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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제국의 2차 원정과 하루밤의 역사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10:19

원제국의 2차 원정과 하루밤의 역사

 1274년 10월 있었던 1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침공은, 몽골군 지휘부의 결정적인 판단실수와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으로 인해 일본이 기적적으로 승리하였다.
 그러나 판단실수를 인정할 수 없었던1차 원정의 총사령관 흔도와 부사령관 홍다구(洪茶丘)는,  원(元)제국의 도읍 북경으로 돌아가 쿠빌라이에게 패전의 원인을  단지 폭풍우에 의한 함대의 난파 때문인 것으로 보고했다.
  이에 쿠빌라이칸은 즉각 재침을 결의하고 고려에도 다시 출정을 준비하도록 명했으니, 1차 원정 패전원인을 충분히 분석하지 않은 2차 원정은 시작부터가 잘못되고 있었다. 
  

  다만 쿠빌라이칸은 남송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재침은 7년간 늦춰젔으며, 그로인해 일본은 방어책을 세우기 충분하였다.

여몽연합군이 입었던 갑옷과 사용하였던 단궁, 규슈 앞바다에서 발굴한 것이라 함

단호한 가마쿠라 막부의 의지

  쿠빌라이가 파견한 사신단은 1275년 4월, 구주(규슈)를 거치지 않고 일본 본도(혼슈本州)를 직접 방문하였다.  구주의 적대적인 분위기와 본도의 지형을 미리 살펴보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가마쿠라막부는  임전체제로 들어가 사신일행을 엄중하게 감시했으며,  8월이 되어서야 가마쿠라 막부의 집권 토키무네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토키무네를 접견한 것은 원의 사신단 5명에겐 불행이었다. 그는 쿠빌라이칸의 인자함을 역설하며 봉건관계를 체결하는 것이 양국에 이익이 된다는 내용을 연설 하였지만 9월4일 모두 참수(斬首)형을 당하고 말았다. 
 토키무네로서는 원제국에 보내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때에도 몽골 내부의 분열과 남송망명정권의 끈질긴 저항으로 3년간이나 일본원정을 미루어야 했다.

  이어 1276년 3월경 가마쿠라 막부는 고려원정을 결의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異國出擊計劃(이국출격계획)이라하는데, 하지만 당시 일본의 선박구조수준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여, 수만명의 병력을 일시에 이동시키기엔 부족하였다. 더구나 대규모 해전 경험도 없었고, 무엇보다 고려군과의 현격한 전력차이는 단시간에 극복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가마쿠라 막부는 무리한 고려원정보다는 히카타만 항을 중심으로 한 방루축조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하여 히카타만 곳곳에는 폭 3.1m, 높이 2.6m의 방루가 설치되었다.

한편 1279년 남송 원정을 마친 쿠빌라이칸은 다시 사신을 일본에 보냈으나, 가마쿠라 막부는 이번에도 참수(斬首)로 응답하였다. 



일본으로 향하는 여몽연합, 그러나 주력은 고려수군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이 두번이나 참수되자 원제국은 더이상 원정을 미루지 않았다.  원제국은 고려군을 주력으로 삼는 4만 2천의 동로군과,  남송출신 한족을 주력으로 삼는 10만의 강남군을 편성하였다.이번에는 동로군의 병선만 900척이었고 강남군의 병선은 3500척이나 되었다.

  그런데 강남군 전함에는 다수의 농기구등과 씨앗 등이 실렸다. 이것은  동로군이 구주를 점령할 경우, 남송인들을 그곳에 정착시켜 장기적으로 영토화 할 목적으로 보인다.
 따라서 2차 원정의 실질적인 핵심은 고려군이었고, 원제국군은 보조적인 역활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 고려 충열왕역시 이번 기회에 왜구들의 본거지를 근본적으로 소탕하려 하였기 때문에, 1차 원정때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동로군의 지휘부는 이번에도 혼도와 홍다구였다. 사실 홍다구는 고려출신의 매국노로, 그 조상이 싸우지도 않고 투항한 이후 원제국의 철저한 앞잡이가 되었으며, 김방경에게도 악감정을 품고 무고를 하여 죽음직전까지 몰고간 인물이다. 또한 원정에 동원된 고려군역시, 고려를 항복시킨 나라의 병사로 싸워야 한다는 사실과 홍다구와 같은 인물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그리 사기가 높지 못했다.

 2차 여몽연합군의 원정


 
동로군이 합포를 출발한 날은 1281년 5월3일이었으며 강남군과  이키도에서  6월15일 합류하기로 하였다. 동로군이 합류날자보다 40여일이나 먼저 출항한 것 역시, 이들이 주력이었으며 일본 왜구의 본거지를 근본적으로 제거하려는 고려의 의지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대마도를 가볍게 돌파한 동로군은 1281년 5월26일 이키도에 상륙하였다. 
이때  이키도의 수비대를 이끌고 있었던 사람은 19세의 쇼니 쓰케토키였다. 그러나 그가 거느린 병력은 총 100기 2~300여명 수준, 이키도에 상륙하는 동로군을 향해 바위를 굴리고 장궁(長弓)을 쏘며 용감하게 맞서싸웠지만, 전군은 전멸당하였으며 그도 온몸에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이키도를 점령한 동로군은 10일간 휴식하고 소부대만 잔류시킨 뒤 6월6일 하카타항으로 침입했다. 그런데 상륙정을 타고 하카타만 항으로 접근하던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드디어 가마쿠라 막부가 심여를 기울여 만든 20km의 방루가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상륙이 원할치 않자 동로군은 작전을 변경,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던 시카노도(志賀島)에 상륙하였다. 특히 김방경은 6월 8일 일본군 수급 300여 급을 베는 등 분전하였지만, 홍다구는 연전연패하였고 그로인해 천여명이나 되는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여기에 역병까지 돌아 총 사망자는 3000여 명에 육박하였다.

  결국  6월6일 밤부터 8일간에 걸친 시카노도의 공방전은  일본군의 승리고 끝나고 말았다. 또 일본은 여몽연합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잘 갖추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상륙작전도 여의치 않았다. 다만 일본군의 피해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어서, 강남군이 재때에 합류하여 준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강남군은  이키도가 아닌 평호도에 보름이나  늦게 도착하였고,  
 그때문에 동로군은 유리한 고지를 나두고 훨씬 서쪽에 위치한 평호도로 물러나서 강남군과 합류해야 했다. 일본군에겐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저절로 생긴것이었으며 그러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 7월 초순을 넘고 있었다.
  
  또한 여몽연합군은 부상자와 병자를 재외시키고 부대를 재편성하는 동안,  계절은 태풍이 시작되는 7월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여기에 히카타만으로 가는 전초기지인  다카도(鷹島) 를 점령하였을 때는 이미 7월27일(양력 8월19일)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때까지도 별다른 폭풍이나 태풍이 불어오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다카도에 정박중이던 4400척의 여몽선단을 향해, 일본군은 기습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여몽연합의 병선에 탑재되어 있는 투석기로 인해 접근조차 어려웠고 피해만 가증되었다. 결국 일본군은 그들이 선호하는데로, 육지에서의 기습작전이나 백병전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었다.



  운명의 날
  
여몽 연합이 하카타만을 향해 진격했을 때는 이미 음력 7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용하던 바다는 마침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오히려 태풍이 지나치게 늦게 온 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도  7월의 태풍보다 8월 중순이나 말경에 밀어닥친 태풍의 위력이 더 강한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거대한 삼각파도, 곳곳의 암초, 그러나 그보다 더 피해를 키웠던 것은 병선간의 충돌이었다. 파괴된 병선은 그자체로 암초역할을 하였고 음 7월 30일부터 윤 7월 1일 사이의 태풍은 1차 원정때 불었던 해풍정도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위력적이었다.
  
 단 하루밤의 태풍으로 입은 여몽연합의 피해는 전체전력의 70% 정도에 이르렀고 사망자도 7만 여명에 육박하였다.
  태풍으로 인해 이탈한 병력중 일부는 다키도(鷹島)등지로  귀선하는데 성공하기도 하였지만, 윤 7월 1일부터 7월 7일에 거쳐 전개된 일본군의 초토전에 의해  전멸을 면할 수 없었다.


 아타하이·흔도·홍다구·김방경·범문호 등 지휘부는  침몰하지 않은 병선들을 타고 고려로 귀환하는데 성공하였지만, 그들의 도주는 무책임한 것이었다. 
 일본인에게 포로로 잡힌 군사만 2~3만명이었는데, 이들은 남송출신 중국인만을 제외하고 모두 집단학살되고 말았다.
 
동국통감에는 몽골군중 돌아오지 못한 자 무려 10만, 고려군중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 또한 7000여 명 정도라고 한다. 즉 중국내에서 건조된 병선의 경우 그 손실이 90%이상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고려인이 건조한 병선은 손실이 30%내이다. 
 
 물론 당시 선박건조기술이 고려가 중국보다 앞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록 적선을 건조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거기에 승선하는 사람은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나마 일본원정에 동원되었던 우리나라 사람은 다수 살아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역사를 바꾼 원제국의 내습
  
 1274년 1차 여몽연합과 1281년 2차 여몽연합은 비록 자연재해의 영향이 컸지만, 그렇다고 일본이 단지 자연재해 덕으로 모든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재해가 불어올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였던 일본인의 결속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제국의 속국이 되는 길보다 당당하게 싸워 독립을 유지하고자 하였던 가마쿠라 막부의 의지가 선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일본이라 하더라도, 재침을 두려워하지 않고 철저한 준비끝에 최선을 다해 막아낸 점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 그러나 이 가마쿠라 막부 최대의 업적이 오히려 정권붕괴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즉 원재국의 재침에 대비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가마쿠라 막부를 가난하게 만들었고, 또 각지역에 무장을 강화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위협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세력이 많아지게 되었다.
 일본 막부체제는 한마디로 무력의 힘에 의해 정권이 유지되는 체제인데, 그 무력의 힘이 약해지면 다른 강자에게 그자리를 내어 줄 수 밖에 없다.
 칼로써 일어선 자는 칼로써 망하는....그것이 바로 막부체제의 모순이자 일본 역사의 순환이었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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