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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 1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09:51

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 1

 이집트 사막위에 우뚝솟은 고대의 신비로움 피라미드 .... 현재 피라미드에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의문점이 해결된 상태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 건축물에 대해 신비로움과 불가사의가 남겨져 있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이 위대한 건축물에 대해 수천년간 유지되어 왔던 편견이 있었다. 바로 이집트의 지배계층이 수천, 수만의 노예를 동원하여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견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역사의 아버지로까지 불리우는헤로도토스(H?rodotos 484?∼425?)  였다.

 그리스의 역사가로 페르시아 전쟁사를 저술하는등, 역사학에 있어 최초라는 타이틀이 삶과 저술활동 곳곳에 붙는 그였기에 오랜세월동안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그의 주장을 믿어왔다

그는 젊은 시절에 이집트를 관광하면서 사막 곳곳에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피라미드를 보고 , 피라미드와 나일강에 관한 이야기를 그의 대표작인 [역사]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여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 널리널리 알렸다.


그런데 그는 이 과정에서 쿠푸왕의 “대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20년 동안 매년 10만명의 노예들이 동원되었다는 현지 안내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기록하게 되었고, 서양 역사학의 고전인 그의 저서를 통해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즉 그는 아마추어 안내자에 불가한 사람이 말을 아무런 고증이나, 연구과정없이 수록한 것이었다.  

 물론 헤로도토스의 대표작인 [역사]에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식견을 보여주는 훌륭한 서술이 많이 들어 있다. 특히 각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상호 연관시켜 종합적으로 서술하는 데 능했던 그는 나일강이 이집트의 역사와 문화에 미친 절대적인 영향력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아무튼 그의 주장대로,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지 안내자의 말대로 정말 노예노동을 통해 피라미드가 건설되었을까? 우선 현지 안내자는 지리에는 익숙할지 몰라도 역사나 건축술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를 둘러보던 시기는 피라미드 건축이 중단된지 2000년 가까이 지난 후였다. 따라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이야기가 정확하다고 보긴 힘들다.

 그렇다면 기원전 2500년에서 2000년 사이 피라미드가 집중적으로 조성되던 시기, 이 초대형 건축현장에 동원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 시기는 고대 이집트에서도 초기에 해당하는 고왕국 시대의 제3~6왕조 로, 이 때의 이집트는 나일강 하류 일대의 강변 양쪽에 자리잡은 왕국이었다. 물론 당시로서는 상당히 거대한 왕국이긴 하였지만 정복전쟁을 벌인만큼 전투적이거나 왕성한 활동을 보이진 못하고 있었다. 

 고대의 역사에서 노예는 대부분 정복 전쟁을 통해 사로잡힌 이민족 포로들이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 나라 사람들 중에서 각종 범죄로 인해 노예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노예를 구성하는 대다수는 역시 점령당한 지역주민이거나 전쟁을 통해 사로잡힌 포로였다. 그런데 이집트가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 드넓은 영토를 획득하면서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피라미드가 집중적으로 건축된 시대보다도 1000년 정도 뒤인 신왕국 시대의 일이다.
  이 때에는 상당히 많은 이민족 노예들이 이집트로 끌려오기도 하였지만 피라미드가 건축되지는 않았다. 결국 이런 역사적 고증을 살펴 볼 때 노예노동에 의존해서 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노예가 아닌 누가 피라미드를 건설했던 것일까?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1990년에 대피라미드로부터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노예의 마을, 또 다른 계층의 존재


 처음 이곳이 알려진 것은, 피라미드 내의 각종 휘귀유물들을 훔쳐내는 도굴범들이 소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전문적인 도굴범들이 주로 행하였지만, 그것이 값나가는 것임이 알려진 뒤로는 현지주민까지 합세하여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집트 당국은 더이상의 도굴및 문화재 밀반출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정비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노예의 마을' 로도 불리는 이곳이 고고학적으로 매우 연구가치가 있는 곳임이 밝혀짐에 따라 집중 발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발굴하자마자  피라미드 건축의 비밀을 풀어줄 각종 유물과 단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피라미드 건축에 사용된 각종 생산 도구는 물론 총 600여개가 넘는 무덤들이 발굴되었는데, 바로 지금으로부터 4600년 전 대피라미드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그리고 무덤으로부터 1000여구가 넘는 노역자들의 유골이 수집되어, 마침내 누가 피라미드를 만드는데 동원되었는지 밝혀지게 되었다. 

 우선 40세 정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두개골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두개의 구멍을 찾아내었는데 물론 당시에 정확한 병명을 알고 치료하지는 않았겠지만 외과시술의 흔적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그리고  노역자 마을의 1000여구의 시신을 모두 분석하고 통계를 내본 결과,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거의 같다 사실이 밝혀졌다.
 고대 노예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성과 여성을 분리하여 수용하는 것이 보통이며, 설령 여성의 유골이 혼합되어 발견된다 하더라도 남성의 비율이 앞도적으로 더 많다.

따라서 노예의 집단촌으로 보기는 힘든 것이다.
 또한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단순히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전문 인력들이었을 가능성이 오히려 더 크다. 피라미드 건설에 참가한 일반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숙식제공외에 어느정도의 헤택이 돌아갔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마을에 사는 전문인력의 경우 상당한 대우를 받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이들은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재산도 사유하면서  국가로 부터 합당한 임금을 보장받는 제 2의 중산계층으로 존재 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지급되는 기초적인 숙식제공도 매우 환영받는 일이다. 특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나일강의 범람기에 공사를 집중시킴으로써, 기근등으로 인한 이집트인의 동요를 막고, 하나의 목표를 향한 성취감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즉 고대의 임금체계나 노동동원 체제를 현재와 같은 수준에서 비교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농한기 때 기초적인 숙식을 제공받는 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며, 그리하여 자발적이고도 건강하게 피라미드 건축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언급되야만 하는 것은, 피라미드는 그 원래의 목적과 용도가 무엇이든 당시 이집트인들 공공의 신성한 건축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신성한 건물을 노예의 손으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주장일 수 있다. 현재에는 이 피라밋 건설이 공공근로 개념이었다는 학설에서, 국가적 잉여 노동력 활용정책이었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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