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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본사] 근대 (메이지유신. 군국주의)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5. 23. 20:28

근   대  메이지유신. 군국주의

 

1.개  요
 메이지 유신이후를 근대로 본다. 일본의 자본주의 및 근대적 통일국가의 시점이 이 때였다고 보기 때문. 그러나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언제로 보는가는 이견이 있다. 덴포(天保) 개혁기(1830-1844)로 보기도 하고 개국기(1853-1858)로 보기도 한다. 근대의 끝은 제2차 세계대전.
 
2.메이지 유신
 1)개  요
 막부가 붕괴하고 근대적 천황제 형성의 시점이 된 사건. 자본주의를 향한 경제적, 사회적 변혁도 함께 이루어졌다. 개국이 된 1853년부터 세이난(西南) 전쟁이 발발한 1877년 까지. 시작을 덴포(天保) 개혁기(1830-1844)로 보거나, 종료를 1880년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원인은 막부체제의 모순과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압력.
 미국의 페리에 의해 개국된 이후, 일본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존왕양이 운동, 공무합체 운동, 막부타도 운동, 대정봉환, 왕정복고, 무진전쟁, 판적봉환, 폐번치현, 세이난 전쟁 등등. 이 사이에 일어난 민중 반란과 사족들의 저항을 누르고, 부국강병을 목표로 한 징병제와 새로운 학제, 조세제도, 경제부흥책과 문명개화 정책 등 많은 정책이 일사천리로 시행되었다. 결국 일본은 천황 중심의 근대적 통일국가 형성에 성공.
 그러나 메이지 유신의 성격과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천황권 강화 및 군국주의와 관련시켜 이를 절대주의의 성립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일본의 자본주의화를 이룬 부르조아 혁명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 물론 메이지 유신이 일본 근대화의 시발점이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2)주요사항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 : 반막부 운동. 왕정복고외세배격을 주장하였다. 존왕론과 양이론은 별개의 사상이었으나 막부 말기 외세가 밀려드는 위기상황에서 하나로 결합. 하급무사 및 부유한 농민과 상인이 주축이 되어 교토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죠슈 번(長州藩)이 중심이 되었으나 1863년 공무합체파에 의해 교토에서 추방되었다. 죠슈 번은 오늘날의 야마구치 현(山口縣) 지역.
 존왕양이파는 후에 외세배격의 현실적 어려움을 알고 개국책을 주장하면서, 막부타도 운동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공무합체(公武合體) 운동 : 막부 말기의 막번체제 강화운동. 조정의 전통적 권위를 인정하면서 막부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사쓰마(薩摩) 번이 중심이 되었다. 사쓰마는 오늘날의 가고시마 현(鹿兒島縣).
 1863년 교토에서 존왕양이파를 추방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쥐었다. 후에 사쓰마 번은 죠슈 번과 제휴하여 막부타도 운동에 나선다.
-대정봉환(大政奉還) : 1867년. 에도 막부의 15대 쇼오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조정에 정권을 반환한 사건. 요시노부는 막부타도 운동의 기세를 피해보고자 정권의 반환을 조정에 주청하여 수락되었다. 그러나 막부타도파도 동시에 막부타도의 밀칙을 받았다. 같은 해 말경 막부타도파는 왕정복고 선언과 함께 도쿠가와 씨의 은퇴와 영지반납을 결의. 결국 막부세력과 막부타도파 간의 긴장이 높아져 무진전쟁이 발생하였다.
-무진전쟁(戊辰戰爭) : 1868년부터 1869년까지. 구 막부군과 막부타도파의 전쟁. 쇼오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은퇴와 영지반납 요구에 격분한 막부군이 교토에 입성, 막부타도파와 교전하였다. 도바·후시미(鳥羽·伏見) 전투에서 시작, 홋카이도의 고료카쿠(五稜郭) 전투에서 종료. 막부타도파가 승리하였다. 막번체제의 급격한 해체와 천황제 통일국가 형성의 결정적 계기.
-판적봉환(版籍奉還) : 1869년. 각 번의 판(版)과 적(籍) 즉, 토지와 백성을 조정에 반납한 사건. 번주들은 지번사(知藩事)에 임명되고 번정(藩政)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점차 번의 독자성이 상실되면서 폐번치현으로 이어진다.
-폐번치현(廢藩置縣) : 1871년, 전국의 번을 폐지하고 부(府)와 현(縣)으로 개편하여 중앙집권적 통일국가의 완성을 기한 것. 도쿄, 오사카, 교토의 3부와 302개의 현으로 편성하였다. 번주 출신인 지번사들은 화족(華族) 신분을 보장하여 도쿄로 이주시키고 부에는 지사(知事)를, 현에는 현령(縣令)을 파견. 후에 통폐합하여 3부 72현이 되었다.
-세이난(西南) 전쟁 :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적 국가 형성과정에서 발생한 보수적 사족의 마지막 저항. 메이지 유신의 지도자로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자신의 주장이 실현되지 않자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후학을 양성하며 사족 지배체제를 유지, 정부의 사족해체책 등 여러 정책에 반하는 행위를 계속하였다. 결국 그의 제자들과 사족이 중심이 되어 거병, 정부군을 공격하였으나 패퇴.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결하였다. 1877년부터 1899년까지.
 
 3.군국주의
 1)개  요
 사회의 어떤 부문보다도 군사부문을 우선시하는 체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도 이같은 경향이 거세졌다. 군대는 아예 내각이나 국회의 견제도 받지 않는 천황 직속으로 편제.
 1894년의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 그리고 1910년의 강제적인 한일합방은 군국주의 팽창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다이쇼(大正) 민주화 운동기에 잠시 쇠퇴한 적도 있었으나 만주사변 이후에는 오히려 강화.
 
2)주요사항
-다이쇼(大正) 민주화 운동 : 다이쇼 시대에 발생한 민주적 개혁운동. 다이쇼(大正)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의 연호. 귀족이나 군부 등 특권층의 권한 축소, 의회와 정당 중심의 정치, 보통선거 실시와 여성의 참정권 부여 등을 주장, 민중의 정치참여 확대를 꾀하였다.
 그러나 개혁요구는 모두 천황제와 현행 제국헌법의 유지를 전제로 한 것이어서 혁신성이 부족하였다. 1차대전 후에는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도 여기에 합류하지만 역시 혁신성의 실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분열. 정당과 민중간의 괴리가 커지면서 다이쇼 민주화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만주사변(滿洲事變) :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전쟁. 봉천 부근의 남만주 철도에서 폭발사건을 일으켜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조작. 봉천을 점령하고 이어서 전면적 침략을 개시하였다. 내각은 사태를 확대하지 않을 방침이었으나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군사행동을 확대, 1932년 만주국 괴뢰정부를 세웠다. 이에 정부도 군부의 행동을 추인. 일본의 군국주의는 더욱 극성을 부리게 된다. 국제연맹은 일본을 비난하고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하고 국제연맹을 탈퇴.
출처 : 니홍고닷컴
글쓴이 : 양박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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