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Revolution Francaise
1789년 7월 14일부터 1799년 11월 9일까지 약 10년간에 걸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시민혁명.
절대왕정(絶對王政)의 구제도(舊制度;앙시앵레짐)를 타파하고 자유평등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한 전형적인 시민혁명(bourgeois revolution)이다.
[원인]
혁명사상은 18세기 중반부터 C.L.몽테스키외·M.A.볼테르·J.J.루소·D.디드로 등에 의해서 싹트기 시작한 계몽사상이었다. 그 가운데 몽테스키외는 삼권분립과 그 유기적인 결합을 주창하고, 귀족제를 살린 군주제를 이상으로 하여 루이 14세가 주장하는 절대주의를 비판하였으며, 루소는 문명에 대한 격렬한 비판에서 출발하여 개인이 계약에 의해 인격과 소유권을 양도하는 대신 평등한 공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국민국가(國民國家)를 구상하였다.
이같이 여러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절대왕정은 신분제 사회에 입각하여 국민의 2%에 지나지 않는 성직자와 귀족에게 면세특권을 주고 있었다. 그들 특권신분은 제 3 신분, 특히 85%를 차지하는 농민의 납세에 기생(奇生)하였고, 봉건영주들은 지대(地代)를 징수하였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후기부터 루이 15세 치세를 통해서 대외정책의 실패와 궁정생활의 낭비로 심각한 재정난에 부딪치자 정부는 세금의 증가와 국채 발행으로 적자를 보충할 뿐 근본 대책을 강구하지 않았으므로 절대왕정의 기초가 무너지고 혁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774년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 때 국정의 근본적인 개혁을 단행하지 않고는 위기를 면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특권계급은 상층시민과 결탁하여 구제도를 옹호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을 다하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선량하고 신앙심이 깊은 인물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었으나 국정을 개혁할 수 있는 굳은 의지와 결단력이 없었다.
그리고 왕궁의 권위가 루이 14세 시대에 비하여 매우 약화되었으므로 특권계급의 세력을 누르고 개혁을 단행할 만한 실력이 없었다. 루이 16세의 재무장관이고 중농주의 경제학자였던 A.R.J.튀르고와 스위스 대은행가로 1776∼81년까지 재무장관이었던 J.네케르 등이 재정 뿐 아니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궁정귀족(宮廷貴族)과 고등법원을 중심으로 한 반동세력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또 미국독립전쟁을 원조하기 위하여 영국에 선전(宣戰)하였는데 그 결과로 다액의 국채를 발행하여 화폐가치를 폭락시켰으며, 게다가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 미국독립전쟁의 승리는 절대군주(絶對君主)와 특권계급의 탄압에 반항하는 프랑스 민중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으므로 헌법제정과 자유평등을 주장하는 소리가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1789년에 이르러 대흉작 때문에 일어난 곡가(穀價)의 폭등과 국고의 지불정지로 초래된 재정계의 공황으로 국내정세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하여졌으므로, 루이 16세는 최후 수단으로 1614년부터 소집되지 않았던 삼부회(三部會)의 소집을 선언하였다. 성직자·귀족·시민으로 구성되는 삼부회 대표들을 선출하기 위해서 비교적 자유스러운 토론이 전개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민중의 정치의식이 많이 계몽되었다.
삼부회 의원들은 선거구의 여론을 대표하는 진정서를 가지고 집합하였는데 특히 제 3 신분에서는 입헌정부(立憲政府)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시민계급과 귀족 출신의 계몽주의자가 많이 선출되었다. 1789년 5월 삼부회가 베르사유궁에서 소집되었을 때 제 3 신분의 의원들은 그들만이 국민을 대표하는 참다운 의원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계급과 합석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민의회를 구성하였는데, 귀족·성직자계급의 의원들도 점차 가입하게 되었으므로 드디어 삼부 합동으로 헌법국민회의(憲法國民會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보수파 귀족의 선동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위협하였으므로 이에 극도로 분개한 파리 시민들은 7월 14일을 기하여 궐기하였다. 그들은 먼저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고 범인들을 석방하였는데 이것이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파리 시민들은 의회의 승인을 얻어 시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자치제를 실시하며 국민군을 편성하였다. 그 영향은 곧 지방에 파급되어 지방도시도 파리시를 모방하여 자치제를 시행하였으며 도처에서 봉기한 농민들은 영주·관리·어용상인·부자 등을 죽이는 등 무서운 사태가 전국에 확대되었다.
[경과]
<삼부회에서 국민의회로>
전국 삼부회는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궁에서 개최되었다. 성직자·귀족의원은 각 300명, 제 3 신분은 약 600명이었다. 시이예스 등 제 3 신분 의원들은 모든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사안(事案)을 다수결투표에 의하여 결정하자고 주장하며 부별투표(部別投票)를 주장하는 특권층 보수파 의원과 대립하였다.
평민의원과 성직의원 일부는 궁정의 방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6월 20일 국민의회(Assemblee Nationale)를 결성하고 프랑스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선서하였으며(테니스 코트의 서약), M.라파예트 등 자유주의 귀족도 합류하여 6월말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국민의회는 7월초 <헌법제정의회>로 이름을 바꾸고 헌법과 의회정치의 개설작업에 착수했는데, 아르투아백작 등 궁정 보수파는 국왕에게 압력을 넣어 베르사유 부근에 군대를 집결시켜 파리 시민들을 긴장시켰다.
<바스티유 습격>
7월 11일 국왕 루이 16세는 사태의 책임을 물어 삼부회의 최고책임자 네케르를 파면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에 전해지자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C.데물렝이란 젊은 신문기자의 선동에 따라 시가를 휩쓰는 폭동을 일으켰다. 격분한 시민들은 14일 약 1만명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있던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으며, 왕실의 친위대가 이에 가담하여 감옥을 점거하였다.
이튿날 구(舊)체제 최후의 파리 시장(市長)과 수비대장은 살해당하고, 궁정의 기도는 저지당하였다. 파리는 자치제(commune)의 확립쪽으로 발전해 갔으며, 왕은 이에 군대를 철수시키고 네케르를 재등용하였으며 라파예트를 국민위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선언>
바스티유감옥의 습격 소식이 지방에 전해지자 파리에서 일어난 운동에 호응하듯 격렬한 농민소요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오랜 봉건적 속박을 벗어나기를 열망하였으며 영주측이 보관중인 장원문서를 불태우고 장원과 성채(城塞)를 약탈, 소각하였다. 농촌은 대혼란에 빠지고 강도의 무리가 날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농민들은 밤에 문을 잠그거나 무장하여 자기방위를 하는 등 공포의 분위기였다.
당시 매우 막연하지만 광범하게 퍼진 공포분위기를 <대공포(大恐怖;Grande Peur)>라 부르고 있다. 이 소요를 배경으로 헌법제정의회(立憲議會)는 8월 4일 밤 L.M.노아유자작의 제안으로 봉건적 특권과 영주제가 폐지되어 전국민이 대등한 권리와 의무를 보증받는 법 앞의 평등이라는 전제조건이 실현되었다.
다만 1790년 3월 농노신분과 관계된 영주권은 무상(無償) 폐지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영주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분을 돈으로 되사야 하였기 때문에 그 뒤에도 분쟁은 계속되었다. 입헌의회는 이어 89년 8월 26일 라파예트와 E.J.시에예스 등이 기초한 <인권선언>을 가결하고 인간의 천부적 자유, 권리의 평등, 국민주권, 법 앞의 평등, 사상의 자유, 과세의 평등, 소유권의 신성(神聖) 등 새로운 국민사회의 기본원칙을 명시하여 혁명의 정의(正義)를 내외에 널리 알렸다.
이 <인권선언>은 정치적인 평등이나 저항권의 구체적인 행사법이 명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후일 자코뱅 <산악파(山岳派)>의 인권선언과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농촌과 도시민중의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절대왕정이나 보수파귀족의 저항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민사회의 구성원리를 분명하게 선언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부르주아적이기는 하지만 근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하나의 기념비로서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국왕은 봉건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선언에 동의하기를 주저했는데 10월 5일 때마침 빵 부족으로 생활고를 겪고 있던 파리의 주부들이 베르사유까지 행진하여 의회에 호소함과 동시에 6일 왕궁으로 난입했으므로 국왕은 의회의 뜻을 따라 선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회와 함께 파리로 귀환하였다. 바스티유 함락과 더불어 베르사유 행진은 프랑스혁명 초기의 극적 사건으로서 이로써 의회는 왕으로부터 독립, 민중에게 예속되었다.
<1791년 헌법>
입헌의회는 이미 A.바르나브의 주장에 의거 일원제(一院制)와 국왕의 정지적(停止的) 거부권을 정하여 입헌군주제의 근간을 구축하였으나, 재정의 개선은 C.M.탈레랑의 제안대로 교회재산의 국유화와 매각(賣却)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790년 5월부터 교회재산 경매가 시작되었는데 지불수단으로 발행한 아시냐(assignat)를 지폐로 바꾸어 점차 대량으로 발행하였다.
그리고 성직자는 정부에서 봉급을 받는 관리로 하고, 이것을 결정한 성직자는 국가와 의회에 선서(宣誓)를 해야 하였으므로 많은 성직자가 선서를 거부하고 혁명을 적대시하기 시작하였다. 입헌의회는 이밖에 현제(縣制)의 시행, 사법제도의 정비, 농사법의 제정, 길드의 폐지 등 근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납세액에 따라 능동시민과 수동시민의 차별을 두어 3일분의 노임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하는 시민에게만 예선회(豫選會)에서의 투표권·집회권·청원권을 인정하고, 국민위병(國民衛兵)에서도 수동시민을 배제하였다.
이리하여 권리선언 6조에서 모든 시민의 입법과정에의 참여권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791년 프랑스헌법은 재력이 있는 부르주아계급의 이익을 반영한데 그쳤다. 즉 입헌의회는 자유주의 귀족과 상층 부르주아를 주체로 하면서, 영주제의 지주제로의 탈피와 상공업의 자유라고 하는 부르주아혁명으로서의 최소한의 과제를 수행하려고 하였다.
한편 국왕 일가는 91년 4월 H.G.R.미라보가 죽은 뒤 혁명의 진행과정에 불안을 느끼고 6월 20일 파리로부터의 도피를 꾀하다가 바렌에서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는 더욱 불신의 대상이 되었고 파리의 급진파는 이에 격분하여, 코르들리에협회를 중심으로 7월 샹드마르스에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서명집회를 개최하였으나 라파예트가 지휘하는 국민위병에 의해 진압되었다. 의회에서는 바르나브 등이 헌법의 완성을 서둘러 9월에 전편(全編)을 채택하고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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