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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적치유의 현장으로서의 교회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2. 6. 09:38

내적치유의 현장으로서의 교회

 

 

 내적치유를 위한 장소로서의 교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내면세계의 치유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에게 구원의 과정으로서 내적치유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여기에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바른 구원에는 반드시 치유하는 과정이 있게 마련입니다. 새물결선교회에서 치유센타를 운영하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뿐만 아니라 마음과 감정, 육신을 모두 포함한 전인적인 것이 되어야 온전한 구원입니다. 구원의 영원한 능력인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이 우리의 내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겉의 세계에는 잘 적용할지 모르지만 내면의 세계에는 잘 적용을 못하는 실정입니다. 어떻게 십자가로 승리하는지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무지한 실정입니다. 어떻게 찢겨진 예수님의 육체 사이로 난 새롭고 산 길을 통해 때를 따라 도우시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내적 문제가 생길 때 우왕좌왕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여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분이 내적인 문제만 생기면 쉽게 무너지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정말 사단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잘도 농락합니다. 여기에 속에 열등감이나 분노와 정욕 등이 다루어져 있지 않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평소에 사단은 가만히 있다가 적당한 시기에 그리스도인들 속을 한 번 쿡 찌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와르르 무너집니다. 잘 이겨내다가도 말입니다. 연약한 부분에서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는 기초공사와도 같습니다. 여러분, 큰 집을 짓는 사람일수록 땅을 더 깊이 파는 법입니다. 이처럼 땅을 파듯이 치유를 위해 우리 마음을 깊이 파는 것이 내적치유입니다. 요사이 겉은 성장하였는데 속은 갓 난 아이 같은 ‘성인아이’들이 많습니다. 겉은 멀쩡합니다마는 속은 과잉보호와 불신 등으로 병이 들었고 인격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마마보이’같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통계로 볼 때 우리나라 인구의 약25%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변화보다는 퇴락해 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도들 수가 그렇게 많은데도 말입니다.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교인들의 마음에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아픈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변화시킬만한 능력이 성도들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보다는 아픔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사명 중 하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면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사역과 관련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 선포,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원래 하나입니다. 곧 하나님 나라의 사역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란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 선포와 능력사역이 그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사역을 통해 예수님이 전파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하나님께서 친히 뒷받침하셨습니다. 하나의 사역이지만 두 측면이 있습니다. 메시지 선포와 능력사역이 그것입니다. 주님은 능력사역을 통해 백성들 속에 있는 병을 고치셨습니다. 병고침은 외적 병고침과 내적 병고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복음 선포와 아울러 능력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치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 안에 능력사역을 찾기 쉽지 않습니다. 그저 주일낮예배를 주보에 적혀있는 순서대로 진행하면 예배를 드린 것이 되는 실정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의 교회에는 치유가 약화되어 있습니다. 자연히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유약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인데도 불구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이때를 틈 타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이단이란 원래 아픈 자들이 모여서 만드는 사악한 단체입니다. 교회가 치유를 하지 않으니까 생겨나는 병폐이기도 합니다. 자기들끼리 자기들 사상대로 치유를 행하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법도라고 떠들어대는 곳이 이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단이 말세가 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린다는데 있습니다.


  한 기독 의사의 말입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처음에 주로 육신의 병들을 고치시다가 차츰 마음의 병들을 고치셨다고 합니다. 그분의 표현에 의하면 몸의 병은 마음의  병이 어떠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 교회는 치유의 장소이자 하나님나라의 현장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일주일 동안 찢기고 상한 영혼들이 모여 예배하다가 다시 살아나는 모임이자 공간입니다. 그런 이유로 말씀과 찬양, 기도시간에 치유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일주일 동안 마음이 상하면서 세상을 살게 마련입니다. 물론 이 말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삶은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삶을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잘 경험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또한 십자가의 능력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세상에 살다보니 이렇게 저렇게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주일이면 아픈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오게 마련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마친 후에 기뻐하며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말씀이, 찬양이, 기도가 서로서로를 살려놓아야 합니다. 여기에 최후의 만찬 도중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겨라!”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러한 치유의 모임,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회복을 위한 주님의 교훈이 적용되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8장 5절부터 13절까지를 읽읍시다.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 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 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마 8:5-13)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되려면 꽤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백부장도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마도 그는 출세를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천부장이 되려는 욕망이 왜 그에게 없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누구나 백부장쯤 되면 자기 집 하인들에게는 관심이 없게 됩니다. 어느 하인이 아픈지 관심을 두기가 어렵게 됩니다. 출세할 생각이 그를 지배할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여기 백부장의 눈에는 인간의 야망에서 비롯된 위의 것이 보이기보다 아랫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한 하인의 병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분주했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을 찾으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종의 아픔을 보았던 것입니다. 주님이 백부장의 예화를 언급하시면서 의도하셨던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백부장이 되라는 말씀은 아닐까요?


  교회는 백부장처럼 아픈 사람을 찾는 곳입니다. 찢어지고 아픈 영혼을 찾는 작업을 하는 곳입니다. 안식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아픈 영혼을 찾으시면 주님께서도 그리하셨습니다. 오늘 이 곳에 하나님의 행하심이 있는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아픈 자들이 있는가? 이 질문이 예수님의 안식일에 하셨던 사역의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픈 영혼을 보면 즉시로 고치셨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과 율례보다 더 중요하게 이 사역을 다루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고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의 눈에 아픈 사람들이 보입니까? 당신은 지난주일 낮예배 때, 아픈 성도가 없는지 살펴보셨습니까? 교회 지도자들은 아픈 자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그들을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99명을 지키는 일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위한 사역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인간적인 가치관이 아닌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있었던 동기를 가지고 사역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서 말입니다.


  넷째, 치유가 있어야할 곳에 거짓신앙체계가 자리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더 큰 고통을 경험합니다. 혹 당신은 교회에 가서 더 큰 아픔을 경험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사람들은 흔히 습관적으로 아프면 교회에 못갑니다. 왜냐구요? 아프다가도 일단 교회에 가면 할렐루야! 하면서 웃어야 하니까요. 속은 상해있는데 겉으로는 웃어야하는 교회생활, 여기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불행이 있습니다. 어쩌다 마음 문을 열고 약한 모습, 아파하는 속마음을 보이기라도 하면 별의별 얘기를 다 듣습니다. 소위 율법주의 신앙관에 물든 사람들에게서 더 아픈 말을 듣습니다. “믿음이 그렇게 없으니까 약하지! 새벽기도 안하니까 그렇지! 예배에 자주 빠지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말씀을 안보니까 그런 거야!”이러니 누가 병들고 상한 자신의 영혼을 다른 교인들에게 보이고 싶겠습니까? 특히, 교회 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 있을수록 더 속을 보일수가 없습니다. 더 중요한 리더의 위치에 있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마음 문을 열고 약한 모습, 아파하는 속마음을 보이기라도 하면 “집사가 그래가지고야! 그게 무슨 장로야! 아니 목사님도 저래? 믿음이 저렇게들 없어서야 뭐가 되겠어!”


  그래서 교회에 가면 더 아픕니다. “이것 하라, 저것 하라”하면서 시키기만 합니다. 외부적인 복종만을 강요합니다. 살아있는 예수님과의 교제는 뒷전이고 외부적인 복종을 강요합니다. 어떨 때에는 교회에 대해 분노가 생깁니다. 교회에 대해 회의가 찾아옵니다. 교회를 옮겨야하는지 갈등을 가집니다. 정말이지 겉은 말씀이고, 사역이지만 속은 상처를 주는 일이 교회 내에 너무도 많습니다. 어찌 보면 현대 교회에는 죄가 있는 자는 다니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이 모두 거짓신앙체계가 만든 속임수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은 내게 소용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은 내게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병든 자라야 내게 필요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촌교회는 죄인들이 마음 놓고 오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픈 자들이 와서 치유 받고 회복되어 다시 세상으로 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살다가 다시 병들면 찾아와서 쉬고, 힘을 얻어 회복한 영혼으로 다시 땅 끝까지 길을 나서는 교회이고 싶습니다. 물론 항상 병들어 오라는 말이 아닙니다. 좀 더 온전한 삶을 살기 전까지 말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주일낮예배가 축제이고 싶습니다. 한 주간 동안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신 주님을 높이는 날이고 싶습니다. 이것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설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치유된 만큼 남을 치유할 수 있는 법입니다. 셀모임, 구역, 기관 속에서 모두가 치유사역자가 되어 주십시오. 기억할 사항은 자신이 치유 받은 만큼만 치유할 수 있기에 철저히 주님의 주권 아래 순복하면서 십자가의 군병이 먼저 되십시오. 치유되지 않은 부분만큼 남에게 상처를 주기 쉽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깨어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서로서로가 관계를 맺을 때, 좋은 것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함께 오간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내가 치유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실족케 만들 수 있기에 자신이 먼저 진리 앞에 옷을 벗고 말씀 앞에 동의하며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부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상한 마음의 치유를 집중적으로 다룰 것입니다.



 

 



출처 : 창골산봉서방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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