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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보고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9. 27. 08:30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을 보고

- 재미있게 즐겨라. 약과 독은 경계가 모호하다? -



일요일 저녁, 우리 집 아이와 동네 분들과 함께 천호동 롯데시네마에서 영국 영화를 보았다. 대니 보일(Danny Boyle) 감독이 연출한 <슬럼독 밀려네어>. ‘빈민가의 백만장자’ 쯤으로 번역해야할 이 영화의 무대는 인도 뭄바이다. 과거에는 봄베이로 불렸던 인도 중서부 아라비아해의 항구 도시로서, 영국의 식민 지배 당시 인도 경제와 무역의 중심지로 발돋움한 인구 1천6백만의 대도시이다. 우리나라 기업들의 인도 지사들이 대부분 이곳에 있으며, 작년 연말에는 이슬람 테러분자들의 동시다발 공격으로 수백명이 희생당한 비극적 뉴스의 현장으로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슬럼독...>은 재밌다. 그게 이 영화의 최대 강점이다. 흥행이 잘되는 영화의 공식은 ‘재미와 로맨스’ 혹은 ‘재미와 감동’의 결합이기 쉽다. 로맨스만 있거나 메시지만 있어서는 흥행작이 되기 어렵다. 재미만 있는 경우는 그런대로 킬링타임을 원하는 관객들을 불러모을 수도 있겠지만......이 영화는 흥행작의  공식을 잘 버무려 성공한 영화이다. 아카데미상의 작품상, 감독상 등 8개 상을 휩쓸었다는데 글쎄요 하는 의문도 들지만, 아카데미상 수상작이란 것이 뭐 엄청난 대작들만 있었던 것도 아닌 바에야.

 

영국 감독이 만든 영화이지만 철저하게 인도의 뭄바이를 무대로, 대부분 인도 배우들만 캐스팅해서 만든 영화이다. 그런데 이 뭄바이가, 아역들부터 성인 배우들에 이르기까지 인도 배우들의 연기가 러닝타임 120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대니 보일은 영화계의 히딩크감독인가? 영화의 초반부는 뭄바이 빈민가 모슬렘 꼬마들의 이야기다. 우리 나이로 7~8살 또래의 똥구녘이 찢어지게 가난한 아이들은, 그러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천진하고 발랄하다. 


그 아이들이 비행장에서 크리켓놀이를 하고, 잡으러 오는 경비원들을 피해 지붕 위로, 혹은 골목길을 헤치고 달리며 보여주는 거대한 뭄바이 빈민가의 풍경은 아카데미상 촬영상에 빛나는 이 영화의 화면들 중에서도 압권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1987)을 연상시키는 이런 포맷의 화면들은 감독이 영화라는 장르를 ‘관객의 입장’에서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감독 대니 보일의 경력을 찾아보니 한때 영국 BBC방송의 PD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런 이력이 이 영화의 또다른 주요 무대인 TV방송국의 퀴즈프로 장면들을 박진감있게 끌고 나간 힘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경찰서에서 취조받고 고문당하는 자말의 수난으로부터 시작된다. 무학의 어린 주인공 자말이 이 프로에 출연해서 의사나 변호사들도 몇 번의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고작인 계단오르기식 퀴즈에서 승승장구, 첫날 1,000만 루피의 막대한 상금을 획득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자말이 선한 주인공이라면 영화 속 또다른 주인공인 대표 악당은 퀴즈 프로의 진행자 프렘이다. 프렘은 퀴즈의 시작부터 텔레마케팅 회사의 차 심부름꾼에 불과한 18살의 고아 자말을 멸시하고 공개적으로 조롱한다. 그러다 그가 책략으로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말이 결국 승리의 주인공이 되자, 급기야 ‘있을 수 없는 현실’을 의심한 나머지 경찰에 사기죄로 수사를 의뢰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말은 조폭 두목에게 끌려가 사라져버린 애인 라띠카가-이 대목은 흥행 영화의 성공을 위한 극히 영화적인 장치이다. 확인해보니 역시 원작 소설에는 이 로맨스 부분이 없다- 혹시 자기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 그녀가 즐겨보던 퀴즈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뿐이다. 그런 그가 승승장구 퀴즈를 맞출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우연한 결과였고 뛰어난 기억력의 소산이었다. 나온 문제들마다 자말이 힌두교도들의 테러에 엄마를 잃고 10년을 고생하며 지냈던 아픈 기억 속에 그 정답들이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그가 문제들을 맞출 때마다 이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살리며 자말이 살아온 지난 세월들을 돌이켜 보여준다.


대니 보일은 인도 사회 최고 상류층인 프렘과 가장 밑바닥 인생인 자말을 이 영화의 주된 대립축으로 설정했다. 조폭 두목들은 프렘의 아류들이거나 결과적으로 한통속들이다. 반면 자말의 여자친구 라띠카나 자말이 승리할 때마다 환호하며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인도의 서민들은 또다른 자말들이다.  자말의 형 살림은 이 두 캐릭터 사이를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는 경계인. 아벨을 죽인 카인같았던 그는 극적으로 개과천선, 라띠카를 구해주고 자신의 죽음으로 죄값을 속죄하는 선한 경계인이었다.   

 

감독은 프렘의 화려한 말과 술수와 폭력, 자말의 진실된 어눌함과 순정을 대비시키며 긴장의 끈을 팽팽히 유지한 채 영화의 끝까지 ‘자말과 프렘’의 대결을 끌고 간다. 이 두 개의 캐릭터는 영화 바깥 세상이 그렇듯이 항상 충돌하고 대개 선한 자말들의 수난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영화 속의 세상에서는 끝내는 자말의 승리로, 권선징악, 사필귀정으로 끝났다. 자말은 최종적으로 2천만 루피(우리 돈으로 환산해보니 5억원이 넘는다)의 상금을 탔고, 라띠카와 행복하게 결합한다. 체면만 아니라면 막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대개의 경우 이 권선징악-사필귀정의 해피엔딩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 인도의 슬럼독들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그 뒷맛이 참 불편했다. 왜냐하면 현실은 이 영화처럼 우연의 연속(10연타 쯤?)으로 행운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처럼 인도나 세계의 서민들이 자말에게 박수를 보내며 자기 일처럼 응원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일이 다른 소재에서는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영화 <신데렐라맨>의 ‘기적’과 비교해 보자면, 그것은 본인이 열심히 '노력'하고 주위에서 성원해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고 그래서 현실감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영화라는 문화쟝르가 탄생된 이후 오랜 세월 비난받아왔던 대로 살기 힘겨운 대중들의 고통을 무마시키는 마취제라는 혐의를 받을 만하다. 다만 대니 보일이 흥행영화를 추구하면서도 인도의 현실을 자말의 고통어린 기억의 장면들 속에서 한 컷 한 컷씩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던 노력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같다. 영화 속 타지마할 씬에서 중학생 나이 정도로 성장한 자말이 운전사에게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미국인 관광객들에게 했던 말처럼. “이게 진짜 인도예요.”


그 나머지는 영화 첫 머리에 관객들에게 자말의 성공 요인에 대한 4지선다형 퀴즈를 내놓은 감독이 영화의 말미에 제시한 해답에 나와 있다. "Because it is written."  “영화는 영화다” 그런 뜻인가? 절묘한 도망이다. 영화를 재미있게, 유쾌하게 보고 난 뒤에 뒷맛을 운운하는 나같은 먹물들에 대한 그의 반격으로도 읽힌다. ㅎㅎ.


출처 : 김영춘 BLOG
글쓴이 : 아차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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