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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승 달라이 라마와 텔레파시로 통합니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2. 22. 07:25
“스승 달라이 라마와 텔레파시로 통합니다!”
19년째 히말라야 다람살라에서 수행 중인 청전 스님
金容三  TOP CLASS 편집장  
  티베트 망명정부의 수장(首長)이자 티베트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 라마와 사제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인 스님이 있다. 1987년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난 청전(淸典) 스님은 20년 가까이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수행 중이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북인도 히말라야 산자락의 다람살라에서 잠시 귀국한 청전 스님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만났다.
 
  불타는 단풍이 누런 낙엽이 되어 길가에 뒹구는 찬 기운에도 불구하고 청전 스님은 길상사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 촬영에 응했다. 포즈를 취하면서 청전은 “천 장 만 장 사진을 찍어도 진짜 내 모습은 못 찍어요”라고 했다. 우리가 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껍데기요, 허상일 뿐이라는 뜻이리라.
 
  청전은 만나는 사람마다 “현역 갔다 왔냐?”고 묻는다. 대학생 때 유신 반대 운동을 하다 강제 징집되어 힘든 군 생활을 했다고 한다. 청전의 젊은 시절 꿈은 선생님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전주교대에 입학했는데, 얼마 후 10월 유신이 터졌다. 그는 유신 반대 전단을 돌리다 발각돼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더 이상 교대를 다니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사회 정의를 실천한다는 생각에서 신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광주 대건신학교(현재의 광주가톨릭대)에 입학했다.
 
  어느 날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징집영장이 등기로 배달됐다. 7사단 최전방에 배치된 청전의 임무는 지뢰를 탐지하고 매설하는 전투공병이었다. 6·25 때 묻어 둔 지뢰를 잘못 건드려 죽은 시신을 처리하기도 했다.
 
  1977년 제대 후 다시 대건신학교에 복학했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우연히 <선가귀감>(禪家龜鑑)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중기의 승려 휴정(休靜)이 쓴 불교 개론서였다. 그 책을 펼치니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니’(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란 구절이 그를 사로잡았다.
 
  여러 날 가슴앓이 끝에 그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송광사의 구산 스님을 찾아갔다. 구산이 청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학생은 전생에 천축국(인도의 옛말) 고행승이었는데 헛된 곳에 가서 헤매고 있군”이라고 했다. 그 말이 그의 심장을 후벼 팠다. 모든 번뇌의 실마리가 풀리는 것 같았다.
 
  청전은 신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송광사에 입산했다. 그가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고 승려가 된 것은 그로부터 14개월 후였다. 스승인 향봉 스님은 그에게 청전(淸典)이란 법명을 주면서 “너는 생각이 많아 공부하기 어렵겠다”고 했다.
 
  출가 후 청전은 전국의 이름난 선방을 두루 다니며 10여 년 수행을 했지만 갈증만 더해 갔다.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며 절망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풀기 위해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로 떠돌았다.
 
  마지막으로 히말라야 산자락의 다람살라를 찾았을 때 마침 달라이 라마는 하안거(夏安居)를 맞아 막바지 수행 중이었다. 비서에게 “한국에서 수행을 하는 비구인데, 달라이 라마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전했다. 하안거가 끝난 다음 날 어렵게 달라이 라마와 친견 시간이 마련됐다. 1987년 8월 1일의 일이다.
 
 
  놀라운 체험
 
스승 달라이 라마(오른쪽)와 함께 있는 청전 스님.

  맨발에 샌들 차림의 달라이 라마가 활짝 웃는 표정으로 “한국에서 왔다고?”라며 반갑게 청전의 손을 잡았다. 순간 감전된 듯 청전의 몸이 정화되는 강렬한 느낌이 왔다. 청전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다니던 15가지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그는 달라이 라마에게 “지금 내 앞에 앉아 대화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 달라이 라마는 “나는 공(空)이지요. 다만 세속에서는 나를 14대 달라이 라마라고 부릅니다”라고 답했다. 그 말에 청전의 인생이 달라졌다. 그 길로 청전은 다람살라, 달라이 라마의 한식구가 됐다.
 
  그 후부터 청전은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처음 티베트 사원에 들어가 절을 했는데, 버터 냄새 비슷한 냄새가 무척 친근했다. 송광사에서 수행할 때 한국 승려들과 다른, 빨간 승려복을 입고 수행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티베트 사원에서 나는 그 냄새, 그 승복….
 
  다람살라에 도착한 지 보름 만에 말문이 터져 티베트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신기했다.
 
  그때부터 청전은 달라이 라마의 한국어 통역이 됐고,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길 때마다 달라이 라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과정에서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됐다.
 
  청전이 다람살라에 둥지를 튼 지 벌써 19년째다. 다람살라에서 청전은 ‘의사’로 통한다. 수행 중 환자를 치료하는 능력을 얻었기 때문이란다. 언제부턴가 청전은 사람을 볼 때마다 어디가 아픈지, 무슨 기관의 밸런스가 깨졌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달라이 라마께 의논을 하자 “돈, 명예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도와주라”고 했다. 티베트 불교의 기본은 자비심이니,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것이 수행자로서의 의무라는 것이었다.
 
  티베트에서 수행한 지 만 17년째인 2004년, 청전은 달라이 라마에게 “이제 다람살라를 떠나겠습니다”고 하자 “아직 떠날 때가 아니다. 다만 여름 6개월간은 자유롭게 생활하되 겨울 6개월간은 다람살라에서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전은 달라이 라마를 직접 만나 구체적으로 가르침을 받을 뿐 아니라 텔레파시로도 수시로 대화하는 사이라고 한다. 과연 텔레파시란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이 가능할까. 이런 세속적 질문에 청전은 “수행의 경지에 오르면 묵언으로 먼 거리에서 전화하듯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청전은 15세기 초 티베트 불교의 개혁자인 총카파가 쓴 불교서적 <람림>(Lam-rim)을 번역,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했다. 티베트어 ‘람림’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단계적 수행이라는 뜻. 달라이 라마가 설법할 때 주로 인용하는 경전으로, <람림>을 번역하겠다고 하자 달라이 라마는 “그래. 그게 네가 할 일이다”라며 반겼다고 한다. 달라이 라마는 <람림>을 가지고 설법할 때 깊은 진리의 세계에 빠져 눈물을 흘리곤 했단다. 청전은 달라이 라마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대목마다 ‘달라이 라마가 이 대목에서 낙루했다’는 메모를 해 놓았는데, 원전을 번역하다 보니 달라이 라마가 왜 이 대목에서 감동했는지 깊이 이해하게 됐다는 것.
 
  달라이 라마는 얼마 전 청전에게 “이제부턴 공성(空性)에 대한 의미를 파헤치도록 하라”는 화두를 내렸다. 공의 의미, 그러니까 깨달음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라는 뜻이 아닐까…. 그 마지막 단계의 수행을 위해 청전은 다시 다람살라로 떠났다. ■

출처 : 환상의 C조
글쓴이 : 얼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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