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보혜사
빛된교회 최철호 목사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는 교제의 폭을 넓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인맥관리를 위하여 부지런히 사람들을 사귀고, 친구를 만들고, 경조사를 챙기며 찾아다닙니다. 친구 등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교제의 폭이 넓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집안에 경조사가 생겼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축하하는 화환이나 위로하는 조화가 입구를 가득 매우고, 이를 보는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투자도 많이 해야 합니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필요할 때 도움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스개 말이 있습니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끊이지 않는데, 막상 그 정승이 죽으면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권력과 관련된 세상 인심을 말하는 것인데, 이로 미루어 보면 넓은 교제의 폭이라는 것도 사실은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필요할 때 도움을 받으면 그것은 행복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불행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나 차별 없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그것도 아주 강력한 후원자를 얻는 길이 있습니다. 그 후원자는 보혜사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정성스럽게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대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께서 가시겠다는 그곳이 어딘지 이해하지를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이 어딘지도 알지 못한 채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먼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곁에 있던 빌립이 예수께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들을 보고 믿으라.” 이 말씀에 이어서 하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보혜사(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라는 말의 의미를 한 번 살펴봅시다. 이 말은 두 경우, 세 가지의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 사용되었습니다. 둘째는 성령께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는 다시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돕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고, 힘을 주시고, 치유와 회복을 베푸셨습니다. 이런 사역이 보혜사입니다.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여 전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중보 사역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여기, 대언자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성령께도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성령을 지칭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혜사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초신자들에게는 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을 반드시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분명하게’ 말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이 어렵다면 그냥 간단하게 ‘도우시는 분’으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 동일하게 사용된 이 보혜사라는 말이 혼란스럽게 느껴진다면 그냥 간단하게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42:11의 말씀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낙망할 필요도, 불안해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바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사람들을 도우셨습니다. 인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도우신 결과입니다. 남자와 여자, 결혼, 노동, 출산 등은 하나님의 도우심 아래 진행되는 하나님의 산물입니다. 성경은 이에 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몇 가지 유사한 용어들을 접하게 됩니다. 유사한 용어란 이런 것입니다.
성신(7회), 하나님의 신(13회), 여호와의 신(21회), 주의 신(9회), 나의 신(7회), 그의 신(1회), 정직한 영(1회), 새 영(1회), 생기(2회) 등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동일하신 삼위 성령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도우시기 위한 강력한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주시고, 인도하시고, 타이르시고, 구체적인 행동을 보이시고, 진노하시고, 영광으로 임재하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까? 사랑하시는 자기 백성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기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전과 이후입니다.
구약성경에 다양하게 표현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의 위치는 하늘입니다. 사람들 바깥입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사로잡힌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로부터 임재하시고, 위로부터 보이시고, 위로부터 말씀하시고, 위로부터 징계하시고, 위로부터 함께 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사람들과 일정한 간격을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수 없었고, 본 자는 죽게 되어 있었고, 대제사장 같은 특별한 하나님의 종만이 정해진 날에 정해진 방법에 따라 상징적인 장소 앞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신명기 33:2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스라엘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신명기 14:2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특별한 백성으로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보다 더 행복합니다. 우리는 ‘성민’이라는 말보다 더 다감하고 직접적인 가리킴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거룩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결코 이러한 표현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들’이라는 표현보다 더 애정어린 표현은 없습니다. 이 표현은 딸들에게는 시기나게 하는 말입니다. 가만히 보면, 대부분의 엄마들이 아들을 부를 때 이름보다는 “아들아!”고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남자인 저로서도 듣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게 부르는 엄마로서는 최고의 사랑 표현입니다. 무어라고 다 말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이여, 서운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는 남녀 구분이 있지만,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면 시집가고 장가갈 일이 없으며,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믿는 자녀들을 향하여 부르실 때 “아들아!” 하십니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말씀은 최고의 사랑 표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습니다(요 3:35).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그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이 온전히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것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하나님의 뜻대로 미리 정하사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주시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아들의 영,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 등 여러 명칭이 나옵니다. 각 명칭마다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모두 성령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기 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택하신 자기 아들이 아닌 자에게는 결코 성령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머리로 성경을 이해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알 수 있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머리로는 하나님을 알지만 가슴으로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도킨스의 말처럼 ‘만들어진 신’에 불과할 뿐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성령이라는 표현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이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모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숨을 쉬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 시작한 것은 부활 승천하신 이후입니다.
세례란 완전히 잠기는 것을 말합니다. 다리나 허리 정도 담그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속에 폭 담겨져서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혀서 성령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기름을 바른다, 성령의 기름을 안팎으로 바른다’고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서 보았던 모습입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허리를 적시고, 드디어 물이 창일하여 건너지 못할 강이 되는 것을 보았던 것과 같습니다. 믿는 자들은 성령으로 그렇게 잠깁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주신다고 하였습니다(요 14:26).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행 2:33).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엄청납니다. 구약의 성령과 신약의 성령의 차이점은 엄청납니다. 다윗을 감동시키고, 에스겔과 예레미야가 감동받았던 구약의 성령과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믿는 자들에게 임하신 성령의 차이는 천지가 개벽할 만큼의 차이입니다.
구약의 성령은 그들의 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성령은 믿는 자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시다! 하나님께서 드디어 강림하시어 당신의 아들들 가운데 임재하시다! 일순간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계시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놀랄 일이 어디 있습니까? 무엇과 비교하겠습니까? 누가 이보다 더 위대하실 수 있습니까? 누가 이보다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깨달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묵상 가운데 자신을 살펴보고 초월의 경지에 이르고자 노력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실제입니다. 기독교는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영원토록 계시면서 나를 도와주시는 실체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과 지식이 활동하는 하나님의 역사 현장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입니다.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는 강렬한 광채로 말미암아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먼 곳에 계신 위대하신 신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속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이 아버지가 아들인 우리를 도와주시는 우리들의 보혜사이십니다.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행복해 합시다. 우리 모두 동일하신 보혜사, 동일하신 성령님,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동일하신 하나님을 품고 사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합시다. 이 복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합시다.
성령이여,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시고 부흥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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