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장로께서 제17대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에 취임하셨습니다. 경하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분이 국민을 섬기는 분이 되신 일은 분명히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이고 축복할 일입니다. 물론 지난 선거에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이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켰다는 일부 주장이나 보도는 정확한 실상은 아닐 듯 싶습니다. 그런 통계나 조사가 발표된 일도 없고 또 그런 기대를 가지기도 어려운 것이 민주 국가의 현실입니다. 물론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명박 후보가 가진 선진화 국가의 비전이 이 시점에서 꼭 필요한 우리 국가의 리더십이라고 믿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 분을 지지한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그런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열망을 입고 그분이 대통령이 된 것이 부분적인 진실이라면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분이 제발 성공한 대통령이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사실 한 역사가가 증언한 것처럼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가장 큰 진실은 우리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는 되풀이 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던 분들 가운데도 이미 기독교인이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가 오늘 그분들을 가르쳐 ‘성공한 대통령’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는 개인적 리더십의 결함도 문제였지만, 주변에 존재하던 소위 기독교인들의 역할의 미숙이나 오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역사의 교훈을 진지하게 학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 대통령 주변에 같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우리는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선의 우선순위를 둔다든가, 혹은 대통령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그분이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접근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면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대통령 주변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이익 분배에 연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권력의 타락이 노출될 때 이것은 또한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타락으로 증언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으로서 같은 기독교인 대통령을 돕는 길은 없겠습니까? 얼마든지 있습니다.무엇보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중보 기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권력자들을 향하여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의 레슨이라고 성경이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가 실천하는 정책과 결정에 대하여 우리는 가족으로서 그분의 가장 따뜻한 비판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판의 필요성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지만 누구도 비판을 즐길 지도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가족의 비판이라면 우리는 훨씬 더 여유 있게 경청하고, 그런 비판을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대통령을 향하여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된 것을 특권적 기회가 아닌 책임의 기회로 수용하여 각자의 삶의 마당을 더 깨끗하고 더 정직하고 더 겸손하게 가꾸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대통령께서도 교회 편들기나 교회 변명해 주기에 신경 안쓰고 나라 살림 챙기는 일에 열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말을 맺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대통령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태도를 잘 반영하는 말이 있다면 ‘불가근 불가원’(가깝지도 멀지도 말것)일 것입니다. 권력의 이익에 관련된 일이라면 우린 철저하게 그분에게서 먼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격려하고 비판하는 일, 그리고 중보하는 일에 관한 한 그분에게서 가까운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지난 월요일 대통령 취임식에 저에게도 초청장이 왔습니다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이 행사가 국민의 행사가 되고 국가의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얼굴은 되도록 적은 것이 좋으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대신 그 시간에 그 분을 위해 중보하기로 했습니다. 기도는 여의도까지 굳이 가지 않아도 할수 있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위해 중보하는 동안 그분은 제 곁에 매우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5년 동안 계속 그분은 제 곁에 가까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공간에 관한 한 저는 그분과 되도록 먼 거리에 있으려 합니다. 그것이 그분을 돕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그분 곁에 물리적 공간을 좁혀 다가서려는 저도 아는 얼굴들이 여기 저기 보여 큰 걱정이 앞서기만 합니다. 저런 사람들은 저 자리에 제발 안 나타났으면 하는 사람들이 자꾸 뉴스에 나타나서 걱정입니다. “주님, 저들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