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재 정부
1795년 10월에 출범한 총재정부는 1797년의 선거에서 왕당파가 우세를 보이자 프뤽티도르(열매의 달) 쿠데타로 이를 제압했다(1797. 9). 총재정부는 '자매 공화국'의 창설로 혁명을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이탈리아 원정은 예상밖의 성공을 거두고, 오스트리아는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조인했다(1797. 10).
대륙에서의 영국군의 근거지인 네덜란드에 대한 공격도 대성공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보호하에 토착 혁명가들은 북부 이탈리아에 치살피나 공화국을, 그리고 네덜란드에 바타비아 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이러한 자매 공화국의 건설은 계속되었다.
1797년의 쿠데타 후 총재정부는 혁명력을 부활시켰다. 1793년에 제정된 혁명력은 종래의 일요일을 없애고 10일을 1주일로 삼았으며, 달의 이름은 기후와 계절의 특징에서 따왔다(혁명력은 1806년에 폐지됨). 1798년에 제정된 미혼 남자 20~25세의 징집령은 강한 반발과 이탈을 낳았으며, 전세 또한 불리했다.
이러한 위기에 당면하여 입법부는 4명의 총재를 축출했다(프레리알의 쿠데타, 1799. 6). 이러한 정세는 총재정부에 불만을 품은 보수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은 1789년의 기본적인 개혁과 재산권을 보장해줄 정치구조를 원했다. 그리하여 헌법을 폐기할 의회 주도의 쿠데타를 준비했으며 군대의 힘을 빌리기 위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추대했다. 혁명력 8년 브뤼메르(안개의 달) 18일(1799. 11. 9) 보나파르트는 의회에서 취지를 설명하고 반대자를 군대의 힘으로 눌러 새로운 체제의 지배자가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
통령정부
브뤼메르 쿠데타의 주동자인 '수정주의자들'은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1789년의 성과를 유지할 수 있는 강력한 엘리트 정부를 수립할 생각이었으며, 그결과 탄생한 것이 통령정부였다. 혁명력 8년의 헌법은 국민투표의 찬성을 거쳐 행정수반으로 3명의 통령을 두기로 했는데, 실권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이 장악했다.
1802년에는 다시 국민투표를 거쳐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이 되고, 1804년 봄 그는 황제를 선언했으며 혁명력 12년의 헌법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혁명의 기본적인 정치적 원칙인 대의제와 입법부의 우위가 통령정부에 의하여 부인되고, 양원제 입법부는 허수아비로 전락하는 동시에 법률 발의권마저 행정부로 넘어갔다.
통령정부는 선거제를 없애지 않았으나 유권자는 정부가 마련한 후보자 명단에 투표할 따름이었다. 사법관 선거의 폐지와 함께 1800년에는 지방관리의 선거가 폐지되고 도지사는 통령정부가 임명하게 되었다. 1802년 교황과의 화약이 성립되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부활되었고, 비선서 성직자는 복권되었으며 가톨릭의 우위가 인정되었다.
나폴레옹은 구귀족 대신 재능에 기반을 둔 새로운 귀족을 창설하고, 1808년에는 새로운 작위 체계를 마련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법전은 시민적 평등, 법적 평등, 봉건제의 폐지와 근대적인 계약적 재산 형태, 정교 분리 등 1789년의 원리 중 일부를 수용했다.
정복전쟁
이탈리아 원정(1797)과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의 해체 후 나폴레옹은 영국을 공격할 목적으로 이집트 원정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영국 해군의 봉쇄망을 뚫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 나폴레옹 전쟁). 브뤼메르 쿠데타 때 프랑스군은 이탈리아에서 축출되었으나 나폴레옹은 북부 이탈리아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마렝고 전투에서 격파하고(1800) 오스트리아로 하여금 뤼네빌 조약에 조인하게 했다.
1802년 프랑스와 영국은 아미앵 조약으로 관계를 강화했으나 2년 후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는 트라팔가 해전(1805. 10)에서 영국 해군에 크게 패했으나 대륙의 지상전에서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나폴레옹은 울므의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고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1805. 12).
그결과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는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베네치아와 티롤을 양도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를 인정했다. 프로이센은 1806년 10월의 예나 전투와 아우어슈타트에서 패하여 베를린이 점령되었고 프랑스에 배상금을 물었으며 북부 독일이 프랑스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러시아와의 전투는 아일라우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1807. 2) 프리틀란트 전투(1807. 6)에서는 승리했다. 틸지트 조약에서 나폴레옹은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러시아를 지원할 것을 다짐하고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영국에 대항해 프랑스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토스카나·피에몬트·제노바·라인란트를 병합한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왕국, 스페인 왕국, 바르샤바 대공국을 그의 일족과 동맹자의 지배하에 두었다. 나폴레옹은 또한 북부 및 남부 독일의 동맹국들을 연결하기 위해 라인 연방을 창설하고 1810년에 오스트리아의 왕녀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함으로써 오스트리아마저 그의 세력하에 놓이는 듯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경제와 상업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대륙 봉쇄령'을 내렸다 (→ 색인 : 대륙봉쇄체제).
1806년 11월 베를린 칙령으로 프랑스의 세력하에 있는 모든 국가의 영국과의 교역을 금지했다. 대륙 봉쇄는 영국 경제에 타격을 가했으나 허점이 많았다. 1811년 러시아가 대륙 봉쇄에서 이탈했으며,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공격했다. 나폴레옹의 '대군'(大軍)은 모스크바에 도달했으나 러시아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부터의 철수할 당시 군대의 2/3가 상실되었고 러시아의 혹한 속에서의 후퇴로 나머지 병사들의 대부분이 죽었다. 1813년 10월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의 국민해방전쟁에서 패하고 얼마 후 파리가 함락되었다. 그는 1814년 4월 퇴위당해 엘바 섬에 유배되었다. 프랑스의 국경선은 1792년의 상태로 축소되고 부르봉 왕실이 되돌아왔다.
나폴레옹과 혁명
나폴레옹은 혁명의 유산 중 무엇보다도 '봉건제', 즉 영주제와 법적 특권, 그리고 지방자치 폐지에 충실했으며, 시민적 평등과 기회 균등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는 혁명을 종식시켰으나 선거제와 당파정치를 억제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1815년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하고 입헌적인 통치를 수락했다.
그러나 1815년 3월에 나폴레옹은 엘바를 탈출하여 파리로 귀환하고 6월까지 다시 프랑스를 통치했다( 백일천하). 그러나 워털루 전투(1815. 6. 18)에서 영국과 프로이센군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1821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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