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의 독후감은 옛날 홈페이지 "김영춘의 눈" 코너에 2005년 12월 경 썼던 글인데, 세계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2009년 노동절에 더욱 시의적절한 비교가 아닐까 싶어 블로그로 옮겨왔습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vs. 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
- 미국식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지속가능한가? -
얼마 전 홍은택이 쓴 <블루아메리카를 찾아서>란 책을 읽었다. 동아일보의 미국특파원을 지내고 퇴사한 후, 미주리대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발로 찾아다닌 미국'을 쓴 책이다. 이 책은 한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기 힘든 미국 중서부의 지방도시들에 대한 기행문이자, 특히 미국식 무한경쟁체제의 음울한 그림자와 그 희생양인 밑바닥 노동대중들의 실생활에 대한 현장 리포트이다. 재미도 있거니와 다른 데서 읽기 힘든 귀중한 자료적 가치까지 지니고 있어 이 글을 읽는 분들께도 일독을 권한다.
내용을 한 꼭지만 소개하자면 월마트의 본사가 있는 아칸소 벤톤빌에 대한 방문기를 들고 싶다. 미국에서도 시골인 클린턴의 고향 아칸소주, 그중에서도 골짜기인 오자크 고원지대의 인구 2만 6500명의 소도시에 본사가 있는 월마트는 그런 지리적, 경제적 악조건을 극복하고 세계 최대의 기업이 된 회사이다. 월마트는 가장 미국적인 기업이다. 가혹한 미국식 경쟁 과정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K마트를 이겨낸 승리자이고, 그 승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결코 내려올 수 없는 자전거 페달 밟기에 매달리고 있는 기업이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진출하여 사업을 벌이고 있는 월마트는 한국 대형 할인점들의 초기 벤치마킹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백컨대 홍은택의 책을 읽기 전, 나는 이 세계 최고의 성공담 이면의 이야기들은 거의 몰랐다. 내가 알았던 것은 기껏 월마트가 제조업체들을 쥐어짜는 유통업자 지배의 신화를 낳은 장본인이라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그 회사가 자기 직원들에 대해서까지도 철저하게 경비지출의 대상으로 생각해서 한계적 생활을 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는 그야말로 ‘한계적 기업'인 줄은 미처 몰랐다.
홍은택의 조사를 그대로 옮겨 본다. “월마트 직원들의 시간당 평균임금(2001년 기준)은 8달러 23센트, 연간 13,801달러이다. 미국 보건복지부가 정한 3인 가족 기준 빈곤선(2001년)이 연간 14,630달러니까 부양가족이 두 명 있을 경우, 월마트에서만 일하는 평균적인 직원들은 빈곤계층에 속할 수밖에 없다. 월마트에서는 120만 명이 일한다.” 그들은 회사의 철저한 무노조 고수 원칙 때문에 노동권에 대한 보장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직원들도 많다. 미 하원 노동과 교육위원회 소속 민주당 연구위원들의 조사결과로는 빈곤계층인 월마트 직원들을 위해 한 명당 2,103달러, 200명 규모의 월마트 한 곳당 연간 42만 750달러의 연방정부 예산이 들어간다고 한다.
소비자들은 월마트에서 물건을 싸게 사지만(중국산 수입품의 10%를 월마트가 구매한단다), 월마트가 그 물건 값을 싸게 유지하기 위해 직원들에게 임금과 의료보험 혜택을 적게 준만큼 그 소비자들이 세금으로 다시 보조해주고 있는 셈이니 이 무슨 장난 같은 셈법인가? 미국의 각 주에서 이런저런 소송과 시민거부운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월마트는 그러나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상징적 기업이다. 미국은 월마트방식을 세계에 강요하면서 이같은 극단적 양극화 현상까지 강제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식 세계화의 전도사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냉전체제를 장벽과 분열의 시대로, 그 해체 후 등장한 세계화체제를 통합의 시대로 규정한다. 여기서 통합은 다국적 시장의 국경 없는 통합이다. 개별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통합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의이고 필연이다. 산업혁명과 금융자본주의의 도래가 초래했던 첫 번째 세계화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어 낡은 사회질서와 계층구조를 파괴하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킨 잔인한 세계화였지만,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에 기초한 지금의 세계화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국경을 초월한 자유무역과 자유경쟁은 선진국뿐만 아니라 더 못한 후발국가, 후진국들에게도 축복이다. 경제의 효율화와 번영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 필연적 세계화는 그의 멋진 레토릭에 따르면 ‘황금의 구속복’이다. 이 구속을 선택하면 경제는 발전하고 평균소득은 증대된다. 거꾸로 정치는 민주화되면서 점차 축소되고, 여야의 차이도 점점 없어진다. 클린턴의 미국과 블레어의 영국이 이를 증명한다. 심지어 그는 한국도 이 황금의 구속복을 선택한 결과, 경제 상황이 많이 개선되고 선진화되었다고 설파한다. 그러나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전면화는 1970년까지의 번영 신화가 실종되고, 8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혔던 장기경제침체의 산물이다. 미국의 제조업은 국제경쟁력을 상실하였고, 미국은 금융, 서비스업, IT, 문화산업과 같은 경쟁력 있는 산업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했다. 소련의 붕괴로 견제 받지 않는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은 강제로라도 이런 산업들의 세계적 단일 시장을 창출해야만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지금의 세계화 현상과 그 규칙 설정은 바로 이처럼 미국의 생존논리가 기획하고 연출하고 전 세계에 강요한 ‘무제한급 자유경쟁’에 다름 아니다. 영국은 이 새로운 국제정치경제 질서에 적극적으로 편승함으로써 자국의 경제적 난국을 극복하는 돌파구로 삼은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뜻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미국의 이 도박이 초래하고 있는 결과는 어떤 것인가? 레스터 써로우는 세계화를 일컬어 20대 80의 양극화를 구조적으로 수반하는 성공이라고 말한다. 홍은택이 고발했듯이 미국 역시 이 양극화의 재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의 경제 전체는 성장해 왔지만 월마트 직원들처럼 미국 노동자 일반의 실질임금은 오히려 감소했다고 한다. 2004년까지 8년간 시간당 최저임금은 고정되었고 노동시간은 80년대에 비해 거꾸로 늘어났다. 상하층간 소득격차가 확대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미국경제가 성장하고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이 공고해지는 만큼 세계는 번영하고 안전해지고 있는가?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NO!이다. 미국의 일방적 패권주의는 다른 나라들을 잠시 순응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 약효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이라크에 대한 잘못된 전쟁은 미국의 승전과는 관계없이 앞으로 오랫동안 중동정세를 어지럽힐 것이다. 이로 인한 석유가격의 동요는 미국과 세계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고, 급기야는 미국의 일방주의에 반대하는 국제 여론을 더욱 확산시킬 것이다. 기후변화협약의 거부는 부도덕한 패권자의 모습 그 자체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가 없는 것이다. 미국은 국제사회와 보다 대등한 협력관계를 맺는 연습을 해야만 한다.
이 개명천지의 21세기에 남미에서 베네주엘라의 차베스 등 시대착오적(?) 반미좌파정권들이 속속 등장하는 이유 역시 미국은 깊이 헤아려야 한다. 결국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극단적 양극화가 초래한 결과들인 것이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앞서 말했던 양극화 확대의 경제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얼마나 지속가능한 것일까? 나는 적어도 10년 이내에 필연적 반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 반전의 과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미국이 치러야 할 비용도 혹독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미국처럼 양극화의 경제에 돌입한 한국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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