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공연예술 기획을 하는 이형을 만났다. 둘이 술먹지 말고 연극이나 한편 같이 보자고 대학로에서 만난 것이다. 만개한 대학로의 젊음들 사이로 이형이 샘터파랑새극장 앞에 서 있었다. 그가 골라놓은 연극은 <그대를 사랑합니다>. 강풀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장기 공연 작품이다. 공연이 끝난 후 최주봉씨가 말했듯이 처음 막을 올린 지 이미 1년이 지났단다. 그런 작품을 난 아직 모르고 있었으니 내가 얼마나 연극과 담을 쌓고 지내왔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공연장은 <더굿씨어터>. 샘터파랑새극장에서 혜화로터리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니 ‘미스터피자’가 있고 그 건물 지하 2층에 극장이 있다. 300석이 넘어보이는 좌석이 무대를 3면에서 ‘ㄷ’자로 에워싼 형태의 전문극장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최주봉과 강태기가 주인공 김만석역을 맡는 등 모든 배역이 더블캐스팅이다. 오늘 팀은 최주봉, 우상민, 신철진, 박승태, 민충석, 김수정이다. 다른 팀은 전주 공연을 하고 있다니 두 팀이 교대로 쉬는 것도 아닌 강행군 일정이다. 노배우, 중견배우들의 농익은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었다.
지난 가을 국립극장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본 이후 연극 관람은 처음이다. 막이 오르기 전-의례히 그렇듯이- 약간 긴장이 되었다. 극의 줄거리는 단순했다. 2쌍의 달동네 칠십대 커플이 엮어내는 다른 타입의 사랑이야기들이다. 한 쪽은 몇 년전 상처한 홀아비인 김만석과 젊어 혼자되어 사고무친한 송씨의 연애담이다. 다른 한 쪽은 사랑으로 함께 해로하다 치매에 걸린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노부부의 순애보이다.
욕쟁이 영감인 김만석은 혼자 폐지를 모아 살아가는 송씨에게 마음이 끌린다. 우유배달일을 하는 그는 일 끝에 남은 우유를 갖다주고 냉방에 연탄불을 넣어주는 등 구애공세를 펼친 끝에 드디어 송씨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한편으로는 죽은 부인에게 살갑게 대해 주지 못했던 것을 자책하면서... 동네 주차장에서 일하는 장군봉영감은 치매의 아내가 암까지 겹쳐 죽어가는 것을 알자, 함께 이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한다. 급기야 수면제를 먹고 연탄불을 피워 동반자살하는 장씨 부부. 비극이지만 왠지 비극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이 장면에서 눈물을 훔치는 관객들이 많았다. 더러는 노부모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게다.
반면 송씨는 김만석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행복감을 느끼지만 이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불안해한다. 젊은 시절의 상처가 컸던 탓이다. 김만석이 먼저 죽기라도 하면 또 별리의 상처를 안고 살아갈 일이 끔찍하다. 결국 강원도 고향으로 돌아가 세상 떠나는 그날까지 좋은 추억만을 간직한 채 살아가겠다는 송씨에게 김만석은 절규한다. “나, 김만석은 절대 당신보다 먼저 죽지 않을 것이요...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라고. 이 커플의 해피엔딩으로 막이 내린다.
내가 본 금요일 저녁 공연의 관객은 대략 200명 정도. 두어 달 뺀 1년을 이런 형국으로 장기공연을 해왔다면 우리 연극예술의 수요자층도 상당한 두께다 싶다. 원작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젊은 층에 유명한 강풀의 만화라는 점, 주연 배우들의 면면이 화려하다는 점 등이 흥행에 꽤 도움이 되었을 법하다. 소재가 소재라서 그런지 50대 이후의 노부부들도 꽤 보였지만 의외로 20~30대의 젊은 관객들이 훨씬 더 많았다.
그들 연애중이거나 결혼한 지 얼마 안된 커플들은 우리도 저렇게 사랑하며 늙어가야지 하는 소망과 다짐의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같은 중년의 남자는 마누라 살아 있을 때 김만석처럼 하지 말고 장군봉처럼 살아야 되겠구나, 노년의 삶이 얼마 멀지 않았구나 하는 자각의 계기가 되었다. 당연하지만 이 작품은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노인문제에 대한 '따뜻한 대안' 마련의 문제제기도 충분하다 . 거창한 구호보다 잔잔하게 있는 그대로를 극화시켜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이끌어 내는 힘,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힘일 것이다. 여러분도 이 공감을 나눠보심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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