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스름한 해질녁을 길을 잃고 계속 헤메고 있었다. 네비게이션의 지시에만 맡겨둔 것이 화근이었다. 이 첨단의 태크놀로지는 신도시의 새로운 길에서 맥을 못추고 있었다. 새로운 프로그램, 기술, 방법이라고 해서 만사능통은 아닌가 보다. “형, 병점역 표지만 보고 따라가면 한신대가 나올 거예요. 제가 수원에 살아서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요.” 뒤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우는 후배 동훈이가 불쑥 말했다. “이녀석, 진작 이야기하지... 그래..한신대가 그 근처니까 병점역만 찾아서 가보자.” 운전을 하던 디모데 형제는 아예 네비게이션을 끄고 그렇게 가기 시작했다. 길 눈이 밝은 그도 이렇게 헤메는 것이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동훈이 말대로 병점역이라는 표지판을 따라가자 목적지인 한신대학교 표지가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그때 문득 길을 찾는데 몰두하느라 정신이 없던 내 마음이 안도하면서 전혀 의식하지 않던 무언가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병점..병점역이라..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인가.. ” 오랫동안 접어 두었던 그 지명이 심장을 두드리듯 살아나기 시작했다. 20대 중반 나는 전혀 연고조차 없는 이 병점에서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했다. 그 까닭은 형의 주소가 이곳에서 떨어진 화성군 반월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역으로 입영했다가 너무나 몸이 안좋다는 판정을 받고 귀향조치를 받았었다. 1년 후에 갑자기 낯선 이곳에 방위병으로 오게 된 것이다. 몸만 아니라 영혼조차 몹시 아프던 시절이다. 주님을 위해 아골골짝 빈들에도.. 소돔같은 거리에도 복음 안고 찾아 가겠노라던 이십대의 시퍼런 열정은 갑자기 엄습한 불의 시련에 사정없이 타서 재만 남았다. 그동안 자랑하던 그 헌신과 열정 복음의 내공이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불은 사정없이 증명해 버리고 말았다. 나와 가정을 공격해온 음부의 권세, 악한 영들의 공격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누구보다 주님을 향한 열심이 특심이었고, 기도와 말씀과 헌신적인 삶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나는 막상 저들이 공격해 오자 형편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찬양하고 구호를 외치긴 했지만...영적전쟁에 대하여는 잼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것을 가르쳐 주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집은 무너져 버렸고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영적인 공격 속에 너무나 무기력하고 형편없는 나 자신만을 전리품으로 건지고 만 것이다. 주님의 이름조차 부를 수 없는 음부의 구덩이를 그렇게 통과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아프던 시절에 나는 이 낯선 '병점'에 온 것이다. 아니 내 던져진 것이다. 읍사무소에서 나는 날마다 주님등록이며 호적 초본, 예비군 통지서 같은 것을 발급하는 일로 복무를 했다. 가끔 버려진 복사지에 붉은 인주로 일본의 사무라이 미야모도 무사시며 ..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지향하고 걸어 간 성 프란시스의 맨발을 그리곤 했다. 아주 가끔은 이 청춘을 콱 구겨서 휴지통에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또 가끔은 흐린 하늘에 빗대에 아무도 모르게 흘러 가는 이름없는 '순례자'가 되자고 다짐하였다. 지금은 작고한 <강아지 똥>의 작가 권정생 선생에게, 들판에 꽃다지며 씀바귀가 폈습니다 그런 단가(短歌)같은 엽서를 보내곤 했다. 어디론가 나를 훌훌 떠나 보내고 싶어 예비군 통지서를 전달하는 일을 자청하였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변방의 외진 논두렁과 인적이 드문 산길에서 날마다 소식이 끊긴 친구에게 관제엽서를 쓰곤 했다. 쓸 곳이 마뜩 찮으면 나에게 쓰고 며칠 후 받아 보기까지 하였다. 권정생 선생도 그 비슷한 답장을 항상 보내 오곤 했다. 우린 둘 다 몹시 아프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김수영의 시 한구절을 스산하게 적어 보낸 적도 있다. 아픔이 축적되자 서러운 통증이 되었다. 서럽다 해도 전처럼 주님을 부를 수 없음이 더 서글펐다. 그런 시절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안해 봤다. 예수...그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내게 죽음과도 같았다. 한가한 읍사무소의 오후이면 언제나 아스라이 낡은 기차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소리가 아주 마모되고 오래 된 기차가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어느 황혼녘, 나는 그 소리를 찾아 무작정 걸어 갔다. '병점역(餠店驛)'... 마을 한켠에 그 이름의 작은 간이역이 있었다. 나는 그 이름이 무척이나 특이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병점..떡집이라니...왜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는 그 이름에 괞시리 의미를 붙이려 했다. '떡집은 성경에 나오는 벧엘이다.' 막막히 그런 연상을 하며 역 어귀에서 우두커니 있다가 겨우 몸을 추스려 일어섰다. 그것은 성경의 '벧엘'과는 당연히 아무 상관이 없다. 후에 알았지만 고려시대 부터 삼남(三南, 영남, 호남, 충남)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은 지친 나그네들을 위한 떡집들이 모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게 병점은 지쳐 로뎀나무 그늘에 쓰러진 엘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전해 주었던 그 떡과 물은 없었다. 친구도..세상도..주님도 나를 모두 나를 잊은 듯 하였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 황혼의 저녁, 너무나 오랫만에 역근처 교회에 갔던 것 같다. 아무도 없는 작은 예배당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뒤에 있는 성경을 꺼냈다. '벧엘'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나서였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창28:16-19 참으로 오랫만에 찾아 읽어 본 창세기의 한 페이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그 광야의 황혼녘... 그 검붉은 빛으로 서럽게 물든던 황량한 들판에서 도망자가 되어 돌배게를 하고 자던 때에, 꿈속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닥다리가 내려와 천사가 오르 내리는 그 상상못할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야곱이 놀라서 그 위를 보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서서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인가! "나는 너의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네가 어딜 가든지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그 구절을 읽다가 때에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울음이 터졌다.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완전히 고갈되어 메마른 흙투성이 같던 심연에서 예기치도 않은 뜨거운 눈물의 샘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의 하나님..나의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날 그토록 사랑하신다던 주님은..나를 떠나 어디로 떠나셨나요? 나를 위해 중보하신 다는 그 하늘 보좌에서 이렇게 바보같은 나를 지켜 보시기나 하는 건가요?" 참으로 오랫만에 단내가 날 정도로 닫혔던 입을 열어 서러움을 토했다. 그날 나는 창가로 스며온 저녁 오늘로 붉게 물든 예배당의 한 구석에 웅크리고 모처럼 한없이 울었다. 꺽정이처럼 소리죽여 울부짖었다. 그리고 얼마 후 부터 조끔씩 주님을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그처럼 낯설기만 하던 그 변방도 희미하게라도 '벧엘'이 되기 시작했다. 벌써 이십여년전의 일이다. 바로 그곳이 병점이었다. 그 해질녁의 그곳을 생각지 않게 길을 잃음으로 다시 찾아 온 것이다. 2. 병점역을 돌아서자 목적지 오산의 한신대학교가 곧바로 나왔다. 추운 영하의 날씨에 마중을 나온 자매가 학교 담옆의 부대찌개 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감독님을 만나려고 아까부터 와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 일찍 와서 기다리시길레 제가 식당으로 모셨습니다.” 기다리던 기독학생회 대표가 문앞에서 영접하며 그렇게 말했다. 한신대학교는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인데, 그는 매우 순박한 열정을 한 얼굴에 내가 홀리 보이스(hoiy voice)라 농담처럼 부르는 즉 부흥사들의 그 쉰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친구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식당 안의 방에 들어가자 뜻 밖에도 세명의 아주머니들이 일어나 나를 반겼다. “경남 양산에서 감독님을 만나려고 일곱시간을 달려왔습니다.” 나는 놀라서 순간 무어라 말을 못했다. '세계적인 유명한 사역자가 온것도 아닌데... 집회에 참석하려고 일곱시간을 차를 몰아 오다니... ' 그동안 전국을 돌며 집회할 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찾아온 분들이 많았다. 동해안 속초에서 유치원을 경영하는 할머니가 대전의 집회에 까지 온 것을 기억한다. 그때 그분은 유치원 봉고를 몰고 다섯시간 정도를 달려왔다고 해서 놀랐었다. 오랜동안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사모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곱시간을 넘게 달려서 오다니... “뭐하러 고생을 하면서 먼 길을 오셨어요?” 늦게 오는 바람에 불어터진 찌개를 농을 섞어 그렇게 말했다. “큰 딸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고 서러워서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은혜를 받으려고 왔습니다. ” 두 딸과 같이 왔다는 어머니가 심각하게 말했다. 나는 약간 버릇 없이 다시 크게 웃었다. “따님이 은혜를 받았는데 뭐가 서러우세요? 오히려 기뻐하셔야죠” 여전히 그 어머니는 심각한 투로 말했다. “저도 30년 넘게 신앙생활했는데.. 아직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거든요. 큰 딸은 방언도 받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으니 너무나 부럽고 서럽고.. 저도 방언을 받고 싶어요. ” 그 전 같으면 이런 말들이 어리석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성령님을 체험하고 나서 나는 이런 열정을 주님께서 헤아리신다고 믿게 되었다. 세련되고 폼나고 경건의 외양으로 전체하난 신앙보다, 지붕을 뚫어서라도 아픈이의 치유를 갈망하는 그 열심을 주님은 칭찬하셨다. "방언 받고 무엇을 체험하는 것이 성령님을 경험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고...말씀을 통해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교과서적으로 말했지만 이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을 조금 헤아릴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쉽게 판단하고 이리저리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늘의 언어>를 펴낸 후에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여전히 마음에는 답답함이 있었다. '은혜를 체험했다고 하면서...왜 이리 우리는 변화되지 않는가? 유대인들이 그랬듯 여전히 표적이나 은사만 구하는가?' 더 이상 집회를 하지 않고 조용히 전처럼 다큐멘터리만 하고자 하는 속내를 주님께 자주 아뢰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저 작고 외진 곳까지 찾아 다니며 더 나누라 하셨다. "그곳의 나의 작은 백성들..제자들..사역자들을 나는 안타까움으로 보고 있다. 너는 내 마음과 심장을 가지고...그들과 성령으로 기도하는 문을 열어라. 그들에게는 기도의 영이..능력이 절실하단다. 방언은 그것을 여는 지름길이다." 깊은 기도 가운데 그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성령님이 주시는 가장 소중한 기름부음과 은사가 '순종'이라 믿는다. 우리 주님이 그러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날마다 구했을 때, 이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누구도 가기를 꺼리는 사마리아 땅을 주님은 기꺼이 지나 가고자 하셨다. 그곳에서 주님은 아버지가 만나게 하신 한 여인의 진정한 생수요 신랑이 되신다. 그리고 나서 양식을 구하여 온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과 그 나라의 일에 주님처럼 온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내가 꿈꾸고 하고 싶은 일들이 참 많이 있었다. 그러나 나를 부인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그 마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나를 본질적으로 존재케 하는 에너지..양식이 되기를 소망했다. 주님처럼 오직 아버지의 뜻과 진리에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권능을...그 능력을 구하고 또 구하기를 지속하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순종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성령님은 우리가 그저 능력이나 은사로 오해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주님의 그 성품과 능력, 이 땅에서 하신 그 일들을 하게 하신다. 즉, 주님처럼 사는 능력을 주신다. 그것이 성령님의 권능이다. 나는 주님의 마음을 깨닫고 다시 변방을 찾아가 '하늘의 언어'를 나누는 일에 순종하였다. 남들이 가지 않으려는 아골골짝 빈들같은 그런 땅이라도 찾아가 같이 부둥켜 안고 기도하며 은혜를 구한 것이다. 20대 초반에 나는 그런 땅을 찾아가 섬기는 일들을 날마다 간구하였다. 영적인 공격으로 사정없이 무너지고 말았지만, 40이 넘어 나를 그 땅으로 견인해 간 것은 뜻밖에도 '방언'이란 은사였다. 우리의 작은 간구하나라도 주님은 다 기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그 인도하심을 받기 위하여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의 지경에 들어가야 한다. 나는 거의 20여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며 그렇게 낮아지고 순종을 체득한 것이다. 이런 진리에의 깨달음이 진작 있었다면 혼신으로 깨어서 그 순종과 성령님의 임재를 강렬히 구했을 터이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는 않았다. 나는 혼신을 다하여 지극히 작은 한 영혼이라도 붙들고 기도하였다. 그 과정에서 주님은 생각지 않은 작은 지체들을 통하여 방언이 얼마나 놀랍고 중요한 것인지 새롭게 깨닫게 하셨다. 방언을 통하여 성령님을 더욱 깊이 체험하고, 치유와 능력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이들이 무수히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볼잘것 없어 보였던 이들이 주님의 누리고, 하나님 나라와 의에 대한 소망과 열정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순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갈망하는 열심이 있었다. 양산에서 7시간을 달려 방언을 받으러 오는 이런 열심은, 그런 사모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늘상 심령이 가난하고 진정으로 연약함을 붙들고 애통하는 이들을 통해 계시되고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나 체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여전히 그 표피적 표적들에만 갇혀 있다. 여전히 어리석으며, 그 은사를 주시는 아버지의 진정한 뜻과 마음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의 본질적인 능력과 임재를 누리지 못한다. 주님의 길에 순종하여 이 '뜨거운 감자'같은 '방언'에 대한 책을 썼지만, 처음엔 그것에 대하여 나조차 의구심이 많았다. 나의 감각과 하고픈 기획을 따라 책을 썼다면 '방언'에 대한 것은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귀하게도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러 은사중에 가장 논란거리가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어리석은 종자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실례가 되거나, 입에 오르거나 민폐를 끼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내가 스스로 기획하여 은사중에, 가장 문제가 큰 것을 나누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나는 뉴욕의 맨하탄에서 이 시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강력한 성령님의 권능을 구했고, 너무나 확연한 그 응답이 생각지도 않은 '방언'이라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 성령께서 그 언약의 역사를 열면서 부어 주신 하늘의 능력이다. 영으로 기도하는 능력을 가져야 ..인간의 작은 지혜와 정보의 제한 속에 얽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으로 구할 수가 있다." 그렇게 주님은 그것을 나누라고 명하셨다. 그것을 나누는데는 역시 주님처럼 복종이 필요했다. 내 감각과 생각으로는 그다지 깊이 와닿거나 끌리는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러나 내게 익숙하고 편한 것만 추구하는 것에서 이젠 벗어나야 했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체득하고 있기에 나는 주님이 주신 그것에 순종해야 했다. 그 작은 순종 가운데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나누게 하신 방언의 능력과 본질은 <하늘의 언어>에 쓴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오직 믿음의 순종으로만 경험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 진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14:2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다시 순종을 통해 실감하게 되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것인가! 나의 영이 전능하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아버지의 비밀의 정원에 초대되어 가는 것이다. 그 흔하고 하찮아 보였던 은사가 우리 영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깊숙히 견인한다. 나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한구절 한구절이 가진 위대함에 전율하며 날마다 감탄했다. 방언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해나 평가, 비판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방언'이 오순절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고 초대교회의 큰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疑惑)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嘲弄)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행2:11-13 방언은 '하나님의 비밀과 큰 일을 말하는 것'이고 아버지가 약속하신 '새 포도주'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베드로는 제자들의 방언에 유대인들이 놀라자...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행2:16- 이것이 바로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그 성령님의 능력을 부어주신 것이라고 외친다. 그때에는 그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도 부어 주신다고 한다. 당시에 남종과 여종은 가장 비천하고 작은 자로 거의 인간으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자들에게도 성령을 부어 주셔서 예언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실로 영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말하는 방언은 그 깊이를 통해 예언으로 나아가게 하는 능력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을 하도록 하되 더욱 더 예언 하도록 하라(고전 14: )고 강조한 것이다. 방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마음을 받게 하는 '예언'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길이다. 그런데 가장 작은 자일지라도 방언으로, 그 영으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성령 안에서 깊어짐으로 예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에 방언을 하는 제자들을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듯이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것을 조롱하거나 비판할 것이다. 그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지껄임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예언)이라는게 그들에게는 도무지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련되고 학식이 넘치고 지성적인 이들만 불러서 그 영을 주어 역사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비젼은, 그 갈망은 '남종과 여종'까지도 예언 하는 것이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민11:29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가면서 수많은 기적들과 능력을 통해 살아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적이 지나가기만 하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자기들의 욕심으로 아우성하며, 늘 원망과 불평,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세는 이런 못난 백성들의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종자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이 큰 절망으로 다가와 죽기를 간청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짐을 덜어 주시려고 70명의 장로를 세워서 그 짐을 나누어 지게 하셨다. 그 70명의 장로들이 모세의 회막에 이르자 하나님의 신이 임했고 그들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그 70명의 명단에 들어 있던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사람이 회막에 나오지 않고 자신들의 텐트 안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세의 명령을 거역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 텐트에 남아있던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시더니 동일하게 예언을 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여호수아가 분노하여 모세에게 말했다. 명령을 어긴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금지시카고 벌해야 한다고 하자 모세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진실로 우리 아버지의 마음은 당신의 백성들이 다 예언을 하시기 원하신다. 그것을 요엘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젊은이만 아니라..이젠 생을 더하여 아무런 기력이 없다고 여기는 늙은이들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가장 비천한 종들도 에언을 할 것이라고... 이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 알 것인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고전 14:13 바울은 그 마음을 깊이 영으로 깨달은 것이다. '예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그 마음과 계획과 경륜을 성령님을 통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야 우리는 '예언적인 삶', 즉 내 뜻과 게획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 수 있다. 이것이 곧 주님이 사신 삶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들이 다 이런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방언은 그것의 매우 중요한 기초이다. "권사님..잘 오셨구요... 정멀 방언을 사모하신 다면...집회 때에 맨 앞에 앉으세요. 그리고 제가 초청하면 제 옆으로 와서 서세요. 특별히 기도해 드릴게요." 나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분에게 힘을 내라고 그렇게 말했다. 방언을 사모하여 7시간을 달려온 어머니인 것이다. 그 믿음과 열심은 성령님의 사랑과 능력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 "네..감사합니다. 너무 너무 사모합니다.." 눈물이라도 막 쏟아질것 같은 열망의 눈빛으로 권사님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3. 한신대학교 강의실 모퉁이에 있는 작은 공연장에서 집회가 열렸다. 유난히 추운 겨울 밤이었다. 진보적인 신학교답게 연합집회이지만 정작 그 학교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다행히 집회 소식을 '제3시'에서 확인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가득 메워주었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양산에서 온 그들처럼 여러 지방에서 집회의 소식을 접하고 찾아 온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이세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학생 연합회장이 인도하는 찬양은 기름부음이 넘쳤다. 매우 투박하지만 그의 찬양은 영혼을 흔들고 추운 날씨를 태우듯 자극했다. 나는 한구석에서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찬양했다. 내 영혼이 점점 고조되더니 오직 구속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너무나 앙망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전에는 '기름부음' 이라는 그런 말조차 낯설었다. 아니 심지어 '경배와 찬양', '열방'이란 말조차 나는 익숙치 못했다. 그런 것은 은사주의자들이나 지나치게 성령을 추구하는 이들, 혹은열광주의적인 시퍼런 청년들의 용어라고 치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님의 임재,기름부음(Anointing)이 없는 찬양과 말씀과 기도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절감한다. 결국 아무리 화려하고 뛰어난 감각과 예리한 판단, 대단한 신학적 지식을 가졌다 해도 성령님의 역사는 경험하지 못하면 알 수가 없다. 기름부음은 그것을 받은 자만이 아는 것이다. 한 목사님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인도네시아에 ..그 이슬람권에서 대단한 부흥을 이루는 교회가 있습니다. 셀(Cell)목회를 잘한다 하여...여러 한국 목회자들이 탐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의 부흥은 셀목회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 역사를 이룬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름부음이 무엇인지 궁금해져서 성경을 탐구했다. 놀랍게도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역사와 회복과 치유의 본질이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라는 말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며 '그리스도인'이란 '기름부음 받은 자를 따르는 작은 그리스도들'이다. 주님 당신이 곧 기름부은 자의 본질이시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이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다. 기름부음이 없는 신앙이란 형식만 남은 죽은 것이다. 전국을 돌며 집회할 때 거창하고 화려한 찬양을 하지만 전혀 영혼에 울림을 주지 못하는 팀들을 많이 보았다. 대단히 폼을 잡고 다양한 악기며, 큰 소리로 외치지만 오히려 마음을 답답하게만 했다. 그러나 어느 한 구석 아주 작은 찬양팀인데도 너무나 영혼을 흔드는 감동을 주는 것을 느꼈다. 주기철목사님이 신앙을 시작한 진해 웅천교회에 갔을때, 한 젊은 남자가 소박한 남방을 입고 기타를 치며 어린아이들의 찬양을 부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내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단순한 찬양인데도 나는 영혼이 충만함으로 감격하여 너무나 성령님으로 충만케 됐다. 그 찬양이 문을 열어 그날 엄청난 은혜와 역사를 경험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그 교회 부목회자였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다. 기름부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렇게 다른 것이다. "감독님..우리 교회가 이 시골에 있어도 성령으로 충만한 부흥을 경험한 이유가 바로 말씀하신 그 방언에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내가 성도들이 너무나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말하자 웅천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말했다. "방언 때문이라니..무슨 말씀이신지..?"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해서 되물으니, "이 시골에 처음 와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하기 전에 기도하신 무학산 십자 바위에 올라 가서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깨닫게 하셔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동지들을 50명만 붙여 달라고 날마다 기도했지요. 50명이 응답되어 합심해서 새벽에 기도하자 ..정말 하늘 문이 열리 더군요." 나는 무척이나 놀랐는데, 그것은 이 교회가 가장 보수적인 고신교단이었고, 이 교회는 평양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이 사역하던 곳이며, 그 목사님은 매우 지적인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웅천의 한적한 시골 교회가 수백명으로 부흥하고 청년들로 넘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방언이란 하찮고 쓸데없다 여기는 이들에게 그 말은 얼마나 어리석고 치우친 말인가.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는 경험해 본 자만이 알 수 밖에 없다. 그 부목회자의 격식없는 찬양이 영혼을 충만하게 한 것은 그런 영의 간구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방언만이 모든 것의 능사(能事)는 아닐터이다. 그런 함정에 빠져서도 안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성령님의 역사를 여는데 귀중한 통로이며, 영의 간구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것에 집중해야할 충분한 이유를 가질 수 있다. 한신대 기독연합회장과 그 팀이 혼신으로 찬양하는 그 한 구석에서 나는 이 밤을 주님께서 온전히 다스려 달라고 간구했다. "오직 주님이 예비하신 역사로 인도하여 주세요. 당신이 만지기를 원하시는 영혼들을 전능ㄹ자의 손으로 만지시고 당신의 기쁘신 뜻으로 이끌어 주세요." 집회 때마다 나의 간구는 오직 그것이다. 그렇게 기도하는데..갑자기 주님께서 생각지 않은 마음을 주셨다. 경남 양산에서 온 그 권사님의 큰 딸에게 간증을 시키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이 마음과 음성이 민감하게 되었다. 전에는 그저 내 생각이나 지식을 따라 움직여 살아온 나다. 그러나 성령님을 체험하고 방언의 기도가 깊어 지면서...주님의 음성에 너무나 민감해진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에 순종했을 때, 귀하고 아름다운 열매들을 주셨다. 바로 이것이 순종으로 나누어 지고, 믿음의 선포를 통하여 다른 영혼에게 전달 되었을 때, 예언적인 의미를 이루는 것이다. 나는 사도행전 1장을 통하여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란 내용으로 말씀을 전하다가 그 큰 딸을 찾았다. 내가 당부한 대로 그 어머니는 맨 앞에 두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큰 딸은 동생이 방언을 받로고 하기 위하여 동생이 데려 온 아기를 돌보고 있었다. "양산에서 오신 집사님.. 지금 주님께서 이 마음을 강하게 주셨는데 .. 하나님이 집사님께 주신 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런 부탁인데도 그 집사님은 순종하여 아기를 맡기고 앞으로 나왔다. 나는 마이크를 건네고 앞에 서서 조용히 그의 간증을 기다렸다. 그 집사님 잠시 망설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들려 준 간증이 우리의 영혼을 흔들었다. 역시 그 마음은 주님이 주신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이유를 알 수 없이 온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병원에서도 안되고 너무 아프다보니 서러워서 날마다 혼자서 울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체험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성도들은 성령을 체험하고 방언도 하고 하는데 저에게는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금요철야에서 저도 성령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성령님이 임하시더니 방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의 기도가 열리자 저는 그전과 달리 뜨겁고 간절한 기도를 오랫동안 드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전에 10분도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던 제가 몇시간 씩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걸으면서도..설거지를 하면서도..운전을 하면서도...방언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신기하게도 아프던 몸이 말끔히 나았습니다. 어느날 두시간을 넘게 방언으로 기도한 후에 머리를 바닥에 대고 잠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이마의 근육이 움직이더니 입술도 저절로 움직여지며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절로 어떤 말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것은 이사야서 62장 3절, 4절을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내 영혼이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이사야서의 그 말씀은 내가 성령님을 만난 후에 자주 주셨던 말씀이다. 집사님은 그 말씀이 한번도 읽어 본적이 없는 것이라 했다. 나는 그 구절을 함께 읽어 보자고 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이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게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사62:3,4 하나님께서 방언 기도 가운데 그 집사님의 마음을 움직여 전해 주신 말씀은 놀라웠다. 바로 이것이 아버지가 우릴 부르시고 들려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말씀 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가서 오랜 고역과 상처와 아픔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 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신', 즉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그 포로에서 풀려날 것이며 다시 성전과 이스라엘의 땅을 회복할 것이다. 그리고서 다시는 그 버려진 땅을 황무지라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큰 기쁨과 결혼을 하는 신부처럼 여겨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성령님을 통하여 누리는 가장 본질적인 축복과 은혜가 아닌가!' 나는 너무나 감격이 되어 견딜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저 경남 양산이란 작은 도시에서 무명의 연약한 집사님이 성령님을 만났다. 그리고 방언의 기도가 깊어지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는 과거의 내가 그러했듯이 몸이 아프고, 영혼도 아픈 사람이었다. 진정 시하게 아파본 자만이 그 서러움의 깊이를 헤아린다. 세상에 버려진듯 황무하고 서러운 풍경 속에서 신음할 때에 그렇게 말씀 하신 것이다. "너를 다시는 황무지라 하지 않을 것이며... 큰 기쁨이 넘치는 ..나의 딸이고 왕관이다." 진정 우리가 둔감하고 완악하여 듣지 못할 뿐, 아버지는 늘 우리 영혼에 그렇게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고, 오리 영이 열리면 그 음성을, 아버지의 그 사랑스런 마음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간증을 들으며, 이곳에 오기전 방황가운데 다시 발견한 '병점'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익섯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그런 추억들을 생각나게 하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이토록 씩씩하게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달려 가지만... 나 자신 또한 이 땅에서 그 허무하고 발시리던 서러움의 아픈 나날들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을 발견하고, 그분의 손에 붙들리어 주님의 진리와 능력 가운데 다시 직립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신 삶이며... 아버지가 태초부터 계확하신 축복의 언약입니다. 우리 모두 마음을 열고 사모하는 마음으로...그 아버지의 마음..우리를 향한 사랑을 만나기를 구합시다." 역시 영혼의 간구가 터져 나왔다. 내가 전한 메세지의 반응보다도 훨씬 강렬한 역사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집사님의 간증이 영혼들을 자극한 것이다. 이것이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방언으로 간구하는 것이 깊어질 때에, 아버지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 주신다. 그 말씀에 언약하신 사랑과 기업과 전략, 그리고 아름다운 심정을 계시하신다. |
출처 : 성령님의 임재연습 & New Life(새생명) 교회
글쓴이 : Israel태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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