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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랑스 16 (제 3 공화국)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09:53

프랑스의 제3공화국

국가 방위를 위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조인되면서 정식 강화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 의회를 빠른 시일 내에 선출해야 했다. 2월 13일 보르도에서 개회한 새로운 의회는 나폴레옹 외교정책의 비판자였던 오를레앙파의 아돌프 티에르를 공화국의 행정수반으로 선택했다.

3월 1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이 비준되었는데, 프랑스는 동부 프랑스의 독일군 주둔비와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알자스와 로렌의 절반을 독일에 양도하게 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종결 때 이 지방들은 프랑스에 반환되었음). 강화조약이 체결된 며칠 후에 의회는 파리 코뮌의 반란에 직면했다.

3월 18일 티에르는 군대를 파견하여 국민방위군을 무장해제하려 했으나 유혈충돌이 발생하고 폭력사태가 확산되었다. 정부군은 서서히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민중은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평의회를 선출하여 파리 코뮌을 설립했는데, 거기에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5월 21일 티에르의 정부군은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이로부터 '피의 일주일'(5. 21~28) 동안 코뮌 투사들은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2만 명이 전사하거나 처형되고 수천 명의 생존자들은 유배되거나 망명했다.

티에르는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으나,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왕당파를 떠나 공화주의자에 동조하자 왕당파는 그를 해임하고(1873. 5) 군사령관인 마크마옹 원수를 내세웠다. 1875년 의회는 일련의 기본법을 채택하여 제3공화국 헌법을 마련했는데 이 헌법은 양원제 의회와 국무회의, 그리고 대통령직을 규정했다.

1880년대에 공화주의자는 급진파와 기회주의자로 나누어졌다. 좌파인 급진주의자들은 중앙집권, 반(反) 교회주의, 대외정책에서의 민족주의, 헌법개정, 그리고 사회개혁을 내세웠다. 이에 반하여 기회주의자들은 현체제의 유지와 시민의 사생활에 대한 정부간섭의 제한을 목표로 삼았다. 이 시기에 정부를 운영한 것은 기회주의자들이었으며 레옹 강베타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1880~85년 총리직과 다른 각료직을 맡았던 쥘 페리는 의무교육제의 실시와 식민지 제국 건설에 공헌했다. 1885년에 연립내각의 국방장관이 된 불랑제 장군은 곧 공화제를 크게 위협하는 민중운동의 지도자로 나섰다. 그의 목표는 1889년의 의회선거에서 승리해 독재권을 장악하는 것이었으나 선거 직전에 브뤼셀로 도망감으로써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결과 기회주의자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당시 새로 일어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은 공화국 지도자들의 정직성에 대한 회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1893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의석을 얻고, 사회주의는 도시노동자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1900년경에는 많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쥘 게드와 장 조레스의 두 당으로 결집되었고 1905년에 양당은 합당하여 통합사회당(SFIO:지금의 사회당 전신)이 탄생했다.

1890년대에 제3공화국은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최대의 정치적·도덕적 위기를 맞았다. 유대인 출신의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독일에게 군사 기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에도 군사 기밀이 계속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 누설되었고 또다른 장교 에스테라지 소령이 혐의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군부는 드레퓌스의 재심을 거부했다. 한편 언론과 일부 정치가, 그리고 좌파 지식인들이 드레퓌스 옹호에 나섰고, 우파 정치가와 가톨릭 주간지들이 군부를 옹호했다. 1898년에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군대 문서의 일부가 위조된 사실이 드러났고 1899년의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의 형을 감형했으나 여전히 유죄를 선고했다.

그후 드레퓌스는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1906년의 민사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정치와 지적 생활에 큰 상처를 남겼다. 1899년부터 제3공화국 말기까지 프랑스의 정치생활의 중심이 된 것은 급진사회당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군부와 교회는 다 같이 큰 타격을 받았고 1905년에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1871년 이후 약 20년간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으나 1891년에 러시아와 느슨한 협약을 맺었는데, 1894년 이 협약은 군사동맹으로 발전했다. 1890년대에는 영국과의 대립이 중요한 외교 문제였지만 1904년에 프랑스는 독일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협상을 맺고 양국간의 중요한 식민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1899~1905년 좌파와 중앙정당의 연합인 공화파 블록이 형성되어 프랑스 정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우익 소수파는 급진적인 공화파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 악시옹 프랑세즈'의 깃발 아래 모였다. 이 조직은 드레퓌스의 새로운 재판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1914년 무렵에는 아직 작은 운동에 불과했으나 공화국의 유력한 적이 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심각했던 것은 대다수 노동자 계급의 소외였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새로이 탄생한 통합사회당에 투표하고 있었으나 사회당은 그들의 대표들이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결과 내각의 안전성을 보장해주고 있던 좌익연합이 깨어졌다. 급진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공화파 블록에서 철수하자(1905) 다른 중앙 정당들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 급진주의자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었다. 1907년 그의 정부는 영국과 러시아에 접근하여 3국협상을 성립시켰다. 클레망소의 후계자들은 화해정책을 채택했고, 특히 조제프 카요 내각이 모로코 문제에 관하여 독일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자 프랑스의 애국자들은 분노했다. 1912년 카요 대신 독일에 대한 강경론자인 레몽 푸앵카레가 총리가 되었고 다음해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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