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 2 국내에서 농민들이 징용되고, 마침내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일 강이 증수하여 경지가 물에 잠기게 되는 기간 동안 농민들은 피라미드 건설에 종사하였다. 노동자들에게는 주거와 의복, 식사가 제공되고, 피라미드 건설은 농한기에 실시되는 국가 사업이었다. 또 나일 강 수위의 상승은 석재를 운반하기에 적합하였다.
석재의 운반에는 나무로 만든 썰매가 사용되었다. 돌을 어떻게 해서 쌓아 올렸는가는 피라미드의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인데, " 경사로를 이용했다는 것이 유력한 주장이다.
- 피라미드 축조술을 둘러싼 논란
피라미드를 연구하다보면, 간혹 이런 의문점에 부딫치게 된다. 왜 하필 그곳에 만들었으며 도데체 만든 목적은 무엇일까?
이전에 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의 신분은 노예가 아니라, 일반 평민과 좋은 대우를 받은 기술자들이라는 주장을 소개한 바 있다. 물론 고대시대 일반인들은, 전체적으로 최고 지배계층의 잠적적인 노예상태로 볼 수 있긴 하다.
하지만 최소한의 생존권이라던가 재산권, 정치에 직간접 적으로 참여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지 재산의 가치로만 평가되던 노예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따라서 이러한 평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대우는 물론이고 불만을 최소화 시키면서도 공공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파라오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피라미드 건설이 결정되면, 재상을 축으로 모든 관료들과 신관들이 모여 전체적인 운영 계획과 공사 일정 등을 하는 것으로 대공사의 막은 오른다.
피라미드 건축의 가장 기초적인 목적은 파라오를 신격화 시키기 위한 무덤조성공사이지만,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그것만으로는 수많은 사람의 불만을 억제할 수 없다.
따라서 공사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기 위해 측량 기사와 건축가 · 천문학자 · 수학자 · 지질학자등의 전문가들은 신속하게 기본 설계도를 작성하게 된다. 다만 이들 전문가들은 대부분 신관신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피라미드 축조를 들러싼 논쟁
이집트인이 사용한 공구는 단단한 돌덩어리, 나무에 묶는 원형 망치나 도끼류, 날카롭게 갈은 칼과 같은 돌 종류와 동과 은 금속류로 만든 칼이나 가위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런 원시적인 공구로 대형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또 고대 이집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돌 항아리의 숫자와 가공 기술을 근거로 특수한 기술을 가진 공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피라미드의 건설에 사용된 돌덩어리의 거의 대부분이 석회암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석회암은 석화물질이 물밑에 쌓여 굳어진 퇴적암으로, 경도가 가장 무른 활석 다음으로 가공하기 쉬운 재료다. 따라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초보적인 공구로도 충분히 자신들이 원하는 규모로 재단하거나 가공할 수 있다.
한 예로, 시카고 대학의 레너 교수는 50명도 채 안되는 인원과 3주일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0.75톤에서 3톤에 달하는 1백86개의 돌로 8층짜리 피라미드를 고대의 연장만으로 건설했다. 즉, 고대인들이 충분히 피라미드를 고대의 공구만으로도 건설할수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확인을 했다.
어떤 사람은 피라미드 안에 단단한 화강암이 사용됐는데, 이것을 어떻게 가공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화강암도 돌의 형태와 결을 잘 알면 쉽게 가공할 수 있다는 것을 석공들은 잘 알고 있다. 화강암이 석회암 보다 단단한건 사실이지만, 화강암은 6각의 얇은 판모양의 운모, 기둥 모양의 석영, 두꺼운 판모양의 장석 등3가지 성분이 비균질적으로 섞여 있어, 어떤 때는 화강암이 설탕처럼 쉽게 조각나기도한다.
쿠푸왕의 치세가 시작되고 나서 17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높이까지 건조된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의 높이는 146.5m이므로 완성되기까지는 20여년 정도가 걸렸을 것이다. 왕은 나일강의 증수로 경지가 물에 잠기는 시기에 농민을 노동자로 고용한 것이다. 농한기에 식량과 의복, 일을 지급한다는, 말하자면 일종의 실업 정책인 것이다.
피라미드는 마치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자대지의 단단한 암반 위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50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조는 파라오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에 즉위하면 곧바로 착공을 시작했을 것이다.
우선 건설지가 선정되고, 설계도나 축소 모형도 작성되었다. 장소가 결정되면 우선 기초 다지기부터 시작하고 수로를 사용하여 암반을 수평으로 하고, 별을 관찰하여 정확한 방위를 측정하였다. 피라미드 면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피라미드의 건재는 주로 석회암이었는데, 부분적으로는 아스완산 화강암도 사용되었다. 석회암은 기자 부근의 투라에서 좋은 질의 것이 채굴되었다. 대 피라미드는 약 270만개로 어림되는 석재를 사용하였다. 돌을 파 내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을 것이다. 청동제의 끌과 쇄기로 돌을 파내고, 현장에 운반되고 나서 모양이 다듬어 졌을 것이다.
썰매에 실린 석재는 기울기 10분의1(10m 에 1m 오르는 기울기)의 경사로로 운반되고, 위치를 결정할 때에는 산륜이 사용되었다. 기울기는 항상 일정하게 되도록, 높이가 높아지면 경사로의 길이도 연장된다
내부의 구조도 돌을 쌓아올리면서 만들어 나갔다. 정상에 캡 스톤을 끼우면,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쌓아올린 석재를 발판으로 하면서 단을 깎고 표면을 연마하여 마침내 피라미드를 완성시킨 것이다.
여기까지가 주류학계가 주장하는 가장 현실적인 피라미드 건축법이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반론
주류학계에서는 왜, 피라미드의 건축자인 파라오 쿠푸가 암석을 사막에 있는 공사장으로 운반하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못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설득력이 부족한 반론이다.
이집트 사람들은 예로부터 나일강변에 인접한 땅을 ‘검은 땅’(고대 이집트어로 ‘케메트’)으로, 그 너머의 사막을 ‘붉은 땅’(‘디세레트’)으로 불렀다. 그리고 피라미드가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던 고왕국古王國 시대(B.C.2686~2181)의 수도인 멤피스와 인근지역이다. 따라서 상징성을 부각시키고 공사에 편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집트의 가자지구가 가장 적합하였다.
그러나 방위각 즉, 정확한 북쪽을 별의 움직임으로 단순한 눈짐작으로 측정하였다는 이론은 문제가 있다. 차라리 태양의 그림자를 보고 측정하는 편이 낳앗을 것이다. 물론 하루 아침에는 안되겠지만, 동서의 방향만 정확하다면 남북의 방향은 그 중간지점을 십자로 연결하기만 하면 됨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
네모난 석재를 경사각에 이동시켰을 때는 나무 도르레를 이용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이집트에서 주로 자라던 몇 그루 안 되는 종려나무를 벌채해서, 그것을 가공해 미끄럼 도르래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종려나무의 열매는 식량은 물론 뜨거운 태양볕 아래 휴식공간으로 반드시 필요하였는데, 과연 대량의 벌체를 감행하였겠냐는 것이다.
외국에서 나무를 수입한다고 하여도, 기원전 2500년에는 그러한 무역항해술이 발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고려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우선 굴림대, 나무 썰매, 뗏목, 버팀목 등을 만들어 조달하는 인원이 필요한데, 어림 계산으로도 족히 10만 명은 필요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목재들을 주변에서 절목해 운반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인원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또, 피라미드로 돌을 운반하기 위해 10:1 의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었다면, 거기에 소요되는 석재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든 석재의 7배 이상이나 된다. 보조 석재를 줄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해도 어쨌든 추가로 최소한 두 배의 인원이 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각종 식량 조달자나, 의료 및 의복관계 종사자들까지 고용하였다고 주장하여, 최대 고용인구가 50만명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주장은 문제점이 있다.
왜냐면, 이들은 수도 멤피스에 살면서, 피라미드 공사가 있을 때 수시로 동원될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고대의 인력동원을 현재의 고용의 수준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가장 문제가 되는 주장은 돌의 무게가 평균 2,5톤 정도인 것으로 보고 추정한 것이다. 실제 2.5톤은 작은 돌의 무게이며, 이보다 더 무거운 돌들이 피라미드 내부 곳곳에 사용되었다. 특히 왕의 현실로 알려진 곳을 구성하는 개당 70톤에 이르는 100개의 석재는 다른 작은 돌들과 같은 석회암이 아니라 화강암이다.
그리고 비록 단단한 암반위에 세워졌다고는 하지만 대피라미드는 오늘날까지 침하된 정도는 5mm 정도라고한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에서 대형 빌딩에 적용하는 지반 침하 기준인 100년간15Cm 와 비교해보면 그 건축 연대를 고려할 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수치임을 알수 있다.
오늘날 지어지는 일반적인 건물의 건축에도 1% 정도의 훨씬 큰 오차가 적용된다. 그러나 이집트의 대피라미드는 0.1 % 이하다
따라서 레너 교수는 초소형 피라미드를 만든 것 만으로는 작은 규모의 피라미드 축조는 설명할 수 있지만, 초대형 피라미드를 전체적으로 설명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대피라미드에는 무려 70톤이 넘는 돌들이 많이 사용된 반면, 그는 고작 최대 3톤 정도의 돌들을 사용했을 뿐이다. 대피라미드가 230만 개의 돌로 140m 높이의 거대한 건축물인데 비해 그는 수미터에 불과한 모조품을 만들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을 부정하는 것은, 그 이론을 정립하는 것 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라도 직접 참가하지 않은 이상 단점은 있다.
따라서 학계가 주장하는 학설에 일부 문제점이 있다고 하여 그것을 전면 부인하거나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만 이해 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더욱 편협한 시각을 제공할 것이다.
비록 정확한 축조 방법은 여전히 베일에 쌓여 있지만 고대의 이집트는 일찍부터 거국적으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정확하고 체계적인 호구 조사를 하였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의 영혼 불멸과 우주로의 여행을 도와 이 세계의 질서와 안녕을 수호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 피라미드 건설에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참가했을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든 피라미드들 나일강변 서쪽 연안의 푸르른 농경 지대와 그 외곽에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사막 지대와의 경계선 상에 정확하게 늘어서 있다.
온국민의 지혜와 힘을 모아 이같이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하고 신기술과 신지식을 계속 개발 · 축적하여 웅장한 피라미드들을 차례차례 건설해 가면서, 이집트는 오랫동안 파라오 통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고대국가의 기반을 완성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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