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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2일 간의 도보여행을 끝내는 소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9. 27. 08:38

 

 

2009. 9. 10(목)~9. 21(월).

 

그동안 오대산 북대사길, 태백산 천제단, 안동 하회마을의 낙동강변, 창녕 우포늪, 지리산 둘레길의 일부 구간, 구례-곡성 간 섬진강길, 고창 선운산, 변산반도의 해안도로, 옥천의 장령산(장용산)길, 보은의 서원계곡-삼년산성, 충주-제천의 호반길을 걸었습니다. 처음과 끝은 아예 비포장길로 정해서 골라 걸었고, 다른 길은 포장로와 비포장로가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확실히 포장도로가 여러모로 걷기가 훨씬 어려웠고, 흙길은 발에도 마음에도 편안함을 주더군요.

 

걷는 여행은 작년에 했던 한 달 간의 자전거 전국일주 여행과는 또다른 묘미와 가치가 있었습니다. 땀을 흘리는 건 똑같으되, 그 과정의 자극이 다르고 뒷맛이랄까 여운이 많이 다르군요. 자전거는 고개를 올라갈 때의 힘겨움이 짜릿하고 그래서 고개를 내려갈 때의 쾌감이 아주 상쾌합니다. 하지만 도보여행은 그냥 평지를 걸어도 발이 당기고 무릎이 아파올 뿐, 걷는 과정 중에는 육체적으로 아무런 쾌감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느리게 걸으면서 지나가는 길가의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되므로 그 아름다움과 특이함을 제대로 완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또한 풍경이 없으면 없는대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갈 수 있는 행로입니다. 하루의 걷기를 끝낸 후, 기분좋은 피로감과 함께 오는 우릿한 통쾌함이 있습니다만 자전거여행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걷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회가는 길입니다)

 

저는 도보여행을 하며 몇 가지의 보상을 얻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가 참 아름다운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전거여행 때도 느꼈던 바이지만 그 때보다 더 느리고 더 자유롭게 다님으로서 더 구석진 곳까지 들여다본 후의 감상인지라 이제는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본 저인지라 한국의 평균적인 강토가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을 가졌다는 것을 이렇게 늦게 발견한 것이 자괴스럽기까지 하더군요. 눈과 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음으로 이 아름다움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이겠지요. 저는 여행 동안 그 본능을 최대한 해방시키고 즐겼습니다.

 

원래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였겠지요. 그래서 조선말의 서방 여행자들이 찬탄을 했을 것이고, 러시아 출신 박노자는 이 산하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에 취해 한국인으로 귀화를 결심했다지요. 그런 산하를 더럽히고 파괴한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습니다. 다행히 지난 수십년 동안의 녹화사업과 환경오염 규제가 효과를 발휘해 이제 서서히 우리 국토는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남은 일은 지금 이명박대통령처럼 과거식의 개발주의에 젖은 채 생뚱맞게 국토를 ‘개발’하자고 덤벼드는 부나방같은 행동을 제어하는 일 뿐입니다. 아름다운 산과 들, 강을 다니다 보니 4대강 개발사업 같은 건 꼭 막아야되겠다, 그런 각오가 저절로 생겨나더군요.  

 (하회마을 아래쪽 광덕교 하류 방향의 낙동강 - 강의 개발은 이런 모래톱들을 없앤다)

 

두 번째로 얻은 것은 신체의 건강한 변화입니다. 비교적 잘 걷는 편이고 운동을 좋아하고 자주 하는 축입니다만, 오래 걸으면 발바닥이 당기고 아픈 통증은 평생 극복할 수 없는 한계인가 보다 싶었는데 이번에 걸으면서 일주일 만에 싹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설 걷고 적당히 운동했다는 말밖에 안되는 거겠지요. 단 내 허약한 발은 오히려 1주일 후부터 여행끝날 때까지 계속 여기저기 물집이

잡혀서 1회용 밴드를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6시간은 꼭 자야 하고 야행성이라 아침잠 많은 것도 고질병이다 싶었는데 그것도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었습니다. 낮에 많이 걷고, 버스타고 이동해서 밤에 숙소에서 빨래하고, 읍내 어딘가의 PC방을 찾아가 일지를 올리는 빡빡한 일정 탓에 늘 자정 넘어 1시가 가까워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침 6시 경에는 일어나야 동행하는 분과의 호흡이 맞는데 처음에는 죽을 맛이었죠. 섬진강길을 걷고 난 다음날 아침에는 고창의 여관에서 알람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늦잠을 자는 ‘짐승같은 잠’(동행한 선배의 표현인데 사실 짐승은 예민한 놈들이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게 7일차였죠.

 

 (우포늪 주변의 '푸른우포사람들'이 운영하는 늪지생태 학습관)

 

그런데 다음날부터 그런 피곤증이 싹 사라졌습니다. 5시간은 푹 자는데 그 시간만 지나고 나면 알람시계와 상관없이 잠이 깨서 맨정신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저녁무렵 시외버스에서 조는 시간도 많이 줄어 버렸습니다. 어제는 집에 돌아와서 긴장이 풀려서인지 초저녁부터 졸리다가 7시간을 내쳐 잤습니다만, 마음먹기와 몸의 훈련 정도에 따라서는 하루 생활에 지장없이 잠을 조절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일이 있으면 억지로 마음만으로 일찍 일어나서 종일 몸이 힘들었는데, 이제는 몸과 마음의 일치가 주는 한 경지를 알 것만 같습니다. 작년 자전거 여행 때도 1주일 만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즐기던 담배를 지금까지 15개월 이상 못 피게 만든 금연여행이 되어버렸습니다(자세한 내막은 제 블로그의 ‘자전거 전국여행기’를 참조하시길).

 

마지막으로 얻은 과실은 제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 혹은 세상과 불화하고 있는 것은 왜, 무엇 때문인지 하는 등등의 문제들에 대해 그 본질을 잘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무심하게 걷다 보니 저절로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내, 남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단절하는 길이 아니므로 사람다닌 자욱으로 나눠진듯 보여도 숲은 하나다 - 변산 고사포)

 

내가 타인에게 느끼는 불만은 똑같이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가질 수 있는 불만이요. 각자가 갖는 결함은 그 모양만 다를 뿐,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내가 남보다 조금 더 잘났다 싶어도 길게 보면 오십보 백보요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니며, 머리쓰기나 망치질같은 거라도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하는 구석도 있을 것이므로 결국 피장파장인 셈입니다. 그러니 작은 시비심(是非之心)이란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되었지요. 내 생각의 옮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인정해주는 역설의 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다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만, 욕심의 문제도 매 한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갖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본능이지만, 남의 필요도 인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나눔의 습관이 자연스러워질 것입니다. 나의 필요와 남의 필요가 둘이 아닌 하나로 인식되면서 인간의 욕망이 ‘이성의 그물망’ 안에서 제어되면서 공생, 공존이라는 가치의 규범화와 제도화가 돌이킬 수 없는 큰 원칙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세상을 애써 지옥으로 만드는 무한 욕망의 질주가 사라지고 그 욕망의 힘이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되는 큰 문명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남는 문제는 내, 남이 서로 불화하고 적대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아껴주고 보태줌으로써 하나가 되는, 결국 둘이면서 하나인 인간 존재의 궁극적 단일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적대적 불화는 청산될 것입니다. 그런 이상향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이런 마음가짐을 일반적인 삶의 좌표로 삼고 진정으로 연대(連帶)하는 그런 사회가 된다면, 더러 있을 일탈들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가 한결 웃으면서 살아볼만한 세상이 되겠지요.

이것이 요즘 제가 몰두하고 있는 화두인 '인본세상'의 한 요체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해 봅니다.

 

(삼년산성에서 내려오는 풀길 - 고즈넉한 평화가 아름답다) 

 

저는 그런 것들을 새삼 깨달으며, 진리라는 게 결코 고담준론의 세계에 멀리 있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확신있게 진리로 승인하고 올곧지게 실천하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또 비범한 진실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너무 많은 것을 얻은 여행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런 깨달음이 실천으로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비갠 후의 무지개처럼 금새 사라져버릴 신기루라는 것도 알만한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남은 일은 전적으로 저의 역행(力行)에 달린 것이지요. 이제 수신(修身), 수기(修己)하면서 행하고, 행하면서 수신하는 일을 제 삶의 방편으로 삼고자 다짐해봅니다. 다음에 다시 걷게 되면 그간의 행각(行脚)을 반성하고 되새기는 여정이 될 것이지만, 그 여정은 제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반복되리라는 것이 솔직한 전망입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바보같은 사람은 아니겠지요..

출처 : 김영춘 BLOG
글쓴이 : 아차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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