서 지정된 많은 불병거를 자기 사환에게 보여 준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왕하 6 : 17).

 


다른 구절보다 한층 더 분명하게 이 점을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하나 있다. 즉,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형제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두드렸을 때 형제들은 두드리는 자가 베드로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천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행 12 : 15). 이것은, 각 신자에게는 그들을 지켜주는 천사가 각각 따로 있다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생각되어진 듯하다. 그러나 천사들 중 어느 한 천사가 베드로를 돌보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 천사가 베드로의 영원한 수호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데 우리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일반 대중들은 두 천사, 곧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있다고 상상하고는 그것이 마치 별개의 특성인 것처럼 각자에게 예속시킨다. 그러나 알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열심히 탐구한다는 것은 실로 무가치한 일이다. 모든 천군 천사가 자신의 안전을 계속해서 지켜준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한 천사가 자신의 특별한 수호자로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한 천사에게만 국한시키는 자들은 저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온 회원들에게까지도 큰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를 사방에서 후원하며 보호하는 천군들과 함께 보다 더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것을 무익한 약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8. 천사의 계급, 수, 모양

 

천사의 수와 계급을 감히 결정짓는 자들은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미가엘을 가리켜 "대군"이라 부르고(단 12 : 1) 유다가 그를 "천사장"이라고 부른 것(유 1 : 9)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도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심판자리에 모으는 자가 바로 천사장이라고 말하였다(살전 4 : 16; 참조, 겔 10 : 5). 그러나 누가 이러한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천사들의 존귀의 정도를 결정짓고 각 천사들을 그 칭호로 구별지으며 그 위치와 지위를 각자에게 배정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두 이름, 곧 미가엘(단 10 : 21)과 가브리엘(단 8 : 16; 눅 1 : 19,26) 그리고 토비트의 역사에서 이에 하나를 더 가한다면 제3의 칭호(라파엘)가 있는데(토비트 12 : 15), 이 명칭들은 그것들을 갖고 있는 의미로 보아 우리의 능력의 약함 때문에 천사들에게 적용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문제를 미결로 남겨 두기를 원한다.

 


천사의 수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 : 53)라는 말씀을 듣고, 다니엘로부터는 그 천사의 수가 "천천이요……만만이며"(단 7 : 10)라는 말을 듣는다. 엘리사의 사환은 "불병거가 산에 가득함"(왕하 6 : 17)을 보았으며, 천사들이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시 34 : 7) 있다고 기록된 것은 그 수의 막대함을 의미한다.
영들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의 이해력의 정도에 맞추어 그룹이나 스랍이라는 이름으로 천사들이 날개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단 유사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는 마치 번개가 하늘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더우기, 천사의 수와 계급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계시를 알게 될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해 두자. 그러므로 너무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든가, 너무 확신 있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9. 천사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다

 

그러나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는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즉, 천사는 "부리는 영(靈)"(히 1 : 14)이며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의 봉사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또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남은 일들을 수행하신다는 것 등이다. 고대 사두개인들은 천사라는 말을,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무하시는 충동이나, 또는 그가 내뿜는 능력의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행 23 : 8).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생각은 성경의 여러 증거와는 매우 반대되는 것으로, 어떻게 그런 유(類)의 무지가 그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 곧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  (계 5 : 11)이며,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 : 53)라고 말한 구절, 그들이 기뻐한다는 구절(눅 15 : 10), 손으로 신자들을 붙들며(시 91 : 12; 마 4 : 6; 눅 4 : 10-11) 신자들의 영혼을 안식처로 인도하며(눅 16 : 22),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다고 한 구절(마 18 : 10),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들에 대하여는 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외에 천사는 실질적인 실체를 가진 영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논증하는 구절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곡해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율법이 천사들의 손으로 전해졌다고 한 스데반과 바울의 말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행 7 : 53; 갈 3 : 19).

 

 

이와 마찬가지로 피택자들이 부활 후에는 천사와 같이 될 것이며(마 22 : 30), 심판의 날은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마 24 : 36), 그날에 주님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마 25 : 31; 눅 9 : 26)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딤전 5 : 21) 자신의 훈계를 지키도록 디모데에게 명령한 바 있거니와, 그가 이때 의중(意中)에 둔 천사는 실체가 없는 성질이나 영감이 아니라 실재의 영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보다 더욱 뛰어나시다는 것(히 1 : 4), 세계는 천사들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는 것(히 2 : 5), 그리고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히 2 : 16) 등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천사들이 축복받은 영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가 그들에게 적절하다고 이해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동서(同书)의 저자는 신자들의 영혼과 거룩한 천사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소집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히 12 : 22-23).

 


더우기 우리가 이미 인용한 여러 구절들에서는, 어린아이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오며(마 18 : 10), 그들의 호위로 우리는 항상 보호를 받게 되고(눅 4 : 10-11), 그들은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고(눅 15 : 10), 그리고 교회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여러 모양의 은혜에 놀라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경배한다고 하였다(히 1 : 6). 천사들이 자주 사람의 모양으로 거룩한 족장들에게 나타나서 그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들에게서 환대를 받았다는 것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창 18 : 2).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중보자의 위격에서 얻은 탁월성 때문에 천사라고 불렸다(말 3 : 1). 여러 세대 전에 사탄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후 자주 새로이 일어나는 그 어리석고 불합리한 사상에 대비하여 순박한 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점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내게는 좋다고 생각되었다.

 

 

 

10. 신적 영광은 천사들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아직 남아 있는 문제는 천사들이 모든 축복의 관리자요 공급자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미신에 대항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범하기 쉬운 과오는, 어떠한 존귀도 천사들로부터 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것을 천사들에게 돌리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이 여러 면으로 빛을 상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헤아릴 수 없는 존귀가 천사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싸우고 있는 악 중에서 이보다 더 오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천사들을 높임으로써 그리스도를 천사들과 같은 수준에까지 끌어내린 자들과 큰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일체의 축복의 창시자라고 매우 열심히 주장하였다(골 1 : 16,20).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자족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와 동일한 샘에서 물을 긷는 자들에게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확실히 신적 위엄의 광채가 천사들에게서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들을 모두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요한도 계시록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 : 10, 22 : 8-9)는 천사의 대답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천사들을 이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째서 직접 자기 스스로가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신자의 안전을 위해 대비하시며 자비의 은사를 전달하시는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위험을 잘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은 필연성에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사들 없이는 그가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천사들을 그대로 두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을 덜기 위해 저들의 도움을 받으시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약함을 위로하기 위함이며, 이 위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선한 소망을 가지게 하거나 또는 안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사실 주께서 스스로 우리의 보호자라고 선언하신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많은 위험과 그렇게 많은 해로운 것들과 그렇게 많은 종류의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주께서 만일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은혜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셨다면, 우리는 유약하기 때문에 분명히 때로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절망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보호자에게 명령하여 우리의 안전을 보살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옹호와 보호 속에 감싸여 있는 한, 어떠한 위험이 닥쳐와도 우리는 모든 해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순수한 약속을 받고서도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 : 1)하고 찾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친절로 우리의 이 잘못을 고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위대한 은총을 무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엘리사의 사환에게서 우리는 이에 대한 실례를 보게 된다. 그는 아람의 군대가 성을 에워싸 피할 길이 없음을 보자 자신과 엘리사가 마치 죽게 된 것처럼 그 마음이 공포로 가득하였다. 이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즉시 사환은 자기와 그 선지자를 보호할 불 말과 불 병거, 즉 무수한 하나님의 사자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왕하 6 : 17). 이에 힘을 얻은 사환은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만 해도 보기만 해도 거의 절망할 것 같았던 그 원수들을 대담하게 경시할 수 있게 되었다.

 

 

 

12. 천사때문에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천사의 직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모든 의혹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소망을 더욱 더 굳게 확립하는 데 목표를 두기로 하자. 실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돕는 자들을 마련해 두신 것은, 무수한 원수들이 마치 주의 도우심보다 우세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 : 16)고 한 엘리사의 말에서 위안을 찾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더욱더 가까이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 세우신 천사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원조자로 바라보고 부르며 선포하도록 천사들이 그 손으로 우리를 똑바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께 붙들어 매어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우리의 몸을 맡기며 헌신하게 하여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만군의 주께서 서 계시는 사닥다리로 사람을 찾아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야곱의 환상에서 기술된 것을 우리는 마음에 담아 깊이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창 28 : 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 : 51)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만 천사들의 사역이 우리에게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은 천사의 보호를 받으면서도(창 24 : 7) 천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께 위탁하고 기도하며, 아브라함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베풀어주시도록 간구하였던 것이다(창 24 : 1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천사와 나누기 위해 천사들을 자신의 능력과 선하심의 사역자로 삼은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우리의 신뢰를 천사들과 자신이 나눈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자신의 도우심의 사역자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자 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자비심을 더욱 베푸시도록 할 목적으로 천사들에게 경배하는 저 플라톤 철학을 물리쳐야 한다. 미신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우리 종교에 끌어들이려 했고 또 오늘날까지도 굽히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마귀. 13-19)

 

13. 성경은 원수와 대항하도록 우리를 미리 무장시켜 맞서게 한다

 

성경이 마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의도는, 모두가 우리들을 깨우쳐서 저들의 간교한 술책과 계략을 경계하며 따라서 이들 강력한 원수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있고 강한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탄이 "이 세상 신"(고후 4 : 4), "이 세상 임금"(요 12 : 31)으로 불리고, "강한 자"(눅 11 : 21; 참조, 마 12 : 29),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엡 2 : 2), "우는 사자"(벧전 5 : 8)로 언급되는 것은,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한층 더 주의하고 경계하며 마귀와의 싸움을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가끔 명백한 말로 기록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 : 8)라고 말한 후 곧 이어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 : 9)는 권고를 덧붙이고 있다.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 : 12)고 경고한 후, 그렇게 크고 그렇게 위험한 싸움을 싸우는 데 적합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명령하였다(엡 6 : 13이하). 우리는 원수가 가혹하게 우리를 위협한다는 것을 미리부터 경고 받아 왔다. 이 원수는 무모할 정도로 대담하며, 전투적 용맹을 가진 자이며, 가능한 모든 무기를 가졌으며, 전술에 노련한 자의 화신(化身)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우리는 부주의와 무기력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다시 불붙는 용기를 가지고 전투에서 우리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투는 죽을 때에야 끝이 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격려하여 인내하도록 하자. 실로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자각하고, 무엇을 시도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권고와 힘과 용기와 무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14. 사악함의 영역

 

더우기 성경은 이 싸움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더욱 자극하며 격려하기 위해, 우리와 싸우는 원수의 수가 하나 둘 하는 소수가 아니라 군대이라고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도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놓였다고 성경은 말한다(막 16 : 9; 눅 8 : 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내어쫓긴후에 악한 귀신에게 다시 그 장소를 허락해 주면 그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텅 빈 장소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12 : 43-45). 실로 어떤 사람은 "군대" 마귀에 붙잡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눅 8 : 30). 그러므로 이상의 여러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무수한 원수들과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의 소수를 멸시하여 싸우기를 게을리하며, 혹은 가끔 휴전이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태만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나 마귀에 대하여 자주 단수로 언급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통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단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처럼, 불신앙의 무리들과 불경건 그 자체는 그들에게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그들의 왕과 함께 묘사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 : 41)고 말씀하셨다.

 

 

 

15. 화해할 수 없는 투쟁

 

마귀는 어디서나 하나님과 우리의 대적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틀림없이 이 사실은 마귀와의 부단한 싸움에 우리의 마음을 불붙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큰 관심사로 여긴다면 마땅히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기울여 이를 소멸시키려는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증언하는 일에 우리가 열심히 낸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자와 타협할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파괴하려고 함정을 파는 자와 화목해서도 안 되고 휴전을 해서도 안 된다. 창세기 3장에는 그러한 자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박탈하며 인간을 파멸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1-5절).

 

 

복음서의 기자들도 역시 그를 가리켜 "원수"라고 불렀으며(마 13 : 28,39), 영생의 씨앗을 부패케 하기 위해 가라지를 뿌리는 자라고 기술하였다(마 13 : 25). 요컨대,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거짓말장이요"(요 8 : 44)라고 하신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는 그의 모든 행위에서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고 흑암으로 빛을 가리며 인간의 마음을 오류에 빠지게 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며 논쟁과 싸움을 일으켜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하며 인류를 자신과 함께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그는 본래 타락하고 사악하며 악의로 가득찬 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공격하는 데 열중하는 그 성질은 극도로 타락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 : 8)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실로 요한은 마귀를 모든 흉악과 불의의 창시자요 지도자이며 설계자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6. 마귀는 하나님 창조의 타락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마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의 본성에 속하는 이 사악함은 창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타락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에게 있는 정죄받아야 할 것들은 모두가 다 반역과 타락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가 현재와 같은 상태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전적으로 관계없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주님께서도, 사탄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진리에 서지 못하기"  (요 8 : 44)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마귀가 진리에 서지 못한다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확실히 한때는 진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부름으로써, 전적으로 마귀 자신에게 돌려야 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지 않도록 하셨다.

 


이상의 사실들은 비록 간단하고 또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위엄을 모든 비방으로부터 옹호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귀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많이 알거나, 혹은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해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마귀의 타락과 그 타락의 원인, 방법, 시기, 성질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성경이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또는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가볍게 언급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유익도 없는 공허한 이야기로 호기심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성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덕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외에는 그 거룩한 말씀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시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필요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마귀의 성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즉 악마는 창조시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타락하여 자멸하였으며, 남을 파멸시키는 파멸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알아서 유익하기 때문에 베드로와 유다는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벧후 2 : 4),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 : 6)을 용서하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택함 받은 천사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딤전 5 : 21),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버림받는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7. 마귀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있다고 하는것에 관하여 우리가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이 없이는 사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욥의 역사를 읽어보면,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타났으며(요 1 : 6, 2 : 1),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어떠한 악도 감히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욥 1 : 12, 2 : 6). 또, 이와 같이 아합이 속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사탄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위탁을 받아 자기 일을 수행하였다(왕상 22 : 20-22). 이러한 이유에서 사탄은 역시 사울을 괴롭힌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가 그 불경건한 왕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 채찍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삼상 16 : 14, 18 : 10). 그리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께서 "벌하는 사자들"을 통하여 애굽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시 78 : 49). 이상의 개개의 실례에 따라 바울은 불신자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다(살후 2 : 11). 그러나 조금 앞에서는 이를 사탄의 역사라고 불렀다(살후 2 : 9; 참조, 고후 4 : 4; 엡 2 : 2).

 

 

그러므로 사탄은 분명히 하나님의 권능하에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를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께 반항한다든가 사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 반항과 반대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사탄의 의지나 노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본래 사악한 존재여서, 조금도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아주 완강하게 불순종하며 전적으로 반항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격렬하게 또 고의적으로 반항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악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악함이 마귀를 재촉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신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능의 고삐로 마귀를 잡아매고 제지하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창조주에게 순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촉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8. 승리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악령들을 굴복시키며 그들의 활동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신자들과 싸우게 하심으로써 신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기습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을 깨뜨리게 하시고 그들을 싸움으로 몰아 넣으시고 자주 피곤하게 만드시며 패배시키게 하며, 공포에 떨게 하시며, 때로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게도 하신다. 그렇지만 악령들은 신자들을 정복하지도 못하며 박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악령은 불경자들을 정복하여 끌고 다니며, 그 영혼과 육체를 학대하고, 노예처럼 그들을 능욕하여 갖가지 수치스러운 행위를 일삼게 한다. 신자들은 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불안을 갖게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권고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 : 2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 : 8-9). 바울은 자기의 교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후 12 : 7)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도 이런 종류의 싸움을 면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훈련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창 3 : 15)은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사탄에게 정복된다거나 압도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자주 근심에 빠지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심한 타격을 받아 쓰러지기도 하지만 후에 다시 일어난다.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한 개인의 행위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복수로 다윗이 한때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되어, 사탄의 선동으로 인구 조사를 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삼하 24 : 1). 그리고 바울은 비록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는 자들에게도 아직 사죄의 소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딤후 2 : 25-26).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위에 언급한 약속은 우리가 계속 싸워야 할 이 세상에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며 이 싸움이 끝난 후 그 약속이 성취된다고 말하였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 : 20)고 그는 말하고 있다. 실로 이 승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항상 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상 임금은 주님께 대하여 아무런 관계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요 14 : 30). 더우기, 그 승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우리에게는 부분적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완성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 : 18)고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질 때에 사탄과 그의 권세는 무너지게 된다. 제자들이 그들의 전도의 효력에 대하여 보고했을 때, 이 답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하셨다. 주님께서는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 : 21-2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정복하셨으며(히 2 : 14), 교회를 해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모든 세력을 타파하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더라면, 교회는 매순간 몇백 번이고 파멸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약하고 사탄의 광포의 세력은 그렇게도 강한데, 만일 우리의 인도자의 승리를 의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그 다양하고 끊임없는 공격에 대항하여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영혼에 대하여는 사탄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단지 자기 백성의 수에 넣지 않기로 하신 불경자들과 불신자들만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추방당할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 세상을 소유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참조, 눅 11 : 21). 그는 또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고후 4 : 4)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엡 2 : 2)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일로서, 불경자들은 모두가 다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의 복수에 대항하는 사자들에게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 종속되었겠는가? 마지막으로, 저들은 저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한다(요 8 : 44). 왜냐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처럼, 불경자들은 타락하여 사탄의 형상을 지님으로써 당연히 그의 자녀로 인정되기 때문이다(요일 3 : 8-10).

 

 

 

19. 마귀는 어떤 상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우리는 위에서 이미 거룩한 천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으키는 선한 영감 혹은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그 천박한 철학사상을 반박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육신에서 오는 악한 감정 혹은 마음의 불안이 바로 마귀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반박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반박을 간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적지 않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저들은 본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유 1 : 6) "더러운 귀신" 또는 변절한 천사(마 12 : 43)라고 불려졌는데, 이때 그 이름은 충동이나 마음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이해를 구비하고 있는 마음, 혹은 영(靈)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의 자녀와 비교하였는데(요 8 : 44; 요일 3 : 10), 만일 이 "마귀"라는 말이 악한 영감 이상의 뜻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그것은 무의미한 비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요한은, 보다 명백한 말씀을 첨가하여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 : 8)고 하였다. 유다 역시 "천사장 미가엘이……마귀와 다투어"라는 말씀에서, 악하고 배반한 천사를 선한 천사와 대립시켜 놓았다(유 1 : 9). 이것은 사탄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욥의 기사와 일치한다(욥 1 : 6, 2 : 1). 더우기 그 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구절들은, 마귀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느끼기 시작하여 부활시에는 특별히 느끼게 될 형벌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 : 29)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 : 41).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 : 4).

 


만일 마귀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가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그를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의해 지금 그들이 고통과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등의 표현들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 그러나 이 점은 주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지만 동시에 신기한 것만을 좋아하는 공상가들에게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증언은 저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의도한 바를 다 완수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불안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저들 자신과 저들보다 한층 더 단순한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그러한 현혹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오류에 빠지고서도 원수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원수를 저항하는 일에 태만하거나 부주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창조에 관한 영적 교훈. 20-22)

 

20. 창조의 위대함과 풍요로움

 

한편 가장 아름다운 이 극장에서 도처에 표현된 하나님의 사역을 경건하게 즐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말자. 왜냐하면,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 어디를 보나 눈에 띄는 것은 다 하나님의 사역임을 기억하는 일,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창조하셨는가를 경건히 명상하여 생각하는 일, 이러한 것들은 신앙을 위한 으뜸되는 증거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연의 질서에 있어서 첫째가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데 유익이 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모세가 간단하게 기록하였으며(창 1, 2장) 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특히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와 같은 사람들이 상세하게 설명한 우주 창조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창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늘과 땅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 이 권능으로 모든 종류의 생물과 무생물을 산출하셨다는 것, 놀라운 계열에 따라 각종의 무수한 사물들을 구별하셨다는 것, 각기 종류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성질을 주시고 임무를 정하시며 처소와 위치를 지정해 주셨다는 것, 만물은 부패하게 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종류가 마지막 날까지 보존되도록 그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 등을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방법으로 어떤 피조물들을 배양하시되 끊임없이 그들에게 새 활력을 넣어 주시고 또 어떤 피조물에게는 번식력을 주시되 그것들이 죽을 때 그 종(种) 전체가 멸절되지 않도록 하시며, 천지를 놀랍도록 장식하시되 극도로 풍부하고 극도로 다양하고 극도로 아름답게 하여 마치 가장 정교하고 동시에 가장 풍부한 장식으로 꾸며지고 채워진 웅대하며 화려한 저택처럼 하셨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처럼 화려한 미와 많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표본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주 창조를 자세히 다루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몇 가지 점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독자들에게 경고한 대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우주에 대한 기사를 충실하게 또는 성실하게 기록한 모세와 그외 사람들에게서 한층 더 충분한 지식을 찾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을 어떤 목적에 적응시켜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깊이 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대부분 이미 다른 곳에서 다루었으며 따라서 현재의 목적에 관한 것은 두서너 마디로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이 이 우주의 형성에서 어떻게 빛나고 있는가 함을 적절한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그 어떤 미사여구도 그와 같은 위대함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이 거룩한 명상에 몰두해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지혜, 공의, 선하심, 권능의 무한한 풍요함을 조용히 지켜볼 때, 그것들을 단순히 호기심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생각하고 또 진지하고 충실하게 심사숙고하며 계속 그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목적을 가르치는 데 있기 때문에,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생략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독자는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피조물에게서 보여 주신 그 명백한 권능을 아무 생각 없이 잊어버리고 그냥 넘겨 버리지 않는다면, 둘째로 누가 만일 마음에 감동을 받을 정도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배운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라는 것을 이해하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외관상 이 이상 더 아름다운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무수한 별들의 무리를 놀라운 질서에 따라 배치, 배열하시고 서로 어울리게 하신 그 예술가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함을 우리가 생각할 때 비로소 이 법칙의 첫째 부분이 예증된다. 그는 어떤 별들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치를 고정시켜 놓으셨으며, 어떤 별들에게는 한층 더 자유로운 운행을 허용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정된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셨으며, 모든 별의 운행을 조정하여 별들로 하여금 낮과 밤, 달과 해(年), 그리고 계절을 구분하셨고, 우리가 항상 보는 대로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날을 조화롭게 조절하셨다.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되는 것은 그처럼 큰 덩어리를 지탱해 나아가시며 천체를 신속히 운행하는 것과 그와 비슷한 일들을 관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상의 몇 가지 예증만으로도 우주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밝혀 준다. 그렇지 않고 만일 내가 이 문제 전체를 설명하려고 결정하였다면,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수많은 이적,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수많은 증거는 우주에 있는 많은 종류의 사물의 수와 같으며, 실로 크고 작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의 수와 같기 때문이다.

 

 

 

22.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 법칙의 둘째 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만물을 제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큰 은총에서 느끼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조금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창조의 순서를 통해 스스로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창 1 : 31).

 

 

물론 하나님으로서는 창조의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동시에 또는 단숨에 완성하신다는 것이 그런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하시는 것에 비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섭리와 부성적(父性的)인 배려를 보여 주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인간에게 유용하며 유익하다고 미리 아신 것들을 모두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는 이 가장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지 아닌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망은이겠는가? 또한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도 않았을 때 가장 풍부하게 모든 좋은 것들로 마련해 두신 것을 알고서도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언젠가는 우리의 궁핍을 채워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에 떤다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이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힘입어 온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우리에게 예속된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듣는다(창 1 : 28, 9 : 2).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분명히 명목상의 빈 증여(赠与)로 우리를 조롱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녕에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결핍함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부를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분배는 그의 솜씨와 권능으로 된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서 그의 성실한 보호 속에서 양육과 교육을 받고 있는 그의 자녀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축복의 충만함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하고, 하나님께서도 구원에 필요한 것을 우리가 갖지 못한 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완전히 신뢰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며, 우리에게 베풀어진 유익한 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인자하심의 아름다움에 의해 초대되었으므로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섬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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