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은혜와 소망의 설교집

[스크랩] 우리의 절망을 위로하소서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2. 6. 08:33

 우리의 절망을 위로하소서


본문 / 눅7:11-15

예수님 당시에 나인성이라는 곳에 한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며 행복을 가꾸어가던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꽃다운 나이에 과부가 된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와 어린 것 남겨두고 떠나간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이 있었기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생각하여서라도 용기를 내야지... 그리고 참아야지....라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달래며 여인은 슬픔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여인은 재혼하지도 않고 혼자서 아들을 키웠습니다.
아이는 고맙게도 아무탈없이 잘 자라서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여인의 슬픔도 잊어지고 아들과 함께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유도 없이 이번에는 아들이 갑자기 죽은 것입니다. 성경은 그의 사망원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습니다. 병들어 죽었는지 무슨 사고를 당하여 죽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이 걸어가는 인생길이 참으로 기구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잃고 과부되어 십수년을 고생 고생하며 키운 아들인데 그 아들 마저 여인의 곁을 떠나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팔자가 되게 쎈 여자인 셈입니다.
여인에게 아들의 죽음은 하늘이 두 번 무너지는 것이였습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는 그래도 자식이 있으니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슬픔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무엇으로도 위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정많은 동네 사람들이 슬픔당한 이여인을 위로하기 위해 모여왔습니다. 그리고 함께 울며 슬픔을 나누려 하였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이 여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아들의 죽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의 문제도 결국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문제도 없는 것 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에게는 정녕 죽음 같은 것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죄의 대가를 치루도록 되었있습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했습니다. 죄값을 치르어야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초 미국은 심한 불경기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경제공황이 온 것입니다. 문을 닫는 공장과 은행이 늘어나고 거리에는 직장을 잃은 실업자들이 할 일 없이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런 때에 한 극장에 "입장료 없슴"라고 써 있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할 일 없이 거리를 방황하던 실업자의 무리들이 몰려갔고,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하며 무료로 입장하여 재미있게 영화 구경을 하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윽고 영화는 끝나고 퇴장 시간이 되었습니다.
관객이 하나 둘씩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슬슬 퇴장을 하는데, 출입구 양쪽에 어깨가 딱벌어진 장정들이 서서 돈을 내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놀란 군중들은 입장료가 무료 아니였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예, 맞습니다. 입장료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퇴장료는 있습니다."
사람들은 공짜 영화인줄 알고 입장료 없이 들어왔다가 퇴장료를 내고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장료 내고 이 세상에 들어온 사람 있습니까?
그러나 입장료 없다고 해서 진짜 공짜인줄 알고 마음껏 즐기고 멋대로 살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해야 할 때에 우리에게 인생을 즐긴만큼 퇴장료를 거두실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생애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마음껏 세상을 즐기기만 하고 산다면.... 아니 어쩌면 그것은 자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무거운 퇴장료를 물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흥가에 가서 흥청거리고 하나님을 떠나서 온갖 죄악을 일삼는 것은 자유지만, 퇴장료는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인생의 무대에서 퇴장해야할 날이 올 때 물어야할 퇴장료는 사망입니다. 지옥 형벌인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값지게 삽시다.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만큼 값진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종교를 갖는 일 쯤으로 생각하고, 또는 취미생활과 여가를 활용하는 정도로 생각하여 아주 가볍게 취급하시는 분이 계실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들이 생각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작은 비중을 차지했던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 생활이 여러분 인생의 퇴장시에 그 어느것 보다도 여러분을 가장 값지게 해줄것입니다. 황금은 퇴색되고 부귀와 영화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안내할 것입니다. 신앙생활 잘하십시오.

사람들이 죽은 청년의 시신을 관에 넣어 밖으로 메어나갔습니다.
성밖 동굴 무덤에 장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은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따라갔습니다. 울며 울며 아들의 시신을 담은 관을 붙잡고 따라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성으로 들어오시다가 이 장례행렬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아니 장례행렬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 과부를 보신것입니다.
13절에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과부의 무엇을 보고 그를 불쌍히 여기셨을까요?
슬픔을 보신것입니다.
아픔을 보신것입니다.
그리고 절망을 보셨습니다. 보셨다는 것은 아셨다는 것과 같습니다. 여인의 슬픔을 아셨고 아픔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절망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그는 우리의 질고를 아는 자라"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살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북한의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근들어 국제 단체들이 아우성입니다. 그냥두면 몇 달안에 북한의 주민 수십만명이 굶어죽을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와 한가지의 언어를 쓰며 한 땅에서 같은 조상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혈족이 아닙니까?
그들은 뿔달린 괴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도와야할 동족이요 구해야할 형제요 자매인것입니다. 여차하면 북한이 붕괴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마지막 수단으로 전쟁이라는 극단적 행동으로 나올지도 모릅니다.
중국에서는 북한이 붕괴되면 자기들 땅으로 밀려올 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난민 수용소를 만들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일본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 때를 가정해서 지금부터 대비를 해야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절망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아이 엠 에프(IMF)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처한 이 시대의 상황을 보면서 절망하고 있습니다. 경제가 곤두박질 치고 나라가 어려워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한동안 우리가 너무 교만했습니다.
언제부터 그렇게 잘살게 되었다고 자만에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않았습니다. 이른바 3D 직종의 일은 기피하고 그저 쉽고 편하게 돈 버는 쪽에만 사람이 몰려서 서비스 산업만 번창하였습니다. 정부는 당장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 나라가 된 것처럼 떠들었습니다. 막 써도 되는 때가 왔다고 은근히 국민들을 부추겼습니다. 국제화니 세계화니 하면서 잘못된 비젼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인력시장의 판도가 바뀌였답니다. 실업자가 늘어나고 일거리가 줄어들자 품삯이 얼마고 일이 무엇이든 써주시기만 해달라고 사정해야 할 형편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하는 직장들이 우리가 외면했기에 다 문을 닫아서 이젠 일터가 그만 큼 줄어든 것입니다. 이제는 오만하고 자만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낮은 자리에 업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살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여인에게 큰 슬픔이고 절망이였지만 그 절망을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되엇습니다. 주님은 죽은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엿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랬더니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살아난것입니다.
아직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통하여 하실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청년을 살리셨듯이 이 절망 중에 있는 이 나라와 이 백성들 아니 오늘 우리를 살리셔서 하실일이 있습니다.

청년이 살아나자 사람들이 깜짝놀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하여 큰 선지자가 우리가운데 일어나셨다. 라고 증거하며 그 소문이 각처로 퍼저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위로를 받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널리 퍼졌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 국민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이 들어가야 합니다. 아니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절망중에 소망이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을 일으키사 새로우 삶을 주셨습니다. 그분만을 의지합시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생활 방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도 입니다. 희생과 헌신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다시 희망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위로와 복을 허락하실것입니다.

출처 : 창골산봉서방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