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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랑스 6 (혁명전쟁과 국민공회의 성립)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09:57

프랑스 혁명전쟁과 국민공회의 성립

혁명전쟁의 시작

1791년 10월 1일 소집된 입법의회에서는 왕권을 수호하려는 푀이양당과 왕권을 제약하려는 지롱드당이 대립하였다. 지롱드당은 P.V.베르니오·장소네 등 남서부 출신자와 J.P.브리소·M.콩도르세 등 파리에서 선출된 이론가들의 집단인데, 지방 무역상·기업가를 비롯하여 중산 부르주아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망명자 재산의 몰수와 선서거부 성직자에 대한 봉급의 정지 등 강경조치를 가결시켰는데, 이 당의 주요목표는 전쟁정책에 있었다.

전쟁 수행 중에 국왕의 태도를 확실하게 해 두려고 했던 것이다. 국왕은 4월 20일 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 선전하였으나,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프랑스군은 큰 혼란에 빠져 계속 패배하였고, 라파예트장군 등은 공격불능을 선언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양국군대는 즉시 연합하여 프랑스에 침입하여 국왕옹호의 선언서를 발표하여 프랑스국민을 위협하였다.

이에 분격한 파리시민들은 연일 의회로 몰려가 패전책임자의 처벌 등을 요구하였고 의회는 시민들의 애국적인 감정에 호소 의용군을 모집하였다. 프랑스 국가(國歌) 라 마르세예즈는 이 때 마르세이유의 의용군이 부른 진군가이다.

<8월 10일 사건>

파리 여러 구(區)의 국민위병대, 시총평의회(市總評議會)는 2개의 진영으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는데, 입법의회에서는 지롱드당이 우위에 섰으며 1792년 7월 11일에는 <조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각지에서 청년들이 애국적 정열에 불타 의용군으로 참가함으로써 파리는 다시 소란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가운데 과격한 공화주의자들은 다시 한번 시민 봉기(蜂起)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쟈코뱅협회의 해산을 꾀하였다가 실패한 라파예트는 전방에서 오스트리아군에 투항하였고, 브룬스비히선언이 8월 1일 파리에 전해지자 8월 9일 민중의 대표를 자임한 지구위원은 돌연 파리시청을 점거하고 봉기, 코뮌을 수립하여 왕당파(王黨派)의 국민위병 지휘관 망다를 사살하였다. 이튿날인 10일 국민위병을 선두로 수동시민의 무장부대가 가담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튈르리궁으로 진격하여 왕궁을 지키던 스위스인 용병들을 살해하였다(8월 10일 사건).

국왕 일가는 의회로 난을 피했으나 곧 코뮌 당국에 인도되었고, 왕권은 일시 정지되었으며, 파리는 봉기 코뮌의 지휘하에 놓여 왕당파의 무장해제가 단행되었다. 9월초 베르됭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격분한 민중은 9월 2일과 3일 아베이감옥을 습격하여 선서거부 성직자 등 죄수를 학살하였다.

<국민공회(國民公會)의 성립>

발미전투에서의 승리가 알려진 1792년 9월 21일 신헌법을 작성하기 위해 국민공회가 소집되었다. 공회는 왕정의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제를 수립하였다. 국민공회는 브리소·베르니오·콩도르세 등 약 200명의 지롱드당이 우익, G.J.당통·M.F.로베스 피에르 등 약 100명의 자코뱅당이 좌익으로 갈라져 대립하였다.

지롱드당은 가장 혁명적인 파리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지방분권적인 연방공화제를 주장하였는데 민중의 관심을 밖으로 돌리고 프랑스 상품 시장을 넓히기 위하여 대외전쟁에 정치의 중점을 두었다. 이에 대하여 자코뱅당은 급진적 혁명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하여 통일 불가분의 공화국을 원칙으로 하고 중소시민·농민의 옹호와 해방을 주창하며 인민의 이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수행하고 파리코뮌이나 민중과 타협하려는 산악파(山岳派)가 있었다.

양당의 중간에 결정권(캐스팅 보트)을 장악한 평원파(平原派)가 있었다. 산악파 중에는 혁명독재를 일찍부터 주장한 J.P.마라, 8월 10일 사건 후에 봉기위원이 된 로베스피에르가 있어 후일 지롱드당에서 이탈한 뒤의 자코뱅클럽을 이끌어 이른바 자코뱅당으로서 파리의 여론에 영향을 끼쳤다. 양당의 대립은 루이 16세 재판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하였다. 지롱드당은 국왕을 변호하여 그의 정치적 책임의 해제를 요구하였으나 1793년 1월 21일 산악파의 주장이 근소한 차로 통과되어 루이 16세는 국가에 대한 음모죄로 처형당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지롱드당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 전 유럽의 군주에게 큰 충격을 주어 2월초에는 영국·네덜란드가, 3월초에는 에스파냐가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또 2월말에 의결한 30만 명 징용령(徵用令)은 선서거부 성직자의 영향을 받고 있던 방데지방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로베스피에르 등 산악파는 과격파의 한 사람인 J.루를 앞세운 민중의 식량폭동과 각료체포를 겨냥한 발루레 등의 봉기를 제지하면서 혁명재판소를 설치하고 자코뱅클럽을 통해, 또 의원 스스로 3월말에 파리 여러 구에 창설된 혁명위원회로 가서 민중과의 접촉을 심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지롱드당이 결의한 마라의 재판은 파리 민중의 신경을 자극하였으며 그가 석방된 뒤 봉기의 기운이 급속히 고조되어, 93년 5월 31일과 6월 2일에 국민공회 포위로 지롱드당 의원의 대다수가 추방당하였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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