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테아 전투 (PlataeaWars)
페르시아 전쟁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르면 BC 546경부터 보는 견해가 있긴 하지만, 페르시아제국과 폴리스 연합이 직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것은 BC 5세기 이후였다.
특히 BC 522년에 권좌에 오른 다리우스(Darius)는, 페르시아 제국을 통합하고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그리스의 지원을 받은 이오니아계 도시국가들의 반란은 BC 500년까지 진압한 후 BC 490년에는 그리스본토 마라톤(Marathon)상륙에 성공한다.
그러나 선공으로 나섰던 2만 5천 병력이 마라톤전투에서, 말티아데스가 이끈 아테네 군에게 패한 뒤 이집트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결국 그리스 원정을 성공시키지 못하였다. 하지만 10년 뒤 다리우스의 뒤를 이은 크세르 크세스(Xerxes)는 총 병력 30만으로 테르모필라이 협로에 있던 폴리스 연합과 3일간의 격전끝에 돌파하고 그리스 본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크세르크세느는 비록 그리스 본토를 점령하긴 하였지만, 명백하게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긴 힘들었다. 우선 490년 4월 벌인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레오니다스가 이끈 스파르타군의 놀라운 전투력으로 인해 2만이 넘는 병력 손실을 입었으며, 9월 벌인 살리마스해전에서도 4만여 명이나 전사당하는 참패를 겪고 말았다.
지금도 당시 페르시아 병력구성에 대해서 여러가지 논란이 있긴 하지만, 순수 전투병력은 20만 정도로 보고 있다. 따라서5개월 동안벌인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사자만 7~8만 여명, 즉 전체 전력의 절반정도를 상실하고 만 것이다.더 큰 문제는 해상권을 폴리스연합이 장악함으로 인해, 군수물자 보급로 확보에 매우 큰 어려움을 격고 있었다. 아무리 많은 군대와 강력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보급로가 끊기면 더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게된다.
결국 크세르크세느는 철군을 결정하여 그해 겨울에 페르시아로 돌아갔지만, 전면 철수는 아니었다. 마르도니우스의 지휘아래 전쟁 수행이 가능한 군대 중 약 50%에 해당하는 5만여 명의 군대는 그리스에 남겨 두었다.
그리고 이 전투력만으로도 폴리스 연합 전체의 전력보다 결코 뒤쳐지거나 부족하지 않는 전력이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폴리스연합은 단지 섬지역이나 일부해안지대를 회복했을 뿐, 내륙으로 들어가 그 엄청난 아테네 군과 싸우기를 꺼려하였다. 반면 페르시아의 잔여병력도 해상전투보다는 육지전을 선호하기 때문에 바다로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스본토 테살리아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페르시아 군을 어떻게 할 것인가? 폴리스 국가들의 농업경제기반이 침탈되고 노예수급이 중단된 상태에서, 언제까지 섬지역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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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앞서 나가려 하지 않았지만, 스파르타인들은 이제야 말로 그들의 진정한 힘을 발휘할때로 판단하였다. 특히 스파르타 군을 이끈 사람은, 지난날 테르모필라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사망한 레오니다스왕의 조카 파우사니아스(Pausanias) 장군이었다.
그는 레오니다스왕이 왜 전군을 동원하지 않고 단지 300명만을 동원하여 전쟁에 나가게 되었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주력부대를 보호하여, 훗날 다시 벌어질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물러나지 않는 스파르타의 정신과 전사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
전열재정비를 마친 파우사니아스장군은 테살리아지방에서 월동을 마친 페르시아군을 향해 나갔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총 병력은 6000명, 여전히 페르시아군은 10배 가까운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폴리스 연합의 총 병력도 5만 정도는 되었지만, 매번 승리의 영광은 아테네가 차지하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스파르타가 승리의 영광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번전투는 사실상 스파르타군의 단독전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우사니아스는 시타헤론산 아래로 내려가 아소푸스강을 끼고 페르시아군 페르시아군 진영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였다. 그러나 공성전에 대한 경험도 없고 무기도 없었던 스파르타군은 강을 건너서 전면전을 감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렇다고 페르시아군 역시 요새의 문을 열고 언덕지형에 위치한 폴리스 연합을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페르시아의 지휘관 마도니우스는 폴리스 연합군을 직접 상대하기 보다는 보급로를 차단하는데 주력하였다. 페르시아군은 한때 폴리스연합군의 게릴라식 공격으로 보급로가 차단당하기도 하였지만, 그방법을 역이용하여 폴리스연합의 군수물자를 탈취하고 보급로를 차단하였다.
마도니우스는 스파르타군을 완벽하게 고립시키기 위해 아테네군을 타격하였지만, 약 8천여 명 정도의 아테네군은 예상보다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메가라군 역시 페르시아 기병대의 집중 공세를 견뎌내고 있었다. 이렇게 폴리스 연합을 공략하는 것이 쉽지않자 마르도니우스는 스파르타군을 진영 바깥쪽으로 유인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군이 평소답지않게 특정지점에 대한 공격을 가해온 것을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것도 기병대의 측면에서 엄호할 병력조차 없이 오직 정면으로만 돌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팔랑크스를 뒤로 움직여 포위하면 페르시아의 기병대를 모두 전멸시킬수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장 마도니우스가 이렇게 말도 안되는 공격으로 기병대를 모두 소모 시킬만큼 어리석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적군은 언덕아래 어딘가에 주력병력을 매복시키고 폴리스 연합군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신중하게 행동하였다.
*플라테아 전투가 벌어졌던 테살리아지방
이렇게 스파르타군이 유인책에 걸려들지 않자 페르시아군은 식수원에 독을 풀어 넣어 폴리스 연합의 이동을 유도하였다. 결국 파우사니아스장군은 적의 눈을 피하기 쉬운 한밤중에 물을 공급받을 수 있고, 병참선도 안전한 예전 진지와 가까운 곳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하였다.
작전상 후퇴라고해도 적에게 등을 보이는 행위였기 때문에 많은 장교들의 반발을 샀을 뿐 아니라, 야간 행군도중 대부분 폴리스 연합은 흩어져, 동이 트자마자 오직 스파르타만이 홀로 예전 진지에 도착해 있었다.
스파르타가 단독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본 페르시아군은, 다른 연합군이 합류하기 전에 그들을 총 공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일단 스파르타군만 괴멸시키면 다른 폴리스 국가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도니우스의 결정적인 판단착오였다. 스파르타군은 높은언덕지형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병대를 동원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언덕지형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스파르타군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상대가 스파르타군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싸움기계에 가까웠던 스파르타군에게 1/10정도의 숫적 열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스파르타인이 공격받는것을 본 크 다른 펠로폰네소스인들과 테게아인들등이 외곽에서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결과적으로 페르시아군은 빠져 나갈 곳 없는 포위상태에 놓이고 만다. 얼마 후 그곳은 전쟁터라기보다 일방적인 학살현장에으로 변해버렸다.
그 수많았던 페르시아군은 스파르타군의 창과 단검에 힘없이 죽어갔으며, 전열은 뒤죽 박죽 되어 버렸다. 반면 스파르타군의 전열은 이런 난전속에서도 전혀 흩어지지 않았고, 결국 스파르타군은 1천여명 정도만 전사한 반면, 페르시아군은 사망자만 2만 5천여명에 이르는 등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말았으며 사망자 속엔 마르도니우스도 있었다.
플라테아 전투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한 스파르타군은 더이상 그리스 본토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육군은 전면 철수하였다. 이후 페르시아제국은 두번다시 그리스를 침공하지 못하였다.
물론 플라테아 전투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는 30년 동안 계속되었지만,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그리스의 원정전투가 대부분이었다. 페르시아의 세력은 당시 절정에 이르러 있었지만, 그리스인들의 집단 방어는 겉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우열의 차이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 주변에 있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해방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리스가 이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에 그리스 문화와 정치 체제는 페르시아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페르시아전쟁은 그리스인 전체에 <자유를 위한 싸움>으로 이해되었고 그리스의 민족과 역사 발견으로 이어졌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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