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제우스 페리클레스
독재자인가 아니면 진정한 민주주의의 지도자인가에 대해 수천년간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페리클레스, 하지만 그 어떤 논쟁보다 '지상의 제우스'라는 비유만큼 그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은 찾기 힘들 것이다.
|
페리클레스 Perikles (BC 495?~BC 429) |
키몬과의 정권투쟁
흔히 고대 그리스의 정치제도라면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전통적인 귀족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특권층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의 귀족정을 이끌고 있던 키몬(Cimon BC 510?∼BC 449?)은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 밀티아데스의 아들로, 그 역시 페르시아전쟁에 참전하여 BC 480년 살라미스해전에서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 BC 478년 장군으로 선출된 이후 델로스동맹 결성에 이바지하였으며, BC 468년엔 에우리메돈강 입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대파하는등 그 명성과 업적은 페리클레스를 압도하고 있었다.
특히 키몬은 귀족의 정치적 법적 특권을 지키기 위해 아레오스파고스 회의를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반페르시아와 친스파르타와 정책기조를 추구하였다.
그에비해 페리클레스는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군사적 경제적 기반을 물려 받은 구 귀족 출신이긴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귀족정으로부터 다소 소외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파들과 영합할 수 있었다. 또 그의 아버지역시 BC 484년에 도편 추방(陶片追放;osracism)을 당했던 경험이 있던 만큼, 대중의 불신과 투표성향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
도편추방제란 도자기 파편에 추방자의 이름을 쓴 후 비밀투표로 이루어 지는데, 6천표 이상이 넘으면 표결처리되며 이 경우 추방기간은 통상 10년 정도였다. 문제는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웅변술과 적당한 대의명분이었다.
그는 우선 BC 463년에 키몬이 마케도니아를 정복할 기회를 태만하게 지나쳤다는 죄목으로 고발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처럼 민주파와 귀족파가 다소 대립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을 때, BC462년 키몬은 스파르타에서 일어난 노예반란 진압을 돕기위해 아테네를 비우고 만다.
이것은 무력기반이 다소 부족하였던 페리클레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아레오스파고스 회의를 정지시킨다음 민회와·시민재판소·500인회의로 권력을 이양시키는 개혁정치를 단행하였다.
또 페리클레스는 대도록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주정을 실현하기 위해, 시민재판소 심판인에 대한 일당지급을 도입하고 아르콘의 취임자격을 시민 제3급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추첨을 통해 관리로 선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페리클레스는 정치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것은 키몬이 축출당함에 따라 스파르타와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는데, 아테네의 무력기반을 담당할 사람으로는 페리클레스외엔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리클레스는 당시 아테네 민주정의 지도자였던 에피알테스를 지원하는 한편, 외부의 정치와 무력적 위협으로부터 아테네의 민주정을 보호해 나갔다.
어제의 적 오늘의 친구
BC 461년 불행한 일이었지만, 또한 페리클레스에겐 기회가 되었던 에피알테스의 암살 사건이 일어난다. 그가 이 암살사건이후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전면에 나설 수 있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집권은 다른사람의 집권과는 다른 것이었다. 마치 제우스가 번개를 손에 넣었기 때문에 신들의 제왕으로 굴림할 수 있었듯이, 페리클레스에겐 군대라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군사업무에 치중하는 한 정치일선에 나서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누군가는 군사업무를 분담해 줘야 했지만, 그것은 아테네의 안보와 직결되는 일이기에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주목하였던 인물은 키몬이었다. 비록 정치적 노선이 다르긴 하였지만, 페르시아 전쟁당시 키몬이 보여주었던 능력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또 반스파르타와 반페르시아의 양면정책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반스파르타 정책에 보다 비중을 두고 있었다. 그것은 대륙너머에 있는 페르시아보다는, 바로 이웃하고 있는 스파르타의 봉건제 확산이 아테네 민주정치에 보다 위협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반드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할 사람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우선 스파르타를 견제하기 위해BC 454년 델로스섬에 있던 금고를 아테네로 옮겼다. 델로스섬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폴리스 국가의 평등함을 상징했지만, 아테네가 그것을 가져옮으로써 델로스 동맹의 주도권을 장악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미 BC 457년 사면령을 받은 키몬을 귀국시키는 것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이제 키몬이 반페르시아 전쟁을 담당하게 되면, 페리클레스가 구상한 정치의 큰틀은 완성되게 되지만, 문제는 언제든 키몬이 그의 정치적 생명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 부모를 둔 사람만이 아테네 시민권을 갖는다는 법률을 BC 451~450년에 통과시켜, 외국인 어머니를 둔 키몬을 견제 하였다. 또한 이법 아테네 시민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선전하고, 또 외부세력의 침투를 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좋은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던 키몬이 BC 449년 무렵 키프로스 원정대를 이끌고 페르시아군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전사하고 말았다.
키몬이 사망은 페르클레스로서도 큰 위기였다. 그동안 줄기차게 진행되던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더이상 수행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정책을 폐기하고 정식으로 ‘카리아스의 화약(和約)’을 성립시킬 수 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와의 평화협정으로 인해, 그동안 전쟁부당금 명목으로 델로스금고에 매년 납부되던 공물과 선박세등이 졸지에 중단 될 위기에 처하였다. 이것은 풍부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아테네의 민주정치도 동시에 위태로워 졌다는 것을 의미하였다.페리클레스 개인적으로도 전쟁을 통해 내부갈등을 외부로 돌릴 수 있었던 효율적인 정치적 수단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제는 무엇인가 전쟁을 대체할만한 다른 것을 찾아야 했다.
BC 447년에 착공되어 BC 438년에 완공된아크로폴리스.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감사의 뜻으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네에게 바친 파르테논 신전이 유명하다. 평면은 동서로 8기둥, 남북으로 17기둥, 바닥 30.8m×69.5m.
그리고 그때 눈에 띈 것이 페르시아 전쟁당시 폐허로 변한 아크로폴리스였다. 페리클레스는 즉시 그리스 국가들의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 주제는 페르시아인들이 파괴한 그리스 신전의 재건하고, 전사자들에 대한 일종의 위령제에 쓰일 비용을 부담하는 일 등이었다. 이 회의에서 스파르타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대부분의 델로스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영향력을 두려워 하며, 페리클레스의 일방적이기까지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BC 447년 이후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대대적인 재건축이 시작되었다.
아크로폴리스 입구에 세워질 승리의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과 현관건물은, 이미 그 건설계획만으로도 이전에 그리스에서 지은 어떤 일반 건물보다도 더 웅장하고 값비싼 건물이었다.
특히 BC 446년 스파르타와 향후 30년간 화약을 맺음으로써,10년간이나 이어지는 아크로폴리스 작업을 안정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었으며, 나아가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영향력을 델로스동맹 전체에 확산시킬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사라졌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지혜·공예·전쟁의 여신) 황금거상은, 그 당시 아테네가 누렸던 권력과 부유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상의 제우스로 불리우던 페리클레스에겐, 신화속 제우스신의 딸이었던 아테나 여신의 황금거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메모 :
'이야기테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스파르타의 영광 플라테아 전투 (0) | 2010.01.23 |
---|---|
[스크랩] 스파르타의 일그러진 영웅 파우사니아스 (0) | 2010.01.23 |
[스크랩] 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 1 (0) | 2010.01.23 |
[스크랩] 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 2 (0) | 2010.01.23 |
[스크랩] 피라미드를 만드는 사람들 3 (0) | 2010.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