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사람은 모든 사건과 이야기를 자기 입맛대로만 해석한다.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한다. 성숙한 사람은 입장을 달리해서 볼 줄 아는 눈이 있다. 입장을 달리해서 보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이고, 막힌 곳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예를 하나 더 보자.
형이 성공해서 부자가 되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멋진 자동차를 선물해주었다. 새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알고 지내는 어린아이를 만났다. "아저씨, 새 자동차 사셨네요?" "아니 내가 산 것이 아니고, 형이 선물로 사주었어." "정말 부러워요." "너무 부러워하지마. 너도 장차 크면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을 날이 올거야." 아이가 말했다. "아니예요. 저는 선물받은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자동차를 선물해줄 수 있는 형님이 부러운 거예요. 나도 커서 동생에게 좋은 것을 선물해주는 형이 될 거예요." 무엇을 부러워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는 달라진다. 편협한 사람은 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러나 입장을 달리해서 보는 사람은 더 큰 섬김을 위해 나아가는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어린아이를 교육할 때 너무 해석을 많이 가르치면 안된다. 해석이란 기성세대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해석을 강하게 가르치면, 입장을 달리해서 보는 눈이 죽는다. 유대인들은 12세가 될 때까지 해석을 가르치지 않고 그냥 '이야기'(storytelling)만 반복적으로 전한다. 요셉, 모세, 다니엘의 이야기를 적어도 500번은 듣는다. 그러면 자기가 다니엘인지, 다니엘이 자기인지 혼동이 일어난다. 사자굴에 들어간 것 같은 위기를 맞는다. 해석이 이 상황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힘이 그를 이기게 만든다. 자신이 다니엘이 되어서 사자굴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창의적인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홍해 같은 장애가 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지날 수 없는 길이다. 모세의 이야기로 무장한 사람은 이전의 방법에서 답을 찾지 않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 길을 열어간다. 이것이 교육의 힘이다. 자기 주장만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들어야 한다. 치열하게 입장을 달리해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통합의 힘과 새로운 돌파력은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삼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