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 -- 영원한 윤회
A. 왜 힌두교는 비조직적 종교로 발전하였나?
힌두교의 성장은 인도 사회의 성장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다.
힌두교 신자를 지칭하는 힌두(Hindu)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인들이 인더스(Indus)강 유역에 거주하는 아리아인(Aryans)들을 신두(Sindhu)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따라서 힌두라는 단어가 의미했던 것은 인더스강 유역의 아리아인들이었고,
그들의 종교가 힌두교였다.
그러나 아리아인들의 인도아 대륙에서의 세력 확장이 이루어짐에 의해서
힌두화(Hinduisation) 작업은, 아리아 문화와 非아리아 문화가 결합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결과, 힌두라는 단어는 본래의 지역적, 인종적 한계를 넘어
힌두교 신자와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의 구성 요소들을 총칭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힌두와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의 특징을 밀턴 싱어(Milton Singe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들의 생활은 서사시, 전설, 철학과 종교, 예술과 과학의 인상적인 집성체로부터 그 형태와 특성을 취하고 있다.
생활과 예식의 순환은 고대의 의식력을 통해 움직인다.
그들은
마하바라따(Mahabharata),
라마 야나(Ramayana),
바가와따 뿌라나(Bhagavatapurana)의 신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방신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세계관은 우빠니샤드(Upanishad)로 부터 유래한 것이며 ;
그들의 윤리는 바가와드ㆍ기따(Bhagavad Gita), 다르마 샤스뜨라(Dhrmashastra) 및 티루 쿠랄(Tirukkural)에서 유래했고,
그들의 예술의 법칙은 쉴빠 샤스뜨라(Shilpashastra)에서,
그들의 예술은 아유르 베다 (Ayurveda)의 경전에 기초한 것이다.
그들의 세속적 야망은 아르타 샤스뜨라(Arthashastra)에 의해 실제에 적용되고
그들의 정신적 영감은 성시인의 생애와 노래에서 유래한다. >
힌두의 종교적 행위와 사회적 행위는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혼합되어 있으며
그 사회적 제도와 관습 및 가치 등은 힌두교에 기원을 두었거나 종교적 승인을 받은 것들이다.
따라서 하나의 힌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특정 종교에 입교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즉 , 힌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과는 별도로, 힌두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 또 그 문화의 속성까지를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힌두교가 다른 종교와 같이 뚜렷한 입교 의식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신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사회와의 밀착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인도 사회에서 힌두라는 명칭은 한 개인의 소속과 정체를 나타내는 상징이 된다.
힌두들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종교를 느끼고 종교의 굴레에서 맴돌며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
힌두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힌두교의 신자로서의 자격 뿐만 아니라
특정 카스트(Caste)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까지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공동체내 의 동질성과 결속력에 개인은 쉽게 동화할 수 있는 것이다.
힌두교에는 일정한 도그마(Dogma)나 신앙 형태가 없다.
어떤 의미로는
'힌두교에는 세계의 모든 종교들이 지닌 속성들이, 다른 형태, 다른 명칭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힌두교는 다른 종교의 교의에 대해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일은 드물며
다른 종교의 교리도 하나의 진리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관대한 경향을 나타낸다.
이런 힌두교의 속성은 이것을 非배타적인 종교로 오해하게 할 위험이 있다.
이처럼 힌두교와 같이 독특한 배타성을 계발한 종교는 없다.
유대교의 인종적인 배타성과는 성격이 다르게 힌두교는 그 신자를 선별하는데 있어서 선천적인 자격을 요구한다.
카스트에 속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힌두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힌두교의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다.
힌두교 신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非힌두인이 있다면,
그는 내세에 힌두 가정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행운을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힌두교를 ‘바로 이것이다.’하고 단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힌두교는 ‘모호하고 정형이 없으며 다방면적이고 모든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이고 심지어는
‘동화력(同化力)있는 마술’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힌두교는 다른 종교의 도전에 대해 독특한 방법으로 대처한다.
수많은 신조와 신앙 형태를 가진 힌두교로서는 외래 종교가 주장하는 가르침이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은 박띠(Bhakti) 사상과 유사한 것이고
평등의 정신과 유사한 개념은 고대 경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힌두교의 주장이다.
또 기독교의 예수(Jesus Christ)나 이슬람교의 마호멧(Mahommad)도 일단 힌두 신학자의 손을 거치면
비슈누(Vishnu)신의 화신 중의 하나가 되거나 3억 3천만에 달하는 神들 중의 하나로 변화하게 된다.
이와 같이 힌두교는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함으로서 외래 종교의 가치를 약화시킨다.
다른 종교가 외치는 교리는 힌두교의 그것과의 공통점을 찾고
새로운 개념은 힌두적인 관점에서 흡수하여 외래 종교를 별다른 가치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외래 종교가 힌두교에 끝내 포용되지 않을 경우,
힌두교는 그 종교의 신자들을 사회의 예외적인 집단으로 고립시켜 버린다.
따라서 非힌두들은 인도의 사회 내에서
독립된 자급 자족의 집단으로 발전하거나 또는 여러 형태로 가해지는 사회적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한다.
B. 힌두교의 세계관
동양의 종교가 그렇듯이 힌두교 역시 종교와 철학 사이의 경계가 애매하다.
힌두교의 종교적 관점은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과 공통점이 많다.
힌두교가 가르치는 종교적 목적 달성이란 지적 참여를 통한 정신적 탐구로 간주되어질 수도 있다.
따라서 신과 인간의 관계라는 궁극적인 문제가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계시에 의해서 해결되기 보다는
끝없는 사유와 자기 개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힌두교는 보고 있다.
그 세계관에 있어서도 힌두교는
신 중심의 신앙을 고집하거나 계시나 성령에 의해 쓰여진 성전에 입각한 것이 아니고
소위 깨달은 자들이 제시하는 자연적인 지혜에 의존한다.
힌두교는 그 철학적 사유를 ‘존재 (有)’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苦’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다.
힌두교의 철학적 사유는 이 ‘苦’에 대한 진상의 해명으로 일관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이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왔다.
인생도 ‘苦’, 육신도 ‘苦’, 물질도 ‘苦’이다.
따라서 힌두교에서는 이 세계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결국 인간의 삶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저 꿈을 쫓다가 살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하거나
혹시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을 누릴 여유가 없이 죽는다는 것이 힌두교의 주장이다.
또 인간 뿐만 아니라 신들의 삶도 환상이고 전 우주 진행의 기반이 되는 실재적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감각적 존재의 수레 바퀴에서 벗어나
영원한 침묵의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만이 가치있는 일이다.
힌두교의 세계관은 순환적인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계는 깔빠(Kalpa)의 반복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즉, 각 깔빠는 황금 시대, 은 시대, 동 시대 그리고 철 시대로 나뉘어지며 하나의 깔빠가 끝나면 새로운 깔빠가 시작된다.
이 깔빠를 움직이는 힘은 리따(Rita)이다.
리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사물의 과정(Course of things)’이 된다.
자연의 규칙을 의미하는 것이다.
리따는 존재의 행위의 규칙성이며 자연계 불변의, 보편적이고 내재적인 정의이고, 신마저도 이 리따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리따의 인간적 표현인 다르마(Dharma)를 준수하여
인간의 궁극적 목표인 목샤(Moksha)에 도달해야 한다고 힌두교는 가르친다.
목샤는 힌두교에서 인간이 목표로 하는 최고의 가치이며
욕망과 고통으로부터의 정신적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며
육체적으로는 영겁의 까르마(Karma)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따라서 힌두교의 세계관에서 진보의 이상은 개인의 해탈을 의미한 것이지 사회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힌두교는 인간의 영적 해방을, 현세적 복지나 발전보다 우위에 두는 것이다.
힌두교의 세계관은 많은 학자들이
힌두교를 내세 지향적이고 非사회적인 종교이며 현세적 진보에 적합하지 않은 종교로 규정하게 만들었다.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인도의 세계관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부정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세계와 인생 긍정의 정신에 의해 고무되는 활동적인 사회 윤리를 이끌어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 막스 베버(Max Weber)도
힌두교가 강조하는 ‘내적 정신’은 내세적이고 非합리적이며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회 진보를 위해 요구되는 긍정적인 사회 윤리를 생산할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이 전적으로 부당한 것은 아니지만,
일관된 교권 체계가 없는 힌두교에는
인간과 신 그리고 우주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자유스러운 신앙 형태가 허용된다.
또 순환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현세를 보존하고 좀 더 안락하게 만들기 위한 많은 제도와 관습이 산출되어 왔었다.
C. 다르마와 까르마 - 쌈싸라
다르마는 힌두교와 인도 철학의 중심 개념이다.
고대의 경전에서, 다르마는 약 16가지의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① 윤리적 의무 ② 법률 ③ 자연 법칙 ④ 관습과 가족법 ⑤ 종교적 의무 등이다.
다르마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인간의 사회적 의무를 규정한 다르마는,
비록 내세의 행복을 위한 현세의 의무라는 종교적 단서가 붙어 있지만
어디까지나 현실 사회의 안정과 조화를 목표로 한다.
힌두교의 해석에 따르면,
개인의 카스트는 전생의 까르마에 의해 결정되고
각 개인은 현세의 카스트에 알맞은 구나(Guna)를 지니고 태어나며,
내세의 카스트는 현세에 다르마를 어떻게 준수했는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또 힌두교는 인간이 최고 목표인 목샤에 도달하는데는, 단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브라만을 제외한 나머지 계급들이 현세에 목샤에 도달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고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다른 계급들은 브라만으로 환생하는 행운을 기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힌두는 내세에 보다 나은 카스트로 향상되기 위해서
까르마-쌈싸라의 냉엄한 법칙에 순종하고 자신의 구나와 다르마에 알맞는 태도를 지녀야만 하는 것이다.
까르마는 원래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점차
행위의 인과, 직업의 종류, 책임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어지게 되었다.
카스트와 연관지워 까르마를 이야기할 때는 행위의 인과 그리고 직업의 종류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불교에서는 까르마를 업(業)이라고 한다.
쌈싸라는 윤회를 뜻하는 것으로 까르마와 결합하여 힌두교의 가장 보편적인 사상이 되었다.
즉, 인간은 행위의 인과에 의해서 윤회가 계속되며 이것을 벗어나 목샤에 이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각 개인의 카스트는 인과와 윤회의 법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어떤 개인도 이것에 불만을 갖거나 자신의 카스트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힌두교는 궁극적으로 목샤를 약속하고 그것에 이르는 길로서 다르마를 제시한다.
인간 생활의 모든 면에 연관되어지는 다르마는
까르마-쌈싸라의 냉엄한 법칙에 의해 뒷받침된다.
다른 종교와 비교해 볼 때, 힌두교는 신자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보다 사실적인 방식을 채택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약속하는 천국은 그저 유토피아(Utopia)적인 것으로서 간접적인 경험의 기회도 제공하지 않는 반면,
힌두교는, 그 진위의 여부는 차치하고, 간접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브라만은 수드라를 보고 내세에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고
한 사람의 수드라는 브라만에게서 먼 내세에 목샤에 접근한 자신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다.
힌두교는 흔히 ‘생활의 방식’이라고 불리울 만큼, 그 신자의 생활 전반을 장악할 수 있으므로
사회와 분리된 조직체인 교회를 설립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힌두교의 신자에 대한 통제의 형태는 유기체적인 성격을 띈다.
사제 계급인 브라만들도 수 백개의 카스트로 나뉘어져 있으며,
동일한 카스트에 속한 브라만들 사이에서도 교의의 해석이 일관성 있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반 신자들에게도 정기적으로 사원에 참배해야 한다는 의무가 없으며
특정한 브라만에게만 종교 의식을 위임해야 하는 규정도 없다.
그러므로 통일된 교권 체계 또는 광범위한 통제력을 행사하는 종교 공동체 등은 힌두교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힌두교는 그 신자의 생활 자체가 됨에 의해서 통제력을 행사한다.
D. 윤리관이 박약하다
헤겔(Hegel)은 그의 ‘역사 철학’에서 ‘힌두교는 윤리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헤겔의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힌두교가 제시하는 윤리관이 다른 종교에 비해 약한 것은 사실이다.
힌두교는 신자들에게 일반적이고 공통적인 윤리 체계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힌두교에서 다르마는 정직과 부정직이라는 윤리적 측면보다 우선한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모두 그 자신에 맞는 다르마가 있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약속을 어겨도 되고 상대를 기만해도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다르마는 윤리보다 상위 개념이다.
이것은 다르마의 준수 여부에 의해 까르마가 결정되고
궁극적으로는 해탈의 성패를 결정짓게 된다는 힌두교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탈이 궁극적 목적이므로 현세에서의 윤리는 단지 2차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부도덕한 자가 한가지만의 헌신으로라도 나에게 경의를 표한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자로 대접받을 수 있다.' -바가와드 기따(Bhagavad Gita) -
위의 시에서도 나타나듯이 힌두교에서는 세속적인 윤리와 도덕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힌두교가 규정하고 있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죄악 즉, 육욕, 분노, 탐욕 등도
이것들이 사회 질서를 혼란시키는 非윤리적인 행위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해탈에 장애가 되는 요인들이기 때문에 죄악시 되는 것이다.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시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라도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힌두교에서는
현세의 윤리에 최상의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헤겔의 주장처럼 힌두교에 윤리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힌두교에는 다르마라고 하는 느슨한 형태의 윤리 체계가 존재한다.
체계화되지 못하고 카스트에 따라 기준이 다르지만
다르마는 개인의 의무인 동시에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율법이다.
10계명과 같이 명확한 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윤리 체계가 다르마라고 하는 커다란 그릇 속에 녹아 들어 있는 것이다.
E. 획일化하지 않는다.
힌두교는 신도들의 사상과 행동을 조금도 구속하지 않는다.
힌두교는 한 사람의 선지자나 신의 대리인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생긴 종교가 아니다.
1,500여년에 걸쳐
수많은 철학자와 종교가의 노력
아리아인들의 종교와 토착 신앙의 결합
지역의 특성에 따른 신앙 형태의 변형 등이 합쳐져 만들어진 ‘합동 종교(Syndicated Religion)'이다.
따라서 힌두교에서는 카톨릭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의식과 신앙 형태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무수한 신조와 다양한 의식이 존재하고
이웃 사람들이 어떠한 교리 또는 의식을 따른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종교적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간섭하지 않는다.
교리에 대한 어떤 특정한 해석을 고집하지 않고
신앙의 획일성도 강조하지 않으며
신에 이르는 길이 하나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힌두교의 신자들은 3억 3천만의 神 중에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신 하나를 골라 믿으면 된다.
또 일생 동안 자신이 경배하는 신을 받드는 사원에 한번도 가지 않아도 상관 없다.
의무적인 예배 참여도 없고 죄악에 대한 의무적인 고백 의식도 없다.
이렇게 허술한 형태의 종교 체계가 다른 종교와의 경쟁에서 생존력을 가질 수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이런 허술한 체계가 지난 300여년 동안 기독교의 공격에도 버티어 온 힌두교의 생존력의 바탕이 되고 있다.
힌두교의 신자들과는 종교에 대한 토론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 신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기독교의 길도 있고 불교의 길도 있고 이슬람의 길도 있다.
어떤 종교도 다른 종교보다 우수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힌두들이 언제나 도달하는 결론이다.
서로의 종교의 장단점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선교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3억 3천만의 신들이 있는 힌두교를 상대로 기독교적 유일 신의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힌두들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수 많은 신 중의 하나로 인식한다.
힌두들은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교회에 신자로 등록할 때도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다른 신을 믿는다고 생각할 뿐이고
이 신이 그다지 큰 혜택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신에게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F. 외적 힌두교, 내적 힌두교
어떤 종교라고 할지라도 일반 대중의 신앙 형태와 지식인의 신앙 형태에서는 차이가 있다.
일반 대중의 신앙 형태를 외적 힌두교, 지식인의 신앙 형태를 내적 힌두교라 구별해 보자.
외적 힌두교의 신자들은 앞에서 말한 수 많은 신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숭배한다.
그는 자기가 죽은 후 영혼이 생전에 숭배했던 그 신의 하늘로 가서 신앙의 보답을 받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천국에서의 체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점이 다른 종교의 내세관과 다르다.
지상에서는 전생에 쌓은 공덕에 따라 체재 기간이 짧아지기도 길어지기도 하고
공덕의 비중에 따라 다음 세상에 태어날 카스트가 정해지는 것이다.
외적 힌두교에서는 현세에 자기가 속해 있는 카스트가 전생의 상벌이라는 것이 정의이고 교의이다.
내적 힌두교는 사색적이다.
이 신앙 형태에서는 자기 지양(自己 止揚)이라고 하는 추상, 즉 자의식(自意識)의 멸각(滅却)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멸각은 한편으로는 감각을 멸하고 의식을 억제함에 따라 일어나는 해탈의 상태를 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살과, 자기 스스로가 선택한 고행에 의해서 생을 단절하는 것을 뜻한다.
이 내적 힌두교에서는 다신론보다는 범신론 더 나가서는 무신론이 주요한 주제가 된다.
유일하고 우주적・영적 본질은 브라만(Brahman) 뿐이다.
이 브라만은 기독교적인 인격 신과는 전혀 다르다.
브라만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고 항상 불변한 것이며 정의할 수 없고 불가지적(不可知的)이고 비인격적인 절대자이다.
그러므로 복을 빌거나 원조를 청하는 신앙의 대상은 전혀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신에 몰두하여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고 ‘옴(Om)’이라고 부를 때 느낄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어쩌면 브라만은 신이 아니고 자아(自我: Atma)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우주적 본질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적 힌두교는 무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이다.
이 외적・내적 힌두교는 이렇게 논리적으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다.
내적 힌두교에 몰두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실제 생활에서는 외적 힌두교의 미신적 요소와 금기에 영향을 받는다.
외적 힌두교의 신자라고 할지라도 자의식의 억제가 신앙의 중요한 한 형태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힌두교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
이 종교에 심오한 철학과 극히 원시적인 기복 신앙의 요소가 공존하는 것을 보고 매우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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