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제1공화국
프로이센군이 파리로 진격하고 있을 때, 수도는 반혁명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파리의 민중은 반역자들이 감옥의 문을 열고 광신자와 도적들을 석방할 것을 두려워하여 감옥에 들어가 약식재판을 거쳐 죄수들을 처형했다 (→ 색인:9월학살). 9월 20일 프랑스군은 발미에서 침입자들을 격퇴하고, 11월에는 제마프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지금의 벨기에)를 장악했다.
발미 승리의 다음날인 9월 21일에 개회한 국민공회의 첫 주요과업은 폐위된 왕의 운명을 결정짓는 일이었다. 국민공회는 만장일치로 루이의 유죄를 인정했으나, 형벌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라졌다. 공회는 사형 선고를 가결하고, 집행 연기 동의안과 국민투표에 회부하자는 안은 모두 부결되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시민 카페'로서 1793년 1월 21일 처형되었다.
1793년 봄 공화국은 포위되었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라인란트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피레네 산맥을 돌파했다. 인플레이션, 물자 부족, 매점 등으로 도시 민중의 생활은 견디기 어려웠고 공화국 군대에 대한 물자보급도 어려웠다. 급진적인 파리 민중은 결정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파리의 선거인단은 로베스피에르·마라· 당통을 비롯해 파리 코뮌과 자코뱅 클럽의 쟁쟁한 투사들을 공회에 선출했다. 이들 파리 출신의 대표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지방 대표들은 공회 내 위쪽 의석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산악당으로 불렸다. 브리소파는 파리에서는 선출되지 않았으나 특히 지롱드 지방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지롱드파로 불렸다.
산악당은 퀼로트를 입지 않고 긴 바지를 입었다고 해서 상퀼로트로 불리는 파리 민중의 지지를 받았으며, 경제·군사·정치 문제에 있어 대담하고 급진적이었다. 이에 반하여 지롱드파는 파리의 민중적 혁명투사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존중했으며 극단적인 혁명적 조치를 반대했다. 이 양파의 중간에서 조정 역할을 한 대표들은 '평원파'(平原派)라고 불렸다.
국민공회는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정치범을 재판하기 위한 혁명재판소, 반혁명 분자를 색출하기 위한 지방의 감찰위원회, 혁명 수호의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공안위원회를 설치했다. 1793년 5월경에는 대세가 산악당으로 기울어졌다. 6월에 29명의 지롱드파 대표가 숙청되고, 후에 이에 반대한 120명의 대표들이 공회에서 추방되었으며, 10월에는 혁명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지롱드파의 지도자급 대표들이 처형되었다.
공포정치
국민공회는 혁명의 적에 대한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선포하고 경제적 범죄를 주요범죄로 규정하는 동시에, 최고가격제로 물가와 임금을 통제했다. 반혁명자 법은 지방의 혁명위원회에 체포권을 부여하고 준(準)군대인 '혁명군'이 이러한 포고령의 준수 여부를 감시했다. 국민공회는 혁명력 '서리의 달' 14일(1793. 12)의 법으로 공안위원회를 정점으로 한 의회의 독재권을 확립함으로써 혁명정부를 강화했다.
자코뱅 독재는 정부의 능률을 증진시키고 국가 자원의 동원을 촉진시켰다. 공안위원회는 공회가 파견한 지방 순찰 대표에 의한 것이라도 극단적인 행동과 자의적인 조치에는 반대하고, 교회를 파괴하거나 폐쇄하고 성직자를 위협하는 등 1793년 가을에 발생했던 비(非)그리스도교화 운동을 저지하려고 했다.
공안위원회는 또한 몇 개월 후에 파리 지구회의의 과격한 행동을 억제하고 '혁명군'을 해산하는 동시에 파리 코뮌을 숙청했다. 공식적 정책을 벗어난 과격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혁명력 2년 '목월'(牧月) 22일(1794. 7. 10)의 악명 높은 법은 피고로부터 자기 변호의 권리를 박탈하고, 선고는 석방 또는 사형으로 제한했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공화국에 대한 내외의 위협이 사라진 때에 강화되었다. '열월'(熱月) 8일 로베스피에르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일단의 대표들을 '자유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는 반역자라고 규탄했다. 공회 내의 온건파, 자코뱅의 실용주의자, 적대적인 대표 및 극단주의자들이 합세하여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가장 가까운 추종자들을 타도하려 했다.
열월(테르미도르) 9일(1794. 7. 27) 공회는 로베스피에르의 체포를 명했고, 다음날 그는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테르미도르 반동). 1793년 8월 공회는 국민총동원령을 공포하여 18~25세의 건전한 미혼 남자를 전원 소집하여 1년 이내에 약 75만 명을 무장시켰다. 군대의 규율하에서 공화국 군대는 민주적 관행의 모범이 되었다.
국민공회의 개혁
국민공회는 모든 봉건적 공납을 무상으로 폐지하고,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를 폐지했으며, 누진세 제도를 도입하고 소비자를 위한 경제 통제를 실시했다. 1793~94년에 공회는 전국적인 복지정책을 채택하고 초등 교육의 의무제도를 도입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권력쟁탈전을 일으켰으며, 반(反)자코뱅적이고 반왕당파인 테르미도르파는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들이 제정한 1795년(혁명력 3년)의 헌법은 납세를 토대로 한 제한선거와 양원제, 그리고 입법부가 선출하는 5명의 총재로 구성되는 자유 공화국을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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