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랑스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은 전(前)근대시대의 종말을 상징한다.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과 1776년의 미국 독립혁명은 이러한 변화의 전주곡이었으나, 개인주의와 합리성을 인간의 주된 관심사로 만든 것은 프랑스 혁명이었다.
1789년 이전의 프랑스, 즉 앙시앵 레짐(구체제)하의 프랑스에서는 모두가 국왕의 신하였으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여러 종류의 결사나 집단들이 각종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법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계승되는 것이며, 국왕은 스스로를 봉건적 수장인 동시에 성직자와 같은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교적 군주라고 생각했다. 한편 경제적·문화적 발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1789년에 발생한 정치적 봉기를 원하게 되었다.
18세기 프랑스에는 풍요 속에 곤궁이 깃들어 있었다. 아마 프랑스 농민의 1/3은 생활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을 것이다. 그 반면에 산업의 생산고는 급속하게 증가하고 상업, 특히 식민지와의 교역은 번성했다. 프랑스의 수많은 도시들, 특히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들은 이러한 식민지와의 교역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다.
이러한 도시에서 계몽사상이라는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루이 15세와 루이 16세의 계몽된 신하들은 정부나 사법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종교적 불관용과 사법상의 과오가 몽테스키외, 디드로, 그리고 특히 볼테르에 의해 비판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루소(1712~78)의 영향도 매우 컸다. 인간은 타락한 피조물로서 사회적·정치적 공공제도를 순화하고 개혁함으로써 구제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당대인들을 크게 고무했다.
1789년에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프랑스인은 전인구의 1/3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적 변혁은 어느 정도 한정된 것이었으나, 직접 이 변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그것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의 정치가들은 유럽에서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프랑스의 식민지 제국을 확장하며, 영국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미국의 독립전쟁(1775~83)중 프랑스는 해상권 유지에 힘을 집중시켰고, 그결과 영국의 진출을 억제하고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전쟁 개입은 소요 비용으로 문제가 되었다.
국왕은 한없이 불어나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 지배층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그들은 무조건적인 지원에는 반대했다. 그리하여 1789년의 왕정의 붕괴에는 재정문제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고등법원은 보수적인 저항의 강력한 보루였다. 파리 고등법원은 왕의 재정개혁을 공격한 탓으로 1771년 해산되었는데, 루이 16세는 즉위초에 이를 소환했다. 1774년말 루이 16세는 튀르고(1712~81)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징세방법을 변경하려 했다. 1776년 파리 고등법원은 이에 관련된 칙령들의 등록을 거부하고 튀르고는 해임되었다.
미국 독립전쟁에의 개입으로 국가의 부채는 배로 증가했다. 튀르고의 뒤를 이은 네케르는 공채모집에 성공했으나 재정의 고갈 상태로 미루어 조만간 국민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어 보였다. 네케르를 계승한 칼론(1734~1802)은 차용으로 필요한 기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는 대귀족, 주교, 고등법원 법관들, 즉 특권 신분을 대표하는 명사회를 소집했는데, 명사회는 오랫 동안 저항을 받아온 국가의 변혁 시도를 지원하기를 거부했다.
칼론의 뒤를 이은 로메니 드 브리엔은 1787년 5월 명사회를 해산하고, 8월에는 파리 고등법원을 추방했으나 고등법원은 1788년 5월에 파리로 되돌아왔다. 이리하여 완전히 속수무책이 된 국왕은 결국 1788년 8월 삼부회의 소집에 동의했다.
앙시앵 레짐의 붕괴
1789년 혁명의 발생
1789년 삼부회를 열겠다는 루이 16세의 결정은 프랑스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문제는 삼부회의 운영 방식이었다. 과거처럼 신분별로 투표할 것인지 아니면 합동으로, 즉 머릿수로 투표할 것인지의 여부가 문제였다. 제1·2신분은 신분별 투표를 원했으나 대표수가 배가된 제3신분은 머릿수 투표를 주장했다.
1789년 5월 삼부회가 베르사유에서 개회되었을 때 귀족 대표는 성직자 대표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회의를 구성했으나 제3신분은 이를 거부했다. 그 대신 제3신분은 6월 17일 국민의회를 선언하고 다른 두 신분의 합류를 유도했다. 1주일 후에 150명의 성직자 대표가 합류했으나 귀족 대표는 이를 불법이라 항의했다.
왕이 제3신분의 회의실을 폐쇄하자 그들은 6월 21일 실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새로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회합을 계속하겠다는 엄숙한 서약을 했다(테니스코트의 서약). 6월 23일 왕은 부분적인 양보와 더불어 회의는 신분별로 행할 것을 명령했으나 제3신분은 이를 거부했다. 이러한 완강한 도전에 기력을 잃은 왕은 며칠 후 귀족 대표에게 국민 의회에 합류할 것을 지시했다.
이리하여 제3신분은 성직자 및 귀족의 동조자와 더불어 위로부터의 비폭력적인 혁명을 수행했다. 국민 주권을 신봉한 제3신분 대표들은 국민의 대표로서 그들만이 주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1789년의 법률혁명이었다. 그러나 왕의 양보는 개혁을 원하는 애국파를 억압할 병력을 규합할 때까지의 전략적인 후퇴에 지나지 않았다.
7월 11일 왕이 인망있는 네케르를 해임하자 파리 시민은 이것을 반(反)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파리 시민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궐기했다. 7월 13일 파리 시민은 무기를 구하기 위해 무기상을 수색하고, 다음날 바스티유를 포위했다. 수비대는 항복하고 민중은 수명의 병사를 살해했다.
7월 14일의 파리 민중봉기는 국민의회를 해산의 위기에서 구출하고 혁명의 진로를 보다 더 적극적이고 민중적이며 폭력적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한편 농민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7월에 농민들은 귀족의 성을 습격하고 봉건적 의무를 기록한 문서들을 불살랐다. 이러한 농민반란은 '대공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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