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정당의 독재정치와 몰락
<자코뱅당의 독재정치>
산악파는 평원파의 소극적인 지지를 받고 공안위원회를 축으로 내전의긴박한 정세 아래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 1792년 8월 20일 봉건적 여러 권리의 무상폐지(無償廢止), 망명자의 몰수재산 분할판매 등을 결의하여 무산농민이 소토지 소유자로 바뀌어 오늘날 프랑스 소농민계급의 기원이 되었다. 1793년 7월 13일 마라가 지롱드파를 신봉하는 여성 S.코르데에게 암살당한 뒤 국민공회는 자코뱅당에게 조종당하고 공화국의 최고 행정권은 당통·로베스피에르·L.N.M.카르노 등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된 공안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산악파의 공화국 헌법은 남자의 직접보통선거와 선거인회에 의한 의원 소환, 법률의 재심(再審)을 원칙적으로 승인한 획기적인 것으로, 전문(前文)을 이루는 인권선언은 소유권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평등을 전면(前面)에 내세웠으며 봉기권도 명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6월 24일에 가결되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8월 10일 포고와 동시에 시행이 연기된 것은 반(反)혁명의 위험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다음에 산악파내의 자유경제 지지세력을 누르고 곡물과 생필품의 매점(賣占)을 금지하는 단속법과 공설저장고(公設貯藏庫)의 설치가 결정되고, 8월 23일에는 카르노의 제의로 국민총징용령이 가결되었다. 가뭄으로 인한 기근이 파리 민중을 또다시 행동으로 몰고가 9월 5일에는 에베르파를 선두로 최고가격령(最高價格令)과 식량징발을 위한 <혁명군>을 요구, 국민공회는 이를 받아들여 29일 생활필수품 39품목에 대한 일반 최고가격령을 제정하는 한편, 반혁명용의자의 즉각 숙청을 요구하였다.
공안위원회도 스스로 위기극복에 나서 혁명재판소를 쇄신 강화하는 한편 통제경제를 실시하고 전국민에게 군사봉사의 의무를 확인시키고 전쟁수행 동안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뜻에서 <혁명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비요바렌 등 산악파 급진분자를 가담시켜 실시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또 9월에 개력위원회(改曆委員會)가 발족되고, 11월에 공화력(共和曆;혁명력)이 공포, 실시되었다.
<로베스피에르 정권>
자코뱅당 독재에 의한 공화력 2년의 공포정치는 민중운동의 정치적 압력을 배경으로 하여 의회주의를 한걸음 넘어선 혁명정부를 축으로 하여서 감행되었다. 그 전반기는 혁명위원회와 국민협회, 거기에 혁명군 등 민중 자신이 구성하는 조직에 의해 정부의 여러 법이 실시되었는데, 거기에는 교회폐쇄에서 예배금지로 나가는 비(非)그리스도교화, 대차지농(大借地農)과 부유상인의 축재(蓄財)에 대한 간섭 등 민중적인 테러가 확산될 여지가 있었다.
12월 14일 혁명정부는 공안위원회 독재를 정비하고 민중적 테러를 억제하는 방침을 내세웠다. 94년 3월 혁명노선을 둘러싼 에베르파와 당통파와의 항쟁이 격렬해졌는데, 로베스피에르는 <덕(德)과 공포>를 주장하고 94년 3월 에베르파가 파리의 식량사정악화를 이용하여 시민을 동원해서 봉기를 계획하자 체포하여 처형하였고, 4월에는 당통을 처형하였다. 이것은 경제적인 통제를 이완시키면서도 도덕적 원리의 뒷받침을 독재정권에게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코뱅당의 독재를 지탱하는 기반은 약해지고, 6월 10일의 법률에 의해서 국민공회는 의원을 혁명재판에 인도하는 배타적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로베스피에르의 독재는 의원들마저도 전율시켰다. 이로써 독재타도의 기운은 높아지고, 공안위원회 내부의 대립도 얽혀 7월 27일(共和曆 2년 테르미도르 9일)J.L.탈리앙 등 온건파의 반혁명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는 사형을 당하고 자코뱅당은 몰락하였다. 이것을 <테르미도르의 반동>이라고 부른다.
<총재정부(總裁政府)>
로베스피에르파의 몰락을 계기로 유산시민을 주체로 하는 온건공화당이 국민공회에서 다시 지도권을 회복하여 무산시민을 배경으로 하는 자코뱅당과 구특권계급이 지도하는 왕당의 반항을 억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많은 혐의자들은 석방되고 로베스피에르의 법은 기각되고 봉기 코뮌은 해체되었으며 공안위 및 혁명재판소는 폐지되었다.
또 급진적인 노농정책·통제경제는 폐지되고 상업시민의 자유로운 세기가 재현되었으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었기 때문에 자유의 도래는 생활비의 팽창을 초래하여 빈곤한 시민을 한층 더 비참한 생활에 빠지게 하였다. 테르미도르파는 즉각 혁명 정부 개편, 자코뱅클럽의 폐쇄를 단행하고, 너머지 급진 산악파를 추방하였다. 또 1795년 봄에는 두 차례에 걸친 파리민중의 식량봉기를 진압하고, 그해 8월 22일 공화력 3년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10월 27일에는 이원제(二院制)의회와 5명의 총재로 구성된 정부를 발족시켰다. 피선거자격을 높여 상층·중산 부르주아에게 유리한 체제가 되었다. 96년 구(舊)자코뱅파와 전투적인 민중을 규합하여 인민독재를 겨냥한 F.E.바뵈프의 음모가 미연에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그 뒤 97년 3월의 선거에서 입헌 왕당파가 양원(兩院)에 진출하고 위의 법령이 폐지되자 시에예스·바라스 등의 순(純)공화당파는 군대의 위력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의원을 추방하였다.
이어서 98년의 선거에서의 자코뱅파 진출에 대해 선거의 무효를 선언하고, 99년 6월에는 다시 M.바르텔미 등 입헌 왕당파의 총재를 배제하였다. 이와 같이 총재정부는 2,3차에 걸쳐 비상수단을 행사하여 그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재정정책은 낮은 가격을 형성하던 아시냐 지폐를 회수, 폐기하기는 하였으나 강제공채 등에 의하여 구(舊)피낭시에(왕정과 결탁한 금융업자)·은행가 계층을 냉대하였다. 사법·행정에 대해서도 관직자가 선거제이기 때문에 정치적 압력이 커서 안정성이 없었다. 신앙의 자유는 확대되었다고 하지만 입헌 성직자는 봉급과 공무원 자격을 박탈당하여 공적 시설의 예배가 허용되지 않았다.
<브뤼메르의 쿠데타>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국민공회 해산 때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한 실적이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여 프랑스에서의 명성을 드높이고 있었다. 이집트 원정에서는 영국군 때문에 일시 궁지에 빠졌으나 탈출하여 1799년 11월 9일(공화력 8년 브뤼메르 18일), 시에예스·J.푸세·탈레랑 등과 짜고 쿠데타를 일으켜 총재정부를 폐지하고 통령정부(統領政府)를 수립,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와 동시에 의회를 삼원제(三院制)로 하여 공화주의적 비판세력을 봉쇄하고 부르봉가의 복위를 도모하는 왕당파와 자코뱅 급진파를 탄압하였다. 한편으로는 신구 관직자를 재능, 경험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통령제하의 요직에 앉히고, 또한 프랑스 은행의 설립, 정교협약(政敎協約)의 체결 등에 의해 국민 각계층의 욕구를 충족시켜 국내의 안정을 꾀하였으며, 이로써 프랑스 혁명은 종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혁명의 의의]
프랑스혁명은 자본주의 발전기에 있어서 절대왕정에 반항하여 봉건적 특권계급과 투쟁하여 얻은 유산시민계급의 승리였으므로 보통 이것을 시민혁명이라 부른다. 이 시민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자코뱅당의 좌파가 기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옹호하는 절대평등사회의 실현은 실패하였으나 프랑스 일국의 혁명에 그치지 않고 그 영향이 널리 전유럽에 퍼져, 봉건제도를 타파하고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승리의 기초를 세워 근대사회의 성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혁명은 사상·법률·정치·사회 전영역에 영향을 미쳤고, 자연권(自然權) 사상을 무기로 하여 절대왕정(絶對王政)의 법구조를 타파하고 사적 소유를 기초로 하는 부르주아 사회를 건설하였다. 혁명의 귀착점은 국내 상공업의 자유, 토지경작의 자유를 승인한 것이다. 그리고 혁명 초기에는 절대주의 국가간의 전쟁을 부정했는데, 도중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의 간섭전쟁이 일어났고, 이어 영국이 참전하였다.
이러한 외부의 압력을 받아 상황은 급속하게 전개되어 나갔으며, 정정(政情)의 불안정도 계속되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군대를 배경으로 한 나폴레옹의 쿠테타로 수습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역사적인 환경이며, 당시의 프랑스가 영국보다는 후진국이었지만, 다른 인근 제국보다는 선진자본주의국이었음을 반영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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