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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성용어의 변천과정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2. 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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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용어의 변천과정

 

기독교 영성사를 돌이켜 볼 때 ‘영성’이란 말이 미묘한 변화를 겪어왔다. ‘spirituality(영성)’이라는 말의 뿌리인 라틴어는 ‘spiritualitas’인데 이 말은 바울 서신에 나타나는 헬라어 명사 와 그의 형용사를 번역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곧 영(spirit)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고전 6:7). 주안에서의 믿음이란 영으로부터 그리고 영 안에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고전 2:10f).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spirit나 spiritual은 physical 혹은 material과 대조되는 말이 아니라, 헬라어의 σαρχ나 라틴어의 caro와 상대되는 말이다.

즉 영과 상반되는 것은 죄악적인 속성으로 기울어지는 자연적인 육체와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영적 혹은 육적 그리고 육체 혹은 영혼이라는 이원론적인 대조는 인간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영적인 사람(고전 2:14-15)이란 물질적인 실체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 안에 거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실 라틴어의 추상 명사인 ‘spiritualitas’는 5세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때 제롬의 것으로 보이는 서신에서 독자들에게 영성적인 진보를 향해서 정진하라는 권고가 나타난다(ut in spiritualitate proficias). 여기서 사용된 영성이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바울의 신학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기조의 ‘영’이라는 용법은 12세기에 스콜라주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일정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스콜라주의(scholasticism)의 등장으로 신학 안에서 철학의 영향이 깊게 자리 잡게 되자, 영과 물질(spirit and matter)이라는 상호 관계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영적’이라는 말은 비이성적인 피조물에 반하여 지성적인 존재(인간)의 특성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그래서 바울 신학적인 의미는 상실되었고 영은 물질 혹은 육체(corporeality)에 상반하는 의미로 발전되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신학적인 의미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13세기에 들어와서 위의 두 가지의 의미가 나란히 사용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성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상황에 따라서 바울적인 의미 혹은 비물질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또 제 3의 의미로는 평신도와 구분하여 성직자적인 계열을 지칭하는 교회법적인 용법으로서 영성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실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가장 흔하게 쓰여진 용법이 바로 이 제3의 의미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수덕 신학(ascetical theology)과 신비 신학(mystical theology)사이에 연속성이 있느냐가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즉 일상 생활에서의 수덕적인 삶이 비상하고 신비한 신앙적 경험과 어떤 연결점이 있는가 혹은 전적으로 다른 영역인가 하는 논란이 일어났다.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전자의 삶은 의지가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지만 후자의 삶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으로 허락하는 삶의 양식이라고 본다. 반면에 연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앙적인 삶 자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믿는다.

수덕적인 삶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라면 탁월한 신비적 삶도 그 연속 선상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2) 이래로 금욕적인 삶과 신비적 삶을 포괄적으로 영성이라고 일컫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영성 신학은 수덕 신학과 신비 신학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학문이 되었다. 제2차 바티칸 후에 출간된 “사크라멘문디”(Sacramentum mundi)라는 신학 사전은 영성이라는 주제의 종합적인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더욱 최근 영어 권에서 포괄적인 의미로 영성이라는 주제를 방대하게 다룬 책으로는 “그리스도인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I, II, III)이 있다. 이 책은 24권의 방대한 사전적인 기획작품으로서 전 세계의 영성을 주제별로 총망라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서 기독교 영성에 관한 것이 3권으로 출간되고 있다.

교부시대에서 11세기까지의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의 의미는 ‘성령에 따라 사는 삶 내지는 그러한 삶에 관계된 모든 활동 즉 수도원적 삶’을 의미한다. 이 시대의 영성이란 지금처럼 복잡하고 혼돈 되어 있지 않았다. 영적으로 두드러지게 살아가고 있던 사막의 교부들이나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삶의 모양을 총칭한 최상급의 용어였다. 즉 장 르끌레프(Jean Leclerp)의 말처럼 ‘수도원적 신학’이라고 하였다. 이 신학은 수도원적 삶을 유지하고 그 스타일을 형성하기 위한 경험적 신학이다. 그러므로 이 신학의 특징은 지적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한 사변적이 아닌 수도원 삶을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탐구였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법도 영적인 삶에 유익 되는 한도 내로 국한시켰다. 예를 들면 Lectio divina라는 명상법을 통하여 객관적인 계시를 주관적으로 바꾸는 해석 방법이었다. 이 방법의 대표적인 사람이 12세기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의 아가서가 있다. 인간의 영혼을 신부로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비유하여 그 둘 사이를 경험케하는 것이 사랑이라 했다. 이 만남의 정점을 향하여 4단계의 사랑 관계를 구조화시켜 다른 영혼들에게 영적 성장의 길잡이를 제시했다.

이러한 경험을 오늘날 신학이라고 말하는 신학 체계로 옮겨 가는 경계에 선 인물이 ‘안셀름’이다. 조직 신학자들의 말처럼 ‘신 존재 증명’은 안셀름의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산물이다. 그의 책 “Proslogium”을 보면 일차적 관심은 영적인 고백 내지는 기도이다가 2장에서부터 소위 신의 존재 증명이다. 사실 안셀름의 이성적 증명이 아닌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대한 영적 고백이다.

수도원적 신학의 특징은 피터 콤스터(Peter Comester)의 말처럼 “독서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수도사이며 반면에 모든 시간을 독서에 보내는 대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들이 스콜라 신학자이다”라고 말하였다. 즉 사랑이 깃든 배움과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동기가 되어 성경를 읽는 것과 그것을 다시 기도를 통하여 내면화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래로 전해 내려오는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유입되면서 사변적인 신학 방법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이 12-13세기를 지배했던 스콜라 신학이다. 이 때부터 수도원 신학이 영성에 포함 되었던 것과는 달리 수도원적 경험적 차원에서 다룬 영성과 이론적 차원에서 다룬 신학이 구분되어져야 할 만큼 차이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장 르끌레프는 스콜라 철학의 맹점을 “스콜라 신학은 경험의 차원은 몰아 붙이고 이성적 동의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존 칼빈은 “영적인 자양분을 줄 수 없는 사변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스콜라 시대 때 파리대 총장을 지낸 영성가였던 게르손(Gerson,1363-1429)은 그의 저서 “신비 신학에 대하여(On Mystcal Theology)”라는 책에서 스콜라 신학과 영성 신학에 대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 스콜라 신학은 외적인 효과를 통하여 하나님과 신앙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영성 신학(신비 신학)은 내적인 효과 즉 내적인 신의 임재 경험이 그 근본 자료가 된다.
둘째 스콜라주의는 이성을 의지하고 감정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영성 신학은 정의적인 면(affective side)을 소중히 여긴다. 즉 지성적 이성보다 마음의 이성이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있다고 믿었다.
셋째 스콜라주의자들에게는 이성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면 신비학자는 사랑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보다 훌륭한 길이라고 믿는다.

영성과 신학이 날카롭게 대립되어 있을 때 이 둘 사이를 잘 조화시킴으로서 영성의 전통을 유지시킨 스콜라 신학자이며 프란시스 수도자인 영성가 보나 벤투라(1217-1274)가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여행”에서 이성과 의지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신비적 관상을 그것들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사변적 신학 보다 경건에 유익이 되는 실재적인 신학을 중시하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세 가지 요인이 가난과 순회 설교 그리고 노동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높은 가치를 추구한 것이 가난이었다. 병든 자들을 돌보는 것 외에는 돈에 전혀 손을 댈 수 없었다.

이렇게 극단적인 가난을 추구한 것은 역사적인 예수를 문자 그대로 본 받기 위한 프란시스의 영성적인 동기로부터 발원 된 것이다. 프란시스의 영성은 1224년 9월 14일 라베르나산(La Verna)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던 중에 기적적으로 체험한 그리스도의 성흔(stigmata)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의 손과 발에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당한 상처와 같은 상처를 경험한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그 상처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결국 이것이 프란시스 수도회의 영성에 결정적인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그의 제자 보나벤투라도 이같은 경험을 했고 이것이 개인적인 신비 경험에 강조를 두려고 하는데 목적이 아니라 프란시스 수도회가 지향할 영성을 결정 짓는 중요한 상징이 되는 경험이었다. 이를 통하여 그의 경험을 스콜라적인 지적 훈련과 결탁시켜 후기 중세 시대의 영성 신학을 만든 기초가 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기 중세 역시 개인적인 영적 경험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14세기 후반과 15세기에 걸쳐서는 화란 지역에서 일어난 평신도 영성 운동이 있는 데 이것이 곧 ‘신경건주의’(devotio moderna)이다. 이 운동 역시 지나치게 사변적인 스콜라 신학에 대한 영적인 반동으로 일어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반 지성주의이지만 지니치게 영성과 신학을 분리하려고 하는 스콜라주의자들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결국 이 운동의 창시자인 게라드 그루터(Gerard Groote, 1340-1384)는 지적 추구를 반대하고 경건하고 실천적인 사람이었다. 이 사상을 이어 받은 그의 제자 프로랜스 라데윈(Florence Radewine)(1350-1400)은 이 운동의 정신을 확장하면서 공동체를 조직했는데 그것이 곧 ‘공동 생활의 형제단’이다.

이 운동은 탁발 수도회(프란시스칸. 도미니칸)같은 이상을 다시 엄격하게 재건하려는 운동이다. 신 경건주의의 결정은 토마스 아캠버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이다. 이 내용은 세상에서 단순히 살 것을 말하며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세상을 경멸하라고 장상들에게 겸손히 복종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영적인 진정한 이해는 스콜라적인 연구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삶에 적용시키고 말씀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라 한다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내적인 평화와 자유를 맛 볼 것이며 그것이 최상의 길이요 하나님과 연합의 원천이라 한다. 이 경건 운동의 결과로 16세기에 개혁 운동을 낳는 결과를 낳았으며 종교 개혁 이전에 전통적인 수도원 운동을 복구하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나 칼빈은 이들의 운동에 많은 빗을 지고 있다. 후기 중세 시대의 신비가나 신경건 운동은 중세 시대의 교권 권위가 곧 영적인 권위의 표준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개인적 경건과 영적인 경건이 곧 교권의 권위를 뛰어 넘게 한 곳이다. 이것이 곧 개혁가들에게 용기와 자유로운 사고를 갖게해 준 것이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는 개인적이고 정의적(affective)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의미였고, 부정적으로는 열광주의자들, 정적주의자들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자면 볼테르(Voltaire)는 마담 귀용(Madame Guyon), 페넬롱(Fenelon)의 신비주의적 경향에 대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면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삶의 방식이 보통의 기독교적인 삶과는 유리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를 피하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측면의 의미를 담은 영성에 대한 대체적인 말로 여러 용어가 등장했다. 로마 가톨릭의 프란시스 드 세일(Francis de Sale)이나 성공회 신비가 윌리엄 로(William Law)는 ‘헌신(devotion)’이라는 말을 John Wesley와 초대 감리교 주의자들은 ‘완덕(perfection)’이라는 말을 복음주의자들은 ‘경건(piety)’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실제로 18세기 초기에는 로마 가톨릭 영역에서는 ‘영성’이라는 말이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용어에서 사라졌다. 왜냐하면 그 말은 종교적인 열광주의나 정적주의와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영성’이라는 말은 주로 제도권적인 교회에서보다는 자유로운 신앙 그룹에서 국한되어 사용되었다. 그리고 20세기 전반기에 프랑스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영성이라는 말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이 번역물을 통하여 영어권으로 전해졌다.

영성이라는 말의 사용은 영적 생활 그 자체의 본질에 관한 논란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평상의(ordinary) 기독교적인 삶과 비상하고 신비한(extraordinary) 신앙 생활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그 말이 점점 빈번하게 사용되자, 영성은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측면과는 구분되는 경험적이고 종교적인 의식을 다루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영성이 학문적인 영역으로 들어온 것은 매우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매우 높은 신뢰를 받고 있는 1920년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Revue d'Ascetique et de Mystique)와 1932년부터 계속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하면서 현재까지 이른 “영성사전”(Dictionnaire de spiritualite)등이 ‘영성’이라는 말에 독특한 지위를 세워주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1912-15년 사이에 출판된 “가톨릭 백과 사전”(The Catholic Encyclopedia)과 그 개정판인 1970년대판 “새 가톨릭 백과 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을 비교해 보면 그것이 더욱 두드러진다. 전자판에서는 ‘영성’이라는 항목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후자판에서는 8개의 항목에 걸쳐 영성을 언급하고 있다.

1961년의 “옥스포드 영어 사전”(Oxford Dictionary)과 “윕스터 국제 영어 사전”(Webster's International Dictionary)에는 영성에 관해서 6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 5개는 종교적 영역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두개는 교회 밖의 사람들과 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구분하는 용어로서 ‘영성적인 사람’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번째의 것은 현대의 종교적인 의미와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원론적인 의미로 설명을 붙이고 있다. 즉 영적인 상태 혹은 물질적인 관심과는 정반대 되는 것으로서 ‘영성적인 것’을 취급하고 있다.

개혁가들이 후기 중세 영성과 다른 점은 중세 영성은 세상을 경멸하고 자연과 영혼의 단계적 관찰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을 추구했다면 개혁가들은 세상은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간섭하시는 현장으로 보았고 물질에 대하여도 중세 수도원의 금욕주의와는 달리 관심을 보였으며 근면과 절재로 대체되었다. 또한 중세 영성은 인간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고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강조했다. 그리고 용어 사용에서도 영성이나 신비에서 ‘경건이나 헌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유는 중세적 교회의 성경적 계시를 무시하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들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혁주의자들도 초기 개혁자의 영성과는 달리 루터주의자나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이 또 다시 자신들의 신학을 옹호하기 위한 사변적이고 교리적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정교한 신학적 방법론을 개발하자 이들에 대하여 실질적인 경건 생활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었다고 주장하고 나선 이들이 17세기 독일 루터 서클에서 일어난 경건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주장은 루터파 정통주의자들을 공격하며 개인적인 중생과 개인적인 성화 종교적 경험을 강조했다. 이들의 대표자는 독일의 필립 스페너(Phllip Jacop Spener.1635-1705)는 “경건의 소원”이라는 논문을 통하여 성직자와나 평신도들의 도덕적 쇠퇴를 염려하며 신앙의 개선을 지적하고 있다. 그 대안으로 성경공부의 쇄신. 영적 성장를 위한 신자들의 그룹 모임의 장려.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적 직분과 제물로서의 역활을 촉구하고 있다.

18세기에는 스페너의 영향을 받은 진젤돌프가 경건주의를 주도했고 역시 회심과 거듭남을 강조했다. 그 후 요한 웨슬레를 중심으로하여 북아메리카와 유럽 그리고 영국에 영적 감화를 미쳤다. 즉 무미 건조한 학문적 관심을 배격하고 회심할 때나 헌신할 때 경험한 ‘감정적 체험’을 진정한 하나님의 지식으로 믿었다.
이러한 극단적 반지성주의는 18세기의 계몽주의 물결이 그 반동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경건주의의 사랑에 찬 윤리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유럽과 미주 지역에 사회적 봉사와 사회적 복음 이해를 가져오게 했다. 경건주의의 영성은 윤리적 차원과 초월적 차원인 영성이 곧 경건주의의 영성이다.

과거 통상 재세례파 그룹으로 분류되었던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의 제 2그룹은 오늘날 더 적절하게 ‘영성주의자들’로 지칭되고 있는 자들이며, 그들은 성령의 조명과 인도를 수단으로 하는 신비주의적 경향 및 참된 종교의 내면성에 대한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성령을 정의하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것은 성령이다’라고 주장함에 있어서 개혁자들의 대다수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했다.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direct illumination)을 가진 자만이 계시의 내적인 진리를 인식하며, 인간은 단순히 문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사용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을 창안하기보다도 이를 반영하거나 분명하게 해 준다. 아무리 단순하고 원시적 상황들의 회복이라고 할지라도 형식화(formularies)와 사회적 제도들로 표현된 종교의 외면화(exteriorization)는 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요아킴(Joachim of Fiore), 영성파 프란시스칸들(the Spiritual Francisans), 그리고 자유정신의 베가드와 형제들(the Beghards and Brethren of the free spirit)과 같은 후기 중세기의 특징적인 현상이었던 신비주의적 경향들에로 소급한다.

양자에서 묵시론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대들 또한 존재했는데, 여기에서도 명상적인 합리주의(contemplative rationalism)에 의해 상쇄되었다. 영성주의(spiritualism)는 뎅크(Hans Denck), 프랑크(Sebastian Frank), 그리고 쉬벵크펠트(Caspar Schwenckfeld)에 의해 결정적으로 대변되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도 몇 가지 측면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데, 이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먼저 조리스(David Joris)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쉽게 분류하기 어려운 특이한 인물이었다. 1501년경 출생한 네델란드인인 그는 신비주의의 경향을 보였으며, 미술가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소유했다.

그러나 그의 종교적 견해들은 점차 특이한 현상을 드러냈다. 1534년 멜키오르(Melchior)파의 리더 필립스(Obe Philips)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써 멜키오르주의자들(the Melchiorites)에 가담했으며, 나중 이단 세르베투스(Servetus)를 방어하기 위해 저술하면서 카스텔리오(Castellio)의 친구가 되었다. 물세례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없으며 기독교인의 세례는 본질적으로 성령의 세례이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인도할 성령의 내적인 빛이 없이 성경은 그 자체로서 성도들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잔스도흐터(Anneken Jansdochter)라는 한 경건한 여인에 의해 예언자로 격찬을 받자, 그는 자신을 제 3의 다윗(the Third David)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이는 구약의 왕 다윗과 그의 후손 예수를 계승한 인물인데, 조리스는 이 둘보다 자신을 더 높였다. 그는 다가오는 새 시대를 준비함에 있어서 고난의 내재적 가치에 관한 교리를 가르쳤다.

다윗주의자들(Davidians 혹은 Davidists)로 알려진 조리스의 추종자들의 열광주의적 정신은 아네켄(Anneken)의 저술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이들은 메노 시몬스의 동정을 얻지 못했는데, 그는 철저히 자신을 그들로부터 분리시켰다. 1543년 박해를 피하기 위해 조리스는 바젤로 도망갔는데, 거기서 그는 잔 반 브루게(Jan van Brugge)라는 가명 아래 복음으로 인해 도망온 단순한 피난민으로 자신의 신분을 위장했다. 3년 후 1556년 그의 사망 3년 후까지 그의 신분이 사실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이단으로 선언되었으며, 그의 시신은 발굴되어 소각되었다.

한스 뎅크(Hans Denck 혹은 Denk)는 뛰어난 지적 능력 및 영적인 통찰력을 소지한 인물이었다. 뮌헨 서남쪽에 있는 헤이바하(Heybach 혹은 Hubach) 출신의 바바리아 사람(a Barbarian)인 그의 출생은 1495년 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잉골슈타트 대학(Ingolstadt university)에서 공부했으며(1517-19), 거기서 그는 인문주의에 심취했는데,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히브리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는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에서 언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그의 경력을 시작했으나 곧 바젤로 옮겨갔으며, 거기서 그는 에라스무스(Erasmus)와 오이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명성에 매료되었다. 후자는 뉘렘베르크(Nuremberg)에 있는 성 세발두스 학교(St. Sebaldus school)의 교장직을 그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 지역에서 그의 친구 그룹들에는 피크하이머(Pirkheimer), 오시안더(Osiander), 그리고 미술가 뒤러(Albrecht Dürer)가 있었다. 그러나 2년 후 그는 이단으로 고발된 후, 이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그러한 비난은 그가 당시 칼슈타트(Karlstadt)와 뮌스터(Münster)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에게는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뮬하우젠(Mülhausen),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 그리고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그는 그때 쯤까지 이미 재세례파 견해들을 수용했다. 후트(Hans Huth)에게 세례를 베푼 인물은 바로 그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들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스트라스부르크의 온건주의자들(moderates)을 소외시키고 말았는데, 이 도시를 형제들은 ‘의의 피난처(refugee of righteousness)’로 부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부처(Bucer)는 그를 ‘재세례파 교황(anabaptist pope)’으로 보아 거부했으며, 결국 그는 추방되었다. 그는 이후 웜스(Worms)로 옮겨갔으며, 거기서 1527년 그의 가장 유명한 소논문 “참된 사랑에 관하여(Von der wahren Liebe)”를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그의 심오한 영성을 잘 묘사하고 있다. 1527년 여름 뎅크는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회의를 위해 모인 후트와 다른 사람들의 무리 속에 있었다. 이 회의에서 제 2의 오순절이 기대되었다. 나중 후트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뎅크 자신은 아슬아슬하게 탈출했으나 얼마 안 있어 역병으로 사망했다.

뎅크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 조차도 뎅크가 매우 진솔하고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는 열광주의자(a fanatic)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건전하고도 온건한 기질을 합리적인 판단력과 잘 조화시켰다. 예컨대, 성경 내부의 모순들을 인식하면서,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로서의 진리를 파악하도록 해 주는 그러한 영적인 조명에 의해 이 모순들이 오직 내적으로 조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루터의 가르침들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교리적으로 너무 구속적이어서 그것들이 개별 영혼들 안에서 하나님의 발전적인 자기계시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루터의 예정 및 의지의 노예상태(the bondage of the will)에 관한 교리에 대한 그의 반박이 1526년 아우그스부르크에서 출판된 그의 대화록 “하나님이 악의 원인이원인이신가(Whether God is the Cause of Evil)”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의지의 자유 및 어른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향한 책임적인 결단의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는 구원이 우리 안에(in) 있지 우리에 관한(of) 것이 아니며, 이의 정수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자기굴복(self surrender)이다. ‘성경은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수단 곧, 그리스도 자신인 정적(Gelassenheit; tranquility)을 이야기하는데, 이는 육체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인간이 자신의 의지(self will)를 단순히 상실하는 것 외에는 다른 ‘축복의 길(way of blessendness)’이 없다.

한편, 신자는 활동적이어야 하며, 그는 수동성과 무관하다. ‘악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행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리고 왜 하나님께서 ‘악한 본성들(the creaturely)’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만들려는 방향에 따라’ 우리를 만드셨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 뎅크는 ‘자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듯이 만약 하나님께서 이미 악한 본성들을 제거하신다면, 최초에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은 인간이 선 혹은 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간에게 절대적인 선택의 자유를 주신다’고 했다.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으시나, 하나님의 자비는 인정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뎅크의 악의 개념은 신플라톤적 경향을 보였다. 악은 부정적이지 적극적이지 않으며, 죄는 비존재(non-being)이다. ‘어떻게 죄가 비존재인지 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고 자신은 가치없는 존재(nothing)가 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인식되며, 동시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중요한 존재(something)로 창조된다.’ 그는 개인들이 자기포기(self resignation)의 정도에 따라 이를 이해할 것이다고 말했다.

유사한 자유정신의 주창자는 프랑크(Sebastian Frank)였는데, 그는 1499년 아우그스부르크 근방의 도나우워스(Donauwörth)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인적으로 뎅크의 친구였으며, 학자로서 그는 뎅크보다 더 중요했으며, 학문의 깊이에 있어서 그는 인문주의자였고 저술가로서 그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아그리콜라(Agricola) 및 레기우스(Urbanus Rhegius) 밑에서 인문주의를 배웠다. 그는 1515년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에 들어갔으나 후에 하이델베르크로 옮겨갔는데, 거기서 1518년 4월 부처를 만났다. 후자는 거기에서 루터가 자신의 뛰어난 견해들을 설명하고 방어했던 유명한 논쟁에 참석하고 있었다. 아우그스부르크 교구(the Augsburg diocese)에서 사제로 안수받았으며 1526년 자신을 루터파로 인식했으며, 뉘렘베르크 근방의 구스텐펠더(Gustenfelder)에서 성직 임명을 받았다.

그는 뒤러(Dürer)의 제자들이었던 오틸리에(Ottilie Behaim)와 결혼했다. 비록 프랑크가 루터파 진영에 머물러 있던 동안 그는 쯔빙글리 및 재세례파의 견해들을 반대했지만, 이 형제들은 재세례파에 대해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슬렘들의 삶과 예배를 기독교계의 분열들 및 스캔들들과 대조시킨 익명의 라틴어 저술의 독일어 번역인 “터키의 연대기(Türkenchronic; Chronicle of Turkey)”를 출판한 1530년까지 그의 특이한(off beat) 과격주의(radicalism)가 명백하게 부각되었다. 따라서 그의 생각에 이미 12개의 종파들로 분열된 기독교에 3개의 종파들, 곧 루터파, 쯔빙글리파, 그리고 재세례파를 첨가시켰다. 이 기독교 종파들이 다른 방식으로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는 새로이 등장하는 비가시적인 제 4의 타입을 이야기했다. 비가시적인 타입인 이유는 순수하게 영적인 공동체는 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며, 안수 받은 성직자의 목회 및 설교, 성례전들 및 예식들과 같은 전통적인 외적인 형태들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자기 자신의 길을 추구하는 대중적 종교 저술가로서 그의 경력을 시작하기 위해 뉘렘베르크 목회사역(pastorate)을 포기하고 스트라스부르크로 갔다. 여기서 그는 쉬벵크펠트(Caspar Schwenkfeld)와 접촉했는데, 그의 견해들과 자신의 견해들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531년 가을, 그는 방대한 기독교 역사 개관에 관한 저술인 “Chronica, Zeitbuch und Geschichtsbibel”을 출판했는데, 여기서 모든 기독교 교회들이 날카로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로마주의(Romanism)와 제국주의적 시스템(the imperial system)을 거부했으며, 한편 확립된 권위를 폭력으로 도전하려고 했던 대중적인 운동들에 별로 동정적이지 않았다. 그의 이단들과 이단자들에 대한 연구는 특히 흥미롭다. 그는 에라스무스를 이단들 가운데 포함시켰는데, 이는 에라스무스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비록 루터의 업적에 대한 그의 설명이 긍정적이기는 했지만 용감무쌍하게 맹공을 퍼부은 돌발적인 성격으로 인해 그는 투옥되었으며, 이 책의 유포는 금지되었다. 그가 석방되자 스트라스부르크의 시 원로들은 그가 더 이상 이 지역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따라서 그를 축출해버렸다. 그는 이후 울름(Ulm)에 정착했는데, 여기서 인쇄소를 차린 후 자신의 저술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신학자들 및 시 행정부(the magistracy)와 마찰을 빚었다.

그는 참된 종교는 내적이고 영적이며 그리스도 앞에서 성인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 전혀 모를지라도 양심적인 무하마드들(Mohammedans)과 이방인들이 이를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했다.
한 성령께서만 불과 성령으로 세상 어디에 존재하든지 내적인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성도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시는 분이 아니며, 따라서 하나님은 야만인들과 터키족에게 동일하시듯이 그리스인들에게도 동일하시며, 종들에게 동일하시듯이 주인에게도 동일하시다. 그들이 그들에게 비취는 빛과 그들의 가슴 속에 기쁨을 가지고 있는 한 그러하다.

프랑크는 “나의 가슴이 아무에게도 낯설지 않다”고 했다. 이러한 비정통적인 가르침들에 대한 해설들이 1534년의 “역설(Paradoxa)” 및 약 5년 후 저술된 “17권의 인봉된 책(Das mit sieben Siegeln verschlossene Buch)”에서 이어졌다. 전자는 성격상 신비주의적인데, “독일신학(the Theologia Germanica)”에 영향을 받았다. 프랑크의 견해에 따르면, 역설은 분명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지만 특정 시각에서 고려할 때 이는 진실이다. 참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바는 이의 역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성서적 문자주의(scriptural literalism)에 대한 혐오가 명백하다.

이는 성경에 대한 오용이며, 사실 참된 그리스도를 죽이는 ‘적그리스도의 칼(the sword of Antichrist)’이며 이단들 및 종파들의 온상이다. “7권의 인봉된 책”에서 그는 다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형제적인 시각에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좁은 분파주의(sectarianism)를 부인했으며, 플라톤과 플로티누스(Plotinus)는 ‘모세보다도 더 명확하게 그에게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과도한 감정주의와 황홀한 감정의 폭발을 비난하면서 그는 계속 영혼 속의 ‘하나님의 말씀’, ‘내적인 빛’ 혹은 ‘참된 빛’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신적 요소의 존재를 강조했다. 이의 존재는 모든 영적 진보의 근거이며 출발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인간의 의지의 자유 및 성령과의 능동적인 협력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크의 사상에서 중세적 선례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시대의 모든 종교적 사상가들 가운데 가장 근대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교회론적 제도주의(ecclesiastical institutionalism)가 무용하다고 보았으며, 교회의 재 원시화(repristination)에 대한 당시의 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참으로 성숙된 사람은 어떤 외적인 지지물(props)도 필요하지 않는다. 심지어 성경도 너무나도 많은 모순들과 역설들을 포함하고 있는 의심스러운 안내자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이의 교리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이는 심오한 수준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분명히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된다. 그러나 거기서 묘사된 인물은 시대를 통해 다양한 장소들에서 인간에게 교류했던 오직 영원한 말씀의 상징이다. 프랑크는 1539년 초 울름(Ulm)을 떠나 바젤로 갔다. 거기서 그는 첫 부인 사후 얼마 안 있어 재혼했으며, 출판업을 시작했다. 그는 1541년 신약의 라틴어-희랍어판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이듬해 가을 사망했다.

아마도 모든 영성주의적 저술가들(the spiritualist writers) 가운데 가장 지적으로 두드러진 인물은 실레시아 귀족(the Silesian nobleman)이요, 평신도 신학자였던 카스파 쉬뱅크펠트(Caspar Schwenckfeld)였을 것이다. 지주요 튜톤 가문(the Teutonic Order)의 기사였던 그는 일찌기 1518년경 루터파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실레시아(Silesia)의 개혁운동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수 년 동안 루터의 가르침을 열렬히 추종했으며, 개인적으로 루터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단적인 성만찬 이해로 인해 삭소니의 개혁자들의 반대를 받았다. 실망한 나머지 그는 과격주의(radicalism)에 몰입하게 되었는데, 그의 과격주의는 칼슈타트(Karlstadt)나 뮌처(Müntzer)의 그것과는 무관했다.

그들의 혁명주의적 행동은 그의 확신들과 전혀 조화될 수 없었다. 1526년까지 그는 성만찬의 어떤 외적인 표현도 거부했는데, 그리스도의 육체는 순수하게 영적이며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를 내적으로, 영혼의 깊은 곳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이 단계에서 쉬벵크펠트는 그가 종교에 있어서 중도적 혹은 ‘왕도적인(royal)’ 길이다고 부르던 바만을 추구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과는 반대로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일탈하는 경향이 있다.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우리는 왕도만을 걷고, 과거의 위선적인 삶(곧, 로마주의)과 현재의 자유(곧, 루터파) 사이에 중도적 입장을 추구해야만 한다. 행위의 종교(a religion of works)도, 전가된 의라고 하는 순수하게 사법적인 교리(a purely forensic doctrine of imputed righteousness)도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왕도는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찾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쉬벵크펠트 자신의 길은 나중 바뀌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루터파(혹은 칼빈주의)로 대표되는 ‘영토적(territorial)’ 프로테스탄티즘과 재세례파 분파들(the anabaptist sects)의 철저한 과격주의 사이에 존재했다. 사실, 쉬벵크펠트는 후자의 방법보다도 더 이상한 길로 나아갔는데, 이는 루터의 혐오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루터는 그를 ‘악마에 사로잡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바보’로 묘사했으며, ‘사단이 그를 통해 토해내는 팜플렛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반대했다. 루터는 그가 동정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프랑크(Franck)와 마찬가지로 모든 ‘고전적(classical)’ 프로테스탄티즘과 달리, 인간 의지의 자유(the freedom of the human will)를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근본적인 개신교 교리인 이신칭의사상(solafideism)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바는 도덕적인 삶 및 자기훈련을 통해 발전적이고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화를 이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는 주장하기를 이는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Erkenntnis)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했다. 내부로부터 오는 이 지식은 그리스도에 대한 내적인 먹음(interior feeding upon Christ)을 통해 성장된다. 이 내적인 먹음은 성만찬에 대한 순수한 영적인 참여에 의해 가능해진다. 비가시적 집단의 맴버쉽을 가지고 있는 참된 신자들의 제 2의 아담에의 참여는 영혼을 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며, 궁극적으로 이 영혼에 자유를 부여한다.

비록 쉬벵크펠트는 타락한 옛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갱생된 새 사람에게는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새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게 된다. 이는 영혼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변화시키는 능력 때문에 가능해진다. 만약 그가 타락한 인간성(fallen humanity)의 신화(deification)로 지칭했던 바 진정한 성화가 가능하다면, 그는 루터의 ‘의로우면서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의 개념은 인정할 수 없다.

이 개념이 기독교인의 삶에 대한 잘못된 사상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신의 육욕적인 기호들(sensual appetites)을 극복하는 것을 배울 수 있게 되며, 그는 그가 그 안에 거하는 ‘평화 성채(castle of peace)’의 안전감에 의해 가시적으로 변모될 수 있다. 따라서 참된 종교의 시금석은 체험, 곧 완전한 삶의 갱신으로 나타나는 내적인 변모에 있다. 그러나 슈벵크펠트는 영적인 교만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항상 기독교인의 삶은 실제적인 성취보다도 계속적인 발전이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비참하며, 신성한 것들에 미숙하며, 영과 신앙에 무지하며, 약한 우리는 주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도우실 것을 희망한다. 한편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순수하고도 건전한 교리를 열망하며, 그를 통해 그 분의 은총 안에서 경건하게 살기를 갈망한다.그러므로 교회도 완전히 새롭고, 헌신되고 선택된 몸이어야 한다. 성령 안에 있는 자신의 신적인 계시로부터 오는 그분의 구원의 지식의 이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를 통해 주님은 자신의 선택된 교회를 세우시며, 이를 통해 전 세상에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실 것을 우리는 소망한다.

쉬벵크펠트는 그의 말년을 울름(Ulm)에서 보냈는데, 그는 여기에서 1561년 사망했다. 주로 성만찬 교리 및 기독론에 관한 신학적 논쟁에 그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자신의 견해는 아우스부르크에서 확정된 루터의 입장들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이들을 성령 안에서의 참된 자유에 유해한 것으로 보아 거부했다. 성례전들이 본래적으로 은총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자명했었다. 그는 물론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성인세례(adult baptism)의 효과(efficacy)에 관해서도 믿지 않았다.

성만찬에 관해서 그는 참된 임재(a veritable presence)에 관한 모든 개념들을 거부했으며, 복음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제정의 말씀들(the world of institution)조차도 잡히시기 전날 밤 그리스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신 말씀에 대한 오해였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결론의 배후에는 하나님 자신이 모든 피조물들과 무관하듯이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무관하다(external to God)’는 근본적인 원리가 존재했다. 따라서 피조성(creatureliness)은 신성의 도구(the vehicle of divinity)가 될 수 없다. 성만찬 예식(the eucharistic rite)은 상징적인 의미 밖에 없으며, 이의 시행은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원리가 쉬벵크펠트의 기독론을 결정지웠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마리아에 의해(혹은 통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하나이다는 근거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피조된(created)’ 것이 아니라 ‘낳아지신(begotten)’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인성은 자체로서 독특해야 한다. 따라서 비록 쉬벵크펠트가 신성과 인성 사이의 구분성을 주장했으나, 실제로 그가 가르친 바는 일종의 양자의 상호 흡수(mutual absorption)였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 과거 유티케스적이단(Eutychian heresy)과 같다고 하겠다.

구속에 관하여 쉬벵크펠트는 구원은 악마의 파워로부터 인류를 구속하신 역사적 그리스도의 사역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인간 본성의 정화에서 영화된 그리스도(the glorified Christ)에 의해 가능해지며, 재생(regeneration)과 아들 신분에로의 입양(adoption into sonship)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내재적 의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아무도 의롭다고 간주하지 않으신다’고 까지 말하면서 실제적인 도덕적 및 영적 변화의 필수성을 강조했던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

개인주의 및 분파주의적 비밀집회들(sectarian conventicles)에 대한 혐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고백자들(Confessor of the Glory of Christ)로 알려진 분파가 되었으며 이는 1539년 이후 쉬벵크펠트주의자들(Schwenckfeldians)로 알려졌는데, 이들은 실레시아(Silesia) 및 스와비아(Swabia)에, 그리고 나중 프루시아(Prussia)에서도 모였다. 얼마 안 있어 이들은 재세례파들 및 뵈메(Jakob Boehme)의 제자들의 합류로 인해 그 수가 늘어났다. 이 분파는 펜실베니아에서 현재까지 존재한다.

영성주의자들이 비록 특이하게 보이기는 하나, 그들은 결코 단순히 기괴한 몽상가들(eccentric dreamers)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가르침들은 많은 사람들의 자극제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만을 고려해 보았다. 그러나 린쯔(Linz)의 뷘델린(Johann Bünderlin, c. 1499-1533)과 같은 다른 인물들도 언급할 가치가 있다. 그는 스트라스부르크 그리고 나중 실레시아에서 활동했다. 또한 엔트펠더(Christian Entfelder)는 뎅크(Denck)의 추종자요 후브마이어(Hubmaier)의 친구였는데, 스위스 및 오스트리아의 형제들(the Swiss and Austrian Brethren)의 회중들에게 목회했다.

후자는 당시의 성경주의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구도자(the seeker)가 찾고 있는 바를 먼저 자기 속에서 발견하지 못하면, 성경으로부터 아무 것도 도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의 교회관은 ‘그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며, 거기에 성령께서 자신의 은사들을 쏟아 부으시며, 주님께서 자신의 직책들과 자신의 선교를 이의 교인들과 공유하는 선택되었고, 구원 받았으며, 정화되고, 성화된 그룹이다.’ 영성주의자와 입장을 같이 하는 또 한 사람은 스위스의 의사요 신플라톤주의 사상가인 프라켈루스(Theophrastus Paracelus; Philip von Hohenheim, 1493-1541)일 것이다. 그는 재세례파도 반3위1체론자도 아니었으나, 성경 주석들 외에도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에 관해, 특히 성례전들에 관해 많은 글을 썼다.

이 모든 인물들에서 엿볼 수 있는 또 한가지 사실은 직접 15세기 기독교 영성으로부터 기원하는 깊은 종교적 확신이다. 이 15세기 영성에는 플라톤주의와 카발리스트의 자연 신비주의(Kabbalistic nature mysticism)의 요소가 혼합되어 있었다. 이 점에서 그들은 다시 17세기 많은 다른 형태들을 취한 경건의 타입의 예조를 보였으며, 특히 뵈메(Jakob Boehme), 폭스(George Fox), 그리고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the Cambridge Platonist) 스미스(John Smith)를 환기시킨다. 비록 기질상 혹은 관심상 교회들 혹은 종파들의 건설자들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영향력은 광범위하고도 지속적이었다.(유해룡교수의 글에서) -장봉운- 

출처 : 창골산봉서방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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