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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랑스 10 (중세후기 프랑스)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09:56

중세후기 프랑스

14·15세기의 사회와 경제

악천후, 상업의 침체, 일부 지역의 인구과잉 등으로 전보다 더욱 격심한 기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여기에 전쟁마저 겹쳐 경제적 곤궁이 더욱 심화되었다. 그러나 생명과 안전을 가장 혹독하게 손상시킨 것은 흑사병으로 알려진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흑사병은 1347년에 프로방스에 상륙하여 1348년에는 프랑스 대부분의 지역을 휩쓸고, 1350년에야 사그라들었다.

그밖에도 1358년에는 북부 지방에서 자크리(jacquerie)의 난으로 알려진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발생하고, 거의 같은 시기에 파리에서는 에티엔 마르셀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전쟁과 재앙, 그리고 반란들은 봉건적인 프랑스로부터 새로운 근대적 프랑스가 태어나는 과도기의 조짐들이었다.

16세기

샤를 8세(1483~98 재위)가 1494년에 시작한 이탈리아 전쟁은 1559년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왕국의 군사적·행정적 구조뿐만 아니라 왕권의 전통적인 역할에까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으로 국왕은 보다 더 많은 수입원이 필요했는데,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은 신하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관직을 팔기 시작했다.

관직매매는 특히 16세기에 일반화되었으며, 이로써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들은 후에 정치적·사회적 지위 향상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왕은 또한 귀족작위도 팔았으며, 현금을 받고 작위와 관직 세습을 허용했다.

루터의 저서가 파리에 처음 나타난 것은 1519년이었다. 1521년에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는 이 저서의 출판을 금지했으며, 1534년에는 이를 탄압하는 일련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은 1530년대 중반에 장 칼뱅의 개혁 사상으로 변형되고 강화되었다.

앙리 2세(1547~59 재위)는 보다 더 억압적인 수단을 강구했으나 프랑스의 칼뱅주의, 즉 위그노주의는 날로 그 세력이 커지고 반항도 거세어졌다. 샤를 9세(1560~74 재위)의 섭정이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종교문제의 타협과 어느 정도의 관용을 시도했으나 로마 가톨릭파의 수령인 기즈 공의 강력한 반발을 샀을 뿐이다.

프랑스의 종교전쟁, 즉 위그노 전쟁은 신·구 양쪽의 대립이 주축이지만 귀족간의 세력다툼,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왕위계승문제 등이 엉켜 장기간에 걸쳐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영국이 위그노를, 스페인이 가톨릭을 지원해 국제분쟁의 양상까지 띠었다.

전쟁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1572년 8월 23일부터 24일 새벽에 걸쳐 때마침 위그노 지도자의 한 사람인 나바라 왕 엔리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들은 가톨릭의 습격을 받아 지도자인 콜리니 제독을 비롯해 약 3,000명이 학살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알려진 이 엄청난 유혈극으로 전쟁은 가열되었다.

강경한 가톨릭 동맹(1576 결성)의 지도자 기즈 공이 앙리 3세(1574~83 재위)에 의해 살해되고, 이에 격분한 동맹파가 앙리 3세를 살해하여 나바라 왕 엔리케가 왕위계승자가 되고 후에 왕위에 올라 앙리 4세(1589~1610 재위)가 되었다. 그는 카페 왕가의 방계인 부르봉 왕가의 초대 왕으로서, 또다른 5년간의 내전 끝에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지위를 굳혔다.

종교전쟁의 최종 단계는 스페인과의 싸움이었는데, 1598년 베르뱅 조약으로 스페인은 앙리 4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같은 해에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용함으로써 종교전쟁은 끝났다.

17세기

앙리 4세가 즉위할 무렵에는 당파를 초월한 강력한 영도자만이 국가의 통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앙리는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에게 관용을 보장했다. 1610년 암살되기 전까지 그는 왕권의 권위를 회복하고 즉위시 내외로부터 크게 위협받고 있던 국가를 재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루이 13세 시대

앙리의 사후 미망인인 마리 드 메디시스가 어린 루이 13세(1610~43 재위)의 섭정이 되었으며, 1624년에는 리슐리외 추기경이 루이 13세의 총리가 되었다. 리슐리외 외교정책의 첫째 목표는 프랑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국경지대의 요지들을 점령하려 했다.

그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만토 상속전쟁(1628~31)에 개입하고, 1635년에는 30년전쟁에 직접 참가해 합스부르크 왕실과 싸웠다. 리슐리외는 1642년에 죽고 이듬해에 루이 13세가 사망했다. 그리하여 모후인 오스트리아의 안이 섭정이 되었으나 실권은 마자랭 추기경의 수중에 있었다.

프롱드의 난

프롱드의 난은 왕권에 대한 귀족들의 반란이었다(1648~52). 첫번째 난은 파리 고등법원 법관들을 중심으로 한 고위 관직자들과 국왕 사이에서 스페인과의 전쟁에 필요한 국가 수입 증대의 방편을 둘러싸고 일어났으며, 1649년 화해가 성립되었다. 이무렵 제2차 난이 발생했는데, 대(大)콩데 공을 수령으로 한 귀족과 왕족들의 왕권에 대한 반항이었다.

1652년 한때 파리를 탈출했던 루이 14세가 승리해 수도로 돌아왔다. 1659년 마자랭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마무리짓는 피레네 조약을 맺었다. 그결과 프랑스는 영토를 획득하고, 루이 14세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다. 마자랭은 1661년에 사망했다.

루이 14세 시대

루이 14세는 장려한 베르사유 궁전을 세우고 태양을 상징으로 삼아 권위를 과시했다. 그러나 제도적인 혁신이나 행정상의 변화는 별로 없었다. 그의 가장 가까운 고문관은 1665년에 임명된 재무장관 콜베르였다. 그는 정부 기구의 능률을 높였으며 잉여 생산에도 성공했다.

콜베르는 중상주의의 신봉자로서, 수입에 의존하는 물품을 자체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나 그의 시대에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종교 문제에 있어 루이 14세는 관용은 불필요하며 여러 교파가 관용될 경우 국가의 통일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믿었다. 그는 1685년에 낭트 칙령을 철폐했다. 루이는 강력한 외교정책을 추구했다.

30년전쟁으로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1648)의 일부인 뮌스터 화약에서의 중요 과제 중의 하나는 프랑스의 북동 국경지대에 있는 메스·투르 및 베르됭 주교 관구의 귀속 문제였는데, 루이는 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1689~97)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4)에서 합스부르크 왕실이 노린 목표의 하나는 바로 이 3개의 주교 관구와, 루이가 네덜란드 전쟁(1672~78) 끝에 네이메헨 조약으로 획득한 프랑슈콩테의 회복이었다. 그러나 루이는 알자스의 보유는 물론 여기에 로렌 지방까지 추가할 생각이었으며, 1681년에는 스트라스부르를 획득했다.

왕위계승자가 없던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가 그의 전영토와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백 필리프에게 물려주고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장기간에 걸친 전투는 위트레흐트 조약(1713)으로 끝을 맺었다. 루이는 그의 치세를 통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영토를 보전하고 손자 필리프를 스페인 왕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으나 신대륙의 많은 식민지를 영국에 양도했다.

루이 14세 시대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절정기로서, 프랑스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고 동부 국경지대에서 중요한 영토를 획득하기도 했으나, 식민지의 일부를 상실하고 많은 국력을 소모하기도 했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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