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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강, 우리 역사의 시원, 생명의 기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9. 8. 17:06

세계의 도시들은 강을 끼고 있다. 뉴욕의 허드슨 강, 런던의 템즈 강, 파리의 세느 강 등등. 맞는 말이지만 주객이 전도되었다. 도시가 강을 끼고 있는 게 아니라 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의 문장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몸을 뒤틀며 대지를 휘몰아치다 바다로 육박하는 도도한 강줄기가 인간의 삶을 보듬고 돌보기 위해 스스로 위대한 도시들을 탄생시켰다.


인류 역사의 전환기엔 늘 도강(渡江)의 역사가 서려있기도 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영웅으로 거듭나게 된 건 루비콘 강을 건넌 뒤의 일이며, 500년 조선왕조의 흥망성쇠가 도강 대신 위화도회군을 결정한 이성계의 결단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들 역시 한강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도강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정래 대하소설 <한강>의 시작과 끝이 한강을 건너오고 건너가는 것으로 설정된 것은, 그래서 설득력이 더한다.

 

 

 


작가 고종석은 <도시의 기억>에서 조만간 인류의 대부분이 도시에 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다시 말하면 그 말은, 조만간 인류 인구의 대부분이 ‘물’을 찾아서 도시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을 따지는 건 비단 나이트클럽만이 아닌 것이다. 도시에 사람이 몰리는 주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 물이 있고, 물은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물의 중요성에 관한 논의가 현실의 주요담론이 되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 역사의 시원이자 우리네 삶의 원형을 빚어낸 공간이자 이미지이며, 생명줄이자 자존심이기도 했던 ‘한강’을 언급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작가 조정래가 그의 대하소설 3부작의 대미를 <한강>으로 장식한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을 터. ‘한강’은 단지 물리적·지리적 강 이름에 머물지 않으며, 소설 <한강>은 곧 우리의 현대사 속에 틈입해 때론 속을 헤집고 때론 함께 아파했던, 민중들의 회한과 한, 설움과 분노, 웅비의 기운을 머금은 준엄한 역사의 심판자 한강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한강>은 50년대 말 이승만 정권의 독재정치가 극에 달하는 시점부터 시작한다. 4.19혁명을 거쳐, 5.16군사 쿠데타, 유신독재, 한일굴욕외교, 월남파병, 3선 개헌, 10·26, 12·12, 5·18광주민주화운동까지 대략 20여 년간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빠짐없이 기록한다. 소설은 유일민·유일표 형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유일민은 연좌제 때문에 번듯한 학벌로도 직장하나 구할 수 없어, 그를 사랑하는 임채옥의 돈을 밑천으로 술 도매업을 한다. 일표는 그런 일민의 동생이다. 형보다 다혈질이고 정의로운 그는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몸 사리는 것을 마땅해 하지 않는다. 결국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간다.


이야기의 뼈대는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뒤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60~70년대가 주를 이룬다. 격동기를 역동적으로 그리기 위해서 소설은 수많은 인물들이 뒤엉킨 복잡한 이야기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조는 의외로 단순하다. ‘독재자와 거기에 기생하는 인물들’ 대(對) ‘독재에 저항하는 인물들’, ‘경제성장의 수혜자인 재벌과 부동산 투기세력들’ 대(對)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려 신음하고 있는 노동자들’


소설 <한강>의 ‘한강’은 표피와 심층의 이중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표피적으로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환상 속에 내포된, 민중의 삶에 박탈감을 더하는 이미지이다. 한편, 좌우이데올로기 대립의 피해자인 소설 속 유일민·일표형제와 그들을 둘러싼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채워주고 살찌우는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들인데 반해, 도도히 흐르기만 할 뿐 아무 말 없이 역사의 증인이 되고자 하는 심층의 한강에게선 장엄함과 비장감마저 느끼게 된다. 


깊은 밤 고요히 흐르는

강물 같아라

밤의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아

하늘의 모든 별을 제 물결에 담고

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구름 또한 물 같고 강 같아

흔쾌히 그들을 비추리

깊고 깊은 침묵 속에서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산문집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인용한 마누엘 반데이라(Manuel Bandeira)의 시 ‘강물’의 전문이다. 그중 특히 “밤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아/ 하늘의 모든 별을 제 물결에 담고”가 와 닿는다. ‘한강’인들 다를까. 하늘의 모든 별은 물론 한강 변을 중심으로 옥신각신해 오던 수많은 삶의 회한들을 ‘제 물결에 담고’ 깊은 밤 고요히 ‘깊고 깊은 침묵 속’으로 흐르고 있지 않았겠는가. 


조정래의 <한강>이 말하고자 했던 건 어쩌면 그 깊디깊은 밤, 역사의 뒤안길에 고요히 머무르기만 했던 ‘한강’에게 이제는 일어나 당당하게 말하라고 외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조정래는 어느덧 <태백산맥>의 이념과 <아리랑>의 역사를 넘어서서 <한강>을 통해 민족적 현실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다.”는 문학평론가 권영민의 지적은 그래서 적절하다.


민족적 현실의 한복판에 들어선 조정래의 간절한 바람은 민족통일의 염원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이 되고, 그 한강이 임진강과 합수한 뒤에도 다시 한강이 되어서, 비로소 한강으로서 바다로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네 한반도 역시 한반도의 역동성을 스스로 그러모아 마침내 한반도 통일의 주역이 되길 바라는 마음, 그것이 곧 ‘한강’의 마음이며 <한강>의 작가 조정래의 마음인 것이다.

출처 : 인간과 그밖의 것들...
글쓴이 : 시라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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