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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교입문 -발간사,불교란 무엇인가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2. 22. 07:24

 

불교입문 -발간사


여기 불자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삶의 길잡이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이 험난한 세상을 맑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자의 지위를 떠나 무소유와 진리의 삶을 사셨습니다. 부처님의 삶과 깨달음, 그리고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하여 줍니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 욕심을 버리고 가없는 믿음과 바른 공부를 통해 진리를 깨달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제시하신 깨달음의 가르침은 팔만대장경이 상징하듯이 워낙 뜻이 깊고 방대합니다. 그래서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도 막상 '불교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자신있게 대답하는 분이 드뭅니다. 때문에 부처님과 첫 인연을 맺는분들이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자상한 안내서가 있다면 길을 찾기가 한결 쉬운 법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많은 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입문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를 갈망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여망에 힘입어 여러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신도입문서인 '불교입문'을 발간하게 됨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종단에서 최초로 펴내게 된 이 불교입문서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불자가 알아야 할 기초지식들을 간명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불교의식(儀式)과 문화, 상식, 기초교리 등에 대한 설명이 번잡하지도 않고 난해 하지도 않으므로 여러 사찰에서 신도교육 교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교학보다는 믿음과 행(行)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려운 교리공부는 이후에 별도의 교리해설서에 담도록 하고 이 책에서는 부처님의 생애와 불자예절, 기도하는 법, 대인관계 등 믿음과 행으로 불교를 체득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습니다.


셋째, 시대적인 흐름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민족통일, 환경문제, 봉사활동, 성보(聖寶)의 이해와 보존 등은 이 시대 불자의 과제입니다. 불자라면 부처님의 사상을 통해 그 시대에 대한 여러 문제에 해답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입문서에서는 이러한 해답을 다소 부족하나마 불자 여러분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막상 이렇게 입문서를 내고 보니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권의 입문서로 모든 목마름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훌륭한 입문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 불자님들도 이 입문서에 대해 애정어린 격려와 질책, 충고를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이 입문서가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불기 2540년 8월 31일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장 이 성 타

 

 

불교란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였습니다. 종교(宗敎)의 정의는 최고의 가르침 즉, 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주, 교리 그리고 교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종교 중에서 올바른 종교를 찾아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종교나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산, 해, 달, 하늘 심지어는 태풍에도 신이 있다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에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신이 인류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이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이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입니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종이기에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와 동시에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를 부정하고 󰡐인간이 무엇이며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하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그 결과 인류에게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 정립되었습니다. 하나는 신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입니다.


신을 믿는 종교는 세계가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 또한 그러하다고 합니다. 신의 종교는 대체로 서양의 종교관 입니다. 서양의 종교는 절대적인 신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러나, 서양은 교통과 통신 즉, 과학문명의 발달로 다른 세계와 접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은 신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 그 자체에도 있음을 알게 되어, 생각의 편협성을 인정하고 마침내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러한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의 역사에서 더욱 빛이 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불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불교의 교리와 사상이 설사 어렵더라도 불교의 진리야 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알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의 진리}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교주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불(佛)󰡑이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를 소리내어 읽은 음사로 󰡐깨달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깨달음이란 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성불(成佛) 즉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고 이 깨달의 경지는 신조차 초월하는 경지인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많은 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사천왕으로 사천왕은 늘 하늘에서 산다고 합니다. 이 사천왕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부처님께 귀의하여 영원토록 정법(正法)을 수호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도량(사찰)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하늘의 신마저도 감동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경지마저도 뛰어 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불교의 진리는 우리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준다고 합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정진하는 사람은 깨달음의 진리에 언젠가는 도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진리를 알고 행하며 사는 것은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입니다. 불교는 바로 부처님이 깨달으셨던 이 깨달음의 진리의 길을 제시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르고 사는 인생}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인생을 궁금해 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칩니다. 한 평생을 목숨 걸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말은 쉽게 하지만 태어난다는 일만을 생각해도 고생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겪는 작은 상처에도 사느니, 못사느니 합니다. 그리고 큰 병고에 시달리든가 평생을 함께 의지하던 이의 이별과 죽음에 부딪쳤을 때 오는 고통과 마음의 아픔은 눈물로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돌아보면 인생의 많은 시간은 즐거움 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나날입니다. 환희의 시간은 기억에 없고 오늘도 정해진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이 길을 왜 가야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인생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 같이 어림 짐작으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인생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웃고 즐기며 삽니다. 이렇게 인생을 모르면서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인생 역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 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입니다. 즉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은 계속 그 행동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에게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조용한 광야를 걷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어 급한 나머지 그 속으로 들어갔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 그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 내려 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밑에는 다시 무서운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가 아직도 우물 밖에서 성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칡넝쿨에만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위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물 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사람을 노리고 있지 않은가. 온 몸에 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며 칡넝쿨을 잡고 위만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나타나 칡넝쿨에 집을 지었다. 그러면서 꿀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데 그는 꿀 맛에 취해 왜 꿀을 더 많이 떨어뜨려 주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져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무성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합니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을 의미하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慾樂)을 말합니다. 오욕이란 재물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애욕, 먹을 것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욕망, 편안함의 추구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채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욕망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욕망으로 인해 성취하는 것보다 욕망 때문에 잃는 것이 더 많습니다. 눈 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욕심은 지혜를 흐리게 합니다. 이러한 장애를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하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이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


우리는 때때로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왜 사람이 이렇게 많냐󰡓고 짜증을 내는사람을 보기도 하고 스스로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그곳에 있어 더 복잡해졌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먹을 것이 있어도 자기만 먹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지옥의 숟가락은 너무 길어 자기 것으로 제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를 원망하면서 굶주리고 산다. 눈 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말이다. 그러나 극락에 있는 사람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먹을 때는 서로서로 옆 사람에게 먹여 주면서 산다고 한다. 이곳 사람은 지옥에 있는 사람과 다르게 서로 먹여 주며 언제나 화합하고 배부르게 산다.


이것은 지옥과 극락에 대한 비유이지만 오늘날 우리들 삶을 돌아 볼 때 귀중한 교훈이 됩니다. 자신만을 위해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가 대조적으로 나타납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 하는 삶으로 전환할 때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입니다. 즉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세계의 변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불교}


불교는 믿음과 수행을 함께 가지고 있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과 믿음을 함께 가진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불교는 수행체계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전환시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바꾸게 하는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탐욕과 어리석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주 작고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면서도 󰡒왜 그럴까󰡓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단지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바른 이해를 통해 나쁜 습성을 고쳐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은 고행과는 다릅니다. 고행은 혹독한 시련을 통해 자신을 단련시키지만 수행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탐욕과 어리석음에 물든 자신의 잘못된 습성을 좋은 습성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시작한 불교는 소승, 대승으로 발전하였고, 그것이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다양한 종파와 선사상을 형성하면서 전개되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교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수행체계를 형성하면서 수 많은 민간신앙을 불교 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모습은 믿음과 수행을 갖추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길}


바른 생각에서 바른 지혜가 나온다고 합니다.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자신과 세계를 통찰할 때 지혜가 생기며,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생각이 넓어 질 때 지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를 말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지혜의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명(無明)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비록 원수 사이이더라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거나 욕심을 버리면 함께 차 한잔 나눌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입니다. 화가 났을 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화가 난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만 자신에게도 얼마쯤의 원인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상대방이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 해주지 않았거나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경우 화가 나는데 이러한 화가 남은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 부질없는 일이 되었을 때 돌아보면 자신이 낸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에 집착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무명(無明)입니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남을 나처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라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고는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경과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은 자신과 타인에게 고통과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한 행동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세상을 보면 지금까지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불교는 이러한 세계를 열어 주며 그 길을 함께 가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참 나를 찾아서}


어려운 처지에 처해 고민하고 괴로워 할 때 그것에서 구해줄 사람을 만나면 기쁠 것입니다. 그리고 어두운 밤에 피곤한 몸으로 길을 갈 때 함께 갈 길동무를 만나면 고마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이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서 진리를 가르쳐 자유롭고 편안한 인생이 되게 합니다. 인생에 새로운 가치에 눈 뜰 때 삶이 변합니다. 따라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었을 때 인생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잠 못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법구경》


사람이 전생의 업을 다하고 악도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우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법을 만나기 어려우며, 부처님 법을 만났을 지라도 수행자를 만나기 어렵고, 수행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신심을 내기 어렵다.《십이지장경》


우리의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을 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이 가시덩쿨에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고 결국에는 낭떨어지에 떨어지게 되는 격입니다. 즉, 우리들이 불타는 집과도 같은 이 세상을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대한 탐욕을 져버리지 못한 탓입니다.


부처님께서 어느날 숲 속에 있는 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 때 젊은이들이 숲 속에서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부처님을 보고 그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 즉 그들은 이 지역에 사는 지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인데, 오십 명이 저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이를 왔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미혼자만은 기생을 데리고 왔었는데, 모두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그 기생은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 연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놀이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잊어 버리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리하여 그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사분율 제32권》


이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의 세계로 달려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설하시며,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어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 옷을 헌 누더기 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처럼 보아《사십이장경》󰡑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즉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시며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못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고려시대 야운스님은 당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 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자경문》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衣食)이 부족하고,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은 정진에 의하여 일어나나니,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족해 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정진하면, 법을 모두 성취하여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나니, 모두가 정진에 의해 이루어지느니라.≪보살본행경≫


일상적인 삶을 살면서 불교를 알고자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자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를 믿고자 하는 발심(마음을 냄)도 중요하지만 그 발심한 마음으로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생활 속 정진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은 근본이니, 진여(眞如)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는 것이며,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 부처님을 따르는 제자(僧)에 귀의하여 올바른 믿음으로 항상 정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원효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았으면서도 한평생을 닦지 않았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 것인데 다음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은가.


바른 믿음의 정진은 생활 속의 수행과도 같습니다. 불교의 수행은 하심(下心, 자신을 낮추는)의 공부입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 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맞출 수 있을 때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바른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루하루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매 순간 욕망이 싹트고 주위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하여 잘못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승기신론≫에서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은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게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고 하였습니다.


참회(懺悔)는 수행의 중요한 길이라고 합니다. 󰡐참(懺)󰡑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입니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그런 악업을 짓지않도록 하는 것이며, 󰡐회(悔)󰡑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사람에게 허물이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하여, 허물을 스스로 고쳐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道)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고자 하는 첫 마음을 간직하고 변함없이 정진해 가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생각이 많아져서 정말로 괜찮은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죽림정사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소오나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 끊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서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이런 소오나의 마음을 보시고는 한 비구에게 소오나를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소오나, 너는 세속에서 거문고를 잘 탔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 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잡아함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후 소오나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阿羅漢)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소오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쉼없이 바른 믿음으로 정진하면 비록 힘들고 어렵기는 하겠지만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불교적인 삶}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깨달아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이는 바른 믿음과 생활 속의 바른 행을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로서 지켜야 할 실천덕목으로 오계(五戒)를 말씀하셨습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不偸盜)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淫)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음주를 하지 말라(不飮酒)


오계는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업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지 말라󰡑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계는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경우 모든 생명은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니 본래 이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매에게 쫓겨 피해온 비둘기 대신 자신의 살점을 뜯어 주었다는 자비심이야 말로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의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이 오계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가장 안온한 공덕이 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청정한 계를 가지면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와 선정의 온갖 공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즉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禮)로써 그 뜻을 표합니다. 불교에서는 스님 또는 법우를 만나게 되면 합장으로 예를 표합니다. 열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하고 양 손바닥을 맞대어 흩어진 마음과 생각을 집중합니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입니다. 큰 절이 아니더라도 합장은 나의 마음을 뜻하며, 더 나아가 너와 나의 마음이 하나의 진리 위에 서로 만났음을 뜻하는 동시에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의식 속에는 자신을 낮추고 덕 높은 스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수행의 방법으로 매일 백 팔배를 하면, 항상 교만심을 버리고 하심(下心)을 하여 남에게 성내지 않고 좋은 태도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공양 전후에 언제나 합장하며 󰡐이 음식에 깃들인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읊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므로 다른 사람에게 해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워 질 것입니다.


그리고 불공(佛供)을 할 때도 부처님을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불공을 올림은 일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며 열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또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뜻도 담겨 있기에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는 일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씨를 베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이 세상을 더욱 맑고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에서 발원을 할 때도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것보다는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하여야 합니다. 아울러 모든 번뇌를 여의고 하루 빨리 부처님의 법을 익혀 깨닫도록 발원함이 참다운 불자의 발원입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나를 부를 때는 반드시 그곳에 가서 구해내리라.󰡑는 관세음보살의 발원과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모두 구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발원이야말로 참다운 발원인 것입니다. 현실에서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을 덜어 주고자 커다란 원을 세우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실행해 가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불자의 수행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나는 이에게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는 모습, 공양을 하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불공이나 발원을 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생각하는, 주위 사람을 부처님이나 스님들을 공경하듯 하는, 이한 자세가 마음에서 우러나와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더불어 이런 자세를 간직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화합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가족끼리 사랑하고 화목을 이루며 넓게는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며 살아갈 때, 마른 풀이 수미산 같이 쌓여 있더라도 겨자씨 만한 불똥 하나로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마한 신행의 촛불이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의 세계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환상의 C조
글쓴이 : 얼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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