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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면세계에 대한 잘못된 신앙자세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2. 6. 09:37

내면세계에 대한 잘못된 신앙자세

 

  이 시간에는 내적세계 곧 내면세계에 대한 잘못된 신앙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외적인 의지와 행위를 특별히 강요하는 잘못된 신앙태도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율법주의적 신앙관입니다. 사실 신앙이라기보다는 종교입니다. 인격체인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나 친밀함보다 자신의 종교적인 노력이나 헌신을 더 강조하는 신앙관입니다. 거짓신앙체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신앙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속이 어떻든 겉이 멀쩡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정작 무엇을 원하시는지 몰랐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믿음이란 율법의 규례나 규칙을 잘 지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의 성숙이나 깊이를 말할 때 내면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여기에 십자가에 의한 삶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의 군병 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다음 사역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좋은 예입니다.


  베드로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입으로 하는 고백을 너무나도 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겠노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기도 지겠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속에는 두려움과 불신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 그의 속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픈 마음은 성서 도처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의 시작인 구원받는 일에는 분명 우리의 의지가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을 비추시면 우리는 의지를 더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의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지적인 순종이 만날 때 일어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시작에는 분명 의지적인 부분이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계속 의지적인 부분을 강조하면 거짓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모든 부분에 은혜에 의한 삶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경우에처럼 의지적인 믿음만을 강조하면 신앙이 병든다는 점을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의지를 강조하는 신앙관의 문제점은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자치 하나님과 원수 되는 자리에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적인 신앙관에서는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을 살피기보다는 속을 억압한 채‘믿습니다, 믿습니다.’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치유보다는 내면세계의 병을 더 깊게 만들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회 칠한 무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처음 신앙을 배울 때에는 감정이나 느낌이 없더라도 의지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리들이 잘 안 믿어지더라도 성서가 믿으라고 하니까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에라도 점차적으로 감정이나 느낌을 포함해야 합니다. 점진적으로 전인격이 동원되어야 합니다. 의지를 강조한답시고 감정을 무시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내면을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전인격적이어야 합니다. 지정의가 전부 동원되어야 합니다.


  흔히 문제가 생긴 가정을 심방을 한답시고 찾아가서 “기도를 해야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 줘, 작정기도를 하면 돼, 이건 10일짜리야.”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지금 영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전혀 분별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존 윔버 목사님의 ‘능력치유’란 책에서는 기도사역을 할 때 단계를 따라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둘째, ‘좋은 것은 성령, 나쁜 것은 마귀’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신앙태도입니다. 좋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나쁜 것이 있을 때, “마귀”라고 하면서 그냥 눌러 버리는 태도입니다. 아주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좋은 것이라고 해서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라고 해서 항상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적인 눈에는 나쁘게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수만 있다면 그 일은 좋은 일입니다. 그게 또 하나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나쁜 일만 생기면 이것을 마귀라고 외치면서 축사를 하려고 덤벼듭니다. 이것은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내 속의 분노를 치유해야 하는데 화가 올라올 때마다 마귀야 물러가라! 해버리면 마귀는 오히려 우리 속으로 더 숨어버립니다. 이럴 때에는 내 속의 문제점의 출처를 찾아내어 치유를 해야 합니다. 분노의 출처를 없애면 마귀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남에게 보이는 것으로 신앙생활하려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영광을 얻으려는 신앙관과 무관하지 않는 신앙관입니다. 인본주의 신앙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겉으로 무언가를 보이려고 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속은 어떻게 되어있던 간에 겉으로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겠지, 인정하시겠지 하면서 열심히 합니다. 또한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들으면 하나님께도 칭찬을 듣는 것으로 동일시하여 부단히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겉을 보지 않으시고 속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 곧 자기-의를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분은 우리의 상한 것을 받기 원하십니다. 아프고 고민하고 있는 마음을 받기 원하십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한 것을 제물로 받기 원하십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완전케 하신 것만 받으십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여 선 부분만 받으십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칭찬과 영광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넷째, 구원을 강조하여 내면은 어떻게 되던 간에 상관없이 사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을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렇게 구원받는 일은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예수를 아직 자세히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만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의 겉이 의지적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모양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출발이지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서 혼돈을 겪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니까 안심하고 자신의 속에 있는 것 그대로 가지고 살아도 되는 것 인양 신앙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와 같습니다. 구원은 생명보험 같은 보험상품이 아닙니다. 일단 구원은 받았으니까 지옥 갈 일은 없을 테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다섯째, 인간적인 심리와 감정을 무조건 누르는 잘못된 태도가 있습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인간적인 심리 즉 두려움이나 분노 등이 올라오면 깜짝 놀라서 그런 감정 등을 누르고 또 누르는 잘못을 말합니다. “이건 내가 아니야! 난 아냐, 이건 마귀야! 나는 그런 자가 아냐.”하며 계속 끓어오르는 감정을 꾹 누릅니다. 자신 속에 인간적인 것들이 있음을 용납하지 않는 잘못입니다. 주로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의 소유자 곧 완벽주의자들이 여기에 잘 빠집니다.


  누구나 다 인간적인 심리와 감정 곧 두려움이나 분노, 굶주림 등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마치 “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하는 자와 같습니다. 자신을 아담의 후손으로 믿지 않는 자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속에는 모두 곤고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다보면, 십자가의 복음을 잘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옷을 많이 입게 됩니다. 즉 은혜를 입고, 능력을 입고, 은사를 입는 것입니다. 여러분, 멋진 옷을 입은 사람일수록 착각을 잘 하는 법입니다. 자신이 잘 생긴 줄 착각하는 것 말입니다. 옷이 날개였지 사람이 천사가 아닌데도 착각합니다. 문제는 모든 인간이 다 똑같다는 점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시작하면서 착각에 빠지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무언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우월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감정이나 두려움, 분노 등이 속에 생기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믿어 버립니다. 이는 내면세계에 대한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스운 말입니다. 누른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폭발할 때면 더 크게 터집니다. 그런 사람 조심해야 날벼락 맞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적 회복을 원하십니다. 내적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속에다가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해 놓으신 인격을 회복시키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 역시 온전하기를 원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을 만나기 원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세계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내적치유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속은 너무 아파 병이 들었고,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 등으로 덥혀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내면은 하나님을 만나고 계시나요? 겉은 손을 들고 “내 영이 주를 기뻐합니다.”라고 찬송을 하지만 여러분의 내면도 손을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계시나요?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내면이 하나님을 만나는지, 안 만나는지 조차도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성령님만이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비추시기 전까지는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의 내면을 원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율법이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기 원하셨지만 사실은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가장 큰 목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힘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율법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준수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속에 무엇이 있는 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드신 하나님의 법도입니다. 제사법과 예배법이 율법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사법이나 예배법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의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 빠진 예배나 제사는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꼬박꼬박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줄로 알았습니다. 이 같은 착각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대가 멸망할 때 그리고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셨을 때 극에 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유대인들을 향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23장 23절부터 28절입니다.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 23:23-28)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자마자 ‘의미 없는 겉’을 허무셨습니다. 의미 없는 율법 지킴, 의미 없는 예배, 의미 없는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의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분노를 드러내셨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속이 탄로 나고 드러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죽이기에 이릅니다. 그들의 외적세계와 가치관을 허무신 주님을 용서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속에 있는 죄와 불법과 탐심, 욕심을 주님께서 적나라하게 드러내시니까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아마도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하실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이 별 다를 바 없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옷을 찢읍시다. 속을 드러내고 치유를 받읍시다. 우리의 마음 밭을 드러내어 잘못된 부분과 썩은 부분을 고침 받읍시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우리들의 속에 가득 있게 합시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입니다. 옷을 찢은 자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애통하는 자가 됩시다. 우리 속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게 합시다.


출처 : 창골산봉서방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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