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이 넘치는 예수님의 심장처럼(1)
본문 : 마태복음 5장 3-12절
로뎀장로교회 최순철목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우리가 격려를 통해서 회복해야 할 심장의 원형은 예수님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은 어떤 심장일까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팔복에 대한 산상수훈설교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과연 격려만으로 우리의 성향이 바뀔 수 있을까? 격려만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갈 수 있을까? 있습니다. 다만 격려의 본질을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격려는 무엇입니까? 사랑과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정하게 인사하고, 친한 사람을 넘어서 다가가는 것이 격려입니다. 그리고 격려가 지속되려면, 회복된 심장과 인품과 인격이 잘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래하며 찬양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속에서 항상 그렇게 하십시오. 자신의 성향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성향을, 바나바와 바울의 성향을 닮아 가야 합니다. 늘 노래하며, 모든 일에 감사했던 바나바를 닮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옆 사람과, 이웃과 서로 화답해야 합니다. 서로 축복해야 합니다.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실례 : 세상에는 세종류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는 짐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째는 힘이 되는 사람입니다. 격려가 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쫓아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닮아가고 싶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세종류의 사람이 살아갑니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보나마나한 사람이 있습니다. 보고 또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세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남조차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그냥 남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을 나로 여기고, 우리가 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고 싶습니다. 힘이되고, 본이되어야 합니다. 보고 또 보고 싶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위의 사람들을 우리가 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용기와 힘을 얻게 하는 여러 종류의 격려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받을 복이나 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흔히 한국의 기독교를 비판할 때, 사람들은 ‘기복신앙’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복을 구하고 바라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가지로 낙심이 될 때마다,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복과 상을 바라보면, 우리의 심장은 다시 뜁니다. 뜨거워집니다. 삶의 용기와 의욕이 다시 살아납니다.
신기한 것은 바로 8복의 모든 조건이 우리의 심장과 마음과 태도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팔복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심장을 가지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가난한 심령(마5:3)이 가장 먼저 살아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5:3절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 6:20절에 보면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 말씀일까요? 둘 다 맞는 말씀입니다.
물질적인 가난은 심리적인 상태에 영향을 끼칩니다.
마태 6:24절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받았도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요한 자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위로와 의지를 물질에 두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에 비하여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마음을 비우고 사는 득도의 경지에 오른 상태일까요?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물질보다는 주님을 더 의지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원어상 해석은 “자기는 절대로 어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이 전부입니다. 물질, 명예, 권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가 바로 가난한 심령으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가난한 삶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배고프고 굶주리는 고통 속에 신음하면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하루하루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가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낮에는 텐트를 만들며 밤에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의지했고, 십자가를 내려 놓치 않았습니다. 그런 바울이 천국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2절 “자랑해서 이로울 것은 없으나 주님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는 내가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것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도저히 표현할 수 없고 또 누구에게 알려서도 안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격려의 교육을 통해서 복원되어야 하는 첫 번째 심장은 바로 ‘가난한 심령’인 것입니다.
팔복의 가장 기초는 가난한 심령에 있습니다. 복 가운데 첫째 복이 바로 가난한 심령입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해야 죄를 애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성품이 온유해집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남을 긍휼히 여길 줄 알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마음이 맑아지고, 심령이 가난해야 화평과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을 수있기 때문입니다.
주석가 왓슨은 “가난한 심령은 하나님께 붙잡힌 마음이고, 항복하는 마음이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비유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심히 작은 씨이지만 싹이 나서 나무가 될 때 새들이 날아듭니다.
또 하나는 누룩 비유입니다. 가루 서 말 속에 한줌의 누룩은 표도 나지 않고 묻혀버립니다.
그런데 하룻밤 새 가루 서 말을 전부 부풀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의 열매입니다.
둘째 애통하는 마음이 살아나야 합니다(5:4).
애통한다는 말은 ‘가슴깊이 슬퍼하며 운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이렇게 울게 됩니까?
잘 되던 사업이 부도났을 때, 건강한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
가장 아끼던 것을 빼앗겼을 때 우리는 애통해 합니다. 슬픈일이 일어났을때 울줄 아는 것은 건강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애통하며 슬퍼하는 상황은 이런 애통을 넘어선 신령한 애통입니다. 조금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흘리는 애통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여전히 세속적인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통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눈물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18절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이 땅과 자신의 쾌락과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신령한 애통이 있습니다. 따뜻한 눈물이 있습니다.
내가 아직까지 울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진정한 격려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축복해주는 진실한 마음을 만나면 신령한 애통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울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대야에 발을 담가본 사람은 누구나 슬퍼하는 눈물의 통이 있습니다.
주님을 대신해서 울고 싶어하는 애통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마음에는 애통의 문이 닫힙니다. 반대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마음에는 애통의 문이 더욱 넓게 열립니다. 고난가운데서도 감사하는 사람의 눈물은 따뜻합니다.
성도의 애통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신령한 애통은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사야16:9절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나의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실과, 너의 농작물에 떠드는 소리가 일어남이니라”
성경의 인물 중에 신령한 애통의 눈물이요 주님의 애통에 가까운 눈물은 바로 요셉의 눈물입니다.
창세기 42장 24절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43장 30절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 듯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45:14절“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45:15절“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50:17절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애통은 결국 무너진 가정을 회복하는 능력이었습니다. 무너진 관계를 살리는 힘이었습니다.
가뭄에 시들어가는 나라와 땅을 살리는 신령한 눈물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의 눈물은 바로 다윗의 애통입니다.
삼상 30:4절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과 그의 용사들 600명이 전쟁에 나간 틈을 타서 아말렉이 시글락을 쳐들어와 가족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이때 사로잡힌 가족들을 위해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랬을때 여호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삼상30:8절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데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 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을까요? 신령한 애통속에는 사랑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애통의 눈물은 사랑의 눈물입니다. 신령한 애통의 복은 위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를 쫓아 가겠다던 룻의 애통은 결국 보아스를 만나는 위로를 얻었고, 다윗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울면 열립니다. 울면 길이 열립니다. 여호와 앞에 울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실례 : 이번 한국 방문 중에 저를 애통하게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큰 여동생과 함께 밥을 먹는데, 밥상에 놓이 김을 집는 동생의 손이 떠는 것입니다. 왜 손을 떠느냐고 하니까 “마음에 불이 쌓여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홧병인 것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려움 없이 꽤 넉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참여한 벤처회사가 개발한 상품이 바다 심층수에서 뽑아 올려 만든 제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에 받은 나노치약이 바로 그것중의 하나입니다. 돈이 묶이고, 대출받은 은행빚을 갚아야 하는데, 이자만 갚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지난 4월에 치킨 가게를 열었던 것입니다. 날마다 새벽 4시까지 일하고 지쳐가는 몸을 이끌고 나가서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자기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다음 날 새벽 부천 부광감리교회 새벽기도를 다녀오면서 동생이 운영하는 치킨집을 들렸습니다. 한푼이라도 벌어 보겠다고, 새벽까지 일하는 동생을 생각하는데, 제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생의 손에 백만 원을 쥐어 주면서 말했습니다.“동생. 그래도 고마워. 다른 사람 가슴앓이 내 가슴앓이 삼다가 손 떨리고 얼굴 떨리고, 마음떨리고, 그동안 아픈 가슴 움켜쥐며 사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 이제 내려 놓자. 동생 가슴 떨리게 하는 그 사람들을 마음에서 내려놓자.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 붙드실거야.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 풀리니까”
우리는 울수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울면 살아납니다. 울면 회복됩니다.
우리가 울때 울어야 할 일들이 새로워집니다. 교회가 울때 나라가 회복됩니다.
가장이 울때 가정이 살아납니다. 성도가 울때 불신자의 영혼이 몰려듭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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