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경제학-저 자 쓰지 신이치
한 근태 소장 (한스컨설팅)
예전에 비해 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더 정신 없고, 더 분주하고, 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삶의 질은 올라갔지만 그렇다고 더 행복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돈 버는 일에 올인해 부자가 된 사람에게 어떠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돈을 버는데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경제적 풍요가 삶의 가장 높은 우선순위였지요. 돈을 얻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고, 가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친구를 잃으면서 얻은 결과입니다. 별 의미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로 엉뚱한 목표에 목숨을 걸고 살아온 것이다.
우리들 최대의 관심사는 경제이고 성장이다.
경제만 잘 된다면 만사형통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개인도 국가도 경제문제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둔다. 경제만 풀리면 행복해지고, 다른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는 부유하지만 불행한 사람들로 넘쳐난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거로 생각했지만 막상 부자가 되고 보니 별로 행복하지 않다. 행복은 다른 곳에 있다. 부탄이 그런 나라다. 부탄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풍부한 생태계, 자급 자족형 농업, 공동체를 통한 상부상조, 슬로라이프 등이 건재하고 있다. 사람들도 무척 행복해 보인다. 이 책은 행복에 대한 책이 아니다. 풍요라는 이름의 괴물을 퇴치해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이 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국민총생산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총행복지수이다.
오늘은 그런 것에 관한 책 ‘행복의 경제학’을 소개한다. 저자는 슬로라이프의 주창자인 쓰지 신이치이다. 재일교포로 한국이름은 이규다. 국민총행복(GNH)이란 개념은 부탄의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 전 국왕이 1970년대 만들어낸 말이다. 당시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로 국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각국의 수뇌를 초청한 자리에서 처음 이 말을 사용했다. GNP보다 GNH 가 더 중요하다고 2008년 공포된 부탄 최초의 헌법에서 GNH란 말이 국가 통치개념에서 중심개념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다.
1958년에 비해 1991년은 GDP측면에서 무려 6배 성장했다. 하지만 만족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같은 결과다. 1984년 설문조사를 보면 조사자 중 만족한다가 13.7%, 그럭저럭 만족한다가 50.5%였다. 2005년에는 만족한다 3.6%, 그럭저럭 만족한다가 35.8이다. 2006년 세계 80만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행복도 조사에서 일본은 178개국 중 90위였다. 우리는 103위다. 경제측면에서는 10위를 오르내리는 우리가 만족도 측면에선 죽지 못해 산다는 것이 이상하다. 하지만 당연하다. 개발이나 발전을 나타내는 지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벌채에 의해 삼림이 사라질 때마다 GNP는 상승한다. 마음 병으로 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 받을 때마다 역시 GNP는 증가한다. 부를 측정하는 GNP 라는 척도 속에는 사회에 해가 되는 것, 자연에 해가 되는 것, 사람의 불행마저 모두 돈으로 환산되어 뭉쳐져 있다. 교통사고가 날수록 전쟁이 많이 일어날수록 늘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총생산이 는다는 것과 행복과는 별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다.
풍요가 행복을 준다는 착각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가난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풍요한 것이 문제다.” 간디의 말이다. 세계 인구 1%가 전체 부의 40%를, 2%가 전체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빈곤층의 절반은 전세계 총생산량의 1%만 갖고 있을 뿐이다. “빈곤을 낳는 것은 자연을 자원으로,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는 세계관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방패로 자연을 언제나 충분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긴다. 이를 보완하고 메우기 위한 수단으로 과학을 동원해 온갖 기술을 낳는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술은 환경과 생태를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한층 심각한 빈곤을 안겨주었다.”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의 말이다. 실제가 그렇다. 바다는 수 백 년간 어민들에게 충분한 양식을 제공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 (거대한 그물을 가진 하이테크 트롤선)이 나타나 해저를 뿌리 채 헤집고 해양의 생명 사이클을 파괴한 결과 지금 전 세계 어업의 90%가 붕괴직전이다. 빈곤으로부터 구해줄 줄 알았던 기술이 어민을 붕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돈이 많은 것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은 일본을 보면 가장 잘 알 수 있다.
<부자나라 가난한 국민, 일본>의 저자 카렐 월프런은 “일본은 풀이 죽고 기운이 없는 나라”라고 표현한다. 그가 제기한 의문점이다.
-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어린이가 너무 많다.
- 우울하고 심심해 보이며 멍한 표정의 대학생이 너무 많다.
- 여성들이 가장 늦게 결혼한다. 결혼을 해도 자식을 낳지 않으려 한다.
- 냉랭하고 공허한 관계의 신혼부부가 많다.
- 성도착적이며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의 만화가 너무 많다
- 샐러리맨들은 만원 전철 속에서 긴 시간을 시달리는데 잘 받아들인다.
- 다른 나라에서는 화를 내는 일을 일본인들은 당연히 받아들인다¡|
- 의문이 없다 등등
한 마디로 일본은 행복을 희생하여 부를 쌓았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 추구인데 행복하지 않은 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모든 것은 우리와 너무 비슷하다. 현대인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간이다. 다음은 장래에 대한 불안을 없애는 것, 열심히 일한 사람이라면 노후에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것, 근무시간에 맞는 수입 등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미래의 자유로운 시간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풍요를 위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격이다. 그렇다고 미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궁핍과 빈곤은 다르다. 저축이 있는가와 없는가의 차이다. 생활이 궁핍해도 행복한 사람은 많다. 저축이 있기 때문이다. 저축이란 은행의 저축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슨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족, 친척, 지인들과 가까운 지역이나 직장 속 인간관계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고 자연계와 교감하는 시간을 갖는 등이다. 넓은 의미의 사회 안전망을 말한다. 하지만 그런 저축이 없는 사람, 즉 사회 안전망이 무너진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빈곤은 단순히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풍요 역시 단순히 돈이 있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가난해서 불쌍하다고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 오히려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돈이 많고 부유한 사람들이 거꾸로 악착같이 버둥대며 살아간다. 오히려 부유한 사람일수록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도 많다.
행복을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현대인은 정말 바쁘게 산다. 가장 많이 쓰는 인사말도 “바쁘시죠?”다. 바쁘지 않은 것은 무능함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는걸까? 그래서 얻는 것이 뭘까? 처자식을 위해 바쁘게 일한다고 주장하지만 너무 바쁘기 때문에 가족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그 동안 우리는 시간을 돈으로 바꾸면서 살아왔다. 돈을 벌기 위해 소중한 것을 무시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바쁘면 관계가 무너진다. 어떤 관계에도 수고와 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관계에 들일 힘과 여유를 잃으면 행복도 잃는다. 우리들이 느끼는 행복의 대부분은 좋은 관계에서 생겨난다. 소설 어린왕자에 이런 장면이 있다. 친구인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 장미가 그토록 소중한 것은 네가 그 장미꽃에 많은 시간을 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동물은 이토록 중요한 것을 잊고 있지. 하지만 넌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렴.”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빨리 걸었다. 우리야말로 영혼이 쫓아올 수 있게끔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삶에서 사랑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사랑의 근본은 상대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잊고 산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천천히 살아야 한다. 슬로라이프란 사랑하기 위한 시간을 되찾자는 운동이다. 슬로라이프는 돈이나 물건 대신 충분한 시간을 갖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경쟁의 틀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게을러져야 한다. 원래 사회는 같은 목표를 향해 경쟁하는 장소가 아니다. 경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모든 것에 경쟁의 원리가 침투한 것을 비판하는 것이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 진정한 부자다
위만 보는 대신 아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성장 대신 후퇴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홋카이도에는 정신지체자 공동체인 베델의 집이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 재미있다. 열심히 하지 않기, 중간에 그만둘 줄 아는 미덕, 자신의 약점 드러내기, 편견과 차별 대환영, 안심하고 절망할 수 있는 인생 등등. 한 마디로 우리의 통념과 반대다. 작업장에서는 <약점을 유대 기반으로 서로 도우며 안심하고 농땡이 칠 수 있는 직장 만들기>를 추구한 결과 몇 가지 히트상품을 가진 슬로비즈니스를 낳았다. 이들은 너무 즐겁게 일하며 대화에 참여한다. 아무리 보아도 장애를 가진 불행한 사람 모습은 아니다. 이곳의 창시자 무카이야치 이쿠요시의 말이다. “예전에는 부유한 사람들은 행복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의 병은 주로 가난과 힘듬 속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상식은 무너지고 있다.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이 더 큰 고통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부자,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풍요를 목표로 경쟁하면서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델의 집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 병 덕분에 상승지향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희들은 하강지향의 프로들입니다.” 상승하는 인생에서 하강하는 인생으로라는 말은 베델의 집의 이념이다.
우리는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미국식 문화에 익숙해왔다.
그래서 많이 소비하는 사람이 적게 소비하는 사람보다 풍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교경제학을 추구하는 슈마허는 “경제학이란 보다 적은 소비로 보다 큰 행복을 추구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버마에서의 경험으로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말이다. “2-3주가 흐르고, 몇 군데 지역을 방문한 뒤 버마인들이 나 같은 구미 경제학자에게 조언 받을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은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배워야 했다. 버마인들은 고도로 발달한 종교와 문화를 지탱할 수 있는 완벽한 경제제도를 갖고 있었다.” 경제학과 불교가 무슨 관계냐는 말에 그는 “불교 없는 경제학은 사랑 없는 섹스와 같은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말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자연계의 모든 것에는 그 크기와 속도, 힘에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포함한 자연계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그에 비해 기술은 스스로 제어하는 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균형, 조정, 정화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 경제는 수요창출에서 시작된다. 그 동안 불필요한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또 수요는 광고나 매스컴에 의해 없어도 되는 것을 억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별로 행복하지도 않다.
네트워킹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이 모임 저 모임 모임이라는 모임은 다 쫓아다닌다. 점심은 두 탕, 저녁은 세 탕을 겹치기로 출연하기도 한다. 주말에는 결혼식이다 뭐다 해서 정신 없이 다닌다.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의구심이 생긴다. 정치를 하려는 것도 아닌데 뭐 저렇게까지 분주하게 살까? 저래서 얻어지는 게 뭘까? 과연 행복할까? 그 사람이 주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에 끌려 다닌다는 생각마저 든다. 돈과 시간의 문제도 그런 것 같다. 풍요와 행복의 상관관계도 그렇다. 나는 행복이 다른 것보다 우선순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풍요도 행복관 관계가 높을 때 의미가 있다. 다음 사례가 그 얘길 해 준다. 노인과 청년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노인이 얘기한다. “힘도 좋은 청년이 일은 하지 않고 왜 그리 빈둥대고만 있나!” 청년이 답한다. “일을 하면 뭐가 좋습니까?” 노인이 말한다. “일을 하면 돈을 받지 않는가!” 청년이 대답한다. “돈을 받으면 어떻게 되나요?” 노인의 말이다. “부자가 되지” 청년이 말한다. “부자가 되면 뭐가 좋은데요?” 노인의 말이다. “부자가 되면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지” 마지막으로 청년이 말한다. “저는 이미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는데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영혼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성경 말씀이다. 풍요를 얻기 위해 영혼을 지불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헨리 데이빗 소로는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간소, 자립, 관대, 신뢰”라는 네 단어로 답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과 또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사이의 균형 감각이며, 자신과 세상과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풍요를 얻기 위해 세 가지를 희생했다. 땅, 영혼, 사회가 그것이다. soil, soul, society. 해결방법은 역순이다. 지구와 이어지는 것, 자신과 이어지는 것, 사람들과 이어지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행복이 뭔지, 지금 자신은 어떤 위치인지를 생각해 보길 권한다.
'이야기테크 > 책방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정순택- 다르게 사는 사람들] 나를 넘어 너로 (0) | 2010.02.02 |
---|---|
[스크랩]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박준 저] 행복이란 (0) | 2010.02.02 |
큰 부자도 부럽지 않은 작은 부자 (0) | 2010.01.17 |
[스크랩] 허영만.김세영의 `카멜레온의 시`와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 (0) | 2009.12.27 |
[스크랩] 천개의 공감 (0) | 2009.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