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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 황실을 피로 물들인 여제 여태후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09:58

중국 황실을 피로 물들인 여제 여태후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황제는 진나라의 시황제였지만,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일하고 중화문명의 기틀을 세운것은 한나라 고조였다.
 그러나 한고조는 기원전 202년 한나라를 세운지 얼마지나지 않아,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토벌하기 위해  대부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이로인해 도읍 장안성은 물론 모든 내정이 여태후에 의해 장악되어갔다.

 따라서 중국역사에서는 여태후를 단순한 황제의 부인이 아니라, 한나라를 실권통치한 여제로서 평가하는 성향이 매우 높다. 그런데 이처럼 한고조를 능가하는 권력을 차지하였던 여태후지만, 한 여인으로서 아니 한 인간으로서 무척이나 불행하고 외로운 일생을 살아야만 했다.
   
농사군의 딸에서 황제의 부인으로


 한고조 유방은 요즘으로 말하면 향토예비군 단장정도의 직책을 맡고 있던 농민출신이었고, 여태후의 아버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관상을 볼 줄 알았던 것으로 보아 士(사)족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여후의 아버지는 한고조의 관상만을 보고, 한명의 농민에 불과하였던 한고조에게 딸의 혼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농민에게 시집온 여태후였지만, 고달픈 농사일조차 오히혀 자랑으로 삼고  아버지가 예언한 한고조의 미래역시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한고조는 패의 하급 관리로 임명되었다가, 죄를 지어 숨어지내야 할 형편에 있었는데 이 때 여태후는 남편 대신 옥고를 치뤄야만 했다.
 그러나 여태후는 모진 학대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고조의 은신처를 말하지 않아 죽음의 위기까지 몰리기도 하였다. 다행히 한고조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 도움으로 사면되긴 하였지만, 확실히 그녀는 남다른 강인함과 인내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어려운 시절의 경험은, 한고조가 초패왕과 더불어 중국쟁패를 벌이는 동안, 수없이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게 하였다.
 심지어 그녀는 한고조가 기원전 205년 초패왕에게 패하여  2년간이나 인질로 있어야만 되었다. 그런데 한고조는 퇴각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탄 수레를 가볍게 하기 위해 두자녀를 몇번이고 버리려고 했던 일이 있었다.

 비록 한고조의 경호무장이었던 하후영이 두 자녀를 구하여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훗날 이 사실을 알게된 여태후는 남편인 한고조를 불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중국황실을 피로 물들인 대 복수극의 서막이 되었다.

 또 기원전 198년에는 친딸 노원공주를 흉노추장 모돈에게 시집보내 흉노국을 부마국으로 삼으려는 계책을 꾸미기도 하였다. 다행히 여태후가 밤낮으로 울고 애원하여 딸이 흉노족의 부인이 되는 것은 막았지만, 한고조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갔다. 



 어머니로서의 모정과 여제로의 야망

 기원전 197년 거록에 태수로 부임하였던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번에도 한고조는 직접 전장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한고조가 도성을 비운사이, 중국통일의 1등공신이었던 한신이 초왕에서 회음후로 격하된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획책하고 있었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여태후였지만, 반란세력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정치판에 끼어 들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녀가 정치판에 뛰어들자 말자, 다소 우유부단하고 귀가 얇았던 한고조와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옛날 조, 위, 연, 제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초패왕의 군대를 격파한 최고의 전공자 한신을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잡아들여 참수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진희가 토벌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후, 그것을 구실로 축하잔치에 참여케 하여 한신을 참수 한 것이다.

 물론 고조가 진희의 반역을 토벌한 것은 그 이후였다.  도성으로 돌아온 한고조는 최대의 공헌자이자 정적이기도 하였던 한신을 그토록 쉽사리 제거한 여태후를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후는 한신뿐 아니라 반란을 획책하다 항복한 후, 연금상태에 있던 팽월을 주살하고 일족을 몰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팽월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경포에게 보냄으로써, 경포의 반란을 유도하였다.
 팽월의 끔찍한 시신을 본 경포는 자신도 언젠간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른 불안감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과는 참담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한고조도 경포의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빗나간 화살에 중상을 입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기원전 195년 53세의 나이로 죽음에 임박해 지자, 아직 젊은 여태후가 자신이 죽은 후 외척세력과 야합하여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잠정적으로 한나라의 조종이 유씨가 아닌 여씨로 바뀔 수도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고조는 그녀를 멀리함은 물론, 그녀와의 사이에서 나은 효혜제까지 불신하였다.  그대신 한고조는 애첩 척희가 나은 조왕 여의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원래 여자의 애원에 약했던 고조는 척희가 조왕을 태자로 바꿔달라고 하자, 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려 하였다. 하지만 여태후역시 여자가 아니었던가... 이번에는 여태후가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궐 바닥에 업드려 울며 호소하였다. 또 이미 내정깊은 곳까지 장악한 여씨 세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한고조는 여태후와 사이에서 나은 효혜제에게 황위를 물려 주었다. 그리고 척희에게는 "앞으로 여후가 당신의 주인이오"라는 말을 남겼다.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여태후를 주인으로 섬기고 아무런 불평불만을 나타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태후의 자리에 올라 섭정을 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은 바뀌었다. 

가장 잔인한 복수극

 여태후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이 마땅이 누려야 할 황제와 태후의 자리를 위협한 척희에 대해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95년 한고조가 사망하자, 척희를 영항(永港)에 유폐시키고 말았다.
영항이란 원래 후궁들이 거처하던 여러개의 방으로 구성된 궁중 내 건물, 즉 후궁전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여러개의 방에는 지하로 연결되어 후궁을 유폐시키고 문초하고 또 치죄하는 용도로 쓰이는 방도 있었다.

 여태후는 우선 척희의 아름다운 머리결을 밀어버린 후 목에 쇠고리를 끼우고 죄수복으로 갈아 입혀 매일마다 절구질을 하는 노역을 시켰다.
 하지만 여태후와는 달리 심성이 무척 착했던 효혜제는 조왕을 구해주기 위해 항상 숙식을 함께 하였다.

 사실 여태후에게는 아무리 악독한 짓이라도 '자식을 위해서'라는 위안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서 지독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한고조에 이은 자식에 대한 배신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그 분노는 역사상 길이 남을 가장 잔혹한 복수극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효혜제가 사냥을 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망설이지 않고 조왕을 독살시켜 버렸다. 조왕 여의뿐 아니라, 회양왕 우, 양왕 회, 연왕 건등 한고조와 후궁사이에서 나은 아들들은 차례대로 암살당하였다
조왕을 독살시킨 다음대상은 자연 척희였다. 그러나 이 모든 복수극의 시발점은 척희였기에, 단순한 독살이나 사형으로는 만족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척희의 손발을 모두 잘라 목과 몸만 남긴 후 눈을 도려내고 귀를 자르고 약을 먹여 말을 못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산송장이나 다름없었지만, 아직 생명이 붙어있는 척희를 변소 구덩이 속에 던져 넣은 후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잔혹한 모습을 친아들 효혜제에게 보도록 하였다. 원래 심성이 온순하였던 효혜제는, 거의 사람의 형체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그 물체가 지난날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던 척희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결국 효혜제는 척희의 끔찍한 모습을 본지 얼마되지 않아, 제위 7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효혜제는 정실부인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따라서 여태후는  자기 집안에 있던 미인한명을 들이게 되었고, 마침 아들을 출산하자 생모를 죽이고 정실부인이 낳은 태자처럼 꾸몄다.
 사기에는 그에 대해 소제(少帝)라고만 나와있는데,  소제가 4~5세 무렵 억울하게 사사당한 생모의 소식을 접하자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던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는 몰랐으리라, 바로 옆에서 보좌하던 궁녀와 환관역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던 여태후의 눈과 귀였다는 것을 ...  결국 소제는 척희가 강금되었던 영항에 유폐되었으며, 얼마 후 원인 모를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소제가 사망하자,효혜제의 후궁이 낳은 아들 유홍을 황위에 옹립시켰으며, 이때부터 여태후는 8년간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비록 명목상 유홍이 3대 황제였지만, 모든 병권과 요직이 여씨 세력에 의해 철저하게 장악되었으며 그녀가 황제의 모든 권한을 대신하는 여제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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