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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제국의 1차 원정과 가미가제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3. 10:19

원제국의 침략과 가미가제

 12세기 아시아의 정세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북방의 작은 유목민족집단에 불과하던 몽골족은 칭기스칸의 등장과 함께 역사상 최대 판도를 개척해 나갔다. 이 몽고제국의 급성장으로 인해 세계중심을 자처하였던 중국의 송나라는 크게 위축되었으며, 동북아의 강국이었던 고려역시 무인정권이 성립하는등 국가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일본역시 미나모토가문의 요리토모가 안토쿠 천황을 지지하는 헤이시 정권을 종식시키고 고시라카 법황을 지지하는 가마쿠라 막부를 성립시키는 격변을 겪었다. 그러나 정권수립과정에서 요리토모가 동생 요시쓰네를 비롯한 친족세력까지 모조리 토벌하거나 숙청하고, 여기에 가문내의 복수극이 그 후대까지 전해져 스스로 문을 닫고 말았다. 이렇게 미나모토가문이 무너지자, 그 빈자리를 차지한 것은 요리토모의 외가였던 호조씨였다.

특히 가마쿠라 막부의 창시자인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는,  1221년 죠오쿠의 난(承久の亂)을 통해  고토바상황(後鳥羽上皇)의 친정복귀를 저지하고 호조씨가 주도하는 가마쿠라 막부체제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호조씨에 의해 가마쿠라 막부체제는 전성을 누리기 되었는데, 그들이 무사우대 정치를 펼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고려왕조는 유라시아대륙을 재패하고 원제국을 세운 몽고족과 40여 년의 항쟁끝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를 항복시킨 쿠릴라이칸은 남송을 보다 효율적으로 정복 할 방법을으로, 일본을 남송원정에 동원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에따라  1266년의 제1차 일본 초유(招諭-권고를 목적으로 파견)에 이어 1267년 제2차 초유, 1268년의 제3차 초유, 1269년의 제4차 초유를 거듭 시도했다.

1270년 제5차로 파견된 초유사는 일본이 조공하지 않으면 출병하겠다는 쿠빌라이칸의 의사를 통고했다. 사실상 최후통첩이었지만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권력자인 18세의 청년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1251~1284)는 조공을 거부하고 각지역의 담당자들에게 방위 준비를 명령했다.

쿠빌라이는 제5차 초유의 실패 이후 일본이 위협만으론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선 900척의 건조와 12000여 명의 병사를 징발하였다. 

 1272년 4월, 최후의 제6차의 초유사가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사실상 원정을 독촉하는 임무가 아니라  일본의 정세와 지리를 살피는 첩보수집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가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제주도에서 최후로 항쟁하던 삼별초가 평정되자, 북경에서 장수들을 소집하고 회의를 열고 자국군 2만명을 포함 총 3만여 명의 병력으로 일본 정벌을 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1274년 10월 3일(날짜는 모두 음력) 합포항을 출항한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공은 시작되었다.


공포의 여몽연합군

여몽(고려 - 몽고)연합함대는 고려를 출발한지 이틀후인 1274년 10월5일 오후 4시경, 대마도(對馬島 )의 사스우라( 현재 코모다)에 상륙했다. 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대마도주 소오 스케쿠니에게 알렸다. 

 소식을 접한 대마도주는  무사단의 총력 80여 기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출발했다. 종씨족보에 따르면 소오스케쿠니는 부하들을 독전하며 7, 8척으로부터 상륙한 1000명의여몽연합군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웠지만,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2시간에 걸친 전투끝에  전멸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사수우라뿐 아니라 대마도 곳곳에서 소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긴 하였지만 여몽군의 앞도적인 숫적우세와 전력으로 인해 상대가 되질 못하였다.

 이렇게 단숨에 대마도를 정복한 여몽연합군은 이즈하라항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섬으로 출발하였다.

 대마도초토화하고 출항한 여몽연합군은 10월 14일 오후 4시경 이키도 북부 해안에 상륙하였다.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이키도의 가쓰모토에 상륙하였다. 이에 이키도의 성주였던 다이라노 케이류우는  총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다,

 비록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케이류우는 당황하지 않고 휘하장수중 최고의 사무라이로 하여금,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명적 (鳴鏑: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개전 신호로 삼고 적진으로 돌격하도록 하였다.
 낭만적인 맞대결 방식이라면 적진에서도 누군가 한명이 나와줘야 한다.
 그러나 몽고군은 쇠북종과 징을 요란하게 치면서, 자신의 가계와 이름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돌격해오는 무사를 향해 여러명이서 에워싸고  때려 죽여버렸다. 

 이키군을 이끄는 케이류우는 당황하였지만, 400여 명의 몽골군은 여유를 주지않고 단궁에 독을 바른 화살을 쏘며  이키군을 향해 돌진하여 왔다. 그러나 이처럼 불리한 상황속에서도 이키군은 후퇴하지 않고 몽골군의 이키섬 점령을 하루동안 저지하였다. 

드디어 해가 지고 여몽연합군은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이키군은 전력의 80%를 잃었으며 남은 병력은 겨우 20여 기에 불과했다.
  케이류우는 일단 전열을 정비하고 히츠성에 들어가 방어전략을 세웠지만. 히츠메성은 급하게 만든 성이었기 때문에 그리 견고하지 못하였다. 

 다음날인 10월15일, 여몽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성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그러나 히즈메성의 병력은 정예 20기와 민병을 포함하더라도  백여명을 넘지 못하였다. 케이류우는 도저히 여몽연합의 공세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휘하 부하에게  패전을 다자이부(大宰府(대재부)]규슈(九州)를 통괄지휘하는 지휘부가 있는 소재지)에 알리도록 하고 할복자결했다.  

 이키도에 상륙한 몽골군은 남녀노소의 차이를 두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은 극도의 잔인한 방법으로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이키도를 초토화시킨 여몽연합군은 1274년 10월17일 히젠(현재 나가사키현)의  다카도(鷹島)를 습격했다.  다키도의 산성에서 농성하던 일본군역시 100여기의 병력으로 결사항전하였지만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이어 여몽연합군은 다자이부 공략을 위해 10월19일 하카타만으로 진격한다.

 다자이부의 총사령관 츠네쓰케(少貳經資)는 대마도및  이키도로부터 달려온 전령으로부터 여몽연합군의 내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가마쿠라(鎌倉)막부와 교토(京都)의 급전을 전하는 한편 무사들로 하여금 총 동원령을 내렸다. 특히 하카타 지구에는 츠네쓰케의 동생인 쇼니 케이쓰케(少貳景資)가 지휘하는 총 5300여기의 주력부대가 배속되었다.

 그러나 화약무기의 일종인 철포(鐵砲)및 일본활보다 2배의 사거리와 2~3배의 활시위 속도를 자랑하는 몽골단궁(短弓) 여기에 악명을 떨친 독화살과 숫적우세 그리고 대병력간의 전투경험까지 어느 것 하나 일본군이 앞서는 것이 없었다. 쇼니 케이쓰네는  무참하게 패하며 주요지점들을 차례로 내주고 말았다. 이로써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고 말았다.

일본역사에는 이날의 전투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몽골은 큰북과 징을 두들겨 신호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났다. 일본 말들은 모두 이에 놀라 미쳐 날뛰었는데, 그렇게 허둥대는 바람에 적의 화살을 맞았다.  몽골군은 수백인이 矢先(시선)을 정렬하여 화살을 비오듯 쏘는 데다 창이 길고, 갑옷도 빈틈이 없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중앙을 열어 몰아넣은 다음에 兩端(양단)으로 포위하여 무찔렀다. 갑옷은 가볍고 말도 잘 탄다. 힘도 강하다. .......호세용맹자재)하기 짝이 없고, 임기응변의 진퇴에 능하다. 


몽고습래회사
(蒙古襲來繪詞)

'몽고습래회사'는, 여, 몽 연합군의 일본침략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당시 일본군을 지휘하던 '다케자키 스에나가'

 하루밤사이에 결정된 역사.

 그러나 몽골은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았다. 우선 지형에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상태에서 해가 저무는 시간에 계속 추격하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0월20일의 전투에서 단궁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은체 다자이부의 방어진지인 미즈키(水城)로 퇴각하였다.  일본서기에는 큰 둑을 쌓고 물을 저장해 두었다고 수성이라 이름하였는데, 수성은 그야말로 다자이부를 방어하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여몽연합군의 총사령관인 흔도와 홍다구(洪茶丘)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다. 상륙에 성공한 만큼 주요거점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야영한 후 날이 밝으면 일본군과 결전하자는 고려장수 김방경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 대신 그들은 하카타만에 정박중이던 900척의 병선으로 전원 재승선을 선택하였다.

 몽골 지휘부가  재승선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일본군의 夜襲(야습)을 우려하였고, 또 수성을 돌파하여 다이자부를 점령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만약 장기전으로 치달을 경우, 병력충원과 병참부분에서 결정적인 취약점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마다 그때쯤이면 불어오는 해풍은, 여몽연합군이 전원 재승선 한 10월20일 심야로부터 21일 새벽 사이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쳤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하룻밤 사이에 900여 척의 연합군 함대 중 200여 척이 침몰했으며,  10월21일 아침, 하카타만에는 연합군의 전함은 한 척도 보이질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히카타 만에 불어닥친 폭풍우로 인해 사망한 여몽연합군은 전체전력이 20%가 안되는 6000명 내외이다. 즉 잔여 2만의 병력으로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몽골지휘부가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고, 강제로 군역에 동원된 고려인들의 사기역시 높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더구나 홍다구의 무리한 요구로 단 6개월만에 완성된 900척의 병선이 견고할리 없었고, 강제동원된 고려인들이 최선을 다해 건조했을리도 없었다.

  히카타만에서 상실한 함선은 20%정도였지만, 대한해협을 건너 오는 동안에도 풍랑의 여파로 50%에 가까운 손실을 입고만다. 고려사에는『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제국의 사서에서도 패전을 시인하였다. 

 이것은 몽골연합 지휘부가, 풍부한 해상경험을 지닌 고려참모진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들이 철군을 생각해 두었다면 태풍의 불어오는 시기가 지난 다음에 논의하여도 늦지 않았을 것이다. 또 대마도와 이키도를 점령한 이상, 무차별적인 살육이나 약탈만 벌일것이 아니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전에 대비하는 대책도 필요하였을 것이다.

 또한 고려인이 만들고 탑승한 병선은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입은 반면, 송나라출신 부역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병선은 대부분 허술하게 만들어져 몽고병력의 피해를 키웠다. 따라서 일본인이 신풍으로 숭상하는 가미가제는,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몽골지휘부의 해상원정의 미숙함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출처 : 내 인생의 벗은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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