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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생은 여행입니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6. 28. 17:59

 

 인생은 여행입니다. 1800년대 중반 자기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고자 여행을 떠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위스 출신의 명망있는 실업가요, 은행가였습니다. 그는 이미 상당한 권력과 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의 상황만으로 만족할수 없었던 그는 타는 목마름으로 재물의 유혹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유럽의 풍운아요, 떠오르는 태양이었던 불란서의 나폴레옹3세를 만나 불란서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유도하고 유럽 대륙의 권력과 부를 재편하여 그 부의 중심부에서 서고싶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불란서로 여행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폴레옹 황제는 이미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전선으로 떠난 것을 알게 됩니다.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행여나 하는 희망으로 전선을 향해 떠났다가 치열한 전투의 장에서 양군의 즐비한 사체와 피흘리는 부상병들의 참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한동안 전장에 남아 동네 사람들과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 며칠후 이 전쟁터를 떠나는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가 한번도 꿈꾸어 보지 못한 새로운 꿈이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적군과 아군을 막론하고 모든 부상당한 군인들이 인간으로 치료받고 돌봄받는 꿈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민족과 인종을 뛰어넘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의 꿈이었습니다. 바로 이 역사의 한 정점이 앙리 뒤낭(Henry Dunant)(1828-1910)이라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국제 적십자 운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이날부터 평화의 마을을 향해 걸어가는 평화의 순례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앙리 뒤낭이 목격한 전쟁터 이상으로 치열한 전장은 인간의 삶의 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금년 한해 우리는 민족적으로 그리고 교회적으로 얼마나 피흘리며 신음하는 고통을 견디어 내는 질곡의 삶의 전선을 겪어 왔는지요? 샬롬은 히브리 백성의 한 맺힌 언어라 할만합니다. 평화 없이 살아온 그들의 역사의 유일한 희망은 샬롬 곧 평화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웃을 만날 때 마다 주고받는 샬롬의 인사는 이스라엘과 매우 유사한 고난의 역사를 겪어온 우리민족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때의 뉘앙스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비단 평화가 이스라엘과 한국인만의 염원일수는 없습니다. 인류역사의 족적에 남겨진 가장 진하고 가장 간절한 염원은 평화를 비는 염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와 환경안에서 추구하는 평화 이상으로 더 진한 우리 실존의 내면이 찾고있는 것도 사실은 평화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샬롬(shalom)은 결코 번역이 쉽지 않은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장 포괄적인 의미를 담아 이 단어를 번역한다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관계속에서 흔들림이 없는 안정됨 혹은 건강한 실존이라 할수 있습니다. 안과 밖으로 나를 둘러싼 모든 관계 사이에서 치유를 경험하고 건강을 회복한 바람직한 삶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모습이 바로 샬롬입니다. 샬롬-이는 바로 우리 영혼의 본향이요, 우리의 인생 길은 샬롬을 찾는 여정인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구도자 단테가 사랑을 잃어버리고 피곤에 찢긴 몸으로 수도원의 닫혀진 문을 두드렸을 때 "누구를 찾습니까?"라는 물음에 "평화를 찾습니다"고 대답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인생여행의 키 워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세가지 단계를 지나는 경험으로 그려집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Peace with God)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화목제물이신 그분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는 그 순간부터 감히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입니다. 이 평화는 때로 염려나 근심으로 위협되지만 감사함으로 기도의 무릎을 꿇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의 마음과 생각이 견고한 평화로 지켜집니다.

이 평화를 배우고 익힌 사람 곧 자기 내면에 흔들림이 없는 평화가 있는 사람들만이 이웃들과 화평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할수 있는 한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해야 한다고 권면 합니다. 우리는 이제 선거이후 민족적으로 치유와 화해가 필요한 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제 민족화해와 지역화해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먼저 평화의 푸른초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도 새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 평화의 새나라를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가정문제를 다룰 때 역기능적 가정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지역교회에 대해서도 역기능적 교회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는 자리에 와있는지 모릅니다. 역기능적 개인들이 모이는 교회에서도 역기능적 요소들을 탈피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는 역 기능성을 극복하고 한 공동체를 순 기능적으로 변신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런 순기능의 공동체를 일컬어 우리는 다른 말로 샬롬 공동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순 기능의 새로운 샬롬 민족 공동체가 되도록 또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샬롬의 영성은 먼저 우리의 내면에서 부터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내면의 평화를 지키며 함께 더불어 평화를 나누는 유일한 처방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깊이만큼 우리의 공동체는 샬롬의 영성을 회복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내에 존재하는 많은 회의시간을 기도시간으로 바꿀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기도의 방법도 한국교회의 트레이드마크인 통성기도 대신에 침묵기도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주의 음성을 듣기 위해 진정 잠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낯선 손님은 침묵입니다. 우리는 침묵을 외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침묵은 우리로 하나님과 독거하는 공간이라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침묵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침묵과 친해지면 우리는 침묵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즐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침묵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는 창조의 공간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침묵은 우리의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는 일체의 소음을 진정시키는 평화 그 자체입니다.

이제 묵은해를 침묵으로 닫고,새해를 침묵으로 열 것을 제안합니다. 침묵의 커텐이 열리면 하늘의 지성소가 보일 것입니다. 거기서 독대하는 하나님-그분의 임재안에서 민족의 비전을 보고 싶습니다. 교회의 내일에 대한 그분의 기대를 듣고 싶습니다. 감히 은혜로 우리를 불러주시고 세워주신 그분의 가슴앞에 모든 염려와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충분히 오래 침묵해 보십시오. 그동안 우리민족과 사회는 충분히 시끄러웠습니다. 너무 많은 말의 성찬이 있었고, 너무 많은 자랑이 있었고, 너무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주님, 새해를 어떻게 시작할까요?" 묻는다면 저는 그분이 틀림없이 "그냥 내 앞에서 잠잠히 할 수 없겠나"하실 것 같습니다.

 

모두 입을 다물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주간만이라도 민족의 침묵주간을 갖고 싶습니다. 민족이 못하면 뜻있는 교회들만이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못하면 뜻있는 우리 몇 사람이라도 그렇게 침묵의 지성소에 모였으면 합니다. 그때 우리는 이 침묵의 성소 한 복판에 서 계신 매우 고요하고, 매우 평화로우며, 매우 침착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내미시는 손을 잡고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길을 떠났으면 합니다. 샬롬의 여행길을.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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